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인오쇠 풍요의 바다 4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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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시마 유키오의 <풍요의 바다> 연작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다. 잘 알려진 대로 미시마 유키오는 이 작품의 원고를 넘긴 후 할복자살했다. 그가 내세운 자살의 명분인 '자위대 궐기 촉구'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 역사를 감안하면 여전히 독자 입장에서 거부감이 들고 불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죽음 직전까지도 완결 짓고 가려 했던 <천인오쇠>를 읽으면 그의 자살이 과연 그의 선언처럼 정치적인 것인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개인적으로 미시마 유키오 자신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보다 그의 작품이 더 실질적인 그의 유서처럼 느껴졌다. 


<풍요의 바다> 시리즈는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1970년대 쇼와 시대 후기까지 혼다 시게쿠니라는 인물이 관찰자, 인식자가 되어 이른 죽음을 맞은 소년 시절의 친구 기요아키가 정치 궐기를 일으키고 자결한 소년 이사오로, 태공의 공주 잉 찬으로, 마지막으로는 바다의 선박 신호수 통신원 도루로 환생하는 과정을 목도하고 그것이 가지는 궁극의 의미를 불교의 유식론 철학을 통해 깨달아 나가는 장대한 스토리다. 60년에 걸친 한 인간의 생애에서 들고 나는 인연의 그 얽히고설킴 속에서 우리가 집착하고 욕망하고 상실하는 것들과 함께 '결국 붙들 수 있는 궁극의 실재는 무엇인가?'에 대해 던진 진지한 질문은 미시마 유키오 특유의 탐미주의, 허무주의와 맞물려 그 질문을 묻는 행위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킨다. 


혼다는 이제 아내도 먼저 떠나 보낸 여든을 훌쩍 넘은 노인이 된다. 부와 명예를 쌓았다 여겼지만 그 틈에 어느새 시간을 잃어버린 노인이 된 혼다는 우연히 떠난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열여섯 살의 소년 도루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기요아키 환생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양자로 들이게 된다. 도루에게서 혼다가 발견한 건 바로 자기 자신의 악의와 자의식이었다. 젊음과 아름다운 외모로 획득한 그 찰나의 자의식은 반드시 깨져야 하는 것으로 혼다가 도루를 데려온 마음에는 분명 사악한 악의가 끼어들어 있다. 소년과 노인은 서로를 서로가 가장 잘 안다 여기며 팽팽하게 대치하다 어른이 된 도루는 자신에게 아낌 없는 지원을 한 나이 든 혼다를 은근히 무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신이 혼다의 친구로 환생한 특별한 자가 아닌 그저 평범하고 탐욕스러운 저속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듣게 되자 자살 미수 끝에 시력을 잃게 된다. 혼다는 마침내 젊은 시절 기요아키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출가한 사토코가 주지로 있는 월수사로 노구를 이끌고 찾아가게 한다.


그러나 그 애타는 사랑의 대상이었던 기요아키의 이야기를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비구니의 이야기에 혼다는 충격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60년 간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기요아키의 재래와 잃어버린 사랑이 가지는 의미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결국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천인오쇠>의 마지막 문장은 모든 이야기를 일거에 무너뜨린다.


이 정원에는 아무것도 없다. 기억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 자기는 와 버렸다고 혼다는 생각했다. 

정원은 한낮에 쏟아지는 여름 햇빛 속에 고요히 있다......

-pp.356


이것은 <봄날>, <달리는 말>, <새벽의 사원>에서 마침내 <천인오쇠>에 이르기까지의 그 장대한 이야기들을 다 무효화하는 결론인가? 순간 어질어질했다. 그러나 미시마 유키오가 이야기하고자 한 바는 분명 이렇게 외적으로 드러난 단순한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도 각자의 마음이지요."라고 말한 사토코의 이야기는 우리가 살고 느끼고 깨닫는 것들이 결국 우리의 인식 안에서 모였다 흩어지는 하나의 신기루가 아닌가 하는 각성에 이르게 한다. 


우리의 인생 그 자체도 그렇다. 이제 나는 스무 살에 했던 사랑이 실재했던 것인지, 그냥 내 기억 속 하나의 환상인지 확신할 수 없다. 내 삶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과 내 삶에 들어왔다 나간 그 모든 인연들이 남긴 흔적과 기억 또한 그렇다. 내가 진짜라고 생각했던 것, 내가 중심이 되어 경험했다 깨달았다 여긴 일들조차 그렇다. 삶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시간의 화력 앞에서 모두 스러지는 것들이 가지는 의미에 천착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러니 아무것도 없다? 오롯이 남아 있는 것들은 사실 생명이 아니다. 미시마 유키오는 늙음과 시간이 가지는 파괴력 속에서 찰나에 떠오르는 아름다움과 젊음을 간절하게 고정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인생의 절정이 어느 시점인지 알 수 없다 자인했던 그의 한탄이 결국 향한 곳은 스스로 택한 죽음이 아니었을까?


이 허무한 이야기는 그 허무로써 이룬 성취로 울림을 준다. 죽음과 늙음 앞에서 쇠퇴하는 생의 근본적 한계를 이렇게 명료하고 아름답게 형상화할 수 있는 작가는 그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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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기 이전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죽음 이후를 모른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상황은 최악의 내일이 아니라 안개에 휩싸인 듯 모호한 내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을 극도로 압축한 현장이 아마도 병원에서의 마지막일 것이다. 누구나 피하고 싶지만 결국은 맞닥뜨리게 될 실존의 마침표다. 

















의료 현장 속 의료인이 쓴 사람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는 넘칠 만큼 많다. 그러나 이 책의 원제인 ㅡ<Modern death> 는 현대 의료의 눈부신 발전과 더불어 우리가 혜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얼마 만큼 죽음의 현장을 오염시켰는지 명명백백하게 드러내며 우리가 묻어뒀지만 더는 피할 수 없는 본질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피할 수 없는  마지막이 병원 현장에서의 공격적인 진료의 프록토콜을 그대로 따라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 그 생의 종결이 마치 끝까지 겨뤄 이겨야 하는 실패로 간주돼도 정녕 괜찮은가? 


내과 의사인 저자는 이런 본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들을 가차없이 밀어 붙인다. 인기 없는 그 명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에 천착하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그 풍경의 묘사는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그 현장으로 나를 소환하는 것 같아 힘들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어떤 그 가라앉는 마음을 다시 들어 올릴 힘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중환자실에 입원해 온갖 장치를 아이언맨보다 많이 몸에 연결하고서야 비로소 죽음에 대해 가족과 이야기를 나눈다. 

-하이더 와라이치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가 과연 솔직하게 가감없이 우리의 "끝"에 대하여 사랑하는 사람들과 기꺼이 대화를 나눌 용의가 있는가? 의료 현장에서 환자를 전담하게 되는 의료인들과 그것에 대해 제대로 된 정말 원하는 그 결말에 대해 소통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한다. 


생명의 신성함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와 동일시되는 경우에 문제가 생긴다.

-하이더 와라이치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연명치료와 안락사에 대한 첨예한 대립과 저자 자신의 생각도 나온다. 우리가 환자를 둘러싸고 내리는 판단이 과연 그 환자 본인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를 대신하여 목소리를 내고 그를 간병하는 입장에서의 가치관에서 나온 자기 중심적인 것인지에 대한 지적도 예리하다. 더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처지의 환자를 대신해서 목소리를 내게 되는 지점에 대한 그 모호한 부담과 고통에 대해서도 통감한다. 어차피 질 싸움에서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그 위치의 논란과 고뇌 또한 만만찮다. 


죽음을 거론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태반이 병원에서 끝까지 온갖 의료 처치를 받으며 고독하게 죽는 시대, 영원할 것처럼 갈급한 욕망을 조종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가 폭주하는 시대, 그 시대의 끝에도 여전히 우리는 결국 죽음을 맞아야 한다. 휘황찬란한 스크롤로 인간 존재의 본원적 불안을 상품으로 가공해 기만하는 일상으로 숨어 들어가도 결국 맞아야 할 그 어쩔 수 없는 끝의 불편한 진실을 생생하게 그려낸 이야기의 울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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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5-16 0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의학의 발전이 인간에게 꼭 좋은 결과만을 준다고 보장할 수 없지요.제 친척 할아버지는 팔순에도 건강하셔서 항상 자전거로 다니셨는데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때 위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지요.수술이나 치료도 불가능하고 몇달 못 사실거란 이야기도 들었는데 정작 당사자는 자신의 몸은 매우 튼튼하다며(실제 위암이었지만 전혀 고통은 없었음) 암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말하셨는데 실제 자다가 편안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뭐 연명치료다 뭐다하면서 환자들을 고통스럽게 억지로 오래 살리는 것보다 이런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해드리는 것도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blanca 2025-05-16 15:14   좋아요 0 | URL
현대 의료의 발전이 분명 가져온 혜택도 많지만, 또 반대로 고통스러운 마지막을 연장하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참 미묘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환자 본인의 통증 조절과 삶의 질을 항상 배려하는 분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나에겐 아홉 살 어린 동생이 있다. 동생과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문득 '젊음이란 이런 거구나.' 싶다. 아직 동생에게 내일은 가능성으로 채워진 열린 공간이다. 희망도 있고 꿈도 있고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도 있다. 반면 동생 앞에 선 나는 이제 미래를 거진 닫힌 것으로 느낀다. 동생은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반해 이제 나에게 몸은 통증이나 노쇠의 잠재태로 끊임없이 화제에 오른다. 누구나 자신을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특별한 존재로 느끼지만 어쩌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성격보다 연령대에서 더 많이 찾아질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나보다 아홉 살 어린 내 동생보다 나보다 아홉 살 더 많은 김영하 작가가 쓴 글에서 더 많은 공감대를 느끼게 됐다.






칠십대의 하루키가 최근에 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말로 하기 힘든 먹먹함을 느꼈다. 이건 비단 작품 얘기가 아니다. 이제 하루키의 마지막 장편이 될지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다. 하루키는 나의 아버지 뻘 나이지만 그의 작품은 내 청춘과 동년배다. 그 시대의 힙함을 아우르던 그가 이제는 마지막 장편이 될지도 모를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실감은 곧 나도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될 날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을 읽으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특히나 작가가 마지막에 자신의 입으로 그런 고백을 한 대목을 맞닥뜨리고는 더더욱 그랬다.


다른 작가의 책을 읽다보면 때로 어떤 예감을 받을 때가 있다. 아, 이건 이 작가가 평생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글이로구나. 내겐 이 책이 그런 것 같다. 그런 책을 너무 일찍 쓴 것은 아닌가 두렵기도 하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다. 

-김영하 < 단 한 번의 삶>


이 책은 분량이 많지 않다. 어쩌면 앉은 자리에서 집중하면 서너 시간이면 다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영하 작가가 솔직하기로 작심하고 쓴 그의 사적인 인생 얘기가 가지는 여운은 작가가 많은 말을 하지 않으려 했던 기존의 결심에 설득당할 수밖에 없게 한다. 담담하고 솔직하게 부모님의 오랜 이야기로부터 작가의 어린 시절, 대학 시절,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가 젊음으로부터 늙음으로까지 걸어올 때까지 그라는 사람이 어떤 변화를 겪었으며 그러한 변화가 그의 글에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지를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한때는 열정적으로 음습하고 파괴적인 인간의 숨겨진 욕망을 서사화하던 작가의 모습은 누구나 젊음의 통과의례처럼 겪는 하나의 성장통과 연결되어 있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상하게 마음이 서글퍼졌다. 나였던 그 아이로부터 지금의 나는 얼마나 멀어져 왔는지를 나도 작가와 덩달아 반추하니 그 과거를 이제는 만날 수 없다는 생각과 과거의 내가 읽었던 작가 또한 이제 그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이런 내밀한 마지막이 될 고백을 하고 있다 생각하니 말로 형언하기 힘든 감회가 몰려왔다. 


대체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그 흔적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 수많은 작별과 상실이 기다리고 있을 길을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이 절로 느려지고 무겁게 느껴진다. <단 한 번의 삶>이라는 그 자명한 전제를 각성시키는 작가의 글이 이 봄날 아이러니하게도 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보는 이 봄꽃들은 이제 단 한 번이다. 내년의 봄꽃은 이 봄꽃과 다르다. 이생에서 겪는 모든 일들이 다 그러하다. 우리는 영원할 거라 생각하며 살지만 그 생각을 품은 우리는 그럴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질문을 일깨우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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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5-04-04 16: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껴 읽고 있어요^^
그리구... 용필 오빠 앨범 들으며 오빠의 마지막 앨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면서 가버린 시간을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blanca 2025-04-05 09:04   좋아요 0 | URL
분량이 참 아쉽긴 하죠. 그래도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쓴 느낌이 이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작가의 마음이 느껴지더라고요. 조용필 좋아하시는군요. 저도 조용필이 라이브로 부른 <사랑하기 때문에> 들으면 정말 눈물 나더라고요. 일생을 자신이 부른 노래에 부끄럽지 않게 잘 관리하며 나이드시는 모습도 존경스럽습니다. 저희 엄마가 정말 너무너무 좋아하는 가왕이거든요.
 

벌써 십여 년이 흘러가버린 과거에 살던 집 근처에는 사면이 유리로 된 예쁜 도서관이 있었다. 주택가에 숨어 있는 그 도서관은 작은 숲과 연결되어 있었다. 가장 잘 보이는 서가에는 압도적으로 많은 신간이 좌르륵 꽂혀 있었고 놀랍게도 그 신간들은  언제든 원하면 거기에 있었다. 그렇게 백수린, 김금희, 손보미 작가를 만났다. 황홀한 시간들이었다. 내가 한동안 멀리 했던 소설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던 건, 그때 한창 작품 활동을 했던 이 작가들 덕택이다. 이야기에 흠뻑 빠져 사는 일의 고단함을 잠시 잊을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 백수린 작가는 나에게 특별하다. 그녀는 나의 어떤 한 시절을 상징한다. 아직 젊었고 아직 셀카 찍기를 좋아했던 그때를 연상 시킨다. 그녀의 책들을 빌리러 가던, 어느 봄날 나는 사진 속에서 행복하다. 그 사진을 보면 그때가 떠오른다. 곧 숲속 유리 도서관에서 빛나는 유니버스로 들어가는 기대로 충만하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들.





작가도 세월과 함께 나이 들어 간다. 생애의 주기마다 쓸 수 있는 글이 다르다. 삼십대였던 작가와 사십대 작가가 바라보고 만드는 이야기는 미세하게 결이 달라진다. 그런데 그 변화가 작가가 삶을 사는 태도, 자세, 이야기를 만드는 힘에 의해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백수린 작가만이 할 수 있는 그 여전한 방식으로 이제는 상실을 품은 사람과 사람 간의 그 애틋한 스침에 대하여 이렇게 결이 고운, 그러나 과장하지 않는 방식으로, 여전히 읽는 사람의 눈물을 핑 돌게 한다. 



홀로 살던 할머니에게 어느 날 원하지 않던 '그것'이 오고 마침내 '그것'이 떠나간 자리에 남는 건 무엇일까? 수필 쓰기 수업을 듣지만, 과제를 제출할 수 없었던 할머니가 마침내 자기만의 글을 쓰게 된 그 계기는 그 사랑스러운 작은 솜털 뭉치가 남기고 간 따뜻한 온기 덕택일 것이다. 이렇게 나이 들어도 여전히 예측할 수 없는 그 돌연한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인 <아주 환한 날들>은 발표되었을 때 이미 읽어 두 번째인데도 여전히 마지막 문장에서 먹먹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주 환한 날들> 백수린



<봄밤의 우리>에는 주인공이 유학 시절 만난 무해한 남자 사람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인 유학생은 집안의 가업을 잇기를 포기한 채 뒤늦게 무작정 프랑스로 날아 와 팍팍한 유학 생활을 하며 주인공의 한 시절을 함께 한다. 이 기묘한 우정은 언제나 그렇듯 미묘하게 어긋나고 주인공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사랑을 나눴던 노견의 마지막을 함께 하며 그와 다시 연락이 닿는다. 마침 늙은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키고 있었던 그와 주인공은 이렇게 상실의 한 시절을 공유하게 된다. 이것은 섣부른 상실의 교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날 사랑했던 그 무엇을 잃고 난 다음 내가 경험하게 되는 그 개별적 상실의 무게를 상대의 그것과 등가 교환하려는 마음은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가. 바로 그 차이를 예민하게 인식하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남는 이야기들은 어떤 것일지, 그 둘의 재회는 결국 또 어떻게 어긋나게 되는지. 


<눈이 내리네>의 다혜가 대학 시절 잠깐 함께 살았던 이모 할머니와의 이야기는 내가 잊었던 그 이십 대의 불안하면서도 흔들리는 시간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 봤던 세상이 얼마나 몽환적이고 드라마틱하고 진실과 멀어져 있었는지는 세월과 함께 잊어버렸지만, 작가를 통과한 다혜의 그 시절은 그것들을 복원하고 복기하며 거기에서 얼마나 지금 우리가 멀어져 왔는지 그 거리가 가지는 것이 비단 상실만이 아니라 어떤 삶에 대한 이해를 가져왔는지를 보여준다. 


그때만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때만의 슬픔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때가 지금에 남긴 지금만의 의미가 있다. 빛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는 백수린 작가가 환기하는 여전한 것들이 일깨우는 그 시간을 통과하는 것은 황홀한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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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3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13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5-03-14 1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책보다 블랑카 님의 리뷰가 더 좋을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이 듭니다.

blanca 2025-03-15 09:56   좋아요 0 | URL
^^;;
 

흔히들 나이가 들면 현실적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 치일수록 더 내 앞의 이 물리적 현실이 허깨비 같은 허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느 순간 '나'라는 자아를 가진 의식이 출현하여 '너'를 만나 때로 '우리'가 됐다 어긋나 헤어지거나 죽음으로 이별한다. 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과정인가. 한때는 절대적인 존재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시간과 함께 스러져버리는 일이. 화성 탐사가 가능하고 손바닥 만한 전자기기에 세상 전부를 담을 수 있는 순간에도 여전히 정복하지 못한 이 존재의 부조리 앞에서 사람들은 더 큰 절망을 느낀다.
















스타니스와프 렘은 폴란드의 전설적인 SF 작가다. 폴란드 최초의 위성은 그의 이름을 본따 만들어졌고 심지어 그의 이름과 작품명으로 명명한 소행성들도 있을 정도다. 몇 차례 영화화된 <솔라리스>의 원작자의 상상력은 이미 그가 2006년에 고인이 됐음에도 여전히 오늘날의 기술 발달과 그것과 충돌하는 인간들의 내적 갈등에 놀라울 정도로 현재적이다. 그가 작품으로 형상화한 미래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현재적이다. 우주 탐사, 컴퓨터, 인공지능의 발달은 마치 스타니스와프 렘의 명령어를 따르기라도 한듯 그의 이야기와 닮았다. SF가 허무맹랑한 우주 탐사나 이물감이 드는 로봇, AI에 대한 피상적 스토리에 불과하다 생각된다면, 이 작가의 작품은 그 편견을 일거에 깨부수는 개미지옥이 될 거라 장담한다. 그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도 잠시 내려놓고 스타니스와프 렘이 만든 세계의 낮은 허들만 뛰어넘는다면, 작가가 창조한 생생한 유니버스 안에서 내 내면 안 해소되지 않았던 각종 기억, 감정, 고민들이 언어화되어 눈앞에 나타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솔라리스>는 '솔라리스' 행성 정거장에 탐사를 간 심리학자가 십 년 전에 자살한 연인과 조우하게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한 문장으로 이 SF의 고전을 요약하기는 역부족이다. 솔라리스 행성에는 끊임없이 정형과 비정형의 온갖 형태를 만들어내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유동하는 거대한 바다가 있다. 이 바다와 접촉하기 위한 시도는 결국 주인공이 내면의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있던 온갖 무의식, 기억의 심연과 대면하는 일로 이어진다. 연인과의 재회는 내 기억 속 환상의 순환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되는 과정의 일환이다. 이 우주 정거장에서 돌아다니는 인간의 외피를 입은 형상들은 실재하지 않는 내 환영일지도 모른다. 우주 탐사를 떠난 인간은 결국 내면 탐사의 지점으로 돌아온다. 우리 자신도 제대로 모르면서 지구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인간의 자신감은 얼마나 오만한가. 결국 주인공이 마지막에 이르러 불완전한 실패하는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실패하고 또 실패하는 신과 인간이 가지는 그 자체로서의 의미의 마침표.


<우주 순양함 무적호>는 분량이나 재미로 볼 때 스타니스와프 렘의 입문서로 괜찮을 것 같다. 역시 미지의 행성 레기스 3에 착륙한 무적호 승무원들이 실종된 우주선 콘도르호를 찾는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모험 이야기다. <솔라리스>의 바다의 역할을 떠맡은 미지의 형성물은 무생물의 진화로 확장된다. 이것은 인간의 문명에 대한 일종의 아이러니다. 우리는 흔히 생물, 그 중에서도 인간만이 문명을 만들고 진보한다,는 인간 중심설을 기본 대전제로 간주하지만, 죽음의 한계 바깥에서 건재하는 것은 물질이고 인간이 만들어 낸 로봇과 물질들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 빚어질 비극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주인공이 마지막 구조자의 임무를 떠안고 마침내 대면하고 마는 그 엄청난 비극의 형상은 거대한 아포칼립스에 실제 고립된 막막함을 추체험하게 한다. 


결국 나를 둘러싼 모든 이야기는 내 내면의 투영이다. 나는 사방에서 내가 비친 거울을 본다. 스타니스와프 렘은 이 거울을 우주 반사경으로 보여주는 스토리 텔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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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3-12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라리스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SF 라서 저는 딱히 관심을 두진 않았었거든요. 그런데 이 페이퍼 읽으면서 알게된 솔라리스의 줄거리는, 간단하게 요약하셨다하지만, 너무나 흥미롭습니다. 저도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명성이 자자한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요.

다락방 2025-03-12 10:58   좋아요 1 | URL
지금 땡투 누르고 사려다가 혹시 몰라 검색해봤더니 제가 2022년에 이 책을 샀다고 되어있네요 ㅠㅠ 집에 가서 찾아봐야겠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잠자냥 2025-03-12 13:1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blanca 2025-03-12 16:03   좋아요 0 | URL
ㅋㅋㅋ 다락방님, 충분히 그러실 수 있어요. 워낙 유명한 책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