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올리기 전에 한 번 더 읽어봤는데, 문단 가득히 무력감이 느껴진다. 원체 귀가 얇은 사람인데, 극단적인 성향도 있어서 나도 내가 좀 걱정스럽기는 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래서…’인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기술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이 즈음에, 세계는 우리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할까, 이다. 그러니깐, 이 문단은 이 글의 마지막 문단과는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고. 그래서 수미쌍관 작전은 완전 실패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우리의 희망을 찾을 것인가. 만들어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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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변화를 남겨두고 싶어서 쓴다. 이게 아닐까~ 라는 물음이 아, 어떡하지?의 탄식으로 바뀌는 순간을. 일부러 기록해 둔다.
'인간에게 일은 어떤 의미인가'는 내가 오래오래 궁금해 온 주제이다. 천착해 온 주제다, 라고 쓰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쓴다고 더 멋져 보이는 게 아니기 때문이고, 더 정확히는 여전히 나는 그 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사회적 계약관계에 의한 노동관계를 하지 않았던 나는, 특별할 것도 없는 설문조사의 직업 선택 난 앞에서 '전업주부'를 클릭할 때마다 멈짓하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놀고 있다'라고 말했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무슨 일, 하세요?'의 물음에 내 스스로, 내 입으로 '놀아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단 한 번도 전업주부의 삶을 예상하지 않았던 내가 그렇게 19년을 살았다. 그 생활에 크게 불편함이 없었고, 적잖이 만족스러웠고, 나름 즐거웠기에 나는 내게 다른 삶, 직업을 갖는 다른 삶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알라딘서재 이웃님들과 연이어 읽으면서 정치적 자유만큼 중요한 경제적 자유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나는 이미 '경단녀'가 되어 버렸고, 특별한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고,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내게 가능한 일이란 건 비정규직, 반일제, 저임금 노동일뿐이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 실비아 페데리치,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크리스틴 델피 그리고 정희진을 읽었던 시간이 있어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우연한 기회로 다시 사회적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워킹맘 3년 차를 보내고 있다.
내가 해왔던 일들에는 급여가 지급되지 않았기에, '일'이라 분류되지 않았기에 내게 각별한 페미니즘 운동은 '가사부불운동'이었고, 사랑의 이름으로 돌봄 노동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가정내 노동에 대한 이론과 정치가 내게는 중요했다. 『마틴 에덴』을 읽으면서도 기본 소득을 떠올렸던 데는 이런 배경이 존재한다.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의 물음, "나는 우리가 용기를 내서 행복이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페미니즘의 투쟁』, 190쪽)는 내게 언제나 절실하고 시급한 문제였다.
나는 인간의 가치가 '하는 일'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인간의 가치가 '자신의 밥벌이를 할 수 있는가'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타고난 베짱이인데다가 그럴 수 있는 환경, 즉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한 고려를 무시할 수 없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일에 대한 낭만화를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혼자 살지 않고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살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의 삶은 그 자체로 충만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기 위해 자신의 삶을 절제하고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의 땀방울은 소중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존중받아야 하고, 하고 있는 일의 무게와 특징이 인간 개개인의 가치와 병렬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AI와 인간 신피질의 확장을 통한 인류의 진화에 대한 책을 읽었다. 딱 2권 읽었으니깐 한 권 읽은 사람보다는 덜 위험하겠지만, 딱 2권 읽은 사람답게 내 마음은 참 조급하다.
농업 혁명과 산업 혁명의 변화의 넓이를 넘어서는 상상 이상의 변화가 이제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일하지 않아도 되는 인간의 등장. 비로소 인간은 일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인가. 김대식 교수는 고대 로마를 떠올리며 『AGI, 천사인가 악마인가』에서 이렇게 예측한다.
로마 제국의 팽창으로 유럽, 중동, 북아프리카에서 끌고 온 노예가 로마 전역을 통틀어 1,000만 명 이상 되면서 '로마 시민' 개개인의 노동은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무료로 일하는 노예의 등장으로 보통 사람에게 노동을 시키고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스로 유학을 다녀올 정도의 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상류층에 속하지 않지만, 새로 유입된 노예들 때문에 이전의 노동으로 돌아갈 수 없는 중산층의 붕괴가 가속화되고 불평등이 강화되었다. 실업자 폭증이 폭동의 위협으로 이어지자 로마 제국은 최초로 보편적 기본소득 Universal Basic Income을 도입하고 실행하기로 한다. 아주 잘 살게 해준 것은 아니고, 딱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구휼(235/417)이다. 이제 할 일도 없고 국가에서 먹여 살려 주니 여유시간이 생긴 시민들을 위해 대형 목욕탕과 사우나, 콜로세움 등의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했다. 이를 향락 문화의 만연으로 인한 로마 멸망의 이유로 꼽는 사람들도 있지만, 현실은 일거리 없는 사람들을 위한 고육책이었을지도 모른다.
AI로 인해 엄청나게 많은 일자리가 감소하고, 자의가 아니라 외부 환경의 변화로 일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에게 국가가 기본 소득을 제공하고, 저렴하고 깨끗한 주택을 공급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적성과 취향에 맞는 '일'을, 돈을 버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건 내가 상상했던 '좋은' 미래가 아니었던가.
경제적 여유와 더불어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더 많이 놀고 싶다. 더더. 친구들과 만나서 신나게 놀고 싶다. 오늘은 대학 과친구를 만나고, 내일은 독서모임 언니들을 만나고, 모레는 동네 친구를 만나고, 글피는 멀리 사는 친구를... 만나고 싶다. 그런 삶이 가능해진다고? AI 덕분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그래픽 히스토리 Vol. 2: 문명의 기둥』을 읽고 나서도 일에 대한 글을 썼다. 인간이 밀 경작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밀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전제와 논증이 내게는 설득력 있게 들렸다. 이 부분이 오늘의 글과 닿는다.
예전에 『사피엔스』를 읽었을 때는 진보의 결과로 인간이 더 많은 노동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 방점이 찍혔다면, 이번에는 조금 다른 지점에 관심이 생겼다. ‘돌이킬 수 없는’ 변화라는 점이었다. 당시의 모든 사람이, 정확히는 수렵‧채집인들이 바로 농민으로 탈바꿈한 것은 아니다. 농업혁명은 하나의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수천 년에 걸쳐 이루어진 긴 과정이었다. 농업혁명이 내포한 치명적인 결함을 눈치챈 사람들 중 일부는 정주 생활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더 깊은 숲속으로 이동했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거부하면서 자신들만의 문화를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 시간은 짧았다. 역사의 지배적인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기에, 자의로 혹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농작지를 경작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 전업 농부가 되고 말았다. (<농업 혁명의 질문: 우리는 더 많은 노동을 원하는가>, 단발머리)
돌이킬 수 없는 변화. 그런 변화가 우리 앞에 펼쳐진다. AI는 이미 정보의 분류와 조합을 넘어 판단의 주체로 자리 잡으려 한다. 엄청난 데이터의 처리를 통해 얻게 된 인공지능의 결정(판단)을 인간은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런 인공지능이 자율성을 갖게 된다면?
인간의 존재 이유를 일에, 혹은 일에만 두었을 경우에, 그것을 경제적 보상으로만 이해했을 경우에, 인공지능이 그러한 인간의 정보를 바탕으로 인간과 일에 대한 개념을 정립했을 경우에, '일하지 않는 나'를, 인공지능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 일은 내 생전에는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미치는 해악과 혜택을 적어도 내 눈으로 파악하기 전에 죽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그건 내게 참 궁금한 일이고.
일하지 않는 나. 기본소득을 통해 수입을 얻고, 힘써 일하지 않는, 힘써 일할 필요가 없는 나.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 뜻대로 실행할 수 있는 나. 그런 나를 바라보는 인공지능의 시선이, 카프카의 『변신』 속 커다란 벌레로 변해버린 '나'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시선과 크게 다를까.
그러니깐 내 마음이란 건 뭐랄까, 그런 것 같다.
무리 지어 협동하고 협력해서 자신들을 공격하는 사피엔스를 보는 네안데르탈인의 마음. 눈에 보이지 않는 내일과 내년, 그리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농업 정착민을 바라보는 오늘 당장 행복한 수렵채집인의 마음. 그런 마음이다. 지금의 내 마음은.
걔네가 사피엔스고, 걔네가 농업 정착민이다.
나는, 그리고 우리 인간은.
네안데르탈인 쪽이고, 수렵채집인 쪽이다.
우리는 그쪽이다.
믿든 믿지 않든.
알든 알지 못하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