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책을 읽으며 번역가를 의식하게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대부분의 번역가가 번역을 능숙하게 잘했다는 이야기도 되겠다. 직역과 의역의 딜레마와 한계도 인정한다. 그런데 최근 읽은 너무나 좋았던 소설은 번역이 정말 아쉬웠다. 내용이 좋아서 더 그랬다. 사소한 번역 오류 한두 개 정도가 아니라 각종 비문들, 오타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이 잊을 만하면 끊임없이 나왔다. 하나하나 지적하자면 한도 끝도 없이 의식되는 오류들에 숨이 턱턱 막혔다. 나는 그 책을 도저히 그 누구에게도 추천할 수 없다. 


이 책의 번역 때문에 역설적으로 번역가의 역할과 번역의 힘, 지금까지 큰 생각 없었던 번역자의 노고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게 됐다. 그러면서 잘 읽히던, 잘 이해되던 각종 번역서 뒤에 그들의 지분이 얼마나 컸던지 절감하게 됐다. 번역은 투명하지만 투명하기 위해 갖춰야 하는 기본기와 담보되어야 하는 성실성의 무게가 엄중하다. 한때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었지만, 그 생각을 접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번역가는 나 같은 아무나가 절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또 한번 다시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은유 작가의 정제된, 다듬어진, 성실한 문장들이 좋았다. 우리 말의 아름다움과 그 엄정한 문법으로 은유 작가의 인터뷰어로서의 태도와 자세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는 과정이 사람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기록하는 일의 무게와 가치를 일깨워줬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 사람과의 시간을 공유하기 위해 작가가 기울여야 하는 노력이 어떠한 것인지, 그 에너지가 얼마나 깊고 넓은 것인지. 


나도 살며 어떤 일에 매너리즘에 빠져 실수하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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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처음으로 유명 피아니스트의 리사이틀을 보러 가게 됐다. 클래식 공연 관람이 처음이라 며칠 전부터 긴장됐다. 겨울이 채 안 끝난 시점이라 감기에 걸려 공연 중 기침이라도 나올까 봐 이만저만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패딩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내면 안된다, 갑자기 재채기가 나와도 안된다, 는 등 내가 조심해야 할 규율들은 점점 더 자가증식했다. 그냥 편안히 앉아 음악 감상을 하는 것만이 클래식 관람의 전부가 아님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날 실제 공연장에 가보니 피아니스트 자리와 생각보다 더 가까워 심지어 침 삼키는 소리까지 신경 쓰일 정도였다. 아, 그러나 사고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연주자의 연주 사이의 그 잠깐의 정적을 깨고 뭔가 엄청난 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났다.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건 그 소음이 아니었다. 그 소리와 함께 동시에 앞자리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듯 다 같이 그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비난과 분노의 눈길을 보낸 것이다. 정말, 다 한 마음으로 그 무언가를 떨어뜨린 사람을 향해 성토하고 있었다. 관크가 되는 일은 생각보다 더 끔찍한 대가를 치뤄야 하는 일이었다. 






에이모 토울스의 단편집 <테이블 포 투>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 중 하나인 '밀주인'에 이러한 관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전투 같은 어린 아이 육아의 터널을 통과한 토미 부부는 드디어 카네기홀에서 키신 같은 거장들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을 얻게 된다. 당연히 우아하고 편안하게 그 시간을 음미하고 향유하기를 바랐던 남편 토미는 역시나 그 시간을 산산조각 내고 마는 노인 관크를 하필 옆자리에서 만나게 된다. 놀랍게도 그는 관크 중에서도 가장 지탄 받는 최악의 행동을 하고 있었으니, 바로 연주자의 연주를 몰래 녹음하고 있었던 거다. 숫자의 정확성을 사랑하는 금융인이었던 토미는 도저히 그 행동을 묵과할 수 없다. 아내의 눈으로 본 남편 토미의 분노는 아무래도 좀 선을 넘은 감이 있다. 토미는 망설이지 않고 그를 공연장측과 경찰에 고자질한다. 


노인에게는 언제나 그렇듯 눈물 없이는 차마 듣기 힘든 이 연주를 녹음할 수밖에 없는 파란만장한 사연이 따라온다. 그 사연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토미에게 좀 너무하다,는 시선을 보낸다. 자책감이 든  토미는 공연 중간에 도망치듯 사라진 그 노인을 직접 찾아 나선다. 토미가 마침내 대면하게 되는 그 불편한 진실은 토미의 남은 인생에 클래식 공연 관람이라는 행위 자체에 하나의 트라우마를 남기고 만다. 


클래식 공연의 묘미를 정작 맛보고 알게 된 사람은 이 모든 일들의 전면에 나섰던 토미가 아니라 화자인 아내라는 아이러니는 작가 에이모 토울스가 인생을 이야기하며 항상 등장시키는 반전의 묘미다. 


비행기 연착으로 인연을 맺게 된 너무나 매력적인 낯선 한 남자의 인생에 의도치 않게 개입하게 됨으로써 그 매력 뒤의 취약점을 알게 된 주인공의 기억에 남은 사람이 바로 그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아내의 끈기과 사랑이라는 결론이 감동적인 <아스타 루에고>처럼.


그날의 공연에서 공공의 적이 됐던 그 사람은 사실 졸다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 아닐까 하는 어떤 사람의 추측 글을 내가 온라인에서 보게 된 것처럼. 


언제나 일어난 일의 민낯은 생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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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화제인 인공지능의 가장 큰 취약점은 인공 신경망의 학습을 통한 창발 과정을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의 기원을 제대로 밝혀내기 힘든 지점과 맞물려 있다. 우리의 몸 안에 담긴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의식과 마음이 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심리학자, 뇌신경학자, 물리학자들이 오랜 세월 여러 가지 이론으로 밝혀내 보려 애썼지만 결국 우리 앞에 놓인 건 우리의 신경망을 닮은 물리적인 기계의 출현이다. 결국 우리의 마음을 설명할 수 없다면, AI의 특이점 도래 앞에서도 우리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과연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 저널리스트 조지 머서의 이 책은 이런 우리 의식의 기원을 다양한 시각에서 탐사한다. 마음의 물리학, 뇌와 양자론, 우주론까지 확장되는 스펙트럼은 경이롭다. 우리의 머릿속 신경망이 AI의 인공 신경망, 더 나아가 우주의 모습까지 닮았다는 발견은 결국 지금의 기술 발달이 우리의 자유 의지로 이룬 성과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미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저자 또한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론과 결국 실재가 아닌 관찰자인 우리 자신을 포함한 관계의 파악이 의식의 핵심에 있음을 언급한다. 

우리 자신을 관찰하는 일은 우리를 관찰하는 관찰자인 우리 자신을 포함하는 재귀성과 결국 AI 또한 그런 한계 안에서 작동함을 암시한다. 인간의 의식의 기원을 탐사하며 결국 그 과정에서 인공지능의 작동 원리, 그것이 가지는 함의에 놀라운 통찰을 제공하는 책이다. 


















불문학자이자 영화 비평가인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화 제목을 연상시키는 <제국의 음모>는 프랑스의 제2제정,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과 의붓동생 내무대신 드 모르니의 쿠데타를  드 모르니가 남긴 두 개의 문서로 독해하는 이야기다. 하나는 국민들 앞으로 쓴 인쇄물 <포고>, 다른 하나는 놀랍게도 입법원 의장이 된 그가 오펜바흐까지 동원해 만든 오페레타 부파의 각본이다. 십 년의 시차를 두고 우유부단한 의붓형에게 쿠데타를 종용해 '제국'을 설립한 그가 미련 없이 그 권력의 사다리에서 내려와 일종의 희가극을 만들고 상영하는 데 집중하는 모습은 그 자체가 하나의 농담처럼 보인다. 저자 하스미는 사생아로 태어나 자신의 신분을 발명해 낸 드 모르니의 이 행적 자체가 "역사적으로 조금도 본질적으로 여기기 어려운 것들을 형태짓는 냉소적인 역사성"이라 명명한다. 대단한 의도도 역사 의식의 자각도 없이 그저 내키는 대로 저지른 권력 탈취의 종말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사실 연락 한번 거의 않던 두 형제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으로 갑자기 의기투합하여 이 불법적인 권력 탈취의 쿠데타를 통해  "애매하고 희박한" 역사적 우연의 격동을 만드는 장면은 우리에게도 낯선 것이 아니다. 우애랄 것도 없는 나폴레옹 형제는 근대국가에서 일어난 최초의 쿠데타의 주역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의 역사가 본질적이고 의도적인 주류의 흐름에 의한 도식이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두 책 모두 인간의 자유의지와 의식적인 결단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돌아보게 한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는 의식도 환각일 수 있다. 각자 다른 시점에서 세상의 실재를 읽어나가려는 시도가 만나는 지점에서 이 두 책은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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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 사안에 공적인 발언을 하는 것은 조심스럽고 민감한 일이다. 자칫 논란에 휩싸이거나 공격을 받게 된다. 어느 입장을 취하든 상대편 진영에서는 비판할 거리가 된다. 모든 정치적 사안에 대해 작가가 자신의 입장을 표명할 의무는 없다. 작품으로서 이야기해도 충분하다. 작품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폭력이나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게 과연 정치만의 문제일까?















오에 겐자부로는 대표적인 반전주의자다. 어떤 명분의 폭력도 혐오한다. 일본의 패전 후 학교에서 도망쳐 숲속으로 들어가 혼자 나무와 교감했던 소년은 얼마 전까지 숭배하라 가르쳤던 천황이 일으킨 전쟁과 그 패배, 동네에 들어온 미군 지프 차를 화해시킬 수 없었다. 열병을 앓고 죽음 직전까지 갔던 오에가 자신이 죽어도 다시 또 낳아주겠다는 어머니와 대화하는 장면은 소설보다 더 감동적이다. 오에는 이 책에서 소년 시절의 이야기들 속에 십대 아이들을 상대로 한 경어체로 자신이 깨닫게 된 삶의 지혜들을 들려준다. 겸허하고 자애로운 노교사가 교실에 십대 아이들을 불러모아 쉽고 아름다운 말로 강의를 하는 듯한 책이다. 거만하지 않고 교조적이지 않고 따분하지 않다. 특히 자살 충동을 느끼는 십대 아이들에게 지금 이 순간을 넘길 수 있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은 그 어느 조언보다 와닿는다. 어른이 읽어도 좋지만, 중고생 아이들에게 선물하기 좋은 책이다. 

















이탈리아의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대중적인 과학서를 추천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다. 문학적 표현력과 과학적 사고의 절묘한 균형 지점을 찾아내는 데 그 어떤 작가보다 특화된 작가가 아닌가 싶다. 호수의 다리를 걷다 물고기를 통해 의식의 본질과 주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자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전쟁과 패권 갈등으로 얼룩진 현 세계 정세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사물의 실재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일종의 관계를 통한 과정이라는 이야기와 앎의 주체가 '세계의 일부'로 우리 또한 그 '부분의 부분'에 불과하다는 마지막 이야기는 다시 초입 장자의 인식의 주체와 수미상관으로 만난다. 


오에 겐자부로도 카를로 로벨리도 서로 만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책을 통해 손을 잡는다. 이 세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고, 그 어떤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일부일 뿐이며 인식의 전능한 주체가 아니라 단지 이 생을 잠시잠깐 경험하기 위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이야기다. 관계 그 자체가 실재이면 그 어떤 형태의 폭력도 타인에 대한 위해가 된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연민할 수 있는 힘 그 자체가 실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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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6-07 1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에 책도 반갑지만 카를로 로벨리 신작 나온 건 블랑카님 리뷰를 읽고 알았어요.
리뷰 올려주셨을 때 읽고 이번에 다시 읽어도 역시 좋네요^^ 믿고 읽는 블랑카님~ 좋은 주말 되시길요!

blanca 2025-06-07 17:08   좋아요 1 | URL
카르로 로벨리 책 너무 좋죠. 철학적인 물리학자라 그 이론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뭔가 여운이 남는 게 저는 참 좋더라고요. 단발머리님도 좋은 주말 보내고 계시겠죠? 초여름 날씨가 환상이네요.
 

태어나기 이전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죽음 이후를 모른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상황은 최악의 내일이 아니라 안개에 휩싸인 듯 모호한 내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을 극도로 압축한 현장이 아마도 병원에서의 마지막일 것이다. 누구나 피하고 싶지만 결국은 맞닥뜨리게 될 실존의 마침표다. 

















의료 현장 속 의료인이 쓴 사람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는 넘칠 만큼 많다. 그러나 이 책의 원제인 ㅡ<Modern death> 는 현대 의료의 눈부신 발전과 더불어 우리가 혜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얼마 만큼 죽음의 현장을 오염시켰는지 명명백백하게 드러내며 우리가 묻어뒀지만 더는 피할 수 없는 본질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피할 수 없는  마지막이 병원 현장에서의 공격적인 진료의 프록토콜을 그대로 따라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 그 생의 종결이 마치 끝까지 겨뤄 이겨야 하는 실패로 간주돼도 정녕 괜찮은가? 


내과 의사인 저자는 이런 본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들을 가차없이 밀어 붙인다. 인기 없는 그 명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에 천착하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그 풍경의 묘사는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그 현장으로 나를 소환하는 것 같아 힘들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어떤 그 가라앉는 마음을 다시 들어 올릴 힘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중환자실에 입원해 온갖 장치를 아이언맨보다 많이 몸에 연결하고서야 비로소 죽음에 대해 가족과 이야기를 나눈다. 

-하이더 와라이치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가 과연 솔직하게 가감없이 우리의 "끝"에 대하여 사랑하는 사람들과 기꺼이 대화를 나눌 용의가 있는가? 의료 현장에서 환자를 전담하게 되는 의료인들과 그것에 대해 제대로 된 정말 원하는 그 결말에 대해 소통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한다. 


생명의 신성함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와 동일시되는 경우에 문제가 생긴다.

-하이더 와라이치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연명치료와 안락사에 대한 첨예한 대립과 저자 자신의 생각도 나온다. 우리가 환자를 둘러싸고 내리는 판단이 과연 그 환자 본인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를 대신하여 목소리를 내고 그를 간병하는 입장에서의 가치관에서 나온 자기 중심적인 것인지에 대한 지적도 예리하다. 더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처지의 환자를 대신해서 목소리를 내게 되는 지점에 대한 그 모호한 부담과 고통에 대해서도 통감한다. 어차피 질 싸움에서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그 위치의 논란과 고뇌 또한 만만찮다. 


죽음을 거론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태반이 병원에서 끝까지 온갖 의료 처치를 받으며 고독하게 죽는 시대, 영원할 것처럼 갈급한 욕망을 조종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가 폭주하는 시대, 그 시대의 끝에도 여전히 우리는 결국 죽음을 맞아야 한다. 휘황찬란한 스크롤로 인간 존재의 본원적 불안을 상품으로 가공해 기만하는 일상으로 숨어 들어가도 결국 맞아야 할 그 어쩔 수 없는 끝의 불편한 진실을 생생하게 그려낸 이야기의 울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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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5-16 08: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의학의 발전이 인간에게 꼭 좋은 결과만을 준다고 보장할 수 없지요.제 친척 할아버지는 팔순에도 건강하셔서 항상 자전거로 다니셨는데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때 위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지요.수술이나 치료도 불가능하고 몇달 못 사실거란 이야기도 들었는데 정작 당사자는 자신의 몸은 매우 튼튼하다며(실제 위암이었지만 전혀 고통은 없었음) 암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말하셨는데 실제 자다가 편안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뭐 연명치료다 뭐다하면서 환자들을 고통스럽게 억지로 오래 살리는 것보다 이런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해드리는 것도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blanca 2025-05-16 15:14   좋아요 1 | URL
현대 의료의 발전이 분명 가져온 혜택도 많지만, 또 반대로 고통스러운 마지막을 연장하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참 미묘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환자 본인의 통증 조절과 삶의 질을 항상 배려하는 분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