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라도 전주 - 전주의 멋과 맛과 책을 찾아 걷다 언제라도 여행 시리즈 1
권진희 지음 / 푸른향기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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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누가 책을 보고 여행 계획을 짜나요. 핸드폰 하나로 해결하지. 물론 나도 종종 그런다. 하지만 정보만을 얻을 때가 아니라 감성까지 챙길 때는 책만이 주는 고요하고 느릿한 매력이 있다. 언젠가 여행을 가면서 개인적으로라도 기록을 해볼까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계획과 동선, 비용을 기록하고, 사진 찍고, 소소한 경험과 감상을 잊어버리기 전에 적어두고, 심지어 그것을 보기 좋게 정리하는 과정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그때 여행책을 가볍게 여겼던 것을 크게 반성했다. 이런 꼼꼼한 사람들이 날 길 위로 이끌어 낯선 곳에서 잠들게 할 수 있었구나 깨달았다.  

 기억하기로 전주를 서너번, 확실하진 않지만 대여섯번은 다녀왔으리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지역을 여행을 목적으로는 적지 않게 다녀왔다고 생각한다. 나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방문을 제외하고 전주를 다녀온 가장 첫 기억은 '내일로'라는 기차 여행 상품을 이용한 방문이다. 어설프고 시간은 없는 여행자가 그렇듯, 전주에 도착하자마자 육회비빔밥을 비비고, 초코파이를 몇 개 사먹고, 전동성당과 한옥마을에서 인증 사진을 찍고, 밤에는 막걸리골목에 갔다가 다음날 해장으로 콩나물국밥을 먹었다. 오래 전 기억인데도 뭘 먹었나 떠올려보니 선명히 기억나는 동선이다. 기억을 떠올려보니 더욱더 반드시 '언제라도 전주'를 읽어야되는 사람이 나구나 싶어졌다. 

 책을 읽다 마주치는 풍경들에 놀란다. 전주가 이런 곳이었나? 분명히 몇 해 전에도 갑자기 콩나물국밥이 먹고 싶다고 전주에 가서 콩나물국밥 박물관까지 관람하고 돌아왔는데, 건지산 둘레길이나 전주수목원의 풍경 앞에서 그동안 눈은 어디에 두고 입으로만 여행을 해왔나 민망해진다. '언제라도 전주'는 특히나 눈을 통한 여행을 '2부 책 여행'이라는 순서로 하나 더 강조해두고 있어 특별했다. 즉흥시를 지어주는 책방 '조림지'의 이야기를 만났을 때는 보던 책을 내려두고 언제 전주에 내려갈 일정이 비어 있을까 성급히 달력을 확인했다. [시가 돈이 된다는 걸 보여주겠다]라니 정말 멋있다. [손님이 주무시는 시간에도 육수는 끓고 있습니다]는 말처럼 좋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여행의 가장 큰 핵심은 '음식'이다. 어떤 책들은 그 내용을 미리 알게 되는 것이 싫어 굳이 목차를 읽지 않고 넘어가지만, '언제라도 전주'를 손에 넣자마자 확인한 것은 목차였다. 그리고 마침내 '3부 맛 여행'에서 원하던 내용을 확인하고 이 책의 신뢰도를 상향 조정하기로 마음 먹을 수 있었다. 그동안 입만 달고 여행다녔나 반성했다지만, 남의 결혼식장 가서도 결국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식사인 것처럼 아무래도 먹는 것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1부나 2부의 내용보다 3부의 분량이 조금 더 많았던 것이 가산점을 얻어내었다. 급한 분들은 일단 3부의 내용을 확인하고 여행을 떠나면 됩니다.   

 여행보다는 생활이 살아온 흔적이 가득한 애정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내가 이 도시를 이렇게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왔는데, 좋은점이 가득합니다.하고 자랑하듯 소개하듯 보였다. 그 마음이 전해져서 '언제라도 전주'를 믿고 전주로 떠나면 아쉬울 일은 없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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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지의 힘 꿈꾸는돌 42
이선주 지음 / 돌베개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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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나 좋아하냐?" 
유익표는 상대를 모욕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p14" 

 가만히 읽으려고 했는데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다. 쉽게 마음을 열고 웃어주지 않으려 했는데 금방 웃어버려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다. 걱정했던 익표와 여준이는 학폭이 아니었고 3년 동안 삐지고 달래던 사이가 회복됐으니 안심이었는데, 어른의 색안경도 함께 빠지는 장면이었다. 애들은 잘못이 없다. 어른이 문제였다. 하지만 익표의 잘못은 분명했다. " 애들은 유익표가 하는 말은 다 거짓으로 들었기 때문에 유익표가 나와의 사이를 인정하자 우리 둘이 아무 사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됐다. 뜻밖의 효과였다. p127" 익표야, 대체 어떤 삶을 사는거니? 

 매번 웃음이 터지는 것은 아니지만 '검지의 힘'은 정말 재밌다. 게다가 그 안에 감동도 가득하다. 이렇게 짧고 잘 읽히는 글 안에 재미와 감동, 게다가 현실적인 고민들까지 다 채워넣은 이 장르를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을까. 막상 청소년 시기에는 반드시 읽어야 할 현대문학과 고전 명작, 머리 터지는 SF, 자극적인 추리소설 같은 것을 읽느라 몰랐던 것이 아쉽다. 살짝 유치한 것 같으면서도 어설프게 요즘 유행하는 말 같은 걸 끼워넣지 않은 덤덤함도 매력이다. 정말 추천해주고 싶은데 주변 아는 청소년중에 책을 좋아하는 청소년이 드물다는 것이 안타깝다. 

 " 슬정아가 웃었다. 슬정아처럼 잘 안 웃는 애들의 장점은 한번 웃을 때마다 상대방에게 뿌듯함을 안겨 준다는 데 있다. 내가 웃겼어, 하는 뿌듯함. 성적이 오를 때보다 남을 웃길 때 더 큰 희열을 느낀다. p43" 책 읽다가 깜짝 놀랐다. 광대 역할을 하느라 전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깨닫고 보니 남들 얘기에 웃어주는 역할이 추구미였다. 이루질 못해서 그렇지. 웃기는 애는 우스운 애 되기도 쉽다는 씁쓸한 현실과 웃기는 애보다 웃어주는 애가 더 매력있게 보인다는 사실을 다 웃기고 나서 알았다. 잠깐의 뿌듯함 때문에 지은 수치의 산이 백두산은 아니어도 동네 뒷산 만큼은 된다. 남은 생은 평탄화 작업 하는데 써야지. 

 '검지의 힘'에서도 이별이 나오는데, 하지와 영인의 이야기를 읽다가 며칠 전 사거리 횡단보도 한 가운데서 우연히 친구를 만났다고 반가워 펄쩍 뛰어오르며 소리를 지르던 여고생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람은 언제 늙고 어른이 되는가 했더니 그 모습이 풋풋하고 예뻐보이면 그때 되는가보다 싶기도 했다. 요즘은 길다가 학생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면 그게 그렇게 예뻐보인다. 어두운 골목길에서는 좀 무섭고. 나에게도 그런 친구들이 있던 때가 있었다. 하교할 때 헤어져놓고 동네 길목 어딘가에서 마주치기만 해도 반가웠던 얼굴들, '야'하고 뛰어가 온몸을 내던져 서로를 안으며 반겼던 투명함. 

  그렇게 세상 영원할 줄 알았던 친구들과 어느새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지금이 책을 읽으며 차례대로 '강물처럼 흘렀다'(3. 우정은 강물처럼 흐른다). " 초등학교 3학년에 만나 고등학교 1학년까지 나의 부모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친구가 떠나간다. 나비와 함께 나의 일부도 떠나보낸 듯 공허했다. 그러나 따라갈 수는 없다. 친구는 그곳에서, 나는 여기에 남아 각자의 인생을 꾸려 갈 것이다. p123" 하지와 영인의 이별을 아름답고 성숙하게 보여주었지만, 현실에서는 아무런 준비도 예감도 없이 지나고보니 평범했던 그 날이 마지막 만남이 된 인연들이 많다. 자연스럽게 정리된 인연들이었지만 맛있는 것 사주고 좋은 말 해주고 꼭 한 번 안아줄 걸 아쉬웠다. 그저 가끔 마음으로나마 '친구의 미래에 영광이 함께 하기를, 나는 하늘의 구름처럼 온몸으로 친구를 축복(124)' 할 수 밖에. 

 청소년도서를 좋아하는데 가끔은 읽다가 지칠 때도 있다. 아주 작은 부분이 계기가 되어 잊고 있었던 과거가 떠오를 때다.  조금 기분 나쁘고 말았던 혹은 그때는 별 생각 없던 사소한 일들이 기억도 나지 않고 있다가 단 한 장면을 통해 떠오른다. 다른 책들을 읽을 때 개인적인 경험이나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청소년도서를 읽을 때 되살아나는 것들은 어쩐지 그중 가장 예리하고 연약한 부분을 찔러온다. 그때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다른 소설들이 그냥 검지라면, 청소년도서는 특별히 힘이 센 검지라서 가끔 부주의하게 '검지의 힘'을 써버렸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찔릴 것이 두려워 읽지 않기엔 너무 재밌고 매력있는 책이다. 검지의 힘을 옮길 때처럼 간절하게, 이 매력을 전달하고 싶다. "(읽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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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 붕괴
해도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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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마리의 시선이 유진의 얼굴을 향했다. 유진은 긴 이야기를 하는 편이 아니었다. 지금의 유진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마리는 알 수 있었다. 항상 유진이 먼저 다가오기를, 원해서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 마리는 기대와  함께 긴장과 두려움도 느꼈다. 무언가가 달랐다. 일상 속에서 많은 말을 주고받는 것과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많은 말을 주고받는 건 분명 다르니까. 그래도 마리는 좋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변화하면서 깊어진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경험 속에서 배운 것이었다. 158" 

 간만에 읽어보는 소설집이라 부담없이 손에 들었다가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정신을 잃었던 것은 라미(검은 절벽)였지만 우주 공간과 행성 왕복선, 다이버전스, '1G로 가속을 하는 상황에선 중력과 관성이 정확히 같은 역할을 하니까(26)' 같은 말들 속에서 기억이 끊긴 라미보다 더 상황 파악이 안되는 것은 나였다. 갑자기 책을 놔두고 영화 그래비티(2013)라도 복습하고 와야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됐다. 계속해서 읽다보니 단어들 사이에서 상황과 관계가 읽히고 그 뒤로는 재미가 느껴졌다. 그래서 감상 정리가 끝나고 나면 그래비티를 봐야겠다고 마음 먹은 중이다. 

 '진공 붕괴'가 마음에 든 이유 중 하나는 자연스럽게 만약을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주변 사람들도 지칠만큼 만약을 물어보기 좋아하는 편인데 나에게 새로운 만약을 던져준다. 만약 나라면 티나, 교수, 러브조이, 혜나 중 누구를 믿을까? 만약 나라면 유토피아에 남을 것인가 기생선으로 떠날 것인가? 누군가의 기억을 이식 받은 사람은 기억의 주인과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시간을 되돌린다면 이전의 나와 되돌아간 나는 같은 사람일까? 그 밖에도 읽는 이의 눈에 들어올 수 많은 만약들이 있다. 어떤 만약은 우리의 상상일 뿐일 것 같고 어떤 만약은 꽤 가까워진 것처럼 보인다. 과학의 틀을 가져왔지만 만약들에는 인간이 있다. 

 평소 선택하는 주제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읽다보니 재밌게 봤던 영화들이 떠올랐다. 콘택트(1997), 컨택트(2017)같은 작품도 좋아했고, 인터스텔라(2014)도 재밌게 봤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7)나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꽤 유명한 어바웃 타임(2013), 최근 개봉한 첫번째 키스(2025), 죽음이 반복된다는 점이 닮은 엣지 오브 투모로우(2014), 책에서도 작품들의 모티브로 나오는 사랑의 블랙홀(1993)도 빼놓을 순 없다. 다 좋아하는 내용들이었다.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말할 것이 없겠지만 장르에 낯선 독자라도 저런 영화들을 흥미롭게 봤다면 익숙한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진공 붕괴'를 소개하자니 묘하고 안타깝다. 재밌다. 재미있기는 한데 세세한 설명이 나오는 부분은 흐린 눈을 하고 읽어나가서 어떻게 재밌는지 알려줄 수가 없어서 안타깝다. 실험이나 복잡한 배경지식, 우주를 배경으로 한 장면들을 상상하는데 한계가 있어 넷0릭스에서 기0한 이야기 같은 것처럼 시리즈로 만들어주면 안되나? 읽는 것보다 보는 게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은데,하고 바라게 된다. 실제로 영상화 계약이 진행되었다가 코로나를 지나며 무산된 작품도 있다고 하는데 언젠가 영상물로도 만나게 되면 반가울 것 같다. 나중에 00의 원작소설!로 찾아읽게되기 전에 먼저 읽어두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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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 어느 30대 캥거루족의 가족과 나 사이 길 찾기
구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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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를 볼 때 요즘 화두가 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내용일거라 생각했는데 그 안에 담긴 것은 그저 사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가끔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거지 싶기도 하고, 불분명함이 조금 아쉽기도 했다. 친구들과 마라탕 그릇을 앞에 두고 약속하는 나중이 마흔 정도인 것을 보면 이 불분명함은 서른이란 나이에서 기인한 것도 같다. 그럼에도 해소되지 않는 아쉬움이 남았다. 기대했던 바와 달라서였을까 끌어당기는 이야기의 힘이 약해서 였을까 단숨에 금방 읽었지만 한 세계에 빠져들어가지는 못했다. 

 이상하게도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아파트 쓰레기장, 재활용수거함에 관한 것이었다. 채워진 분리함을 정리해두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쌓여 넘치는 쓰레기들을 보면 살아간다는 것이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종이컵, 비닐봉투, 포장, 물티슈 같은 것들이 지금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데 나로써 살아가는 것의 가치가 내가 만들어내는 쓰레기와 플라스틱만큼의 손해보다도 못하면 어떡하지 싶다. 내가 이렇게 땅을 파는 동안 지구의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소비하고 버리며 다함께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어버렸겠다. 넓게 보면 인간도 지구에서 '독립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뉴스에서 '캥거루족'이란 단어가 점점 더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어느 나라도 우리나라처럼 다 큰 성인이 독립하지 않고 지내는 곳은 없다며 이는 부모 세대에 부담을 지우는 미성숙한 행태라 지적하고, 어떤 사람들은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미혼 자녀가 독립하는 문화가 있었느냐며 안그래도 살기 힘든 젊은 세대를 가스라이팅 해 방값 받아내려는 기성세대의 프레임 씌우기라 했다. 각자의 삶이 있으니 누구의 말이 옳다고 할 수 없는 문제인데, 개인적으로는 어느 한 쪽이 일방적인 부담을 지우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독립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는 편이다. 

 캥거루족이란 말이 자주 들리기 전에는 빈둥지증후군이란 말이 있었다. 가끔 부모님 집에 갔다가 두 분만 남은 집을 새삼스럽게 볼 때가 있다. 네 개의 방이 부족할 때가 있을만큼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던 오래된 집에 지금은 단 두 사람만이 남았다. 두 사람의 생활은 어떨까. 30대의 독립을 말하는 책에서 노년의 독립이 오히려 궁금해졌다. 아쉬움으로 남았던 분명하지 않음이 어쩌면 더 넓은 확장으로 닿았을지도 모른다. 분량도 많지 않고 보기 쉬운 만화로 그려져있으니 독립을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가볍게 읽어보기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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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희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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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와 나란히 누운 어느 날 밤, 때때로 혼자일때 떠올리는 바보같은 생각 같은 걸 두서없이 이야기하다 누가 먼저 갈지는 모르지만 먼저 죽은 사람 유품 중에 남들 모르게 처분해야할 것이 있느냔 질문이 나왔다. 외장하드는 너도 열어볼 생각하지 말고 불태워 줘. 일기장 태워, 아니 그냥 둬도 돼. 지인 중에 누구는 부르지도 마. 누구 알렸는데도 안오면 어떡할까, 계좌라도 보낼까. 하는 대화가 가장 최근의 '죽은 다음'에 대한 논의였다. 책에서 강조했듯이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앞선 실없는 대화에서 느껴지듯이 그것이 나에게 오리라고는 크게 생각치 않고 살아간다. 그래서 '죽은 다음'을 읽기로 마음 먹는 것은 약간의 고민이 필요했다. 이 내용에 흥미를 느낄 수 있을까? 혹은 겁먹지 않을 수 있을까? 소설 같은 이야기 속의 죽음이 아닌 현실 속의 죽음과 장례를 다루고 있는 내용이라는 점이 막연한 두려움을 주었다. 터부시 되는 행동을 한 것 마냥 어색히 책 표지를 바라보다 띠지에 적힌 소개글(죽음과 장례에 관한 혁신적이고 탁월한 시선이 벼려낸 사유와 기록 -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에 홀려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읽기 시작했다.

 '죽은 다음'은 장례를 치르는 과정을 훑어가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느낀 것은 건강검진 센터에서 주는 표를 따라 시력, 채혈, 내시경 같이 정해진 과정을 하나씩 통과해나가는 과정을 떠올리게 했다. 상황과 감정적인 문제를 제외하고 보면 그 둘은 내가 모르는 절차를 전문가들의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퀘스트를 깨듯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닮아 있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떠오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책을 읽고 나니 생각이 비워지고 멍해졌다. 수면내시경을 마지막으로 검진을 끝내고 난 뒤와 비슷한 느낌, 경험이 부족하고 미숙하여 알지 못했던 장례 문화와 절차를 단기간에 속성으로 단단히 채워 넣어 벼락치기로 쪽지시험을 준비한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그저 죽음과 그 이후의 정리 과정을 담은 휴먼드라마 같은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읽고보니 장례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담은 생활 정보라 해얄지, 기사를 쓰기 위해 직접 몸을 던지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모 기자의 '체헐리즘'이 떠오르는 현실감 넘치는 취재 내용을 만나게 되었다. 보내는 것과 정리하는 것, 장례의 현실과 실전을 담아 새로웠다. 

 어찌보면 의미보다 절차가 더 강조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책은 그런 뒤바뀜이 반드시 본질의 훼손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충분히 짚어준다. " 소비자가 된 사별자가 그 순간에 해야 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다. 울음과 회한 가득한 장례식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사별자가 해야 하는 일이 상품 선택과 문상객 맞이뿐이라는 것도 쉽게 수긍되진 않는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생산품(노동)에서만 소외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애에서 소외되고 있다. 나는 내 죽음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았다. p233" 장례식장에서 슬픔에 빠진 상주를 매번 판단의 순간으로 불러내고, 수많은 빈객들을 맞아야만 하는 상황들은 '우아하지 못할지도(81)' 모르지만 감정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도록 누군가를 깨우고 환기시키는 장치가 되어줄 수는 있겠다. 

 전에 여성이 상주가 되어 장례를 치르는 것의 어려움을 토로한 글을 본 적이 있다. 누군가는 이런 문제에서까지 남녀를 엮어내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자주 겪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전혀 생각지 못했던 '남성' 중심의 문화가 장례에 존재하고 있었다. 내 가족의 장례에 여성이란 이유로 책임과 결정의 권한에서 매번 밀려난다는 생생한 경험담을 읽으며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상을 치르는 와중에 낯설고 경황없이 절차를 잘 모르니 원래 이런 것인가보다 하고 넘긴 것들이 고정관념(가부장제-정상가족 규범이 지배하는 사회 p289)의 틀에서 의심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책에서도 이와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한두장 넘어갈만 하면 여성이 장례와 관련된 직종에서 일을 하며 겪는 고충과 여성이 상을 당해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겪을 어려움이 나온다. " 여자 장례지도사를 찾기도 어렵고, 여자 장례지도사가 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여자가 무슨"이라는 말부터 들었다. 가릴 것 없이 누구나 만류했다. 68", " 여성이 상주를 획득하는 과정도 경합이지만, 이후 장례식장에서 '상주의 자리'를 올곧이 지키는 것은 투쟁에 가까운 일이다. 장례식장에서 여성 상주를 맡은 이들의 경험을 분석한 오지민은 이들이 "순수한 상주"로 인정받지 못한 경험을 따라간다. 207 " 그래도 요즘은 전보다는 인식이 나아졌다, 달라지고 있다는 말이 붙지만 관례라는 형식 아래 뿌리박힌 차별과 허례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 당신의 장례는 어떠하길 바라나요? 언제가 됐든 장례인들과의 대화는 이 질문으로 맺었다. 인생의 마지막에 품는 기대와 바람, 그건 장래 희망을 묻는 일과 비슷했다. 바라는 대로 이뤄질지는 모르는 일. 돌아보면 좀 허망한 그런 희망. 타인의 '장례 희망'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따스하면서도 바스락거렸다. 277" '장례 희망'이란 말을 책을 읽으며 처음 봤지만 금방 원래 알던 표현처럼 익숙하게 이해되었다. 살면서 미래를 꿈꾸고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 미래에 반드시 포함된 죽음도 계획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장래 희망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많은 것처럼, 장례 역시 망자가 품은 희망이 산 사람들의 몫으로 매듭지어지면서 뜻대로만은 되지 않는 점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장례 희망이란 표현이 잘 들어맞는다. 책을 읽고 난 뒤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더니, 지금에 와서야 자신이 보인다. 내가 언젠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덮어두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아직도 굳이 덮어둔 것을 펼쳐보고 싶지 않은 기분이지만 '유한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인지하고 나면, 오늘이 아닌 내일을 생각하느라 하지 못한 일이 떠오른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생각하느라 지금껏 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195)'는 말처럼 어떤 죽음이 될 것인가를 통해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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