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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ㅣ 책세상 세계문학 13
메리 셸리 지음, 정회성 옮김 / 책세상 / 2025년 4월
평점 :
" 창조주여,
제가 간청했습니까, 진흙을 빚어 저를 인간으로 만들어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저를 끌어내달라고?
- 존 밀턴, [실낙원] p7 "
처음 도입부를 보고 불현듯 기시감을 느꼈다. 워낙 유명한 문구라 전에도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 이 문구를 앞에 두고 보니 전과 다르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요즘 종종 볼 수 있는 파괴적이고 굴절된 말이었다. '낳음당했다' 반출생주의라 칭해지는 기록적인 출생율 저하의 시대에 가난 혐오가 더해져 '돈이 없으면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방송에서는 성인 진행자가 어린 출연자들에게 부유하지만 화목하지 못한 가정 환경과 가난하지만 화목한 가정 환경 중 어떤 조건을 고르겠냐고 묻고 그 대답을 그대로 송출한다. 물질적 조건을 앞세우는 것에 부끄러움이 없어지고 물질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사회가 되더니, 남과 비교하여 유복하지 못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나게 했다는 이유로 '낳음당했다'는 말을 쓴다고 한다. 경제적 요인으로 시작된 '낳음당했다'는 혐오표현은 개인이 가진 신체, 정신적 문제들이 더해져 확산된다. 그리고 이 정서는 넓고 얉게 퍼져나가 사회의 복지와 구조가 기성세대나 혹은 어느 한 성별에게만 유리하게 조성되어 피해를 보는 세대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일부 집단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다시 '프랑켄슈타인'에서 마주한다.
'프랑켄슈타인'을 보면서 소설의 내용 그 자체에 빠져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갖은 미사여구 속에서도 점점 짙어지는 갈등과 긴장감에 몰입하기도 하고, 괴물이자 악마로 불린 빅토르의 창조물이 처한 처지에 동정이 일었다. 특히 2권의 2장에서 마침내 빅토르와 창조물이 서로 마주하여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창조자에게 버림받고 세상에 상처 입었음에도 여전히 '선의와 동정을 갈구하는(137)' 창조물의 태도에 '유창한 말솜씨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298)'던 빅토르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깊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이전에 마음이 여렸던 때라면 괴물이라 불리는 추한 외모의 창조물의 고독과 괴로움에 더 초점을 맞춰 깊이 공감하고 동정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읽어갈수록 그의 면면에서 어쩐지 지금 우리 사회의 병폐들이 보임을 외면할 수 없었다. 책을 읽고 있던 어느 주말,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그것이 알고 싶다 1442회 소년의 시간 - 사천 크리스마스 살인 미스터리 편) 보는 순간 읽는 내내 찜찜했던 요인들이 하나씩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 티비 프로그램을 통해 창조물이 처음 '보호자들(168)'이라 부르던 오두막 사람들에 대한 동경, 오랫동안 지속된 일방적인 관계 맺음과 망상, 스토킹이나 다름 없는 행위가 현실에서 좌절되었을 상황이 연상되었다. "보호자들이 떠남으로써 나와 세상을 이어주던 유일한 연결 고리는 끊어져버렸다. 주체할 수 없는 복수심과 증오심이 내 가슴에 가득 메웠다.(193)" 그리고 이 굴절된 관계 맺기에 대한 욕망과 좌절의 분노는 소설에서는 그들이 남기고 간 오두막의 파괴로 표출되고, 현실에서는 망상의 대상에 대한 보복 살해 후 자해-그러나 결코 자살로 이어지지 않는-로 드러난다. 그리고 괴물/악마는 여전히 살아서 또 다른 비논리적 권리를 욕망한다. "나는 인간의 탈을 쓴 다른 존재에게서 받으려고 헛되이 애썼다가 아무것도 받지 못한 정의를 당신에게서 얻어내기로 결심했다.(195)" 애써서 노력하면 받을 수 있는 정의로 표현되는 것, 현실의 범인은 심신미약과 어린 나이의 청년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미래 등을 이유로 감형과 사회로의 재편입을, 소설 속의 창조물이 빅토르에게 요구하고자 하는 것은 '아내' 또 다른 여성 창조물이다.
창조물이 빅토르에게 요구한 것이 아내라는 점은 재미있다. 처음 창조자나 낯선 이들, 보호자들과 관계 맺기를 갈구했음을 떠올려 빅토르에게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달라고 요구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더 나아가 자신을 위한 아내를 만들어달라고 한다. 심지어 그 때하는 말마저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 "세상의 어떤 남자든 가슴에 품을 아내가 있고, 심지어 짐승도 저마다 짝이 있는데 왜 나만 혼자여야 한단 말인가?"(239)" 남자에게 아내가 반드시 주어지는 필수요소가 아님도, 심지어 그 짐승들조차 수많은 수컷들은 짝을 이룰 기회를 얻지 못함도 고려하지 않는다. 그동안 만난 모든 이들에게 외면 당했음에도 자신에게 주어질 여성에게서 외면 당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채다. 처음 창조물의 요구에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이기심으로 그를 승낙했던 빅토르는 이내 이성을 차린다. 창조물이 '요구한 여성 창조물'은 '아직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았(235)'음을 깨닫는다. 그녀에게도 사고 능력이 있고, 남성 창조물과 빅토르 사이의 계약에 책임이 없으며, 그녀가 무엇을 열망하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성에게도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여기서 현실의 결혼문제가 끌려나온다. 남성들이 사회와 여성에게 불만을 품은 지점이 맞물린다. 성비불균형과 결혼기피현상, 성별 갈등이 심화되어 결혼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현 상황에서 창조물과 비슷한 몇 가지 문제적 태도를 보인다. 여성들의 결혼에 대한 인식과 태도 변화를 맹비난하여 성별 갈등의 심화를 초래하거나, 사회에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내놓고 자신들을 구제하기 위한 도움(여성 교육, 사회 진출 제한, 조혼 장려 등의 극단적 방안을 주장하기도 한다)을 줘야 한다고 요구한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의도를 가진 정부의 대책 방안*이 공개되어 논란이 된 적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해결 방안이 될 수 없다. 여성이 환경과 조건에 떠밀리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결혼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인식은 빅토르가 여성 창조물을 남성 창조물에게 만들어주기 전 깨어난 '이성'으로, 아직 책 안에서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보다 경제적으로 낮은 처지에 있는 상대자를 찾아 '금전적 보상을 댓가'로 결혼 상대자를 구매해오게 변질된다. 하지만 빅토르의 예상대로 그들이 찾은 결혼 상대자들 중 일부는 '여자가 떠나면 어떻게 될까?(236)'는 질문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창조물은 사랑받고 선택받지 못함을 대상 뿐 아니라 사회를 향한 공격으로 표출한다. 그것도 애초에 본인이 인정을 갈구했던 대상 창조자인 빅토르가 아닌 그 주변인들을 공격함으로써 대상을 압박하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행동하도록 조종하려 한다. 사귀던 사람이 관계를 정리하려고 할 때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가족까지 해치겠다고 협박하는 범죄의 패턴과 닮아있다. 빅토르의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창조물은 계속해서 강조한다. 처음부터 나는 나쁜 존재가 아니었다, 누군가 나를 받아주고 기댈 사람만 있다면 나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나쁘게 대하는 사람들이 더 나쁘다며 자신의 악한 행동에 대한 원인을 외부로 돌리기 바쁘다. "세상에 있는 수 없이 많은 사람 중에 나를 불쌍히 여기거나 도와줄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몰인정한 사람들을 무턱대로 호의적으로 보아야 할까? 말도 안 된다! 나는 그 순간 인간이란 종족, 특히 나를 만들어내 도저히 참기 힘든 고통의 구렁텅이로 처박은 그자와의 끝없는 전쟁을 선포했다.(191)"
그리고 창조물과 빅토르 사이의 관계는 현대사회에서 다시금 되살아나 피해를 입고 있는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구도를 가진다. 창조물은 빅토르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너에 대한 나의 지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계속 살아 있어라. 그러면 내 권능은 완벽해질 것이다. 나를 따라와라. 나는 끝없이 펼쳐진 북극의 얼음 바다로 갈 테니까. 나는 거기에서도 아무렇지 않지만 너는 추위에 고통을 받을 것이다.(293)" 빅토르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사실, 빅토르의 목표가 자신이 되었다는 사실에 창조물이 생의 의미를 두는 것은 점차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캥거루족을 연상시킨다. 단순 거주지를 독립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장기 불황에 일자리를 얻지 못한 지난 세대가 7~80대 부모의 연금에 기대 4~50대가 될 때까지 근로소득없이 살아가는 일본의 '패러사이트 싱글' 문제*와 닮아있다. 부모가 죽고 나면 소득원이 사라져 남은 자녀의 생계 수단이 끊기게 된다는 점이 빅토르의 죽음 이후 창조물도 생의 의지를 잃고 사라져버린다는 결말 마저 닮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프랑켄슈타인'이 이런 식으로 읽히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처음 '프랑켄슈타인'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서평을 남기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전에 어린이용으로 각색된 내용으로 접했을 때는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작품이고, 나중에 어떤 내용인지 줄거리를 알았을 때도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었다. 창조물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 창조자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괴물 혹은 이것저것 이어붙여 만들어진 것을 비유적으로 지칭할때 여전히 프랑켄슈타인이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완역본으로 다 읽고 나니 그 전과는 다른 감상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재미는 물론이고 나름의 생각을 덧붙여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2017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제13차 인구포럼의 저출산대책 일부 내용이 드러나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여성의 하향선택결혼을 유도하기 위한 문화적 콘텐츠 개발이 이루어져야 함. 이는 단순한 홍보가 아닌 대중에게 무해한 음모수준으로 은밀히 진행될 필요가 있음'
*2019년 일본 도쿄에서는 이로 인해 존속 살인이 일어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