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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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집어 들어 읽는 순간부터 끝까지 다 읽었을 때까지 이 책이 결코 소설이라는 것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당연히 에세이라고 생각했으나 이 책은 소설이였다. 하긴, 이제 겨우 6살 전후 정도 된 아이가 그렇게 까지 상세한 기억을 하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우리가 어릴 때에 기억하는 순간이 사람마다 약간씩 틀린데 그 이유는 자아가 생성된 후부터 기억을 하게 된단다. 그렇게 따지면 초등학교부터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내 스스로 자아를 깨닫은 것이 초등학교때부터 인 듯 하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시대 전반적으로 흐르는 시대정신이나 시간의 흐름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표출되는 것 같다. 그 부분은 결코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훗 날 알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90년대에 읽는 책들이 그 당시를 묘사하거나 20세기를 묘사할 때 느끼는 템포와 현재 출판되고 있는 책들을 읽을 때 느끼는 책의 흐름이나 정서의 템포는 확실히 틀리다.

흔히 고전이라고 불리는 제인에어와 같은 소설은 그 템포가 더더욱 느려 솔직히 읽으면서 쫓아가는데 오히려 어려움을 느낀다.





이 책에 흐르는 정서는 비록 우리나라와는 조금 틀린 서양의 정서이면서 그중에서도 미국 인디어들의 정서인기는 해도 아주 옛날에 읽었던 앵무새 죽이기와 같은 느낌이 나지만 앵무새 죽이기가 좀 더 흥미진지하다면 이 책은 잔잔하게 흐르는 냇가의 느낌이 나서 멀리서 볼 때도 좋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바닥까지 투명하게 보여 어떤 놈들이 놀고 있는지 다 보일정도라서 차마 들어가서 놀 생각은 못하고 냇가 근처에 걸턱 앉아 세상 모든 시름을 잊고 고즈넉하게 보는 듯 하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은 무척 바쁘다. 아무리 모든 것을 잊고 집에만 머무른다고 해도 TV로 인터넷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검색하거나 보고, 스스로도 잠시도 멍하게 있지 못한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내 자신이 그렇다. 단 하루라도 멍하게 있거나 TV도 인터넷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다. 그나마 몇 박 며칠로 수련회를 가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하루 하루 시간을 보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부와 차단되어 있을 뿐이지 정신없게 지내는 것은 같다. 그래서, 최근에 템플스테이와 같은 것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 굳이 그렇게까지 일부러 내 시간을 외부와 차단하여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자연스럽게 현재 느끼고 현재 바라보는 만큼 세상을 보려 하고 내 자신에 대해 아는만큼 행동하려 한다. 책에 나온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작은 나무'는 굳이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려고 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시간을 보내지도 않는다. 자신들의 삶을 자신들에게 맞게 살아가고 있을뿐이다.





도시 생활을 하고 있는 나로써는 도저히 적응 될 것 같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해가 뜨면 눈을 뜨고 하루를 보내고 어두워지면 촛불을 켜 밥을 먹고 그나마도 아끼기 위해 촛불을 끈 후 장작불 근처에 모여 담소를 나눈 후에 잠을 잔다. 이렇게만 묘사하면 도시인이 내 입자에서 볼 때 너무 따분하고 성공지향적인 눈으로 볼 때 도저히 버티지 못할 삶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삶이 당연했고 더 가지려 하는 것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될 정도로 안분지족하는 삶을 추구하고 실천한 사람들이 옛 사람들의 삶이였고 인디언들의 삶이다.





부모님들의 죽음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되었지만 '작은나무'는 이 덕분에(??) 체로키 인디어들이 과거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을 직접 온 몸으로 체험하고 할아버지 세대들과 교류를 통해 잊고 있었던 체로키 인디언들의 전통을 실천하게 된다.





의도적인 묘사인지 모르겠지만 책에서 나오는 도시인들이나 종교인들은 한결같이 자기밖에 모르고 남들을 위하는 척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모르거나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솔직히 모른다는 전제하에 타인에 대해 배려하거나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에 대한 답은 '작은 나무'의 삶과 도시인들의 삶을 들여다 보면 되지 않을까 한다.



'

작은 나무'나 도시인들이나 똑같이 하루를 소중하게 보내지만 도시인들은 무조건 오늘보다 더 발전된 것을 추구하려 한다. '작은 나무'도 똑같이 더 발전된 삶을 추구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욕심이 아닐까 한다. 자연에 수긍하고 내 몸을 맡겨 같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밟아서라도 내가 먼저 발전해야만 만족하는 점이 다른 점이라 보인다.





책의 말미에 자신들의 잣대로만 남을 제단하려 했던 정치인들 - 책에서 조금이라도 나쁜 놈들은 다 정치인이라는 보통 명사로 부른다 - 이 '작은 나무'를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신들의 관점에 의할 때 돌보지 못하다는 이유로 고아원에 맡겨졌다가 다시 할아버니, 할머니 품에 안기고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장면은 잔잔하게 내용이 전개되는 가운데서도 숭고한 감정이 들면서 고개가 떨어지게 만든다.




늘 빠르게 전개되는 책을 읽고 어떻게 하든 더 벌기위해 노력하는 삶에 익숙했던 나에게 그런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았던 과거를 추억나게 만들었다. 누구나 그런 삶을 동경한다고 하면서도 누구도 노력하지 않는다. 나 역시 책을 읽고 '그땐 그랬지'하고선 책을 덮은 후에는 다시 언제 그런 감정이나 회상에 잠겼나 싶게 다시 또 현재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슬프지도 모르지만 그게 내가 선택한 삶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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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고릴라 - 우리의 일상과 인생을 바꾸는 비밀의 실체
크리스토퍼 차브리스.대니얼 사이먼스 지음, 김명철 옮김 / 김영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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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책을 꽤 많이 읽었다. 그렇다고 정통 심리학을 공부하거나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다. 대부분 인지심리학이나 행동경제학과 관련된 분야를 읽었다. 심리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자면 프로이트나 그를 추종했다가 반기를 든 융부터 시작하는 정통 심리학을 공부하다보면 그게 또 더 거슬러 올라가 소크라테스 플라톤을 공부하고 그러다보면 외국의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닌 우리 동양의 주자학같은 것을 또 공부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거창할 생각은 없다.

 

어느 정도 내가 원하고 필요한 심리학 책은 다 읽었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새로운 책이 나오더라도 읽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했기때문에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 기존 책에서 읽은 내용이라 보여 큰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사람은 아는 사람들의 추천이나 누군가의 추천에 약해지기 마련이라 다시 마음을 바꿔 관심을 갖고 있다 도서관에 떡하니 새책이 있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대여해서 집에 갖고 온 내 자신을 발견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대여해서 보기를 정말 잘했다. 지금까지 나온 인지 심리학의 결정판이자 총집한판이라 모든 것을 집대성한 내용에 이미 알고 있는 내용에 더 자세하고 깊게 들어간 내용이 나를 사로잡았다. 여타의 책과 달리 기존의 이론이나 사람들에게 알려진 내용들을 더 깊게 파고 들어 조사한 끝에 내 놓은 자료들은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게다가 설렁하게 넘어가면서 읽을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로 구성도 탄탄하다.

 

예를 들면 기존에 농구공의 패스 숫자를 말해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패스 횟수에 집중하느라 고릴라가 나타난 것을 보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농구선수들은 그 고릴라를 보았다. 여기까지는 이미 다른 책에서 알려진 내용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에서는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데 이 농구선수들도 조건을 아주 약간만 변경하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반인들과 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영어를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뇌검사를 할 때 잘 하는 사람은 뇌에서 열량이 거의 나오지 않지만 못하는 사람은 엄청난 열량이 발생하는데 그건 평소에 얼마나 익숙하느냐의 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익숙하게 만드는 전문가와 같은 것이 중요한데 여기서 책은 다시 한번 전문가들이라도 다시 믿을 것이 못된다는 이야기를 해 준다.

 

아무리 죽었다 깨워나도 운전하면서 통화를 할 때 위험하다는 일화와 같은 내용으로 보이지 않는 고릴라로 시작한 호기심내지 인간 심리에 대한 탐구가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져서 우리에게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을 뒤집어 놓는다. 책을 읽다보면 정말로 집요하게도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조사하고 탐구하고 그 역에 대해서 다시 조사하여 자신들의 이론을 확정하려 한다는 느낌이 든다.

 

다른 책에서 알지 못했던 이야기 중에 인상적인 것은 모짜르트에 관한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모짜르트가 태교 좋다는 이야기는 산모들에게 신앙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허구라는 것을 이 책은 밝히고 있다. 모짜르트가 영재를 만든다는 이론은 불확실한 조사와 탐구를 통해 발표되었지만 거대자본과 결탁된 후에는 이미 사실이 된 과학으로 탐바꿈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열심히 광고로 나온 닌텐도를 통해 우리의 기억력이나 인지능력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도 완전히 거짓말이라는 것이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한 마디로 그 역에 대한  실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하루에 30분 걷기가 우리의 인지능력을 향상시킨다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고로, 노화를 방지하고 우리 머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유산소 운동을 매일같이 해야 한다. 유산소 운동은 못해도 몇 분 정도의 스트레칭은 하려고 하는데 스트레칭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로지 유산소 운동만 개선 효과를 보인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은 틀림없다고 믿는다. 자신이 본 것을 믿지 못한다면 어떤 것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기억의 왜곡과 잘못된 자신감이나 믿음으로 얼마든지 착각하고 오판할 수 있다고 한다. 강간을 당한 한 여인이 범인을 분명히 기억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통해 분명히 기억했고 그 범인을 보자마자 파악하여 지목하여 법정을 통해 감옥에 보냈지만 몇 년후에 그 사람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당연히 당사자는 엄청난 충격과 최책감이 시달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우리 주위에는 리더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들이 결코 우리보다 실력이 뛰어나서 리더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격적이 면이 많이 좌우된다. 어떠한 상황에서 그가 내린 선택이나 결론이 틀렸다 해도 자신있게 주변 사람들에게 최초로 말한 사람이 바로 리더가 된다는 것이다. 고로 능력과 리더는 전혀 다른 것이라 우리는 리더라는 사람들을 믿으면 안된다고 볼 수 도 있다.

 

책을 통해 얻은 결론은 이렇다. 그 어떤 것도 쉽게 믿으면 안되고 끈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면 이거 어디선가 많이 들은 내용이다. 그렇다. 철학이다. 데카르트나 칸트를 통해 익숙한 내용이다. 인간은 철학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을 이렇게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가는 것일까? 그건 내가 모르겠다.

 

인지 심리학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잘못된 것을 올바르다고 믿고 행동하는 지에 대해 알려준다. 그것도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는 믿음으로 해결한 것들을 현대인들의 새로운 믿음인 과학을 통해 알려주는데 한편으로 과학이라고 하는 믿음을 통해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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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 욕망 + 모더니즘 + 제국주의 + 몬스터 + 종교 다섯 가지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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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가진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또한, 역사는 자신이 아무리 공평하고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해도 자신의 가치관이나 역사관이나 사상등이 투영될 수 밖에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살아남은 자들의 말을 듣거나 그들의 기록을 찾아 역사를 서술해야 하니 힘없는 사람들이나 패배한 사람들의 이야기보다는 승리한 사람의 관점이 투영되는 것이 당연하다.

 

역사를 서술하는 대부분의 책들이 일대기나 연대기식으로 구성한다. 역사란 과거의 기록이다 보니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연대기 순으로 하는 것만큼 머리속에 잘 들어오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는 다른 방법으로 역사를 서술한 책들은 특정한 목적과 핵심을 근거로 역사를 바라보는 조금은 색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데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역사를 총 다섯가지의 방법으로 이야기한다.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 종교라는 특정한 주제를 갖고 그 주제에 맞게 역사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고 특별히 색다르거나 기존 역사채들과 큰 차별성이나 변별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역사란 과거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후대에 살펴보는 것이라 그 한계가 있고 사건 자체가 갖는 의미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논점이 달라 질 수는 있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첫번째 방법으로 '욕망'을 제시하는데 이 욕망은 사실 다섯 가지를 다 포함하는 주제다. 욕망이 바로 인간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라고 본다. 더 갖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망을 채운 후에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채운다. 그 욕망이 채워지면 한 국가가 아닌 다른 땅 덩어리까지 차지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의 의식까지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 생겨 그 욕망마저 채우게 되면 결국에는 신이 되는 것이다. 아직까지 이 모든 욕망을 채운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 바로 인간이 갖는 유한성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과거에는 개인의 욕망이 지극히 소박하고 그 중에 이미 선택된 인간들이 갖는 욕망으로 벌어진 사건들이 역사를 이루고 있다면 - 가진자의 논점에서 - 이제는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욕망이 끊임없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고 이 욕망들이 모여 한 단체와 국가로 번져 이 욕망들을 채워주는 사람들이 그들을 대표하게 된다.

 

책에는 욕망중에 커피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근대화로 넘어가며 커피가 기호식품이 된 것은 커피가 바로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정신상태를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과거에는 차가 지금의 커피를 대체하고 있었지만 영어로 커피는'break time'이라고 하고 차는 'tea time'이라 하여 커피는 무엇인가를 각성하는 시간이라면 차는 쉬는 시간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대표된다고 한다. 예전보다 더 도시가 발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바로 도시가 인간의 욕망을 대변하고 해결하는데 더 유리하고 욕망을 소비해 주기 때문이란다.

 

다섯가지로 대변되는 주제를 다 읽고 바라보니 욕망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귀결된다는 보인다. 욕망의 주제 이후에 모더니즘이나 제국주의등은 비슷한 주제로 개인의 욕망이 발현되어 좀 더 갖고 싶고 더 잘 살고 싶어 근대화를 이루게 되고 이것들이 모여 제국주의가 발현되었다고 보인다. 이 중에 시선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인상에 남는다. 이미 우리의 모든 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감시당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우리를 감시하고 주시하는 사람이나 단체는 없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나에 대해 감시하고 내가 몇 시에 어느 곳에 있고 어떤 것을 주로 읽고 웹 서핑 하느냐를 토대로 얼마든지 마음대로 나를 제단하거나 단절낼 수 있다. 이런 것들이 모여 지금은 정보가 권력이 된다고 하는데 이 정보라는 것이 결국에는 얼마나 더 많은 눈을 갖고 세상이 돌아가는 가를 알 수 있는 시선의 집합이다.

 

몬스터와 종교에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파시즘과 지구에서 가장 널리 퍼져있는 기도교, 유대교, 이슬람교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와의 싸움에서 패한 것은 결국에 인간의 욕망을 발산시켜줄 수 있는냐가 핵심이다. 사회주의는 일정수준까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만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무한대로 충족시켜 준다. 이런 와중에 욕망이 덜 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피해를 보거나 억압 착취를 받을 수도 있고, 이런 인간의 욕망을 공동체의 힘으로 발산시켜 한쪽으로 몰아 준 것이 바로 파시즘이다.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가 이론적으로 더 완벽해 보여도 결국에 실패한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본성을 만족시켜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망을 억제시키고 정화시켜주는 종교가 각 개인이 종교를 믿어 실천하면 좋은 쪽으로 발전하지만 각 개인이 뭉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욕망들이 모이면 그 자체로 다시 거대한 욕망으로 변해 종교가 갖고있는 의미와 이유를 망각하고 종교의 욕망으로 변해 모든 것을 집어 삼키게 된다. 이때에 개인의 욕망은 종교의 욕망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현재 가장 위험한 욕망이 바로 이 종교적인 욕망이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참사나 다툼, 분쟁들이 이 종교적인 문제로 생기고 있다. 종교적인 문제의 어려움은 바로 배타성과 불관용에 있지 않을까 한다. '나도 옳고 너도 옳다'가 아니라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로 대변되는 이 논리를 뛰어넘는 믿음이 바로 모든 불행의 근원이 되고 있다.

 

향후 세계는 인간들의 이 욕망을 어떻게 다스리냐가 새로운 원동력이 될 것이다. 각 개인이 점점 똑똑해지고 과거와 같은 욕망을 채워주는 것으로 절대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종교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지만 이 종교가 다시 문제의 발단이 되고 있으니 어떤 방법으로 해결 될 것인지가 궁금하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어떠한 해결책도 갖고 있지 않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나 단체가 나타날 수도 있고, 영원히 풀지 못하는 숙제가 될 수도 있지만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역사는 반복된다. 지금과 같이 특정한 사상이 세계를 지배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고 획일화된 적도 있고, 다양성으로 서로 신경쓰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일국 체제가 될 수는 있어도 유일 신이 지배한 적이 없으니 이 부분은 분명히 딜레마로 보인다.

 

결국에는 인간이 갖고 있는 욕망을 종교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해소해야만 해결 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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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버린 사람들
나렌드라 자다브 지음, 강수정 옮김 / 김영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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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차라리 할 수 없다는 것을 운명으로 여기고 체념하며 살아가면 마음이 편하다. 내 자신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다면 과연 어떻게 인생을 살아 갈 수 있을까?

 

내가 조선시대에 태어나 다행히도 양반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농부로 태어났다면 그나마 괜찮은 데 천민이라 여긴 신분으로 태어났다면 그저 당연하게 숙명이라 여기며 살았겠지만 최소한 인간적인 대접은 어느정도 받지 않았을까 한다. 그저, 하루 하루 살아가는데 의미를 부여하는 인생을 살게 될 지 모르지만 말이다.

 

인도라는 국가에 직접 가 본적은 없어도 카스트 제도라는 것이 있어 인도 국민들의 계층을 나눠 그 계층을 운명으로 여기고 살아간다는 것은 배운 적이 있어도 그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알 지 못했다. 그저, 조선시대와 천민과 같은 삶을 사는 정도라 어렴풋이 생각을 했지만 '신도 버린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으면 그 이상으로 인간이로되 인간으로써의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우리 눈에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인도 사람들에게는 그 사실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무엇이라 할 수 없을 지라도 인도에서 소가 신적인 존재로 추앙을 받는다고 할 지라도 가축인 소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살아간다는 사실은 경악에 가까울 정도의 현실이다.

 

불가촉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남들이 만지는 것을 만지지 못하고 상위 계층이 마시는 물을 마실 수도 없고 심지어 개에게도 먹이는 물을 더럽다는 이유만으로 마시지 못하게 한다. 마을에서 고기를 잡아 잔치를 벌이게 되어도 상위 계층이 다 가져간 후에야 비로서 그들의 차례가 와 먹을 수 있다. 과연 이것이 인간이라 불리울 수 있는 것일까?

 

심지어 이미 죽어 물 속에 둥둥 떠다니는 시체가 부패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최하층 천민이라고 밤 새워 그 시체를 봐야 하고 수거하는 가족이 없으니 물에서 꺼내오라는 관원의 말에도 상위 계층을 만지면 부정이 타기 때문에 끝까지 만지지 못하고 혹시라도 만지게 되면 몰매를 맞게 되는 현실을 살아간다면 사는게 과연 아름다울까?

 

먹을 것이 어려운 시절에 축제 비슷한 것으로 상위 계층 카스트들이 먹을 것을 줄 때도 먹을 것을 직접 주는 것이 아니라 집 앞 거리에 뿌리며 '재수 없는 내 모든 나쁜 것을 가져가라~!'라고 말을 들으면서도 그 음식을 거리에서 주워 집에 갖고 와서 먹는다면 웃으면서 먹을 게 생겼다고 좋아 할 수 있을까?

 

아주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이런 현실을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살아 왔을 때 분명히 그 누군가는 이런 현실에 울분을 토하고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을 것이지만 한 명의 생각은 현실을 바꿀 수 없지만 단 한명의 실천은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토대와 뿌리가 된다. 책에 나온 깨어있는 불가촉천민의 지도자를 통해 이런 악습이 타파되기 위해 노력하고 이를 자각한 한 아버지와 그 어머니와 그 자녀드의 이야기가 바로 이 '신도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삼 대가 골고루 카스트 제도에 도전하고 이를 타파하는 이야기로 생각했으나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 책의 저자인 아버지가 노후에 자신의 일대기를 집필한 일기장을 근거로 불가촉천민들이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와 인간으로써의 존엄성을 찾는데 할애하고 있다.

 

부모세대가 배운 것 없고 온갖 멸시를 받으면서 투쟁하여 인간으로써의 삶을 쟁취하고 그 후대는 이를 통해 교육을 받아 외국에 유학도 갔다 온 후에 크게 성공하여 불가촉천민들이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했던 종교시설을 천대받으며 강한 반대가 아닌 상위 계층의 카스트들이 직접 나와 VIP로 대접하여 종교시설에 들어가는 대목은 실로 엄청난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삼대에 와서는 아직까지 인도에서 카스트 제도가 뿌리까지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삼대째인 딸에게 '너희 아버지가 자다브라는 달리트(불가촉천민)중에 가장 성공한 사람이구나'라는 이야기를 굳이 하여 여전히 카스트제도의 타파는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에게 한 번 뿌리박힌 사상을 없애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책에서는 불가촉천민으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아야만 된다는 점을 지도와 아버지가 유념하여 어떻게 하든 교육을 시키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 교육을 통해 자녀들이 전부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걸 보면 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데 우리나라를 보더라도 알 수 있는 모습이다.

 

우리도 바보같이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속고 있거나 믿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이런 것들을 깨닫고 이겨내기 위해서 공부하고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책에 나오는 달리트(불가촉천민)들처럼 숙명으로 여기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착취를 당하거나 제대로 된 취급을 받지 못할 수 있다.

 

달리트라도 인도를 나가 외국에서 생활 할 때는 누구도 그 점을 신경쓰지 않고 생활하지만 다시 인도로 들어오면 그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한다. 그처럼 우리도 인도보다 좋은 이 땅에서 - 달리트들의 인구만 1억이 넘는다고 하니 - 어디 출신이라는 것을 따지고 여러가지 이유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잘못된 사상이 얼마나 오래도록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지 알려준다.

 

책의 제목이 '신도 버린 사람들'이지만 달리트들은 바로 그 신을 버림으로 신을 버린 사람들로 변하여 오히려 자신들을 찾게 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별 것 아닌 스스로의 속박을 하나의 단순한 체스처어로 벗어났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까지 엄청난 스트레스와 자신 스스로를 다시 바라보고 깨닫는 과정을 거쳐야만 이룰 수 있는 고통이 따랐을 것이다.

 

불가촉천민이라는 숙명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공식적으로 이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한 가족의 일대기를 통해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고 진실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점에서 꼭 읽어봐야 할 책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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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강의
랜디 포시.제프리 재슬로 지음, 심은우 옮김 / 살림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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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을 알고 있는 드라마는 중간 내용이 흥미진지해도 어딘지 재미가 들하다. 그러나, 결과를 이미 알고 있어도 결과와 상관없이 재미있는 것들도 많이 있다. '식스 센스'처럼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다"말을 들음과 동시에 영화를 보는 재미가 완전히 날라 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용을 쫓아가며 같이 웃고 울며 동화되는 드라마들도 많다.

 

'마지막 강의'같은 경우에도 워낙 유명하기도 하지만 이미 저자가 고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책이 처음 나올 때 이미 광고로도 나왔기 때문에 결론을 알고 읽는 책이지만 중요한 것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저명한 학자이자 한 명의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빠이자 자식이자 동료이자 친구이며 스승인 사람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이 인물이 과연 어떤 이야기로 삶의 마지막에 대해 이야기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그렇다고 무대 위에 올라 온 언테테이너에게 '자, 멍석을 깔아 주었으니 어디 한 번 놀아봐'라는 감정으로 책을 읽는 것은 아니고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궁금해 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게 되었다. 슬프게도 세 아이의 아빠로 아직 자녀들이 자라지도 못하고 심지어 한 명은 이제 막 말을 할 정도의 나이라 더욱 떠나고 싶지 않은 아빠로서 단순하게 학생들에게 하는 마지막 강의가 아니라 자녀들에게 평생 남을 수 있는 영원한 강의를 들어보고자 했다.

 

다 읽었을 때 느끼는 감정은 멋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이랍시고 숭고한 충고를 하거나 자신이 못다한 일에 대해 후회를 하며 남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말라는 교훈식의 이야기도 아니고 랜디 포시라는 한 개인 그 자체의 삶에 대해 최대한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무척 감동적이며 순간 순간 흔들리는 모습이 비쳐질 때는 저절로 감정이입이 되며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평소 내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 각 기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것들이 내 삶의 주인이 되면 안된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구입하여 타고 다니는 것이 이동수단의 목적을 넘는 경우가 많은데 개인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도 자전거를 철저하게 자전거로 쓰고 있어 다른 자전거보다 좀 더럽기도 하고 바람빠져 공기 넣는것 이외에는 전혀 노력을 하지 않는데 그런 관점의 이야기를 볼 때 반가웠고 나처럼 우선순위를 확실히 하는 구나라는 괜한 동료의식을 갖게 되었다.

 

저자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제자중에 스타워즈가 아직 4편 이후가 제작된다는 이야기 조차 없던 시절에 자신의 꿈이 스타워즈 4편 제작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꿈을 이야기한 제자가 실제로 그 꿈을 이뤘다는 이야기는 진정으로 꿈을 꾸고 그 꿈을 위해 노력한다면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게 된다는 아주 평범하지만 어려운 진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준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분명히 췌장암으로 인해 수술을 받았음에도 암이 전이되어 남은 삶이 몇 개월 되지 않는다는 판정을 받았음에도 일반인(??)들보다 더 밝고 유쾌하게 살고 있는 모습은 세상을 바라보는 내 자신의 태도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너무나 밝은 모습에 도대체 누군가하고 얼굴을 봤더니 바로 췌장암 선고를 받은 랜디 포시라는 것을 알고선 너무 감동받은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내 삶의 주인공은 내 자신이여만 한다는 걸 알려준다.

 

책 내용중에 자녀들과 해 볼만 내용이 있었는데 그건 내 맘에는 들지 않지만 아이들 자신이 하고 싶은 행동에 대해 서로 계약을 통해 그걸 망치면 아이 스스로 책임지고 원상복귀한다는 계약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 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도 계약했으니 참아야 하고 아이들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행동하면 되기때문에 여러가지로 아이들에게도 교훈이 되거나 책임완성이 되지 않을까 하는 힌트를 얻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내 마음에 들지는 않겠지만.

 

자세하게 나오지 않았지만 자신에 대한 추억을 갖지 하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자녀들에 대해 가장 미안하고 힘들어하지 않았을까 한다. 같은 부모로써 그런 느낌이 들었다. 될 수 있는 한 자녀들과 추억을 공유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좀 더 아이들과 추억을 공유하는 아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부모님의 자녀로써, 주변 사람들의 동료, 친구, 선후배로써 끝으로 내 반 쪽인 반려자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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