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책세상 세계문학 13
메리 셸리 지음, 정회성 옮김 / 책세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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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조주여, 
제가 간청했습니까, 진흙을 빚어 저를 인간으로 만들어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저를 끌어내달라고?
- 존 밀턴, [실낙원] p7 " 

 처음 도입부를 보고 불현듯 기시감을 느꼈다. 워낙 유명한 문구라 전에도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 이 문구를 앞에 두고 보니 전과 다르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요즘 종종 볼 수 있는 파괴적이고 굴절된 말이었다. '낳음당했다' 반출생주의라 칭해지는 기록적인 출생율 저하의 시대에 가난 혐오가 더해져 '돈이 없으면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방송에서는 성인 진행자가 어린 출연자들에게 부유하지만 화목하지 못한 가정 환경과 가난하지만 화목한 가정 환경 중 어떤 조건을 고르겠냐고 묻고 그 대답을 그대로 송출한다. 물질적 조건을 앞세우는 것에 부끄러움이 없어지고 물질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사회가 되더니, 남과 비교하여 유복하지 못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나게 했다는 이유로 '낳음당했다'는 말을 쓴다고 한다. 경제적 요인으로 시작된 '낳음당했다'는 혐오표현은 개인이 가진 신체, 정신적 문제들이 더해져 확산된다. 그리고 이 정서는 넓고 얉게 퍼져나가 사회의 복지와 구조가 기성세대나 혹은 어느 한 성별에게만 유리하게 조성되어 피해를 보는 세대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일부 집단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다시 '프랑켄슈타인'에서 마주한다.   

 '프랑켄슈타인'을 보면서 소설의 내용 그 자체에 빠져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갖은 미사여구 속에서도 점점 짙어지는 갈등과 긴장감에 몰입하기도 하고, 괴물이자 악마로 불린 빅토르의 창조물이 처한 처지에 동정이 일었다. 특히 2권의 2장에서 마침내 빅토르와 창조물이 서로 마주하여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창조자에게 버림받고 세상에 상처 입었음에도 여전히 '선의와 동정을 갈구하는(137)' 창조물의 태도에 '유창한 말솜씨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298)'던 빅토르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깊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이전에 마음이 여렸던 때라면 괴물이라 불리는 추한 외모의 창조물의 고독과 괴로움에 더 초점을 맞춰 깊이 공감하고 동정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읽어갈수록 그의 면면에서 어쩐지 지금 우리 사회의 병폐들이 보임을 외면할 수 없었다. 책을 읽고 있던 어느 주말,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그것이 알고 싶다 1442회 소년의 시간 - 사천 크리스마스 살인 미스터리 편) 보는 순간 읽는 내내 찜찜했던 요인들이 하나씩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 티비 프로그램을 통해 창조물이 처음 '보호자들(168)'이라 부르던 오두막 사람들에 대한 동경, 오랫동안 지속된 일방적인 관계 맺음과 망상, 스토킹이나 다름 없는 행위가 현실에서 좌절되었을 상황이 연상되었다. "보호자들이 떠남으로써 나와 세상을 이어주던 유일한 연결 고리는 끊어져버렸다. 주체할 수 없는 복수심과 증오심이 내 가슴에 가득 메웠다.(193)" 그리고 이 굴절된 관계 맺기에 대한 욕망과 좌절의 분노는 소설에서는 그들이 남기고 간 오두막의 파괴로 표출되고, 현실에서는 망상의 대상에 대한 보복 살해 후 자해-그러나 결코 자살로 이어지지 않는-로 드러난다. 그리고 괴물/악마는 여전히 살아서 또 다른 비논리적 권리를 욕망한다. "나는 인간의 탈을 쓴 다른 존재에게서 받으려고 헛되이 애썼다가 아무것도 받지 못한 정의를 당신에게서 얻어내기로 결심했다.(195)" 애써서 노력하면 받을 수 있는 정의로 표현되는 것, 현실의 범인은 심신미약과 어린 나이의 청년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미래 등을 이유로 감형과 사회로의 재편입을, 소설 속의 창조물이 빅토르에게 요구하고자 하는 것은 '아내' 또 다른 여성 창조물이다. 

 창조물이 빅토르에게 요구한 것이 아내라는 점은 재미있다. 처음 창조자나 낯선 이들, 보호자들과 관계 맺기를 갈구했음을 떠올려 빅토르에게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달라고 요구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더 나아가 자신을 위한 아내를 만들어달라고 한다. 심지어 그 때하는 말마저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 "세상의 어떤 남자든 가슴에 품을 아내가 있고, 심지어 짐승도 저마다 짝이 있는데 왜 나만 혼자여야 한단 말인가?"(239)" 남자에게 아내가 반드시 주어지는 필수요소가 아님도, 심지어 그 짐승들조차 수많은 수컷들은 짝을 이룰 기회를 얻지 못함도 고려하지 않는다. 그동안 만난 모든 이들에게 외면 당했음에도 자신에게 주어질 여성에게서 외면 당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채다. 처음 창조물의 요구에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이기심으로 그를 승낙했던 빅토르는 이내 이성을 차린다. 창조물이 '요구한 여성 창조물'은 '아직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았(235)'음을 깨닫는다. 그녀에게도 사고 능력이 있고, 남성 창조물과 빅토르 사이의 계약에 책임이 없으며, 그녀가 무엇을 열망하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성에게도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여기서 현실의 결혼문제가 끌려나온다. 남성들이 사회와 여성에게 불만을 품은 지점이 맞물린다. 성비불균형과 결혼기피현상, 성별 갈등이 심화되어 결혼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현 상황에서 창조물과 비슷한 몇 가지 문제적 태도를 보인다. 여성들의 결혼에 대한 인식과 태도 변화를 맹비난하여 성별 갈등의 심화를 초래하거나, 사회에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내놓고 자신들을 구제하기 위한 도움(여성 교육, 사회 진출 제한, 조혼 장려 등의 극단적 방안을 주장하기도 한다)을 줘야 한다고 요구한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의도를 가진 정부의 대책 방안*이 공개되어 논란이 된 적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해결 방안이 될 수 없다. 여성이 환경과 조건에 떠밀리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결혼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인식은 빅토르가 여성 창조물을 남성 창조물에게 만들어주기 전 깨어난 '이성'으로, 아직 책 안에서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보다 경제적으로 낮은 처지에 있는 상대자를 찾아 '금전적 보상을 댓가'로 결혼 상대자를 구매해오게 변질된다. 하지만 빅토르의 예상대로 그들이 찾은 결혼 상대자들 중 일부는 '여자가 떠나면 어떻게 될까?(236)'는 질문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창조물은 사랑받고 선택받지 못함을 대상 뿐 아니라 사회를 향한 공격으로 표출한다. 그것도 애초에 본인이 인정을 갈구했던 대상 창조자인 빅토르가 아닌 그 주변인들을 공격함으로써 대상을 압박하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행동하도록 조종하려 한다. 사귀던 사람이 관계를 정리하려고 할 때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가족까지 해치겠다고 협박하는 범죄의 패턴과 닮아있다. 빅토르의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창조물은 계속해서 강조한다. 처음부터 나는 나쁜 존재가 아니었다, 누군가 나를 받아주고 기댈 사람만 있다면 나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나쁘게 대하는 사람들이 더 나쁘다며 자신의 악한 행동에 대한 원인을 외부로 돌리기 바쁘다. "세상에 있는 수 없이 많은 사람 중에 나를 불쌍히 여기거나 도와줄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몰인정한 사람들을 무턱대로 호의적으로 보아야 할까? 말도 안 된다! 나는 그 순간 인간이란 종족, 특히 나를 만들어내 도저히 참기 힘든 고통의 구렁텅이로 처박은 그자와의 끝없는 전쟁을 선포했다.(191)" 

 그리고 창조물과 빅토르 사이의 관계는 현대사회에서 다시금 되살아나 피해를 입고 있는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구도를 가진다. 창조물은 빅토르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너에 대한 나의 지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계속 살아 있어라. 그러면 내 권능은 완벽해질 것이다. 나를 따라와라. 나는 끝없이 펼쳐진 북극의 얼음 바다로 갈 테니까. 나는 거기에서도 아무렇지 않지만 너는 추위에 고통을 받을 것이다.(293)" 빅토르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사실, 빅토르의 목표가 자신이 되었다는 사실에 창조물이 생의 의미를 두는 것은 점차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캥거루족을 연상시킨다. 단순 거주지를 독립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장기 불황에 일자리를 얻지 못한 지난 세대가 7~80대 부모의 연금에 기대 4~50대가 될 때까지 근로소득없이 살아가는 일본의 '패러사이트 싱글' 문제*와 닮아있다. 부모가 죽고 나면 소득원이 사라져 남은 자녀의 생계 수단이 끊기게 된다는 점이 빅토르의 죽음 이후 창조물도 생의 의지를 잃고 사라져버린다는 결말 마저 닮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프랑켄슈타인'이 이런 식으로 읽히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처음 '프랑켄슈타인'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서평을 남기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전에 어린이용으로 각색된 내용으로 접했을 때는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작품이고, 나중에 어떤 내용인지 줄거리를 알았을 때도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었다. 창조물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 창조자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괴물 혹은 이것저것 이어붙여 만들어진 것을 비유적으로 지칭할때 여전히 프랑켄슈타인이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완역본으로 다 읽고 나니 그 전과는 다른 감상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재미는 물론이고 나름의 생각을 덧붙여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2017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제13차 인구포럼의 저출산대책 일부 내용이 드러나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여성의 하향선택결혼을 유도하기 위한 문화적 콘텐츠 개발이 이루어져야 함. 이는 단순한 홍보가 아닌 대중에게 무해한 음모수준으로 은밀히 진행될 필요가 있음' 

*2019년 일본 도쿄에서는 이로 인해 존속 살인이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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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 붕괴
해도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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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마리의 시선이 유진의 얼굴을 향했다. 유진은 긴 이야기를 하는 편이 아니었다. 지금의 유진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마리는 알 수 있었다. 항상 유진이 먼저 다가오기를, 원해서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 마리는 기대와  함께 긴장과 두려움도 느꼈다. 무언가가 달랐다. 일상 속에서 많은 말을 주고받는 것과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많은 말을 주고받는 건 분명 다르니까. 그래도 마리는 좋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변화하면서 깊어진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경험 속에서 배운 것이었다. 158" 

 간만에 읽어보는 소설집이라 부담없이 손에 들었다가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정신을 잃었던 것은 라미(검은 절벽)였지만 우주 공간과 행성 왕복선, 다이버전스, '1G로 가속을 하는 상황에선 중력과 관성이 정확히 같은 역할을 하니까(26)' 같은 말들 속에서 기억이 끊긴 라미보다 더 상황 파악이 안되는 것은 나였다. 갑자기 책을 놔두고 영화 그래비티(2013)라도 복습하고 와야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됐다. 계속해서 읽다보니 단어들 사이에서 상황과 관계가 읽히고 그 뒤로는 재미가 느껴졌다. 그래서 감상 정리가 끝나고 나면 그래비티를 봐야겠다고 마음 먹은 중이다. 

 '진공 붕괴'가 마음에 든 이유 중 하나는 자연스럽게 만약을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주변 사람들도 지칠만큼 만약을 물어보기 좋아하는 편인데 나에게 새로운 만약을 던져준다. 만약 나라면 티나, 교수, 러브조이, 혜나 중 누구를 믿을까? 만약 나라면 유토피아에 남을 것인가 기생선으로 떠날 것인가? 누군가의 기억을 이식 받은 사람은 기억의 주인과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시간을 되돌린다면 이전의 나와 되돌아간 나는 같은 사람일까? 그 밖에도 읽는 이의 눈에 들어올 수 많은 만약들이 있다. 어떤 만약은 우리의 상상일 뿐일 것 같고 어떤 만약은 꽤 가까워진 것처럼 보인다. 과학의 틀을 가져왔지만 만약들에는 인간이 있다. 

 평소 선택하는 주제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읽다보니 재밌게 봤던 영화들이 떠올랐다. 콘택트(1997), 컨택트(2017)같은 작품도 좋아했고, 인터스텔라(2014)도 재밌게 봤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7)나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꽤 유명한 어바웃 타임(2013), 최근 개봉한 첫번째 키스(2025), 죽음이 반복된다는 점이 닮은 엣지 오브 투모로우(2014), 책에서도 작품들의 모티브로 나오는 사랑의 블랙홀(1993)도 빼놓을 순 없다. 다 좋아하는 내용들이었다.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말할 것이 없겠지만 장르에 낯선 독자라도 저런 영화들을 흥미롭게 봤다면 익숙한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진공 붕괴'를 소개하자니 묘하고 안타깝다. 재밌다. 재미있기는 한데 세세한 설명이 나오는 부분은 흐린 눈을 하고 읽어나가서 어떻게 재밌는지 알려줄 수가 없어서 안타깝다. 실험이나 복잡한 배경지식, 우주를 배경으로 한 장면들을 상상하는데 한계가 있어 넷0릭스에서 기0한 이야기 같은 것처럼 시리즈로 만들어주면 안되나? 읽는 것보다 보는 게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은데,하고 바라게 된다. 실제로 영상화 계약이 진행되었다가 코로나를 지나며 무산된 작품도 있다고 하는데 언젠가 영상물로도 만나게 되면 반가울 것 같다. 나중에 00의 원작소설!로 찾아읽게되기 전에 먼저 읽어두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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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골동품점
범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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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밌겠다! 읽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든 생각이다. 그리고 누가 드라마나 영화로 안 만들어주려나 하는 바람이 딸려왔다. 가급적이면 드라마로. 넷플릭*가 이 책 읽어봤으면 좋겠다. 영화로는 이래저래 덜어내는 분량이 생길 것 같아 아까우니까. 옴니버스 구성이라 얼마 전에 봤던 일본 영화 '이상한 과자 가게 전천당'이 떠올랐다. 유치할 것이라 예상하고 갔다가 생각보다 몰입도 잘되고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다. '호랑골동품점'은 그보다 더 쌉싸름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 영상화 된다면 더 다양한 연령층에게 두루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다. 50만이라는 흥행을 거둔 '퇴마록'을 떠올려보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도 좋겠다. 

 생각해보니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들이 얽힌 기묘한 이야기를 엮은 것들이 좀 된다. 전천당이나 퇴마록도 얘기했지만 좀 더 비슷한 분위기로는 백귀야행(이마 이치코)이나 펫숍 오브 호러스(아키노 마츠리)같은 만화책이 떠오른다. 둘 다 재밌게 본 기억이 나는 걸 보니 처음 '호랑골동품점'을 보고 한눈에 마음에 들어했던 것이 이해된다. 이런 내용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호랑골동품점'이 조금 더 괴담 분위기라 무섭다.  

 처음 책을 꺼내든 건 밤이었는데 신나게 책을 읽다가 금방 멈추고 앞으로는 낮에만 읽기로 마음 먹었다. 재밌어서 다음장으로 넘어가는 속도가 느리지 않은데도 읽다가 멈추게 되는 바람에 읽는데 조금 오래 걸렸다. 무서웠다. 특히 '3. 1977년, 체신1호 벽괘형 공중전화기'. 그 전에도 뭐가 보이고 들리는 내용이 나와서 낮에 읽어야겠다, 했는데 이때부터는 핸드폰 전화오는 것도 신경쓰일 것 같아서 낮에 사람 많은 카페같은 곳에 가서 읽어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요즘은 다들 핸드폰 써서 공중전화 찾아보기 어렵긴하지만 길을 가다 공중전화를 보면 괜히 무서울 것 같다. 

 무섭긴한데 마냥 무섭기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자극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무게를 두었다. 그래서 읽다보면 씁쓸한 하지만 아리고 그리운 맛이 남는다. 책을 읽다가 어느날은 그리운 사람이 그리워 앓았다. 속에 묻어두었던 세 번 부르고 싶은 이름을 떠올려본다. 묻고 싶은 것은 없어도 듣고 싶은 목소리는 있어서.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눈썹 대신 머리카락에라도 흰머리가 섞여있나 한 번 훑어보고는 오래된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지, 지금이 아닌 것들은 꺼내보지 말아야지 한다. 어쩔 수 없는 부재를 그러려니 하고 살다가도 가끔은 사무친다. 그런 것들이 '호랑골동품점'에 있었다. 

 책의 맨 마지막 작가의 말에 치앙마이의 골동품점에서 언젠가 골동품점을 배경으로 글을 쓰고 싶단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낡은 것들을 보며 값이 아니라 이야기를 짐작하는 사람이 작가가 될 수 있구나 싶었다. 주변을 둘러싼 물건들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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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사랑니 TURN 4
청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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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우 찾은 이직처였지만 도망치는 곳에 낙원은 없다더니 진실로 그러했다. 인격적으로 무시당했고, 월급은 크게 줄었다. 스트레스는 서로 간에 어찌나 끈끈한지 매번 손을 잡고 단체로 찾아왔다. 누가 내 마음 좀 알아줬으면 좋겠네, 좆같은 세상. 속으로 욕만 할 뿐 꾹 참으며 사는 탓에 좆같은 세상은 매일매일 좆같기만 했다. p43 " 

 처음, 책 두 권이 있었다. '플라스틱 세대'와 '낭만 사랑니' 뭔가 반대 느낌의 두 제목을 보고 있다가 아무래도 낭만은 뭔가 나랑 안 맞을 것 같아 순서대로는 아니지만 '플라스틱 세대'부터 읽었다. 사랑니는 이미 다 발치하고 난 뒤라 없기도 했고. '플라스틱 세대'를 기대 이상으로 재밌게 읽어서 '낭만 사랑니'를 읽으려니 영 집중이 안됐다. '플라스틱 세대'는 사건이 끊임없이 벌어져서 순식간에 다음 전개로 나가게 만드는데 '낭만 사랑니'는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염라와 나한이 나오고, 치위생사의 이름이 천직이면서도 불길하게도 이시린이고. 잠깐 보려다가 다 읽어버린 '플라스틱 세대'와는 다르게 '낭만 사랑니'는 읽어보려고 앉았다가 몇 번 딴짓하게 됐다. 결국에는 이렇게 감동하게 될 줄 모르고. 이 두 책이 동시에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더라 비교하게 되었던 것이 " 이처럼 우주만물은 상호작용을 하며 인연을 쌓고, 서로를 느끼고, 공명하며, 아름다운 개성을 얻는다. p101"는 것 아닐까. 

 "못난 자들은 자기만큼 못난 자도 견딜 수 없기 마련이라 과장은 오만한 자를 보면 혐오감을 이기지 못해 구역질했고, 지금은 위기 상황이었다. p81 " 아, '낭만 사랑니'의 장점이자 단점은 시린의 직장생활이 너무 안좋은 방향으로 진짜 같다는 것이다. 책을 읽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자면 뭔가 떠오른다. 넓지도 않은 한국 땅 어딘가는 두 번 다시 근처도 가고 싶지 않은 지역이 있는데 '거지같은 전직장 구역'이다. 밥만은 맨날 갈수있는 한 가장 맛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먹어서 근처 맛집이 어디있는지 잘 꿰고 있지만 그 맛집 두 번 다신 안가도 괜찮을 그곳. 책을 읽다 문득 세상이 왜 이러냐며 성토하고 싶어지는데, 그럴때마다 심호흡을 하며 과거의 어딘가에서 밥벌이를 하다 겪은 일들을 줄줄이 펼쳐놓고 싶은 마음을 잘 갈무리한다. 시린의 일상과 주변인들이 너무 진짜 같아서 답답하고 피곤한데 공감도 됐다. 나와 다른사람 사이의 거리감이나 관계같은 것들을 생각해보며 읽었다. 서로에게 칼날같은 말을 내뱉으면서도 그 안에는 염려, 사랑, 불안, 관심, 슬픔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인물들에게서, 나는 걱정이라고 이름 붙인 것들로 도리어 남에게 생채기를 낸 일들은 없었던가 떠올렸다. 속마음이 그대로 상대에게 전해지도록 노력하는 일도 용기가 필요하다. 

 "평소에는 사방이 암흑이라 본인이 꺼진 줄도 몰랐지만 환하게 타오르는 불을 목격하는 순간이 오면 어쩔 수 없는 조바심이 들었다. '혹시 나만 꺼져 있는 걸까?'하고. 목구멍 언저리가 아릿했다. p35" 청소년소설을 읽는 걸 좋아하는데 그 안에 야무지게 공감과 갈등, 극복, 성장같은 것을 넣어놓은 점이 마음에 든다. '낭만 사랑니'는 그 못지 않은 의미들을 꾹꾹 눌러담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흔들리는 어른들을 위한 성장소설이 아닐까 싶다. 어릴땐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싶은지 고민하는데, 어른이 되고 나면 속도가 신경쓰인다. 방향은 이미 돌릴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저마다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 남들이 가는만큼은 가고 있나 뒤쳐진 건 아닐까 불안해지고 만다. 나란했던 것 같은 사람들의 등만 보이는 것 같고, 내 등을 보고 있을거라 생각되는 사람들보다는 앞서있고 싶은 시기와 교만에 익숙해지는 것을 '어른이 됐다'고 핑계삼는다. 그러지말아야지.
 
 " 그녀는 늘 일어나지 않은 일을 고민하며 살았다. 눈앞에 실체 없는 장막을 두고 사는 그녀에겐 앞으로 나아가는 일보다 제자리에 멈춰 있는 일이 편했다. 남들에게는 손끝으로 가벼이 밀어내는 문일지라도 그녀에게는 부딪칠 엄두가 나지 않는 벽이었다. 시린은 콧잔등을 간질이는 강아지풀 같은 고민 하나로도 온 세상의 파멸을 상상했으니, 매사가 무서웠다. p133 " 주인공 시린의 나약함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었다. 망했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실수가, 막힌 길이 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상황, 그 일의 과정이나 결과일뿐 나의 시간은 계속된다. 막상 상황 앞에서는 그게 전부인 것 같지만 과정 속에서는 한 순간일뿐이고 내가 나아가고자 하면 나는 망하지도 끝나지도 않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한때는 몰랐다는 걸 곱씹으며 읽었다. 

 아쉬운 것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을 소개하려면 내용이 너무 많이 드러나게 될까 피해야한다. 처음에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었던 시작을 나처럼 어렵게 여기거나 진부하거나 지루한 소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갈수록 관계와 세상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감동을 주는 좋은 책이었으니 꼭 읽어보길 바란다. 특히 수보리와 나호라의 이야기에서 감동했다. 이 둘의 갈등은 이미 결말을 어느정도 예상했음에도 사건을 풀어내는 말들이 깊이있는 울림을 준다. 언젠가부터 책 선물도 취향이 타는 조심스러운 선택지가 되었지만, 이 감동을 전하고 싶어 친구에게도 책을 선물하고 싶어졌다. "벗이여. 그대를 보고 나는 내가 되고, 그대 또한 나를 보아서 그대가 된다네. p222" 읽고나면 떠오르는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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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세대 TURN 5
김달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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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에게 갑자기 나타나는 이상 식욕! 플라스틱에 대한 탐닉으로 이성이 마비되고 목숨까지 위협받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 

 시작이 어려웠다. 읽어야 할 책들이 몇 권 있었고, 그 중에는 오랜 시간을 요할 것 같은 책도 있고 도서관 대출기한이 끝나가 금방 반납해야 할 것도 있었다. '플라스틱 세대'는 그에게는 애석하지만 나에게는 다행히도 둘 다 해당되지 않았다. 거기다 다른 책들에 비하면 읽기도 편할 것 같아 뒤로 미뤄두고 나중에 읽어볼까 싶었다. 다른 일을 하다가 하루가 거의 끝나갈 무렵, 뭔가를 제대로 시작하기엔 부담스러운 시간에 가벼운 마음으로 한두장 읽어보다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속도감있는 빠른 전환은 몰입도 빠르게 만들었다. 재밌다. 재난물을 좋아하는 취향과도 맞았다. 

 " "웃기지 않아요? 연간 몇천만 톤씩 플라스틱 쓰레기를 배출해서 환경을 망쳐왔던 인간들이 이제 그걸 다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는 게. 적어도 지구는 덜 아프겠어요." p36"
솔직히 좀 뻔하다고 생각한 면도 있다. 주로 인간이 파괴한 환경이 자연의 분노로 돌아와 그 댓가를 치른다는 메시지는 자연보호 표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안에 담긴 선한 의도를 넘어서는 특별함을 갖거나 매력을 찾기 어려운 주제다. '플라스틱 세대' 역시 특유의 공익광고스러움을 가지고 있지만 특별했다. 플라스틱을 먹는 이상식욕 증상이 나타났습니다,에서 끝나지 않고 세대로 이어지는 변화를 꾀했다. 이야기의 범위가 길어지면서 전개에 속도감을 더하고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가끔 인류의 진화는 어떻게 이루어질지 생각하곤 하는데,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하는 조건은 무엇인지를 두고 신체와 심장, 폐 같은 장기를 대신하는 것이 인공물이라면 사람과 로봇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으로 두는가, 기억을 저장하고 학습을 보조할 수 있는 칩이 이용된다면 사람과 AI의 경계는 어떻게 되는가 같은 문제를 떠올렸다. '플라스틱 세대'는 새로운 진화를 맞이하는 인류를 상상하게 한다.  

 " 재현이 온라인에 남긴 증언은 과연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MZ세대라고 불리는 1990년대생을 중심으로 퍼진 알 수 없는 플라스틱 섭취 현상은 그동안 체내에 축적된 환경호르몬이 내분비계에 영향을 미쳐 끝도 없이 플라스틱을 원하도록 세포 변형을 일으킨 결과였다. 그들의 뇌는 플라스틱을 음식으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의 몸은 자기가 원해서 받아들인 것에 의해서도 쉽게 파괴됐다. 플라스틱으로 인해 죽어가는 해양 포유류의 전철을 밟게 된 것이다. p55 " 애석하게도 MZ세대들이 그 플라스틱 세대의 첫 걸음이 되었는데, 안타까웠다.  MZ라는 명명도, 그걸 대표하는 이미지도 기성세대의 마음대로 규정지어졌는데 플라스틱 세대로도 꼽히다니. 자원을 마음껏 써온 MZ보다 더 윗세대는 이상식욕이 발현하지 않는데, 빨대도 종이로 대신하게 되었던 MZ세대들은 플라스틱 빨대를 그리워했던 만큼 플라스틱을 먹고 싶어하게 된다. 영원히 고통받는 MZ 살려. 

 재난영화에서 앞으로 닥쳐올 재난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주인공 집단이 늘 그러하듯, 이 이상식욕과 그 뒤에 숨겨진 거대한 비밀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주인공 예인 역시 고단한 길 앞에 놓여진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야만 하는 주인공의 숙명을 안고 세대의 흐름을 거슬러 나아간다. " 예인은 두렵고 무서웠다. 그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을 강하게 결박한 경찰의 팔에 얼굴을 파묻고 매달렸다. 당신도 죽을 거야...... 비로소 예인의 중얼거림을 알아들은 경찰이 힘을 풀었다. 괜찮다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예인을 달랬다. "죽는다고요, 진짜 다 죽는다고." 예인은 현실감을 되찾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아니, 그것은 뒤늦게 찾아온 현실감이었다. p108 " 누가 모든게 안전하고 검증되었다는 말 대신 모든게 망가졌고 결국 다 죽을거라는 말을 믿고 싶겠는가. 듣기 조차 싫을 현실을 폭로한 예인은 재난의 중심으로 끌려간다. " 사람, 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의 눈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먹잇감을 찾으려 필사적으로 쓰레기통을 뒤지고 차도로 뛰어들었다. 충희의 시선을 따라 이 광경을 함께 보게 된 예인이 차게 얼어붙었다. 충희는 예인에게 등을 내보이며 업히라고 했다.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p156 " 좀비를 다룬 아포칼립스 물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요처럼 책을 읽으며 플라스틱으로 인해 상실된 인간성과 치안이 무너진 도시의 모습을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인지의 순간은 부정과 함께하고, 진정한 혼란은 인식과 인정 사이에서 발생한다. 현실의 혼란에서 우리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하겠지만. 

 하루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읽기 시작한 책은 다음날의 시작이라는 넉넉함을 맞이했다. 조금만 읽어봐야지,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빠져들어 멈출 수가 없었다. 아주 잠깐 사이에 남은 책장의 두께보다 읽은 책장의 두께가 더 두꺼워진 것 같았다. 그만큼 빨리 줄어드는 책장이, 어차피 조금만 더 읽으면 되니까 그냥 마저 읽어버리라고 부추겼다. 모자란 잠은 지금이 아닌 나중의 내가 감당하면 될 일이니까. 자연과 건강을 해치는 플라스틱을 다음 세대에게 넘기는 무뢰한처럼 생각했다. 다음날을 피곤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부디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첫 장을 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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