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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랜드 엘레지
아야드 악타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국, 조국, 민족은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의 슬로건이 되어 지나치게 화석화된 용어처럼 느껴지지만 전혀 사소하지 않은 개념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혹은 기대보다 훨씬 자신이 속한 민족, 나라, 문화, 언어에 영향을 받는다.
잠깐 미국에 거주한 경험으로 내가 이민자의 삶을 감히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스쳐가듯 만난 이민자 친구들이 이민자들의 나라라는 미국에서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일들을 겪고 소화하고 때로 감내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다른 피부 색깔이나 식습관, 언어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리 오랜 기간 그곳에서 살아도 내가 만난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를 미국이라 이야기하지 않았다. 인도, 한국, 이탈리아, 중국, 일본. 그들은 떠나온 나라를 "내 나라"라고 표현했다. 다시 돌아갈 일이 없어도 그랬다. 오래 전에 떠나왔어도 이민이라는 건 내가 떠나온 그곳을 녹여 융합하는 과정이 아닌 것 같았다.
한때 트럼프의 심장 질환 주치의였던 아버지를 둔 2세대 이슬람께 이민자 극작가 아야드 악타르의 자전적 소설인 <홈랜드 엘레지>는 도발적이면서 아름다운 작품이다. 일단 픽션이라는 외피를 입은 자전적 요소의 과감한 표현이 강렬하고 생생하다. 아슬아슬할 정도로 솔직한 이야기들은 '그래, 이건 지어낸 소설이야.'라고 가슴을 쓸어내려야 할 정도였다. 물론 그 경계가 어디인지는 작가만 알 수 있을 것이다.
파키스탄 의사 이민자인 아버지가 만난 당시의 트럼프는 경제적으로 최악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병을 고치러 와준 무슬림 의사에게 보인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던 모양이다. 작가의 아버지는 이후로 트럼프를 지지하게 되고 아들과 이 문제로 사사건건 대립하게 된다. 그는 미국에서 낳고 키운 아들 앞에서 때로 자신이 떠나온 나라를 폄하하고 미국을 칭송한다. 기회의 땅, 준법의 땅, 성취의 땅. 이 판도가 바뀐 것은 911 이후였다. 사람들은 단지 무슬림의 겉모습을 지녔다는 것만으로 그들에게 오래전 이미 떠나온 조국, 민족, 종교를 상기시키고 배척한다. 무슬림은 존재만으로 배척, 배제,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경험을 수시로 하게 되고 각종 민감한 사안에서는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결정타가 된다. 911의 상흔은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트라우마와 상처를 남겼고 이것은 이민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평온한 일상이 외부인들의 테러에 의해 언제든 유린당할 수 있다는 학습은 모두의 미래를 불안 속에 잠식시켰다.
작가의 아버지는 환자가 제기한 지난한 의료 소송에 시달리다 결국 도망치듯 빚을 남기고 그렇게나 칭송하던 미국을 떠나 다시 파키스탄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내 피의 모든 원자가 이 땅의 흙, 이 땅의 공기로 빚어졌다. 하지만 이 많은 것은 나의 것이 되지 않으리라."고 선포했던 아들의 마지막 문장은 결국 미국이 내 고향이라는 것이다. 이 아이러니의 설득력은 결국 작가의 필력에서 나온다. 낯선 사람들의 이야기에 이렇게 이입해서 읽은 적은 오랜만인 것 같다. <홈랜드 엘레지>는 그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낯선 이야기다. 낯선 이야기가 일깨우는 그 고유의 공감대는 인간이라면 결국 태어나 자란 한때 기억하는 내 고향에 대한 생래적 이끌림에 대한 엘레지, 고향을 떠나 순례하는 과정이 결국 삶이라는 자각, 언제나 우리의 타인에 대한 이해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지만 그럼에도 의미가 있다는 체념이 만나는 데에서 나올 것이다.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