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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특별증보판)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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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식탁에서 밥 먹고, 식탁에서 책 읽고, 식탁에서 알라딘하고, 식탁에서 유튜브 본다. 큰아이 밥을 차려두고 동영상을 보고 있는데,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내용이다. '선의를 가지고 있더라도'가 여러 번 반복된다. 선의를 가진 상태에서의 권고, 충고, 제안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그것은 금방 '괴롭힘'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그 핵심이다. 밥을 먹고 있는 아이에게 요 며칠 귀가 시간이 너무 늦다고 가볍게 한 마디를 했더니, '가정내 괴롭힘' 아니냐고 묻는다. 엥? 바로 답을 못했더니, 이런 것도 '괴롭힘'이라고, 알아서 잘~ 들어올 테니 걱정 말라고, 먼저 주무시라고 한다. 전열을 가다듬고 나도 한 마디한다. 너도 엄마한테 '버섯돌이'라고 하고, '독버섯'이라고 하는 거, 그거 다 '가정내 괴롭힘'이야. 밥 먹던 아이가 벙쪄서 '버섯 모양' 머리를, 아니 버섯머리를 지긋이 쳐다본다.




무엇을 하라, 혹은 하지 말라의 '금지'와 '강제'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자유롭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아간다는 뜻이고, 어린이와 심리적으로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행동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는 의미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자유와 쾌락, 즐거움을 위한 행동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도록 자신의 행동을 자제하겠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 유시민이 자유론의 핵심이라고 강조한 부분은 바로 여기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어떤 사람의 행동 자유에 개입하는 것은 자기 보호가 목적일 때만 정당하다. 따라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경우가 아닌 한 문명사회의 구성원에게 본인의 의지에 반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모두 부당하다. 물리적이든 도덕적이든 그 사람 자신의 이익은 정당한 근거일 수 없다. 그에게 더 이로운 일이라서, 그가 더 행복해질 것이라서, 남들이 현명하고 옳은 일이라 한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어떤 행동을 강요하거나 금지해서는 안 된다. 더 많은 이익, 더 많은 행복, 남들이 볼 때 옳은 일은, 충고하거나 설득하거나 권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무엇인가 강제하거나 불이익을 줄 합당한 이유는 아니다. 남에게 해악을 끼칠 것이 분명한 행동이라야 정당하게 제지할 수 있다. 사회가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은 타인과 관련된 행동뿐이다. 오직 본인 자신만 관련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그 사람의 몫이다. 자기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대한 주권은 각자의 것이다. 「자유론」, 33~34쪽, (322쪽)





자기 보호 목적과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당연한 일이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동에 대한 규제 역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합당한 일이다. 제일 난해한 지점은, 본인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행사되는 지점에 있다.

그에게 더 이로운 일이라서, 그가 더 행복해질 것이라서, 남들이 현명하고 옳은 일이라 한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어떤 행동을 강요하거나 금지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둘 다 성인이 되었는데, 여전히 모든 책을 육아책으로 읽고 있는, 자꾸 그렇게 읽고 있는 내게,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라는 이 말은 부모의 말로 들린다. 30년 정도의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후회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최선의 코스, 시간 낭비하지 않을 최단의 코스를 지원한다.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도록 최대한 지원한다. 이는 모두 '그/그녀'의 행복을 위한 것임을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는다. 사랑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보살핌과 지원. 그리고 세트처럼 함께 이루어지는 강요와 금지.

큰아이가 아직 돌이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초보 엄마는 아이의 발달 사항이 모두 책에 적힌 대로 이루어질 거라는 이상한 신념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고, 순간순간 자기도 모르게 '극성'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초보 아빠가 동창 모임에 나갔는데, 한 친구가 자신의 아이를 데려왔더라고 했다. 그녀 역시 초보 엄마였고, 그 집 아들은 우리 집 큰애와 비슷한 개월 수의 아이였다. 밥을 먹고, 커피숍에서 어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한참 움직일 때였던 아이는 활기차게 바닥을 기어다니고, 카펫이 어떤 물건인지 확인하며, 어른들에게 닿지 않는 1층 세계를 마음껏 활보했다고 한다. 가까이에서 영유아를 돌본 경험이 자신의 딸이 유일했던 초보 아빠는 바닥 생활을 즐기는 아이를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고, 주위 동창들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나처럼 초보 엄마였으되, 나와는 다르게 아이를 키우던 그 엄마, 초보 아빠의 동창이 말했더란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는 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게 아니면, 그냥 둬.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둬. 아무 말도 못 하는 아기지만, '안 돼!', '하지 마!' 그런 말들이 쌓이면, 지금은 말을 잘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한꺼번에 폭발할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 그게 7살 때 일 수도 있고, 사춘기일 때 일 수도 있고.

자유론의 핵심을 그분은 실천하고 계셨던 건데, 위생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던 얼치기 초보 엄마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해와 실천은 다르고, 이론과 실제는 천지차이이다. 아이들은 이제 다 컸고, 더 이상 육아 정보는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실천하고 싶은 몇 가지 명제들이 있고, 그 명제들의 근거는 이 문장이다.

충고하거나 설득하거나 권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충고하거나 설득하거나 권유하자. 다양한 방법을 제시해 주고 스스로 선택하게 하자. 끝까지 들어주고 공감해 주자. 믿어주고, 믿고 있다고 말해주자.

그리고 진짜로 믿어주자.


믿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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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5-07-06 2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기다려주기가 너무 어려워요.. 마지막 두 문단 정말 ㅜㅜ 반성하게 하네요

단발머리 2025-07-06 21:56   좋아요 2 | URL
4세에서 10세까지. 그리고 잠깐 착한(?) 어린이였다가 12세부터 14세까지.... 가 저는 제일 실천이 어려웠어요.
물론.... 지금도 그래요. 그래서, 마지막 두 문단은 저의 다짐이오며.
유수님, 폭풍 같은 시기 잘 견뎌내시기를... 쉬는 시간, 그리고 휴식 시간 짬짬히 가지시면서 잘 견뎌내시기를.... 바래요.

유수 2025-07-06 21:59   좋아요 1 | URL
적어주신 바에 따르면 11세뿐인데요. 그 일년 유니콘의 해네요.

단발머리 2025-07-06 22:05   좋아요 1 | URL
그니깐요. 아, 그러네요. 진짜....
‘마음을 읽어주셨나요?‘의 오은영 바람을 넘어 저는 조선미 박사 훈육관도 좋아합니다. 학교 가기 싫다고 떼쓰는 아이를 설득하지 말라고요. 하기 싫어도 해야할 일이 있어! 라고 말해주라 하더라구요. 저는 교회 다니고 있어서.... 교회에서는 자녀 훈육을 좀 강하게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어요. 이를테면 매를 아까지 말라... 등등. 저는 성경적 훈육관에 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걸 가르쳐 주긴 했어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못 해도) 엄마(아빠) 말이면 일단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경우도 있어! 이렇게요. 이건 12세 이전까지만 사용가능합니다. 머리가 커질수록 반항은 커지오며....

북프리쿠키 2025-07-06 2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젤 좋아하는 소설 <죄와벌>은 유시민님의 이 책을 보고 읽게 되었습니다. 개정판을 보니 반갑네요~^^

단발머리 2025-07-09 08:06   좋아요 1 | URL
<죄와 벌>을 제일 좋아하시는군요. 북프리쿠키님!ㅎㅎㅎ
전 유시민님의 이 책 읽고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었습니다. 반가운 마음, 이해합니다^^

책읽는나무 2025-07-06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충고, 설득, 권유…그리고 믿음!
아이들이 작은 성인이 되었어도 육아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게 저는 조금 충격이었습니다.😳
애들이 정신 연령이 크게 자란 것 같지 않았단 것에 조금 충격이었거든요.ㅋㅋㅋ
그래서 지금 저희 집 아이들은 저의 모든 말들을 잔소리로 받아들이고 있어요…성인이 된 자녀들은 또 어떻게 키워야 하는 건지? 내가 보기엔 녀석들도 행동이 크게 달라진 것도 없어 보이던데 말이죠.
그런데 충고와 설득 그리고 권유로 충분하단 문장이 성인이 된 자녀들의 육아법이라니…
정말 맞는 말 같군요.
휴…부모의 길은 끝이 없군요.
그나저나 동창 모임에 아기와 함께 참석했다는 것은 또 좀 놀랍습니다.
저는 못 보냈을 것 같습니다만.
또 어찌보면 그 자녀의 부모들도 대단해 보이기도 하구요. 지금은 그 자녀가 어떻게 성장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아마 좀 대범하게 잘 컸을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25-07-09 08:0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모두 잔소리로 받아들이는 거 같아 아무말 안 하려고 하는데 ㅋㅋㅋㅋㅋ 근데 그렇잖아요. 꼭 할말이 있습니다.
또 부모이긴 하지만 저 역시 부족한 점이 많기 때문에... 필요한 거를 말했는데 건성으로 듣는다던지, 부탁한 거를 홀랑 잊어버린다던지.... 그런 일이 ㅋㅋㅋㅋㅋㅋㅋ저는 많습니다.
동창 모임에 아기 데려오신 분은 아이가 어린데 맡길 곳이 없어서 데려오신 것 같았어요. 아니면, 남편을 못 믿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차라리 내가 데리고 가겠다! 그러셨을수도요.

바람돌이 2025-07-07 1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 글 읽으면서 다 키운자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너무 좋아요.
단발님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고지가 바로 저기예요. 호

단발머리 2025-07-09 08:10   좋아요 1 | URL
다 키운자의 여유를 마음껏 누리시기 바래요, 바람돌이님!
저도 고지가 바로 저 앞이라 생각하기는 합니다. 으쌰으쌰!!!

다락방 2025-07-08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지런한 펜통속의 형광펜, 저 맨 위의 것들이요, 부드러워서 저도 참 좋아합니다.
단발머리 님은 책과 함께 늘 간식을 드셔서 참 좋습니다. ㅋㅋㅋㅋㅋ

‘그에게 더 이로운 일이라서, 그가 더 행복해질 것이라서, 남들이 현명하고 옳은 일이라 한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어떤 행동을 강요하거나 금지해서는 안 된다. ‘

제가 살면서 깨달은게 바로 이것입니다. 그에게 더 이로운 일이라서, 그가 더 행복해질 것이라서, 는 모두 ‘나‘의 생각이지요. 저는 ‘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라면서 저한테 남자 사귀라는 친구도 있었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굉장히 당황하고 기분 나빴던 기억이 있어요. 전 그 당시 충분히 행복해하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남자 없어서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왜 하는건지.. 그건 자기 기준 아닌지....... 아직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

단발머리 2025-07-09 08:14   좋아요 0 | URL
간식 알아봐주시는 안목에 감사와 칭찬을!!

자기 기준에 맞춰 그런 것도 있을테지만,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그런 것들을 ‘너를 위한다‘는 이유로 말하는 게 얼마나 ‘과한‘ 일인지....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자신의 행복에 대한 생각을 강요하는게 문제인것 같아요.
남자 없어서 행복하지 않을 거라 말하셨던 그 분, 그 남자 분이랑 행복하신지.... 항상 행복한 건 아닐텐데... 그럼 언제 행복하신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7-09 05: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맞다.
단발머리 님. 이번에 개봉한 쥬라기월드 4편에 ‘조나단 베일리‘가 주연인거 아시나요? ㅋㅋ 저는 봤거든요, 아버지 모시고 가서. 착한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단발머리 2025-07-09 08:15   좋아요 0 | URL
세상에!! 저는 개봉 예정인줄로만 알았어요! 벌써 개봉했단 말이에요? ㅋㅋㅋㅋㅋㅋㅋ 아, 조나단 좋아했던 거 이제 다 과거인가요? 저도 얼른 가서 봐야겠어요. 다락방님은 아버지랑 보셨군요. 일상이 다 효도 생활이에요! 엄지척!

독서괭 2025-07-11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섯... 너무 귀엽고요 ㅋㅋ
일전에 어느 책에서, 충고하지 말고, 조언하지 말고, 평가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고(충조평판) 하는 걸 읽고 굉장히 부담스러웠는데, ˝충고하거나 설득하거나 권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씀에 마음이 편안해지네요. 평가랑 판단은 안 하는 편이 좋겠지만, 충고랑 조언정도는..! 안 할 수가 있습니까..? ㅋㅋ (애들에게)
 
사상의 좌반구 - 새로운 비판이론의 지도 그리기 컨템포러리 총서
라즈미그 쾨셰양 지음, 이은정 옮김, 배세진 해제 / 현실문화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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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관심이 가는 챕터, <포스트 여성성>을 읽었다.

해러웨이가 보기에 우리는 모두 어떤 점에서는 사이보그다(358쪽). 나는 지금 안경을 쓰고 있고, 출근할 때는 콘택트렌즈를 낀다. 안경이 없으면 제대로 볼 수 없다. 행동에 제약이 있다. 그 지점에서, '본다'는 점에서 나는 사이보그다. '우리는 모두 사이보그다'에서 시작한 해러웨이는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흐릿해진 만큼 '인간/동물과 인간/기계'라는 이중 경계 역시 사라진다(361쪽)고 주장하는데, 이는 새로운 존재론으로 이어진다.

해러웨이가 보기에 인공물은 모든 사물에 대한 사유 모델을 제공한다. 그의 인공물주의는 급진적 반본질주의다. 그는 세계 내 어떤 실체도 ‘본질‘을 소유하지 않으며, 따라서 상호작용하는 다른 실체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는 없다고 여긴다. 사물은 언제나 혼종적인 것이요, 여러 심급의 혼합이다. 이는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반본질주의는 동시대 비판 사상 대부분에 공통적이다.(361쪽)

혼종으로서의 사물, 여러 심급의 혼합인 사물을 상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생김새가 다른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일테면, 『랜들 먼로의 친절한 과학 그림책』 62쪽 '생명체의 나무'를 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생명체가 한 가족이라는 생각은 인류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비교적 최근에서야 나타났다. 인간, 근대적 인간은 분류하고, 구분하고, 무리 짓고, 카테고리별로 묶었다. 생명체의 나무에 따르면, 사람은 집에서 키우는 물고기보다는 새에 더 가깝고, 집에서 키우는 그 물고기는 사람을 잡아먹는 커다란 물고기보다 사람에 더 가깝다고 한다. 작은 나무처럼 생긴 버섯은 나무보다는 동물에 가깝고, 나무, 벌레, 사람과 같이 '하나보다 많은 보따리로 이루어진 모든 생물'은 세 번째 큰 가지에 속한다. 나무와 벌레, 그리고 사람. 작은 차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구별과 분류가 해러웨이 앞에서 무너진다.

해러웨이의 인공물주의의 이론적 결과 중 첫 번째는 반인간주의다. 어떤 사물도 본질을 갖지 않는다면, 인간 존재 또한 본질을 지니지 않는다(361쪽)는 주장. 당연히 인간은 동물보다 특별하지 '않다'. 이러한 주장은 자연스레 반종차별주의로 간다. 두 번째로 해러웨이는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362쪽), 인간이 유기체와 기계의 얽힘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하에서 인간과 동물 간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듯, 여성과 남성 역시 '본질'적인 구분이 불가능하다. '여성'됨이라는 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다(362쪽)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이제 주디스 버틀러다. 휴우~~

버틀러가 보기에 섹스는 젠더와 마찬가지로 문화적 구성물이다. '섹스'와 '젠더'라는 구분 자체가 사회적·역사적으로 정립된 것이니, 그 구분을 이루는 항목들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 결국 버틀러가 최종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바로 본성과 문화의 분리다.(369쪽)

섹스와 젠더를 이해하던 이전의 방식을 버틀러는 완벽하게 분쇄한다. 어디까지가 본성의 범주이고 어디에서부터 문화의 영역인가. 평생에 걸쳐 반복해서 이루어지는 '젠더 사회화'를 통해 인간은 여성으로, 남성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강제적 이성애와 남녀 이분법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더욱 공고해진다.

나왔다, 스피박.

포스트식민주의 연구와 페미니즘 내부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킨 스피 박의 개념은 전략적 본질주의strategicessentialism다. 본질주의에 대한 비판은 동시대 비판 사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젠더든, 계급이든, 민족이든 모든 정체성은 사회적으로 구성되었고, 따라서 우연적이라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정체성은 객관적이거나 실체적인 그 어떤 것도 가리키지 않는다는 얘기다. 전략적 본질주의 개념 역시 이런 비판에서 유래하며 사회 세계에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그러한 본질을 제거하기가 어려워 보일 만큼 일상생활과 사회 투쟁에서 개인이 본질을 자주 참조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379쪽)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전에 써두었던 글을 여기에 붙여둔다.


전략적 본질주의 :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5259889


저항주체인 여성의 전략적 본질주의 :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5262820



다시 해러웨이에게로 돌아가 보자. 해러웨이는 사물에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핵심은 급진적 반본질주의다. 버틀러의 주장에 따르면, 섹스는 젠더와 마찬가지로 문화적 구성물이다. 일상적 수행을 통해 특정 젠더로서 '기능'할 뿐이다. 버틀러가 고전 페미니즘의 '여성'이라는 범주에 대해 비판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379쪽) 젠더든, 계급이든, 민족이든 모든 정체성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379쪽) 하지만, 여전히!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압당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고, 이런 현실에 대한 대응으로서 스피박은 '전략적 본질주의'를 주창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382쪽을 읽다가, 나는 저자의 얼굴을 확인하러 구글로 갔다.


『제인 에어』는 19세기 자율적인 여성 주체의 출현을 나타낸 작품으로 여겨지지만, 스피박은 이런 여성 주체의 출현이 식민지 출신 여성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는, 다시 말해 식민지 출신 여성을 인간 이전의 상태로 일축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이는 여성이 집안일에서 해방되는 것이 흔히 식민지(그리고 피지배계급) 출신 가사도우미의 원조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명백하다. 따라서 여성이 놓인 조건의 역사와 제국주의의 역사는 분리될 수 없다. 이 둘은 함께 고려돼야 한다. 다만 이제껏 페미니즘에서는 그 작업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382쪽)

남자일거라 예상했지만, 굳이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던 건, 페미니즘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집안일에서 해방되는 것은 식민지 출신 가사도우미의 원조를 전제로 한다'는 그 말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많은 경우 그랬고 또 지금도 그러하다. 하지만, 여성이 해방되고자 간절히 원하는 '그 집안일'은 여성만의 몫이 아니다. 이에 대한 페미니즘의 비판과 평가, 연구가 앞으로도 이루어지겠지만, 그 비판의 목소리조차 나는 여성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자신의 밥을 스스로 잘 챙겨 먹는 사람일 거라 추측하고 싶다. 엄마가, 아내가, 여자친구가 해주는 밥을 얻어먹으면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는 뜻이다.

해러웨이와 버틀러, 스피박 이론의 핵심을 잘 짚어내면서도 쉽게 설명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밥 이슈를 빼고는 괜찮았다.


정리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좌반구 살짝 돌았고, 우반구는 다음에 돌기로 하자.

이제부터 놀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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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6-28 22: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휴.. 사흘 연달아 놀기만해도 될 것 같은 페이퍼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단발머리 2025-06-29 08:21   좋아요 0 | URL
놀기 이틀쨰입니다. 다락방님도 여유롭고 편안한 하루 되시길요^^ 날은 좀 후덥지근하지만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5-06-29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어려운 책을 척척 읽어내시는 단발 님께 좋아요를 수십 개 눌러드립니다.
해러웨이, 버틀러, 스피박…이름만으로도 와!
반대쪽 우반구로 빨리 돌아야 멀미가 사라지겠죠?ㅋㅋㅋ

단발머리 2025-06-29 16:29   좋아요 1 | URL
제가 이 책을 다 읽은 것은 아닙니다 ㅠㅠㅠㅠㅠ 그러나 건네주신 좋아요~~는 다 받아도 되겠지요?
우반구는 다음을 기약해야 합니다. 일단 오늘은 좀 놀고욬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5-07-11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가, 아내가, 여자친구가 해주는 밥을 얻어먹으면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는 뜻이다.
밥 이슈를 빼고는 괜찮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명언들 콕 짚고 갑니다.
밥이슈는 중요하죠, 암요!!

 
재생산 유토피아 - 인공자궁과 출생의 미래에 대한 사회적·정치적·윤리적·법적 질문
클레어 혼 지음, 안은미 옮김, 김선혜 감수 / 생각이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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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페이퍼를 쓰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주제는 '재생산권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가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 전제는 '재생산권을 통제한다' 혹은 '재생산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출산율, 이제는 출생률로 부르고 있는, 재생산 비율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와 불안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획기적인 대안이 도출되지 않고 있음을 고려하면 아직은 우리 사회가 그 문제를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는 하다.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길어야 100년 사는 우리가 고민하는 지구의 미래에 대해 나는 좀 회의적이다.

문제는 권력자들의 정치적 성향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더 좋거나 더 나쁜 재생산 후보로 분류하고 서열화할 수 있으며, 이를 근거로 재생산을 통제해야 한다는 발상이다. 부분적으로는 좌파, 진보적 사상가, 선의를 지녔다고 인정되는 개인, 국가 또는 기관이 이행하기만 한다면, 그런 관행은 허용될 수 있고 심지어 유익할 수 있다는 위험한 신념 때문에 우생학이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이런 발상은 어떻게 아직도 할데인이 상상한 인공 자궁에 대한 잔재가 실현 가능한지, 우리가 얼마나 더 나아가야 체외발생이 화를 재촉하는 데 쓰이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 시사한다. (109쪽)

폭력으로부터 임신한 사람을 보호해 줄 자원을 제공하는 것보다, 그저 이들의 몸에서 태아를 적출하여 '더 안전한' 장소에서 자라는 편이 더 낫다는 발상은 지극히 충격적이다. 이런 주장은 태어난 어린이와 동등한 권리를 태아에게 부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임신한 사람이 임신에 최적화되어야 할 '환경'이자 인큐베이터에 불과하다고 암시하면서 이들의 권리를 침해한다. 그리고 이런 각각의 주장들은 인공 자궁을 우생학의 실현 도구로 활용하려는 과거의 잔재를 이어간다. (115쪽)

배아에 대한 실험적, 물리적 통제가 14일이었지만, 이제 그 기한은 이런저런 이유로 연장될 가능성이 크다. 초극소 미세아에 대한 돌봄 혹은 관리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될 경우, 두 개의 기술은 반드시 결합할 것이다. 의료적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인공 자궁에 들어가는 아이들의 숫자가 늘어날 테고, 그 이후에는 '편리함'을 이유로 인공 자궁을 이용해 아이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이런 흐름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에는, 과학 기술의 발전과 기술의 적용에는 후진이 없다고 생각한다.

뒤쪽을 읽어갈 때는 '조산아'의 인종, 계급, 사는 지역에 따른 사망률의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보건 의료 자원을 보다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에는 임신한 사람, 엄마, 영아들의 건강 불평등이 인종차별로 인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이 있다. 미국의 경우 임신한 흑인 여성들의 사망률은 임신한 백인 여성들의 3~4배에 이른다. 또 임신 및 출산과 관련하여 '생명이 위태로워'지거나 신체적 손상이나 합병증으로 후유증을 겪을 확률도 실질적으로 더 높다. 원주민 여성들이 임신이나 출산과 관련된 원인으로 사망할 위험은 도시에 사는 백인 여성들보다 4.5배 더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에 사는 흑인, 하와이 원주민, 미국 본토 원주민, 알래스카 원주민 아기들은 미숙아로 태어날 위험이 더 크고, 생후 일 년 이내에 사망할 확률도 더 높다. (144쪽)

적은 비용으로 치료가 가능한데도 건강 불평등 때문에 흑인, 원주민의 아기들이 목숨을 잃는 반면,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 얻어진 최신 과학 기술 덕분에 생명을 '연장'하게 된 백인 아기들이 존재한다. 이는 명백히 자원의 배분과 연관이 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당연히 서열화일 것이다. 누가 누구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이 정치를 넘어 문화의 영역에서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용인될 때, 사람들의 잘못된 신념은 구체적인 통계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반대로 '강제적' 평등이 강조되었을 때, 전체주의 사회의 도래를 막을 수 없게 된다. 로이스 로이는 소설 『기억 전달자』에서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차이를 'sameness'로 치환하려 했을 때, 그러한 강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는지 보여준다. 요는 '차이'를, '다름'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대상을 우열로서가 아니라 차이로서 인식하는 것. 인류 문명이 다하는 날까지 어쩌면 그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부분에 재생산권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 두 아이를 낳아본 입장에서 낳는 것보다 키우는 일이 몇 배 더 힘들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뱃속에 아이를 열 달 넣고 다니는 게 힘들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한 인간을 1인분으로 키워내고, 그 모든 과정에서 가능한(혹은 최대한) 아이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나 자신을 반추해 나 자신이 먼저 성숙한 인간, 좋은 부모에 가까운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다.

2018년 11월부터라고 다락방님이 이야기해 줘서야 알았다. 같이 읽기를 시작했던 그 순간의 대화들도 기억이 또렷한데 7년이나 지났다고 하니,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책 선정에서부터 리뷰와 페이퍼 쓰기, 완독 독려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을 이끌어주신 다락방님께 특히 감사드린다. 함께 읽고 함께 쓰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었던 모든 이웃님들 덕분에 새로운 것들을 많이도 배웠다.

완독의 기쁨을 5월 31일, 오늘 이날에 즐겁게 담아둔다.

기술로 만든 장치 안에서 자라는 아기의 경험은 인간의 자궁안에서 겪는 경험과는 어떻게 다를까? 또 우리가 결국 이런 계획을 추진해야 할 이유에 설득되어 동의한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 미래의 일을 넘겨짚는 대신, 1923년과 케임브리지의 북적북적한 학술모임에서 ‘체외발생‘이라는 말이 처음 생겨난 순간으로 돌아가 과거를 되짚어보면서 가능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자. - P85

달리 말하면 인공자궁은 ‘우월한 자‘만이 생존을 보장해준다는 이야기이다. 《오늘과 내일》 시리즈의 다른 저자들도 우생학이 완전히 실현된 미래가 더 나은 미래라는 데 동의했을 것이다. - P102

헉슬리가 전체주의와 우생학이 지배하는 체제를 상상한 시기는 나치의 그야말로 극단적인 우생학 정책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이었다. 하지만 당시 헉슬리는 영국, 유럽, 북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시행되고 있는 정책과 법률, 관행에서 정보를 얻었다. 이 책이출판된 지 3년이 지난 1935년에는 뉘른베르크 인종법Nuremberg RaceLaws으로 홀로코스트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유럽과 북미에서는열등하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의 불임화와 분리정책을 정당화할의도로 법규를 통과시켰듯이, 뉘른베르크 법은 유대인, 로마인, LGBTQ, 흑인, 장애인, 혼혈인을 인간 이하로 분류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이 법은 이들 중 누구도 ‘아리아‘ 독일인과 결혼하거나 성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명시하고 사람들이 결혼 전에 건강적합인증서를 갖추도록 했다. 이러한 각각의 조치들은 미국에서 통과된 법규와 영국 우생학자들의 권고 및 저서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았다. - P110

국가나 기관이 몸 안에 아기를 지니면 안 된다고 다른 누군가를 대신해서 결정한다면, 이것은 우생학이다. 임신한 사람이 알코올이나 마약을 사용했든, 암 치료를 받았든, 학대에 희생되었든, 이런 행동 때문에 임신한 사람의 몸에서 아기를 적출되는 편이 아기의 최선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결할 권한이 판사에게 주어진다면, 이것도 우생학적이고 반페미니즘적 관행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이 같은 판결을 마주한 사람이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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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6-02 2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 님, 5월 도서 완독을 축하드리고요 읽고 글까지 쓰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무엇보다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같이 읽어주셔서 더 감사드리고요. 단발머리 님 덕에 이 같이읽기가 오래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같이읽기를 하게 된다면 꼭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단발머리 님이 게셔야 힘이 납니다.
감사했어요!!

단발머리 2025-06-03 11:20   좋아요 0 | URL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할 수 있었던 건 좋은 책과 알라딘 이웃님들, 그리고 다락방님이 계셔서에요.
안식년 야무지게 잘 보내신 후 또 좋은 계획 있으면 공지해 주세요^^
우리도 더워요, 한국도요 ㅋㅋㅋㅋㅋ치앙마이도 덥겠죠? 땀 많이 내고 오세요!
 
레이먼드 윌리엄스, 마르크스주의와 문학 컴북스 이론총서
박만준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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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윌리엄스, 마르크스주의와 문학』을 읽었다.

'문화'에 대한 여러 정의 중, 근대적 사고와 실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개념에서 시작해, 언어, 문학, 이데올로기, 헤게모니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어디까지나 저자 박만준씨가 이해한 '윌리엄스 론'이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읽는다.

노동자계급 출신의 윌리엄스는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수련의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교수의 자리에 올라서도 한결같이 실천적 지식인으로 살았다. 당시 영국은 물질문명의 발달과 소비주의가 확산되는 분위기였는데, 윌리엄스는 자신의 지식과 그를 바탕으로 한 해석이 사회 현실에 대한 '보고'가 될 수 있도록 좌파적 입장에서 대안을 제시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윌리엄스는 의미를 생산하거나 의미 생산의 근거가 되는 것을 그 주된 기능으로 하는 텍스트나 문화적 행위를 문화라고 정의했는데, 이는 구조주의자들과 후기구조자들이 말하는 "의미를 나타내는 실천 행위(sygnifying practive)"와 동일하다(7쪽)

이를 문학이라는 비교적 구체적인 대상에 적용할 때,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발간한 『문학비평용어사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윌리엄스의 문화유물론적 관점에서 문학은 해석되고 감상되어야 할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여러 관계와 조건들을, 가치와 의미들을 구성하고 만들어 주는 하나의 행위로 존재하게 된다."

고정되고 확정된 형태로서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문학이 아니라, 우리 삶의 관계와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행위로서의 문학. 문학 작품이 있고, 그 작품을 읽는, 감상하는, 작품 밖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작품을 읽을 때, 읽어낼 때, 그 작품을 읽는 과정, 그 작품을 읽어내는 행위 자체가 새로운 가치와 의미들을 구성하고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읽기가 연대라고 믿어요."라는 정희진쌤의 말씀이 이런 의미라고 나는 이해한다.

윌리엄스의 주요한 주장 중 하나인 헤게모니에 대한 이론은 그람시의 '헤게모니' 정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헤게모니는 단순히 위로부터 강요되는 힘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서 이루어진 타협의 결과고 저항과 합병의 흔적을 남기는 과정이다. 한 마디로 헤게모니는 '사회의 전 과정'으로서의 문화며, 사람들은 이러한 문화를 통해 그들의 삶 전체를 정의하고 규정한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의미와 가치체계는 그 어떤 것이든 헤게모니를 통해 특정 계급의 이해를 표현하거나 투영하게 마련이다. (54쪽)

푸코의 권력에 대한 설명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단순히 힘으로 강요되고, 위에서 아래로 강제되는 방식으로 운용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 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의 타협과 저항, 합병, 그리고 일련의 협의의 과정을 통해 헤게모니가 작동한다는 주장이다. 그에 따른 결과는 무엇일까? 실제 그 계급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지배를 정상적 현실 혹은 상식으로 받아들이도록(52쪽) 하는데, 그것이 바로 헤게모니에 의한 지배를 가리킨다.

사실과 픽션,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의 이원화는 부르주아적 문학 이론이 글쓰기의 형식을 통제하고 특수화해 왔다는 증거이자 이론적·역사적 단서인 것이다.(80쪽)

사실과 픽션, 객관적인 것의 주관적인 것의 이원화, 이러한 부르주아적 글쓰기 행태에 대항하는 새로운 글쓰기 형식은 페미니즘 글쓰기에서 유독 도드라진다. 마리 루티의 책에서 정확한 문장과 표현을 찾아내려 기억을 더듬어 루티의 책 두 권을 뒤져 보았으나, 아쉽게도 찾지 못했다. 읽고 있는 책 『재생산 유토피아』는 이원화 글쓰기의 반대 예가 될 수 있겠다. 체외수정에서부터 시작해 '인공 자궁'의 완벽한 실현이 다가오고 있는 즈음에, 지금까지 '부분 인공 자궁'의 역사를 살펴보고, 기술 발전과 나란히 제기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해 쓴 책인데, 임신하고 있는 저자의 상태와 맞물리면서 '태아와 산모의 상호작용', 더 나아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잘 어우러져 있다. 이론과 실제의 이상적 결합, 객관성과 주관성의 치열한 경합을 다룬 글쓰기의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도서관에 없는 책이라 구입해서 읽었다. 아주 작고 얇은 책이라 몇 시간 만에 읽었는데, 내용 자체가 흥미로워 재미있게 읽었다. 스물셋에 읽었던 윌리엄스와 그의 이론, 특히 토대와 상부구조와 관련해 마르크스를 인용한 부분이 아직도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에서 나는 아직 어리고, 아직 철들지 않았으며, 생각보다 많이 성장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조금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나를 빼고, 이 책만 두고 이야기할 때, 좋은 책이었고, 좋은 읽기의 시간이었음은 확실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언어는 물질적이며, 사회적 관계로서 표현되는 물질적 생산의 인간적 양식은 처음부터 언어라는 실천적 의식을 필연적 요소로 내포하고 있다. 세계와 세계를 이야기하는 언어를 분리하거나 실재와 의식을 분리해 버리면 언어의 물질성은 단지 물리적인 것으로 파악될 뿐 결코 물질적인 행위로 파악될 수 없다. - P16

윌리엄스에 의하면, 공통 문화는 아무도 상속할 수 없으며 인민들이 스스로 만들어 가야만 한다. 공통 문화의 토대는 평등한 사회이며, 윌리엄스가 성취하려 한 유일한 평등은 존재의 평등이다. - P24

한마디로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문학과 전체적인 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를 화해시키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문학 혹은 창조적 문학 생산과 현실 사회에 대한 치밀한 분석은 불가피하다.
"우리의 사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그곳에서 시작된다." - P25

각각의 생산양식은 생필품을 획득하는 방식이 다르고, 노동자와 생산양식을 통제하는 자들 간의 관계가 다르며, 문화제도를 포함한 특수한 제도가 다르다. 한마디로 물질적인 생산양식이 전반적으로 삶의 과정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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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5-27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토대, 상부구조, 헤게모니 너무 오랫만에 읽는 단어들. 그냥 오래전에 눈이 닳도록 봐서인지 왠지 정겹고 고향에 온 듯한 그런 리뷰입니다. ^^아직 어리고 철들지 않은 인간 여기도 한명 있어요. ^^

단발머리 2025-05-27 20:49   좋아요 1 | URL
옛 추억에 빠져들게 하는 리뷰라니.... 바람돌이님, 격정의 20대를 보내셨던 것으로 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윌리엄스 배웠던 그 학기의 그 책이, 정확히는 교재죠. 아직도 있습니다. 책 많이 버렸는데 못 버리겠더라구요. 한 페이지 옮겨 적고 싶었는데 귀찮니즘 발동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리고 철들지 않은 우리 모든 어린이들~~ 오늘밤도 평안하시길!!

수이 2025-05-27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월의 리뷰로 선정하겠습니다. 제일 공감 가는 부분은 역시 마지막 태그 두개 :)

단발머리 2025-05-27 20:49   좋아요 0 | URL
애정어린 선정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아직 철들지 않은 저를 부디 어여삐 여기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님, 굿나잇!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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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6일은 미국 국민들뿐만 아니라, 혼돈의 상황을 화면으로 접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날로 기억될 것이다. 제46대 대통령 선거 결과를 인증하기 위한 117차 미국 의회를 저지하기 위해 트럼프 지지자들이 국회 의사당에 난입, 국회 의사당을 짓밟았다. 많은 의원들의 사무실이 폭도들의 침략으로 약탈, 파괴되었고, 트럼프에 반대하던 민주당과 공화당의 유명 정치인들이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하지만, 폭력 사태 이후에도 공화당은 이들과 거리를 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들을 옹호했고, 공화당은 트럼프를 중심으로 더 결속하는 양상을 보였다.

2021년 1월 6일, 전대미문의 폭력 사태는 1934년 2월 6일,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폭도들의 국회 의사당 습격 사건과 유사하다.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으로 뭉쳐 있던 재향군인회, 우파 민병대, 청년 애국단 등의 폭도들은 국회 의사당을 부수고, 의원들을 협박했다. 많은 프랑스 정치인들이 2월 6일의 폭동에 분노를 표하며, 거세게 반발했지만, 주류 보수주의자들 일부가 폭력 사건을 옹호하고, 폭도들을 공화국을 구하려 했던 영웅적인 애국자라고 칭송했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이런 폭도들을 옹호하는 정치인들이다. 1934년 2월 6일 폭동 직후, 그리고 2021년 1월 6일 폭동 이후 '충직한 민주주의자'와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의 구별이 가능해졌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반민주적 극단주의자를 묵인, 방조하고, 그들의 폭력 행위에 동조했다. 주류 중도 우파 정당을 표방했던 공화당 의원들 다수가 트럼프의 등장 이후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로 탈바꿈하는 과정은 공화당뿐만 아니라 미국 정치의 암울한 미래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암시가 되고 말았다.

4년의 공백기를 보내고 워싱턴으로 돌아온 트럼프의 공화당은 현재의 정치 제도를 백분 활용함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확장하고 있다. '정치적 소수가 계속해서 거대 다수를 이기거나 정책을 강요하는(247쪽)' 상황은 미국의 독특한 정치 제도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정당, 가장 많은 국민의 지지를 얻은 정당이 승리해야 한다. 하지만, 건국 당시 지역 엘리트 사이의 이해관계에 근거해 인구가 적은 주들은 여러 가지 이익을 보장받았고, 인구수가 적은 주와 많은 주 사이의 불균형, 그동안 진행되어온 도시화로 인해 현재는 인구수가 적은 주들이 지나치게 커진 대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소수의 지배를 떠받치는 중요한 요소로는 선거인단 제도를 꼽을 수 있다. 선거인단 제도의 '승자 독식 시스템'과 '작은 주 편향'으로 인해, 2016년 선거에서 미국의 민주당은 보통선거에서 더 많은 수를 득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인단 투표에서 패배함으로써 공화당에게 승리를 빼앗겼다. 패자가 이긴 것이다(254쪽). 소수 지배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요소로는 '상원 제도'를 들 수 있다. 민주당은 1996~2002년 전국 보통선거에서 과반의 표를 얻었지만, 인구수가 적은 주, 시골의 작은 주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공화당의 상원 장악을 제지하지 못했다. 이는 미국의 상원이 미국 인구 다수를 대표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소수의 지지를 받은 정당이 다수의 의석을 차지하는 비합리적인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통선거에서 더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받았던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들이 다수 여론과는 반대되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소수의 사람들이 다수의 사람들의 정치적, 사회적 활동을 지배하는 상태가 강화되었다.

이처럼 소수에 의한 다수 지배가 가능했던 것은 건국과 이후의 재건 시대 동안 '다수결주의와 반다수결주의'의 대립 상황에서 소수의 권리가 지나치게 확대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어디까지나 숫자의 게임(248쪽)이다. 다수의 지지를 얻은 쪽이 더 많은 정치권력을 획득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이 가능하다. 건국 당시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더 민주적인 헌법 체계를 갖췄던 미국의 헌법에서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민주주의와는 커다란 차이점을 보인다. 그 핵심은 '3/5 타협안'과 '상원 시스템'이다. 즉, 노예제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남부 주들의 의회 의석이 확대되고, 모든 주가 정치 시스템 안에서 평등한 대표권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 국민들의 지지와 투표권 행사가 정치 현장에 투명하게 반영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많은 수의 미국 건국자들은 주들 간 평등한 대표라는 개념의 모순을 인지하고 있었다. 주를 구성하는 제일 중요한 요소가 '영토가 아니라 인간'이라 주장했던 해밀턴은 모든 주에게 평등한 대표권을 부여하는 방식이 '다수에 의한 지배'를 무력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1세기 현재에도, 세계 최강국 미국에서 그의 염려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어떤 현실이 우리의 현재인가. 국민의 손으로 선출되어 임기가 보장된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내란 또는 외환의 경우 합법적인 절차인 국회의 탄핵소추,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을 통해 탄핵이 가능하다. 2024년 12월 3일. 불법적인 계엄령 선포, 군대와 경찰을 동원한 국회 봉쇄와 야권 주요 인사 및 언론인들에 대한 암살 및 살해를 지시했던 대통령과 일부 국무의원의 행태에 대해 여당은 '줄탄핵에 대한 경고성 계엄'일뿐이라며 애써 그들을 비호했다.

꺼질 듯한 민주주의의 불꽃을 다시 살려낸 건 시민들이었다. 잠옷에 패딩, 슬리퍼를 신고 집을 뛰쳐나가 계엄군과 몸싸움을 벌였던 사람들. 패딩에 방석, 얇은 은박지를 덮어쓰고 '내란 종식'을 외쳤던 사람들. 멀리 살고 있어 집회 현장에 가지 못해 미안하다며 김밥을, 커피를, 국밥을 선결제한 사람들. 아이돌 콘서트장에서 흔들던 형형색의 응원봉을 흔들며, '다시 만날 세계'를 부르던 사람들. 그들이 바로 이 나라의 국민이고, 이 나라의 주인이다. 민주주의에 의한 지배, 다수에 의한 민주적 통치가 시민들의 연대를 통해 가능하리라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어둠을 비추는 촛불 하나 하나가 정권 교체와 정치 세력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투표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국민 주권과 헌법 수호 정신이 광장의 구호를 넘어 우리의 현실이라 꿈꿀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 다수의 대의가, 더 많은 국민의 뜻이 선거와 투표라는 정치 참여를 통해 반영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어떻게 오는가. 거들먹거리는 정치인들의 알맹이 없는 합의와 법조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한가한 말장난, 자신의 이익에만 함몰되어 있는 사회 지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에게서 오직 않는다. 민주주의는 사람에게서 온다. 연대하는 시민들의 응집된 힘을 통해서 온다. 국민, 오직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통해서만 온다. 추운 겨울의 매선 바람을 밀어내는 새봄의 따뜻한 햇살처럼 온다. 환하게 온다. 어김없이 온다. 그렇게 온다, 우리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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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6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06 1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수하 2025-05-19 1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축하드립니다!!

단발머리 2025-05-19 21:39   좋아요 0 | URL
크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좀 부끄럽군요. 축하 인사 감사해요, 건수하님! 🥰

2025-05-20 2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20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20 2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20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5-05-20 08: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라면 대놓고 자랑했을텐데 겸손한 단발머리 님.. ♡.♡

단발머리 2025-05-20 08:5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그건 아니지만.. 사실, 저 아직 엄마한테도 말 안 했음요 ㅋㅋㅋㅋㅋ대신 일기장에 썼어요. 프로 2등러의 삶이란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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