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나다' 시리즈가 한참 유행했을 때가 있었다.
내가 먹는 것이 나다.
내가 사는 것이 나다.
내가 읽는 것이 나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곧, 나다.
문제의 핵심은 '어디까지가 나인가'에 있다. 어디까지 나인가. 나의 몸이 나인가. 나의 생각이 나인가. 나의 생각과 감정과 판단을 육체로서의 '나', 나의 몸과 구별할 수 있는가. 나의 생각과 감정, 판단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태의 이 몸은 무엇인가. 시간과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 껍데기, 이 허울은 무엇인가. 그때, 나는 어디로 가는가. 남는 '나'는 무엇인가 혹은 누구인가.
'몸'을 가시적인 형태로 극도로 제한했던 1940년대 영국인들의 '몸'에 대한 생각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네 살까지 지극히 평범한 영국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던 토니 벨은 전쟁 통에 부모가 죽고, 고모에게 맡겨졌지만 고모의 무관심으로 방기되어 은데벨레 부족과 6년 동안 살게 된다. 빨리 달리는 법을 배우고 강에서 노는 법을 배웠던 토니는 동물처럼 그물에 잡혀 친척들에게 돌아온다. 영국인 아기에서 은데벨레 부족의 소년이 되었던 토니는 다시 영국의 사춘기 소년이 되어야 했다. 목욕, 침대, 식사까지 모든 것이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으나, 가장 곤욕스러운 일 중에 하나는 옷을 입는 일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토니는 바로 옷을 벗고 맨몸으로 생활했다. 그것이 그에게는 자연스러웠다.
그가 느끼는 부조화와 육체적 불편은 우리가 몸에 대해 정상적이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신체적 특징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작용했던 개인적 환경의 결과임을 보여준다.(72쪽)
토니에게 '몸'은 그 위에 적당한 옷을 걸어 자신이 누구인지를 나타내기 위한 매개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자연 속에서 재빠르게 적응하여 생존을 유리하게 하기 위한 원재료 그 자체였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 옷은 사회적 계급과 역할의 표시였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도 복식이 그런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고, 어찌 보면 훨씬 더 정교하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에는 복식의 역할이 훨씬 더 직접적이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옷을 보고 상대방의 계급을 예상했는데,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계급에 맞춰 옷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때, 특정한 옷을 걸치는 '몸'은 신분과 계급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식이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보여지는 몸 자체에 대한 사회적 압박이 강화되었다. 비싼 장신구와 모자, 겹겹의 속옷으로 옷 속 깊숙이 감추어졌던 몸은 이제 가벼운 운동화, 운동복, 일상복과 일체를 이루었다.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의 의상도 무언가를 가리기보다는 드러내기 위한 옷들이 다수를 이루게 되었다.
문제는 획일화에 있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반복되고 재생산되는 이미지는 완벽하다고 여겨지는 남성과 여성의 몸을 상정하고 그러한 몸의 아름다움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글로벌화의 영향으로 완벽한 신체는 단 하나의 표준만을 지향하는데, 이는 곧 백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신체를 의미한다. 특히 여성의 신체에 대한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왜곡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더 강한 힘으로 초등학생들을, 20대 여성들을, 중년 여성들을, 노년의 여성들을 압박하고 있다. 그래서 탈코르셋은 실천 자체가 혁명이다.
일상의 영역이라 여겨지는 꾸밈의 중지가 사회운동이 되는 까닭이다. 내가 꾸밈을 중지한 이후에 비로소 사회가 여성 개인에게 부여한 기본값을 인식하고 그것의 재조정을 개인적으로 경험했듯,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의 얼굴에 부여된 기본값의 사회적 재조정을 꾀한다. (<탈코르셋>, 43쪽)
다만, 여기에 한 가지를 보태고 싶다. 꾸밈 중지는 중요한 선택이고, 사회운동의 하나로 이해되고 마땅히 실천되어야 하지만,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선택을 실천으로 옮기는 과정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나는 19년을 전업주부로 살았다. 3년 전, 전에 내가 일하지 않았던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3년 전, 내 고용 여부를 결정한 사람은 나보다 5살이 어렸다. 2년 전 내 고용 여부를 결정한 사람은 나보다 3살이 어렸고, 올해 내 고용 여부를 결정한 사람은 나보다 10살 정도 어려 보였다. 그러니깐, 19년을 사회 활동을 전혀 하지 않은 채, '말 그대로' 편한 밥 먹고살았던 나는, 새로운 조직에 '뽑힐 만한'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경력 사항에 적을 것이 없어 2004년에 퇴사한 회사의 상호명과 내가 일했던 부서명을 적었다.
나는, 나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직무 연결성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퇴사했던 게 19년 전이니 그 서류는 나를 보여주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했다. 내가 지원한 업종에서는 사교성과 친화력이 중요하다. 하지만, 면접 상황에서 자신이 그러하다고 어필하지 않는 지원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고용될 만큼, 선택을 받을 만큼의 특정 요소가 내게는 필요했다. 서류로 보여질 수 없는 것, 경력조차 일천한 상황에서 나는, 내 몸을 넘어선 나 자신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며칠 새에 예뻐질 수는 없는 노릇이고(아시는 분 계시면, 좀 알려주시고요~) 며칠 만에 호감형의 인물이 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고용되기 위해서, 뽑히기 위해서,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책읽기 시간에 내가 고른 책은 마침 이 주제와 딱 맞는다. 자신의 몸에 대한 소중함을 깨우치려는 교훈적 목적이 눈에 띄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이 페이지가 좋았다. 이 페이지를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정하고, 아이들에게 보여주면서 찬찬히 소리 내어 읽었다.
슬플 때 나는 예전에 읽었던 재미있는 책을 다시 꺼내듭니다.

세상에, 얘들아. 선생님도 이렇게 하거든. 슬플 때, 우울할 때, 책을 읽거든. 좋아하는 책을 혼자 읽거든. 이걸, 이 사람도 알고 있네. 신기하다, 진짜. 이게 나를 바로 알고 있다는 뜻이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아는 것, 내가 슬플 때 그 슬픔을 이길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 말이야.
그게 바로 나를 제대로 알고 있다는 뜻이야.
리쫄라띠와 갈레제의 발견에 따르면, 뇌의 관점에서는 관찰과 행동이 거의 같은 일이다. 뇌는 타고난 이입과 모방 능력을 갖고 있다. 뇌는 눈으로 본 것을 동일한 행동으로해석한다. 그럼으로써 아직 완전히 익히지 못한 활동을 서서히 흡수하고,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준비해나간다. - P79
사람은 남들에게 비치는 제 몸과 마음을 보면서 자신이 정신적·육체적으로 누구인지를 배워간다. - P82
그들의 연구가 다양한 방식으로 암시한 내용을 이어받아, 과학자들은 지난 20여년간 신체접촉을 점점 더 중요시하게 되었다. 신체접촉은 이제 인간의 심리적 안녕에 핵심적인 요소로 인정된다. 신체접촉은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경험이다. - P87
사람이 신체적 감각을 발달시키는 데는 어릴 때 경험한 신체접촉과 그 어머니가(혹은 다른 보호자가) 스스로 품었던 육체적 자의식이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몸은 DNA의 청사진이 충실히 이행된 결과 이상의 무엇이다. - P89
환자들과 상담하다보면, 들고양이 감각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 느낌이 내 몸에 깃들 때가 있다. 나는 그 느낌에 꽤 익숙하다. 그것은 상담중인 환자가 스스로는 쉽게 느끼지 못하는 모종의 육체적 상태를 무의식중에 내게 전달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모든 심리치료사들은 환자의 느낌을 읽어내는 능력을 활용한다. 그것은 환자의 경험 중에서 반드시 다뤄야 할 부분을 지목해주는 단서나 마찬가지인데, 치료사가 아닌 사람이 보기에는 기이할지도 모르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뿐이다. - P107
이와 같이 우리 몸이 다뤄지는 방식에 대한 수많은 변수들이 양육의 물리적 환경으로서 우리 몸을 형성한다. 사전에 주어진 몸이란 없다. 그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모든 몸에는 그 가족의 몸 이야기가 남긴 은밀한 각인이 찍혀 있다. - P119
성형수술을 갈망하는사람들은 그저 허영기가 있는 것뿐일까? 그것은 너무 안일한 답이다. 나는 이처럼 다양한 몸의 표현방식들을 차라리 결여된 몸들의 위기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몸에 대한 욕망과 갈망을 보여주는 증거다. 감각들이 제멋대로 흐트러져서 반드시 관리해야만 하는 몸이 아니라 느낄 수 있는 몸, 만질 수 있고 만져지는 몸, 안정된 몸을 원한다는 증거다. - P145
이처럼 섹슈얼리티에 대한 시각적 대상화, 그리고 섹스를 개인적 자산이나 소모품처럼 여기는 현상은 몸을 어마어마한 무게로 짓누르고 있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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