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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오쇠 ㅣ 풍요의 바다 4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5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시마 유키오의 <풍요의 바다> 연작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다. 잘 알려진 대로 미시마 유키오는 이 작품의 원고를 넘긴 후 할복자살했다. 그가 내세운 자살의 명분인 '자위대 궐기 촉구'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 역사를 감안하면 여전히 독자 입장에서 거부감이 들고 불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죽음 직전까지도 완결 짓고 가려 했던 <천인오쇠>를 읽으면 그의 자살이 과연 그의 선언처럼 정치적인 것인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개인적으로 미시마 유키오 자신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보다 그의 작품이 더 실질적인 그의 유서처럼 느껴졌다.
<풍요의 바다> 시리즈는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1970년대 쇼와 시대 후기까지 혼다 시게쿠니라는 인물이 관찰자, 인식자가 되어 이른 죽음을 맞은 소년 시절의 친구 기요아키가 정치 궐기를 일으키고 자결한 소년 이사오로, 태공의 공주 잉 찬으로, 마지막으로는 바다의 선박 신호수 통신원 도루로 환생하는 과정을 목도하고 그것이 가지는 궁극의 의미를 불교의 유식론 철학을 통해 깨달아 나가는 장대한 스토리다. 60년에 걸친 한 인간의 생애에서 들고 나는 인연의 그 얽히고설킴 속에서 우리가 집착하고 욕망하고 상실하는 것들과 함께 '결국 붙들 수 있는 궁극의 실재는 무엇인가?'에 대해 던진 진지한 질문은 미시마 유키오 특유의 탐미주의, 허무주의와 맞물려 그 질문을 묻는 행위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킨다.
혼다는 이제 아내도 먼저 떠나 보낸 여든을 훌쩍 넘은 노인이 된다. 부와 명예를 쌓았다 여겼지만 그 틈에 어느새 시간을 잃어버린 노인이 된 혼다는 우연히 떠난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열여섯 살의 소년 도루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기요아키 환생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양자로 들이게 된다. 도루에게서 혼다가 발견한 건 바로 자기 자신의 악의와 자의식이었다. 젊음과 아름다운 외모로 획득한 그 찰나의 자의식은 반드시 깨져야 하는 것으로 혼다가 도루를 데려온 마음에는 분명 사악한 악의가 끼어들어 있다. 소년과 노인은 서로를 서로가 가장 잘 안다 여기며 팽팽하게 대치하다 어른이 된 도루는 자신에게 아낌 없는 지원을 한 나이 든 혼다를 은근히 무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신이 혼다의 친구로 환생한 특별한 자가 아닌 그저 평범하고 탐욕스러운 저속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듣게 되자 자살 미수 끝에 시력을 잃게 된다. 혼다는 마침내 젊은 시절 기요아키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출가한 사토코가 주지로 있는 월수사로 노구를 이끌고 찾아가게 한다.
그러나 그 애타는 사랑의 대상이었던 기요아키의 이야기를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비구니의 이야기에 혼다는 충격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60년 간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기요아키의 재래와 잃어버린 사랑이 가지는 의미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결국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천인오쇠>의 마지막 문장은 모든 이야기를 일거에 무너뜨린다.
이 정원에는 아무것도 없다. 기억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 자기는 와 버렸다고 혼다는 생각했다.
정원은 한낮에 쏟아지는 여름 햇빛 속에 고요히 있다......
-pp.356
이것은 <봄날>, <달리는 말>, <새벽의 사원>에서 마침내 <천인오쇠>에 이르기까지의 그 장대한 이야기들을 다 무효화하는 결론인가? 순간 어질어질했다. 그러나 미시마 유키오가 이야기하고자 한 바는 분명 이렇게 외적으로 드러난 단순한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도 각자의 마음이지요."라고 말한 사토코의 이야기는 우리가 살고 느끼고 깨닫는 것들이 결국 우리의 인식 안에서 모였다 흩어지는 하나의 신기루가 아닌가 하는 각성에 이르게 한다.
우리의 인생 그 자체도 그렇다. 이제 나는 스무 살에 했던 사랑이 실재했던 것인지, 그냥 내 기억 속 하나의 환상인지 확신할 수 없다. 내 삶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과 내 삶에 들어왔다 나간 그 모든 인연들이 남긴 흔적과 기억 또한 그렇다. 내가 진짜라고 생각했던 것, 내가 중심이 되어 경험했다 깨달았다 여긴 일들조차 그렇다. 삶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시간의 화력 앞에서 모두 스러지는 것들이 가지는 의미에 천착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러니 아무것도 없다? 오롯이 남아 있는 것들은 사실 생명이 아니다. 미시마 유키오는 늙음과 시간이 가지는 파괴력 속에서 찰나에 떠오르는 아름다움과 젊음을 간절하게 고정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인생의 절정이 어느 시점인지 알 수 없다 자인했던 그의 한탄이 결국 향한 곳은 스스로 택한 죽음이 아니었을까?
이 허무한 이야기는 그 허무로써 이룬 성취로 울림을 준다. 죽음과 늙음 앞에서 쇠퇴하는 생의 근본적 한계를 이렇게 명료하고 아름답게 형상화할 수 있는 작가는 그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