자살의 연구 암실문고
앨 앨버레즈 지음, 최승자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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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자살에 대한 생각과 40대에 자살을 바라보는 시점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죽음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삶조차 나를 제외한 채 무한한 잠재태로 보이는 나이에 자신의 삶을 포기하려는 시도는 때로 구조 신호가 된다. 나를 좀 도와달라고, 나를 소외시키는 지금 이 삶에서 나를 좀 구해달라고. 하지만 죽음이 너무나 단호한 결말이고 이 자살이 실패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완전한 절망을 직시해야 하는 중년의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굳이 통계를 가져오지 않아도 가공할 만한 숫자의 사람들이 매일 목숨을 끊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안다. 이 생이 전부인 것처럼 일상을 사는 우리가 때로는 스스로에게 칼을 겨눈다. 대체 얼마나 큰 절망 앞에서 사람은 자신의 생 그 자체를 포기하게 되는 걸까. 여기에 그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지난한 여정의 역작이 있다. 물론 이미 우리는 그에 대한 딱 떨어지는 답은 결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저자 앨 앨버레즈는 [옵서버]에 시 평론가로 활동하던 시절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실피아 플라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실비아는 이미 시인으로 큰 성공을 거둔 테드 휴즈와의 결혼 생활이 기대만큼 행복했던 것 같지 않다. 무서운 재능을 가졌던 영재 소녀와 영국의 3대 시인의 공존은 쉽지 않아 보였다. 앨 앨버레즈는 초기에 테드 부부와 함께 어울리기도 하다, 결국 테드가 떠나고 아이들과 남은 실비아가 죽음을 선택하기 직전까지 그녀가 읽어주는 자작시를 듣게 된다. 그는 실비아 플라스의 갑작스런 자살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죽는 것

그것은 예술이다,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

<중략>

-실비아 플라스



앨 앨버레즈는 실비아처럼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난 젊은 여성도 택하고 마는 자살에 대한 설명을 찾아 헤매게 된다. 자살이라는 행위의 배경과 서구의 자살에 대한 역사적 관점의 변화, 문학에서 바라보는 자살, 그리고 그 자신의 체험으로 구성되는 <자살의 연구>는 '자살' 그 자체에 대한 학술적 연구서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자살과 관련한 문학 텍스트 분석과 더불어 그것을 창작하고 자살에 대해 고민하거나 결행한 작가들의 생애 자체를 통한 심리 분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현대에서는 안타까운 비극이나 하나의 사고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자살이 고대 아테네에서는 집정관에게 공식 허가만 받으면 가능했던 사례, 절망의 철학인스토아 학파가 때로 자살을 어떻게 합리화했는지, 중세의 기독교가 어떻게 자살을 자신들의 교리 안에 포섭하거나 배척했는지, 낭만주의가 어떻게 자살을 극화했는지, 그리고 마침내 자살이 삶의 부조리에 어떤 비틀린 출구가 되었는지 역사 속에서 변전하는 자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대처가 매우 흥미롭다. 


중간중간 인용되는 셰익스피어, 실비아 플라스, 필립 라킨, 존 던의 죽음에 관련한 시들은 저자의 의도에 의해 삽입된 것이지만 이 책의 번역자 최승자 시인의 시선을 통과한 만큼 또 다른 감동을 준다. 평범한 사람들은 감지해서 표현하기 힘든 남다른 리듬감과 형언하기 힘든 시적 감수성의 체를 통과한 시의 울림이 번역의 한계를 뛰어넘는 울림을 주는 것은 최승자 시인의 노고가 아닐까. 


우리는 누군가의 자살을 예방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누군가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앨 앨버레스의 생각은 비관적이다. 그는 자살이 "도덕을 초월한 문제인 것과 똑같이 사회적.심리적 예방을 초월한 문제"라고 본다. 그는 이 자살 충동이 심지어 인간에 내재한 하나의 특성에 해당된다는 의견에 공감한다. 즉, 앨 앨버레즈는 완벽한 사회조차 한 사람에 내재한 자살 충동 그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고 본다. 프로이트가 죽음의 본능과 생의 본능이 길항하며 우리 삶을 지탱한다고 봤던 시각은 키르케고르의 삶과 죽음 사이의 통로에서 길을 잃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이야기했던 것만큼 진실이다.


프롤로그에서의 실비아 플라스의 죽음만큼이나 에필로그의 저자의 자살 미수 경험은 충격적이다. 실패한 결혼과 알콜 중독 등으로 자살 시도 끝에 거의 3일만에 깨어난 저자는 죽음이 삶의 출구나 단호한 결론이 될 수 없음을 실감하고 다시 태어난다. 삶이 고통스러운 만큼 자살에는 더 큰 공허가 개입되어 있었다. 서른한 살 때의 자살 시도 이후 그는 아흔 살까지 장수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이야기인가. <자살의 연구>에서 자살의 그 복잡다단하고 모호한 지점을 천착했던 작가의 생애 그 자체가 이 책에 하나의 텍스트를 덧붙인다. 


"생이란, 아무도 거절해서는 안 되는 선물이다."

어쩌면 이 카뮈의 이 냉소적 경구가 이 모호하고 예민한 주제에 대한 그나마 가장 명쾌한 답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거절할 수 없는 선물을 가지고 어차피 정해진 종착역까지 견디며 가는 것. 자살은 결국 가장 단호하고 번복할 수 없는 죽음으로 향하는 하나의 경로가 되기에 생을 다시 되찾을 도리가 없는 그 결단에 대한 우리에 내재한 충동이 있더라고 그 충동과 결국 싸워 이겨나가며 다시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이 아이러니를 우리는 도저히 거부할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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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3-04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일 40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보도가 있던데 참 한숨이 나오더군요. 이책이 뭔가 해답이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지만 참 잘 살았네요.^^

blanca 2025-03-04 11:56   좋아요 1 | URL
이 책 읽는 내내 기분이 많이 다운되더라고요. 산다는 게 대체 뭔가 싶기도 하고요. 책 안의 시들이 참 좋았어요. 마지막 장 작가 자신의 자살 시도에 대한 부분이 정말 너무 슬퍼서 어떻게 됐나 찾아보고 죽은 나이 계산까지 해봤네요.

다락방 2025-03-04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는 동안 저 역시 기분이 다운될거라 생각하지만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습니다. 죽음은 두려운만큼 그래서 더 알고 싶어지거든요. 알면 두려움이 덜할까하여. 자살에 대해서라면 저 역시 너무나 모르는만큼 이 책을 읽어보도록 할게요.

blanca 2025-03-04 12:34   좋아요 1 | URL
이 책을 번역하며 최승자 시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런 생각도 했어요. 외국시는 번역의 과정을 거치면 원작자의 의도가 어그러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최승자 시인이 번역한 시들은 말 그대로 훅 빨려든다,는 게 뭔지 알겠더라고요. 진짜 숨을 멈추게 되더라고요. 읽는 과정이 참 쉽지 않았어요. 우울의 늪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크게 권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저는 이 책 읽고 솔직히 한 뼘쯤 더 비관적이 된 건 사실이에요. 흑.

바람돌이 2025-03-04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00페이지에 달하는 자살에 관한 이야기라니.... 기 빨려요. 자살 충동을 느끼고 자해를 하는 아이들을 가끔 보면서 어찌해야 될지 모르는 저에겐 이 책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요. 그래도blanca님 글은 너무 좋아서 두고 두고 읽고싶어집니다.

blanca 2025-03-05 09:45   좋아요 1 | URL
제가 이십 대에는 솔직히 자살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힘들다,는 표현을 그런 식으로 얘기하기도 했거든요. 그건 일종의 도와달라,는 구조 신호였다는 걸 깨달았어요. 실제 정말 그걸 결행하는 사람들의 절망, 그걸 이해하고 공감하는 과정이 참 힘들긴 하더라고요. 문장과 인용한 시들이 너무 좋아서 그건 그대로 또 좋았고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년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정수윤 옮김 / 북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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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해로 쉰 살이 되었는데,"로 시작하는 <소년>의 이야기다. 연대나 각종 기록이 가와바타 야스나리 본인의 것과 많이 겹쳐 자전적 이야기라는 짐작이 간다. 쉰 살이 된 소설가가 전집을 간행하며 우연히 소년 시절의 일기와 보낸 편지, 받은 편지를 발견하며 소개하는 구성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진부한데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릴 정도로 설명하기 힘든 매력과 흡인력이 있는 작품이다. 그 힘이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이 <소년>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우리 모두의 사춘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보편적 공감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 기숙사 방장이었던 화자는 후배 세이노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 사랑이 동성 간의 일이라 해서 띄는 색채는 주된 기조가 아니다. 세이노가 소녀였어도 이 이야기는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 않다. 에로틱한 정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걸 뛰어넘는 뭔가가 있다. 그건 어린 시절 우리가 기대했던 그 순전함과 이상에 대한 결국 실패하고 말 지향과 숭배, 믿음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믿었고, 사람을 믿었던 단 한 시절의 이야기가 초로에 접어든 주인공이 지금의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더라도 그가 발을 딛고 선 그 시점의 황량함과 쓸쓸함을 대조적으로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독자들은 공명한다. 누구나 그런 한때를 가슴에 품고 있지 않았을까. 잊고 있던 그 시절을 환기해 내며 '맞아, 그런 때가 있었어.' 하게 만드는. 


다시 돌아온 현실은 쓸쓸하다. 한때는 전부였던 서로는 각자의 길을 걷고 재회의 기회도 마다한다. 세이노는 끊임없이 화자에게 자신을 만나러 오라 권하지만, 그 채근이 무용하고 결국 그 둘은 재회하지 못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그가 이상화했던 선배 대신 빠져든 언뜻 사이비 같은 종교도. 그 시절의 인연은 그 시절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그 추억을 간직한 채 두 번은 만나지 않는 것이 낫다. 


가타이

시절은 흐르고 있다.

흐르는 시간 소리가 분명히

느껴진다.

저 소리다.

저 소리다.


흐르는 시간 소리를 듣게 하는 작품을 읽고 우리가 결국 닿게 될 그 지점이 어딘가 고민하게 된다. 결국 주인공이 이 모든 오래된 일기와 편지를 소각하게 되는 마지막 문장의 울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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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2-27 2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문장이 정말 좋아요. 인용하신 문장에서는 정말 시간이 강처럼 흘러가는 것 같네요. 앗 그리고 블랑카님 페소아 글 읽다가 포르투갈 작년에 갔다온거 생각나서 포스팅 하나 올렸어요. ^^

blanca 2025-02-28 09:25   좋아요 1 | URL
와, 바람돌이님 포르투칼 가셨군요! 한번씩 비행편 검색해 보니 직항도 잘 없더라고요. 언젠가 저도 갈 수 있을까요? 빨리 가서 읽어보겠습니다.
 
소년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정수윤 옮김 / 북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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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은 없는 단 한 번의 그때, 단 번의 유일한 사랑이 가능했던 소년 시절의 복원은 역시나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답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모호한 경계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아름다운 시절의 진혼곡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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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는 내가 너무나 많아~"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의 가사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수많은 이명에 가장 직관적인 설명이 될 것 같다. 그는 "다양한 이름으로, 다양한 종류의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고 그 이명들을 마치 나름 실재하는 사람들처럼 캐릭터로 만들고 가상의 삶을 발명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들이 그의 내면에만 존재하는 허구의 존재가 아니라 실제 삶을 살아가는 인격체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에 가장 잘 알려진 <불안의 서>도 페소아의 이름이 아닌 그의 이명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로 발표했다. 그는 그들을 페소아의 필명이 아니라 일종의 "고안된 인간들"이라고 얘기한다. 페소아를 읽는 일은 이런 이명의 캐릭터를 기꺼이 실존하는 인물로 받아들이는 과정과 다름 아니며, 우리 내면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경이로운 체험이기도 하다. 그의 기행은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의 한 표현이다. 

















이 책은 페소아가 문학과 예술에 관련하여 쓴  에세이들 선집이다. 어떤 에세이는 채 반 장이 되지 않는 분량이다. 인간의 고정관념, 편견, 우리가 진짜라고 믿었던 것들의 허점과 빈약함을 가차없이 해체하고 전복하는 그의 글은 문장 하나하나가 시를 닮았다.  그 자신이 "이 지구의 시들은 절대 죽지 않는다."고 장담한다. 그의 시는 가볍거나 호화롭지 않다. 간소하고 직설적이고 때로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일종의 반어법인가 싶어 보면 페소아는 분명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제대로 이야기했다. 


<삶의 법칙>

자신감은 최소한으로 가져라. 아예 갖지 않는 편이 낫지만, 가진다면 가짜 자신감이나 흐릿한 자신감을 가져라.


오늘날 자기계발서나 라이프코치들한테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야기다. 자신감을 아예 갖지 않는 편이 낫다니, 이 얼마나 전복적인 이야기인가?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가 삶에 대해서 무엇보다 내가 굳게 믿고 있는 내 자신이라는 허구적 개념이 얼마나 빈약하고 가짜인지를 깨닫는 순간, 해방이 오며 더 감각과 순간에 충실한 지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밤과 혼돈, 꿈과 오류가 더 진짜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모든 것들의 대립항에 페소하의 철학과 시와 글이 있다. 

















산문도 모조리 시로 만들어버리는 화력을 가진 페소아의 진짜 시가 읽고 싶었다. 그의 시는 쉽고 길고 잘 읽히고 신비롭고 아름답다. 이 모든 수사를 다 갖다 붙여도 페소아의 시를 제대로 설명한 것 같지 않은 미진함이 드는 건 이 시들에 이 시집의 제목처럼 페소아의 존재 방식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소한 단어 하나에도 우주적 성찰의 무게가 담겨 있다. 삶이나 예술에 대한 큰 기대가 없지만, 그렇다고 그걸 함부로 포기하지도 않는 그 태도는 자칫 냉소와 오만으로 얼룩지기 쉬운 개인의 철학을 보편적인 신비로 승화시킨다. 아마도 이런 문장들.


그리고 죽을 때가 되면, 하루도 죽는다는 걸, 기억하는 것,

노을이 아름답고, 남는 밤도 아름답다는 걸......

그런 거라면,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는 걸.

-양 떼를 지키는 사람/알베르 카에이루


물론 이런 아름답고 서정적인 시를 쓴 시인 알베르 카에이루는 페소아의 필명이 아닌, 페소아가 만든 또 다른 하나의 엄연한 인간이다. 시골에 살며 정식교육을 거의 받지 않은 아름다운 금발의 청년이라는 페소아의 설명. 이 인격도 페소아의 자아에 있는 혹은 그 자아에 의해 페소아가 함께 한다고 느끼는 또 다른 페소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페소아는 이런 목가적인 풍경과 정서의 시는 그 시를 쓴 사람 자체의 삶도 그래야 한다고 믿은 듯, 시인 자체를 고안해 낸다. 그는 목소리를 빌려오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 목소리를 만든다. 그 목소리는 무에서 그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품고 있던 수많은 자아들 중 하나의 발명이기도 하다. 


수많은 이명을 거느리고 나타나 이런 시를 쓴 페소아가 백 년도 훌쩍 지나 오늘 내가 누리는 하루를 가능케 한 것. 페소아는 자신의 시를 읽는 이들에게 모자를 들어 인사한다. "위대한 무심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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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2-25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많은 이명의 인간들을 자신 안에 품고 산 페소아는 대단한 정신력이듯요. 저는 나 하나의 영혼도 감당하기 힘든데 말이죠. 그러다가 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창조하고 그 삶을 표현한다는게 본연의 페소아 자신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기도 하더라구요.

blanca 2025-02-26 09:55   좋아요 1 | URL
그 이명마다 캐릭터와 서사를 부여한 것도 대단한 것 같아요.

다락방 2025-02-26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이 글이 한 편의 시 같네요!

blanca 2025-02-26 15:39   좋아요 0 | URL
ㅋㅋ 페소아 책 자체가 시거든요. 어떻게 에세이 문장 하나하나가 시어 같은지.. 페소아 열풍이 이해가 가더라고요. 포르투칼 너무 가보고 싶어요.
 

체호프는 생전에 600여편의 단편을 썼다. 그의 희곡이 현대 연극 무대에서도 여전히 관객의 호응을 얻고 있는 만큼 그의 단편집 또한 잊을만 하면 나오는데 출판사가 다르다 보니 겹치는 작품이 많다. 체계적 선집 형태로 정리가 좀 됐으면 하는 개인적 소망이 있다. 


















가장 단편을 잘 쓰는 작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체호프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의 이야기들은 서정적인데 가볍지 않고 무겁지 않으면서도 울림이 크다. 여성의 시점에서 쓴 이야기들도 어느 하나 남성 작가의 시선에서 노출되는 괴리가 없다. 상류층 귀족의 이야기도 노동자의 이야기도 소년의 이야기도 노인의 이야기도 어느 하나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수많은 감정의 파도를 일으킨다. 단편에 회의가 든다면, 체호프에서 시작하고 체호프로 돌아가기를 추천한다. 아니, 소설 자체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면 체호프를 수혈하기를 권한다. 톨스토이가 체호프의 작품에 감동한 나머지 자기 손님들에게 체호프를 읽어봤냐고 일일이 확인하고 손수 낭독해 주기도 한 일화는 유명하다. 

















자크 랑시에르의 <체호프에 관하여>는 왜 하필 체호프냐는 질문에 가장 철학적이고 아름다운 답변이 될 것 같다. 여기에는 아직 한국에 번역되지 않은 체호프의 작품들을 일례로 들어 체호프의 미덕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작품들을 알지 못해도 자크 랑시에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독자에게 바로 전달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저자가 체호프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메시지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통념에 예속된 현대인들이 지향하는 자유와의 거리가 그것이다. 체호프는 바로 그 간극을 겨냥한다. 우리가 체호프를 읽고 감동 받는 지점에는 바로 그러한 것이 있다. 나도 모르게 놓치고 있던 내가 지향했던 별과 지금 내가 여기 발을 딛고 선 땅과의 그 거리. 그 거리를 확인한 순간 우리는 아득해진다. 잊고 살았던 그것이 진짜였음을 확인하는 순간 대안적 삶에 대한 가능성이 떠오른다. 꼭 그 삶으로 점프하지 않아도 단지 기억해내는 것만으로도 오늘은 달라질 수 있다. 왜냐면 그런 삶을 꿈꿨던 나를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작가의 임무는 자유와 인간 사이를 가르는 거리에 대해 거짓 없이, 그리고 자유가 인간에게 부과하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자유의 지평 아래 인간을 안내하는 것이다. 작가의 임무는 먼 곳에 있는 자유의 파열을 예속의 시대 속에 새겨넣는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 <체호프에 관하여>


"시작도 끝도 없이" 출발하여 마침내 끝내는 체호프의 이야기가 비겁하지 않은 이유다. 그의 이야기를 읽고 나오는 길목에서 뭔가 저릿하면서도 아득한 멀미를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가 잊어버렸던 그 자유에 대한 사랑을 그가 기억해 내도록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내어 놓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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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5-02-06 0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체호프는 단막극의 반전이 끝내주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ㅎ 유럽지성사를 배우던 옛날에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blanca 2025-02-10 16:29   좋아요 1 | URL
기회가 되면 연극도 꼭 한번 보고 싶어요.

페크pek0501 2025-02-11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체호프 단편집이 저도 두 권 있는데 겹치는 게 몇 편 있더라고요. 좋은 단편을 많이 쓴 작가죠.

blanca 2025-02-11 16:39   좋아요 1 | URL
체호프 단편집 꼭 겹치는 단편 몇 편이 있어요. 그 정도로 좋다는 이야기도 되겠지만, 책을 사는 입장에서는 아쉽더라고요.

그레이스 2025-02-11 16: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랑시에르 책 저도 사놨는데, 얼른 읽어야겠어요 ^^

blanca 2025-02-12 09:37   좋아요 1 | URL
얇은 게 유일한 단점인 책이더라고요. 문장 하나하나도 참 아름다워요. 저는 랑시에르를 처음 읽는데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