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하고 맑은 공기를 코로 깊게 들이마시며 따뜻하게 내리 쬐는 햇살에 내 등도 내어주고 향기마저 고소한 커피는 호로록 호로록 마시며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는 상상을 한다. 핸드폰 속 대기질 ‘나쁨’ 소식이 현실을 알려주는 지금.


슈테판 츠바이크에 매료되어 다시 그의 책을 두권 구매하였다. 아직 북타워에서 얌전히 나를 기다리는 책들을 보며 당분간은 ‘장바구니에 넣어만 둬야지.’하고 맘 먹었는데 어지럽혀진 마음을 비워내듯이 구매 버튼을 눌러 자발적으로 장바구니를 말끔히 시원하게 비워냈다. 다만 지름신에게 굴복 당해서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물건을 구매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더불어 나를 매료시킨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이 곧 온다는 기대감으로 가득 찬 지금. 그럼 됐다. 찡긋.


점잖은 말투로 차분하게 들려주는 말들 속에 그의 유머가 취향저격이다. 2주 전에 읽었던 <감정의 혼란> 속에서 말도 없이 홀연히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교수님을 두고 그의 제자 롤란트가 “ 병마개 위에 달린 병뚜껑처럼 그는 느닷없이 잽싸게 튕겨나간 후 다시 돌아오곤 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혼자 빵 터졌었다. 무슨 뜻으로 말하는건지는 알겠으나 내가 상상한 느긋하고 고루해 보이는 모습의 교수님이 병뚜껑처럼 뾰~옹!! 하고 냅다 사라졌다가 돌아오는 모습이 만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지길래 진중하고 심도 깊은 이야기를 담아내는 책 내용 속에서도 혼자 끅끅 거리며 웃게 만드는 매력을 느끼게 하였다. 작정하고 의도한 유머가 아닌 자연스럽게 베어나오는 그 매력.(자주 보여주는건 아니라서 더 매력 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상황들 속에서도 능수능란하게 감정들을 휘어 젓다가 우아하게 실크를 펼치는 듯한 기술적인 묘사가 주는 섬세함. 그래서 현재 상품 준비중이라는 주문 현황이 날 너무 설레이게 한다. 또 찡긋.


작년 이맘때쯤을 떠올려보니 많은 변화가 있더라.
여러 일들을 겪고 난 이후로 점점 더 염세적으로 변하여 책을 읽어도 눈길이 가고 손길이 가는 것은 분명 소설은 아니었다. 그런데 확실히 이제는 분야의 폭이 조금씩 넓어짐을 느낀다. 그건 나의 심적 변화가 있음을 뜻하는게 아닐까? 긍정적으로 와닿았다.


여러모로 뒤숭숭한 3월도 차근히 열심히 잘 살아 내야겠다. 그럼 해준 것은 하나 없어도 저절로 우리를 위해 예쁘게 피어주는 꽃들과 함께 더 화사한 4월을 안정적으로 지내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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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잊을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뒤에 남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과거를 버릴 수 없는 것인지도. - P191

"이게 바로 구절초, 우리가 흔히 들국화라고 부르는 꽃들의 진짜 이름은 구절초야. 쑥부쟁이 종류나 감국이나 산국 같은 꽃들도 사람들은 그냥 구별하지 않고 들국화라고 불러버리는데, 그건 꽃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꽃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 이름을 자꾸 불러줘야 해. 이름도 불러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냐."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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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이모와 외할머니의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아련히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것을 느끼면서 잠 속에 빠져드는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달콤했다. 어머니가 울거나 소리치지않고 오랜 시간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가 어린 안진진의 외갓집 나들이였다. - P132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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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부른 일상 이야기>

“ 엄마, 나 택배로 시킬 거 있는데 혹시 필요한 거 있어?“
” 봄동이랑 오이랑 상추랑 깻잎. 묵무침이나 해 먹을까?“
” 왜? 또 아빠가 묵무침 해달라고 했어? 묵 쑤느냐고 괜히 엄마 힘만 드는데 그냥 두지......”

나는 안다.
어차피 엄마는 마음속에서 이미 며칠 전에 냉동실에 자리차지나 하고 있는 녹말가루로 묵을 쑬 계획을 세웠다라는 걸. 그 불을 지피게 한 것은 아빠라는 것도.
(눈치가 조금 없을 뿐. 그저 본능에 충실했을 뿐.)

“ 녹말가루가 냉동실 자리차지나 하고 있어서 그냥 대충해서 먹어치우지 뭐.”
모든 엄마들의 국룰1탄처럼 묻는게 묻는게 아니다. 누군가의 의사 따위는 필요없는 그저 혼잣말을 크게 하는 것 뿐이다.

엄마가 부엌에서 분주하게 이것저것 만들어내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우리집의 쩝쩝박사 아빠는 그저 해맑게 기대와 행복으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 난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이미 벌써 얼굴이 붉그락푸르락 해진다.
(아빠는 엄마가 쉬는 걸 못 견디는 유전자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내방으로 들어오는 그릇 달그락 달그락 소리들로 내 귀가 상당히 괴롭다.)
둘다 저렇게 웃어가며 꽁냥꽁냥 맛나게 해 먹겠다는데 뭐가 그렇게 안 내켜서 나는 불만인걸까. 심보 참 고약하네.
휴...할말하않...

굉장히 안 내킨다.
우리집에 엄마들의 국룰 2탄 ‘대충해서 먹어치우기’ 가 선포되면 응답하라 1988 덕선이 엄마가 강림하시고 맛있게 딱 한번만!!먹고 깔끔하게 잘 먹었습니다!!로 끝나는 법이 없다.

나는 안다.
분명히 세숫대야만한 거대한 크기의 그릇에서 묵무침이 까꿍 하고 있을거라는 걸. (날 먹어치워줘~~~~냠)

엄마 힘들까봐 염려되서 뭔가 해볼까? 하는 액션만 나와도 일단 정지!!제어부터 들어가는 내가 대단한 효녀인줄.
이렇게 열을 내는 이유는 늘 언제나 남은 녀석들을 먹어치우는 처리자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 나도 안다.
이렇게 곁에서 엄마가 해주는 음식 맛있게 먹는 순간 조차가 엄청나게 귀하고 소중한 것이라는 걸.
우리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역시나 내 실력 죽지 않았네!! 하면서 얼마 전 나름 요리라고 말하기엔 뭐하지만 내가 만든 찌개가 생각보다 엄마가 만든 찌개보다 맛이 꽤 괜찮게 나와서(지금 생각해도 신기방기)너도 놀라고 나도 놀라 엄마를 당혹스럽게 만든 그 사건이 단순 우연의 헤프닝이 될 기회를 주는 것이라는 걸.
그리고 일상의 행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리고 어느하나 당연한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배부른 일상을 보냈다. (여러의미로)

그리고 나는 봤다.
이미 진작에 예고한 거대한 세숫대야 묵무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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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3-04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까이 살면 조금 얻어 먹고 싶은 비주얼입니다.
곰돌이님의 마음은 아는데 주책스럽게 넘 맛있어 보여요.
집에서 직접 묵을 쑤면 계속 저어야 하잖아요!
어머님, 힘드셨을 것 같아요^^
얼마전에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나 울컥했어요^^

곰돌이 2025-03-04 19:03   좋아요 1 | URL
처음 받아보는 댓글에 깜짝 놀랐어요^^ 맛있어 보인다는 말씀을 얼른 전달하였습니다.(무지 좋아하시네요.^^ 칭찬에 목마르신 쉐프님이라서요.) 페넬로페님 울컥 하신 마음에 저의 닿지 못하는 손 부끄럽지만 살포시 얹어 드려봅니다.

숲노래 2025-03-04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곰이 보면 머잖아 ‘엄마손 집밥’은 가뭇없이 사라지리라 봅니다. ‘엄마손 집밥’이 사라진 자리에 ‘아빠손 집밥’이 깃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집밥 시늉 시킴밥(배달요리)’이 차지할까요?

곰돌이 2025-03-04 19:02   좋아요 0 | URL
숲노래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아빠손 집밥은 이번 생에는 어려울 거라 확신합니다. 상상만으로도 뒤치다꺼리로 분주해지네요.^^ 솜씨는 없지만 흥미는 있어서 조금씩 실력을 연마하고 있는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런지요...🤔
 

그런데 나는? 스물다섯 해를 살도록 삶에 대해 방관하고 냉소하기를 일삼던 나는 무엇인가. 스물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무엇에 빠져 행복을 느껴본 경험이 없는 나, 삶이란 것을 놓고 진지하게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본 적도 없이 무작정 손가락 사이로 인생을 흘려보내고 있는 나, 궁핍한 생활의 아주 작은 개선만을 위해 거리에서 분주히 푼돈을 버는 것으로 빛나는 젊음을 다보내고 있는 나. - P17

마침내 마음자리에 홍수가 나버려서 이 아침 절박한 부르짖음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 P18

열 살이 넘으면서부터 내 손으로 곧잘 밥을 지어먹곤 했다. 착한 마음이 불 일듯 일어나는 날에는 된장찌개도 끓이고 나물도 무쳐서 밥상을 차려놓고 시장에서 돌아오는 어머니를 기다렸다. 그러나 열다섯 살이 넘은 후로는 그렇게 착한 마음이 생기는 날이 참 드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철이 들면 더욱 착하게 굴어야 할 텐데,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 P60

"형이랑 같이 살 때, 난 밤마다 기다렸다가 형이 벗어둔 양말을 깨끗이 빨아서 널어놓은 뒤에야 잠을 잤지. 냄새나는 형의 양말,
나 때문에 더욱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그 양말을 주물러 빨고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했어. 지금도 형 집에 가면 형수 몰래 가끔 형 양말을 빨아주고 돌아와."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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