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한강 작가님의 작품. 너무 인상적인 단편이었다.






난처한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 벤치에 않아 깜박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 P13

이게 흑시 마지막인가.
그녀는 문득 의문했고, 살아오는 동안 두어 차례 같은 의문을 가졌던 순간들을 기억했다. 그때마다 짐작이 비껴가곤 했는데, 기어이 오늘인가. - P17

시작이 언제였는지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마치 몇 달 만에 굴 밖으로 나온 초식 짐승처럼 그녀를 항해 천천히 걸어오는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인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불쑥 그가 그녀의 짐을 받아 들었을 때인지, 시간을 거슬러 그녀가 그의 그릇에 국수를 덜어주었던 저녁부터인지 분명치 않았다. 어느 쪽이든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전까지 없었던 무엇인가가 두 사람의 사이에 생겨난 이유를. 보이지 않는 길고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그들을 연결하는 실체로서 존재하게 되고, 그 실의 진동이 출발하고 도착하는 투명한 접지가 몸 어딘가에 더듬이처럼 생겨난 까닭을. - P30

처음부터 그는 그녀가 앞날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해결책도, 해결 의지도 없는 가난에 수인처럼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그에게 조언하거나 의지처가 될 처지도 아니었다. 함께할 어떤 미래의 기약도 없이, 일 년이 채 되지 않는 지난 시간 동안 그녀는 다만 그 실의 감각만을 매 순간 실체로서 느꼈다. 밤에도 낮에도, 함께 있거나 떨어져 있거나, 그 실은 변함없이 진동하며 두 사람 사이에 고요히 걸쳐져 있었다. 그것의 존재감이 너무나 분명해서, 때로는 그가 있는 서울과 그녀가 옮겨 간 신도시 사이의 분명한 물리적 거리가 마치 부채처럼 접혔다가 활짝 펼쳐지는, 반쯤 생명을 가진 유동하는 덩어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P31

고통이 없다면 두려움도 없지. - P53

더 이상 기회가 없을 수 있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순간에 하고 싶어 하는 말, 모든 군더더기를 덜어낸 뒤 남는 한마디 말을 그녀는 했다. 날카로운 것에 움뚝 찔린 것 같은 말투로 아이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나도 사랑해. - P53

나직이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가 얼굴을 돌려 그녀를 멍하게 마주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사람의 입술이 만났다. 그가 차가움을 견디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입술과 혀가 녹는 것을 견뎠다. 그것이 서로를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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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 다섯 번의 화요일
릴리 킹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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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50 남녀간의 사랑만이 사랑은 아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 동성애, 불륜, 동경 등 범위는 무한하다. 사랑에 관한 10개의 개성 넘치는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표제작 등 일부 작품은 괜찮았지만, 후반부에 위치한 단편들은 많이 아쉬웠다. 뒤표지에 실린 언론사의 찬사는 좀 과장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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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5-05-23 16: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궁금한 소설인데. 새파랑 님의 3별, 잠자냥 님의 4별. 제 별은 몇 개가 될지...

새파랑 2025-05-23 23:55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도 별4 아니실까요? ㅋ 작년에 나온 앤드류포터 단편집과 비교해보면 전 앤드류포터가 제 취향이더라구요~@@
 
육체의 악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1
레이몽 라디게 지음, 원윤수 옮김 / 민음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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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49 육체의 악마, 육체적 끌림은 오래갈 수 없다. 육체가 멀어진다면 그 사랑도 끝나버릴 테니까, 그리고 육체는 충분히 대체 가능하니까. 전쟁때문에 징집된 남편의 공백을 비집고 들어간 사춘기 소년의 비도덕적인 체험기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의 모호함을 다시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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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05-21 0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징집된 남편의 공백을 비집고 들어간 사춘기 소년이라...지금 읽고 있는 존 밴빌의 <오래된 빛>과 설정이 살짝 겹치는 것도 같네요~~열 다섯 소년이 스무살 차이 나는 미시즈 그레이(친구의 엄마)와 벌이는 육체적, 정신적...비슷한 설정으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게 소설의 매력이랄까요~

새파랑 2025-05-21 07:49   좋아요 0 | URL
이 작품은 몇살 차이 안났던거 같아요. 한 다섯살? ㅋ <오래된 빛>도 궁금하네요~!! 이책은 내용보다는 문장들이 좋았습니다~!!
 
내가 그대를 잊으면 - 트루먼 커포티 미발표 초기 소설집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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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38 트루먼 커포티가 10대 때 쓴 단편집. 나는 10대때 뭘 했었나 반성해본다...제목과 표지가 정말좋은데 포함된 단편들도 모두 좋다. 자전적인 느낌이 많이 남. 이제 그의 장편들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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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판으로 다시 읽은 등대로. 너무 너무 좋다.

"그래, 물론이지. 내일 날이 맑으면 말이야." 램지 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종달새가 지저귈 때 일어나야 할걸." - P5

"내일 날이 맑지 않더라도." 램지 부인은 눈을 들어 윌리엄 뱅크스와 릴리 브리스코가 지나가는 것을 흘끗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일은 또 다른 날이 될 거야. 자." - P55

바로 지금, 고통스럽게도 인간관계의 불완전함, 가장 완벽한 관계에도 흠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진실에 대한 본능적 갈구 탓에 진실을 직시하려 하지만 견딜 수 없던 바로 그 순간에, 고통스럽게도 자신의 무가치함이 입증되었다고 느끼고 이런저런 거짓과 과장 탓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느끼는 순간에, 고양된 기분의 여파로 이처럼 비참하게 초조해진 바로 이 순간에, 카마이클 씨는 노란 슬리퍼를 신고 발을 질질 끌며 지나가고 있었고, 내면의 어떤 악마적 충동으로 그녀는 지나가는 그를 소리쳐 부를 수밖에 없었다. - P86

자신에게 미모의 횃불이 있음을 그녀는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어느 방에 들어서든지 그 횃불을 꼿꼿이 들고 다녔다. 결국 그녀가 횃불을 베일로 덮고 단조로운 자세를 벗어나려 해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또렷이 드러났다. 그녀는 늘 흠모를 받아 왔다. 그녀는 사랑을 받아 왔다. 애도하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방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그녀 앞에서 눈물을 흘렸고, 남자들과 여자들 모두 복잡다단한 사정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소박한 위안을 나누었다. - P89

수프를 떠 주면서 그녀는 이제 모든 것을 지나왔고, 모든 것을 통과했으며, 모든 것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저기 회오리바람이 일고 있어서, 그 안에 휘말릴 수도 있고 거기서 벗어날 수도 있는데, 자신은 벗어난 느낌이었다. - P185

영국에서 요리로 통하는 것은 (그들이 이미 동의한 대로) 혐오스럽기 그지없다. 물에 그저 양배추를 삶고, 고기가 가죽처럼 질겨질 때까지 굽고, 채소의 맛있는 껍질을 깎아 버리는 것이다. "껍질 안에 채소의 영양소와 맛이 다 들어 있는데 말입니다."라고 뱅크스 씨는 말했다. 그리고 음식 낭비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램지 부인이 대답했다. 영국인 요리사 한 명이 낭비하는 재료의 양은 프랑스의 한 가족이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였다. - P224

그날 오후에 다른 일로 이미 느꼈던 것처럼 사물에는 응집성과 영속성이 있다. 덧없이 흘러가고 사라지고 유령처럼 형체를 잃어버리는 것에 맞서 변화를 초월한 어떤 것이 루비처럼 빛을 발한다는 뜻이다.(그녀는 반사된 빛이 잔물결을 일으키는 창문을 힐끗 바라다보았다.) 그래서 오늘 밤에 다시 그녀는 이미 낮에 한 번 느꼈던 감정, 평화로움과 평안함을 느꼈다. 앞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이런 순간들로 이루어진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순간이 남을 것이다. - P234

램지 씨는 어느 어둑한 날 아침에 비틀거리며 복도를 따라 걷다가 양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가 팔을 내민 전날 밤에 램지 부인이 다소 갑작스레 죽었기에, 그의 팔은 텅 빈 채로 남고 말았다.) - P287

그해 여름 프루 램지는 출산 중에 죽었다. 정말 비극적인 일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녀보다 더 행복해야 할 사람은 없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 P297

포탄이 폭발했다. 프랑스에서 청년 이삼십 명이 포탄에 맞았고, 그중에 앤드루 램지가 끼어 있었다. 다행히도 그는 즉사했다. - P299

실로 긴 세월이 지나고, 램지 부인이 죽은 후에 돌아와서 그녀가 느끼는 것이 무엇일까?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 P324

아마도 위대한 계시가 찾아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대신에 사소한 일상의 기적이나 등불, 어둠 속에서 뜻밖에 켜진 성냥불이 있을 뿐이었다. - P361

"삶은 여기에 정지해 있다."라고 말한 램지 부인. 그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른 영역에서 릴리 자신도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듯이) 램지 부인. 이것이 계시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혼돈의 와중에 형상이 있었다. 외적인 변천과 흐름이(그녀는 지나가는 구름들과 흔들리는 이파리들을 보았다.) 영속성 안에 고정되었다. 삶은 여기에 정지해 있다고 램지 부인이 말했다. "램지 부인! 램지 부인!" 그녀는 되풀이해서 불렀다. 이 계시를 얻은 것은 부인 덕분이었다. - P361

기억하세요?’ 통발이 깐닥깐닥 움직이고, 편지지들이 날리던 날 바닷가에서의 램지 부인을 다시 떠올리며 그녀는 그의 옆을 지나면서 묻고 싶었다. 아니, 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 이전과 이후에 있었던 일은 공백으로 남았는데, 그 장면만이 살아남아 아주 멀리까지 에워싸고 환히 불을 밝혀서 극히 사소한 것까지도 뚜렷이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P382

그녀는 그림을 보았다. 어쩌면 그림이 그의 답일 것이다. ‘당신’과 ‘나’ 그리고 ‘그녀’가 지나가고 사라진다는 것, 그 무엇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 그러나 단어들이나 그림은 그렇지 않다는 것. - P401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보고 있는 것에 가슴이 벅차서, 마치 나눠 가져야 할 것이 있지만 이젤을 떠날 수 없다는 듯이 붓을 든 채 릴리는 카마이클 씨를 지나 잔디밭 끝으로 걸어갔다. 그 배는 지금 어디 있을까? 램지 씨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 P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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