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하루> 중에서...

시골 우리 마을의 집은 서로 멀찍멀찍 떨어져 있었고 한눈에 누구네 집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영희네 집은 영희네 집같이 생겼고 수돌이네 집은 수돌이네 집같이 생겼다. 우리 집에 오는 편지는 할아버지의 성함만으로도 우리 집을 잘만 찾아왔다. 아무리 가르쳐도 주소를 제대로 못 외는 딸은 엄마를 실망시켰고 아둔하다는 탄식을 자아냈다. 소명하다는 칭찬을 듣던 아이가 환경이 바뀌자 하루아침에 아둔한 아이로 변했다. - P21

내가 꿈속에서 찾는 건 친구네 집도 아니고 우리 집도 아니고 다만 사람 사는 동네다. 저 등성이만 넘으면 동네가 보이겠지, 혹은 인가로 통하는 찻길이나 교통편이라도. 그러나 길은 점점 더 험해지고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협곡이나 직각으로 선 단애를 만나게 된다. 차라리 단애에서 추락을 하자. 그래야 꿈을 깰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고비만 넘으면 사람 사는 세상으로 통하는 길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미련을 못 버리고 계속 허우적대다가 깬다. - P22

내가 누려온 안일이 한없이 누추하게 여겨졌다. 사람이란 고통받을 때만 의지할 힘이나 위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안일에도 위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증언의 욕구가 이십 년 동안이나 뜸을 들였다가 결실을 맺게 된 것은 아마도 최초의 욕구가 증오와 복수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증오와 복수심만으로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 우리 가족만 당한 것 같은 인명피해, 나만 만난 것 같은 인간 같지 않은 인간, 나만 겪은 것 같은 극빈의 고통이 실은 동족상잔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 P32

내 붙이의 죽음을 몇백만 명의 희생자 중의 하나, 곧 몇백만 분의 일로 만들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생명은 아무하고도 바꿔치기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우주였다는 게 보이고, 하나의 우주의 무의미한 소멸이 억울하고 통절했다. 그게 보인 게 사랑이 아니었을까. 내 집 창밖을 지나는 무수한 발소리 중에서도 내 식구가 귀가하는 발소리는 알아들을 수있는 것처럼. 몇백, 몇천 명이 똑같은 제복을 입고 운동장에 모여 있어도 그 안에서 내 자식을 가려낼 수 있는 것처럼. 내자식이 딴 애들보다 덜 똘방똘방하고 어리숙해 보일수록 사무치게 사랑스러운 것처럼. - P33

나는 오슬오슬 춥다가 오싹오싹 떨린다고 말하고 싶다. 내 몸은 지금 불화로를 얼음조각으로 포장해놓은 것 같다고 말하고 싶다. 삭신이 쑤신다고 말하고 싶다. 입맛이 소태 같다고 말하고 싶다. 죽어도 이 나라에선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아무도 통역할 수 없을 것 같은말만 생각났다. 그걸 참고 따라다니자니 하루가 여삼추였다. - P39

나의 시골집 마당은 아직도 흙바닥이지만 양회 바닥처럼 단단하다. 내 친구의 어머니 시신까지 하룻밤 사이에 동해바다로 토해낸 폭우도 우리 마당의 견고함을 범하진 못했다. 나의 입과 우리 마당은 동일하다. 다 폭력을 삼켰다. 폭력을 삼킨 몸은 목석같이 단단한 것 같지만 자주 아프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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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의 매력에 점점 더 빠지고 있다. 누군가의 스치는 감정이기보다 스포이드로 쏙 뽑아 올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그 순간에 내가 놓여 있는 듯한 문장과 마주할 때의 쾌감도 좋고, 핀 조명으로 주목한 것 뒤로 드러내지 않아 가려진 것, 그 보이지 않는 것을 헤아려보는 시간이 나에게 소소한 즐거움이 되어주기도 한다. 짧지만 잊지 못할, 그 찰나의 감정을 바로 흘려보내지 않고 조금 천천히 놓아주고 싶어진 내면의 변화 때문일지도 모른다. 잘 흘려보내고 싶다. 좋은 것은 오래도록 기억하게 어떤 식으로든 남겨두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옹글게 맺혀 있는 감정은 모난 모서리 부분을 잘 다듬어서 잘 흘려보내고 싶다.

뚱카롱을 좋아하고 뚱낭시에도 좋아하는 내가 뚱책마저 좋아하기에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로 눈길이 가 몇 권을 구매했다. 여섯 권 중 세 권은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작가지만, 먼저 읽은 분들의 평과 작품의 분위기를 가지고 결정했고, 맨 처음에 실린 글과 표제작 위주로 조금씩 읽어보았다.



<왕이 되려 한 남자 외 24편>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정글북>으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은 1865년 인도 봄베이에서 태어나 그동안 자신이 경험한 인도의 문화와 생활상 등을 관찰하여 글을 써오다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아들을 잃고 난 뒤로 내면 세계로 눈을 돌렸다고 한다. 25편의 단편 중 맨 앞에 실린 「백 가지 슬픔의 문」을 펼치자, 백인과 인도인 혼혈인 한 남성과 인도의 뒷골목 비좁은 통행로와 담배 파이프 자루 상인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편굴에 가득한 검은 연기와 아편 향에 취한 한 남성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헛소린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독한 기운을 내뿜는 통에 나마저 대나무 파이프에 연기를 빨아올린 느낌이 들면서도, 밀폐된 공간에서 홀로 맨정신으로 참담함을 목격하는 기분이 들게 했다. 아편 거래로 수익을 올리며 배를 불리고 있는 영국의 모습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충분히 그려지다 보니, 검은 연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눈알만 돌리다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이들의 모습이 이토록 허탈할 수가 없다. 아편에 중독되어 죽어 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똑같이 그 길을 걸어가는 남성은 내 시선에는 비극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것 같기만 한데, 지난 기억들이 연기와 함께 전부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평온함을 느끼고 위로를 얻고 만족해하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괴상하다고 부를 만한 것들을 보아왔다. 그러나 당신이 검은 연기를 들이마시고 있으면 그 연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괴상하지 않다. (「백 가지 슬픔의 문」, p. 16)



<오랜 죽음의 운명 외 19편> 캐서린 앤 포터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미국 남부 태생인 캐서린 앤 포터는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고, 안타깝게도 그 불행이 남편과의 결혼 생활까지 이어졌다. 정신적·육체적 폭력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녀는 이혼 후 과거로부터 자신을 떼어놓기 위해 ‘칼리 러셀’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길러 준 조모의 이름을 따라 ‘캐서린 앤 포터’로 개명한다. 소개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니,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이 느껴졌다. 작가를 꿈꿔왔다고 한다. 이 꿈을 위한 노력이 그녀에게 버티는 힘을 주고, 살아 움직이게 하며 가슴 뛰게 했을 것 같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멕시코의 어느 마을에 사는 한 여성의 발걸음에서 느껴지는 고단함과 마주하게 된다. 응달진 길에 잠시 쉬었다 가면 좋으련만, 그쪽은 선인장이 무성하기에 괜히 가시 돋친 길을 걷다가 발에 박힌 선인장 가시를 뽑으며 지체할 시간이 없다며 계속해서 조심조심 걸어 나간다. 그런 그녀의 눈앞에 남편과 한 여성의 다정한 모습이 마음을 괴롭힌다. 그럼에도 정작 그녀는 삶에 불만이 전혀 없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그런 태도가 나를 더 어쩌지 못하게 만들었고, 언제쯤에야 이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싶어 발걸음을 계속 따라가 본다. 계속해서 걸어야 하고, 살아 나가야 하는 그녀를 불안하게 흔들거리는 촛불을 보듯 바라만 봐야 했다.

“기도는 혼자 조용히 하세요, 할머니. 아니면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해 주든가요.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원하는 걸 하느님께 직접 구할 테니까.” (「마리아 콘셉시온」, p. 23)



<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 외 31편> 유도라 웰티

이 책의 서문을 위에 소개한 캐서린 앤 포터가 썼다. 그녀의 정성스러운 글 덕분에 유도라 웰티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올리비아 콜맨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외모의 웰티는,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 캐서린 앤 포터와 달리 미시시피 잭슨 출신의 풍족한 가정에서 별다른 걱정 없이 글쓰기에만 몰두하며 지냈다고 한다. 대학에서 따로 글쓰기를 공부한 적이 전혀 없고 자신이 방향과 목표를 잡고 도전하며 그 길을 닦아 나가다가 스물여섯 살에 첫 단편을 발표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니 그런 그녀의 시선에 자주 들어온 것은 아마도 주변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맨 처음에 실린 「릴리 도와 세 부인」은 지적 장애가 있는 ‘릴리’라는 한 여성을 향해 보이는 사람들의 손길이 과연 진실한 친절이자 배려이자 보호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겉으로 보기엔 점잖아 보이는 여성들이 모두 한목소리를 내며 릴리를 향해 다가가는 모습은 오히려 그녀가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것만 같아 이 강압적인 분위기가 조금 숨 막히고 불편한 감정을 만들어냈다. 어쩌면 이 불편한 감정이 틀에 박힌 생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삶에 미묘한 틈을 만들어 주는 게 아닐까 싶다. 사진작가이기도 했던 웰티가 카메라 셔터를 내리는 순간 포착한 것처럼 그녀의 눈에 들어온 수많은 것 중 글로 담고 싶은 순간은 무엇일지 나머지 31편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진다.

릴리가 웃었다. 카슨 부인의 가슴 앞에서 손을 뻗어 창문 밖의 한 남자를 가리켰다. 그는 기차에서 내려 그저 거기에 혼자 서 있었다. 모자를 쓴 그는 외지인이었다. “저거 봐요.” 릴리가 대충 입을 가린 채 낮게 웃었다. “보지마라.” 지금까지 한 얘기를 다 통틀어 엄숙한 이 단어가 모자란 릴리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게 하려는 듯이 카슨 부인이 아주 또렷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엘리스빌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보지 말거라.” (「릴리 도와 세 부인」, p. 33)

조심성이 있지만 어떤 단단함이 느껴지는 웰티의 글을 따라가 보니 역시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왠지 얌전하고 차분할 것 같은 그녀가 생각보다 꽤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표제작 「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는 특별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창문을 열어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늘 별반 다를 게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다. 가족과 한 공간에서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이 현재 몹시 피곤하게 만드는 상황까지 벌어져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인데, “되바라진 년!”이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던 여성과 가족 사이의 일상이 펼쳐진다.

“전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는 거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예요.” (「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 p.119)

그녀의 말 한마디는 공감을 자극했고, 무엇이 필요한지 충분히 알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평온을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보수적인 미국 남부 지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던 이 소설에서 내가 흥미롭게 바라본 부분은 주인공 여성이 자신의 짐을 실은 수레를 이동시키기 위해 도움을 요청한 검둥이 소녀(소설 속 표현 그대로)에게 삼촌이 5센트 동전을 ‘던져 준’ 장면이었다. 아홉 번을 왔다 갔다 해야 할 만큼 짐이 적지 않았다고 했다. 웰티는 이 장면을 흑인 차별이 극심했던 그 당시의 보편적인 분위기 그대로 찰나의 순간처럼 담았다.



<선원, 빌리 버드 외 6편> 허먼 멜빌

읽어보고 싶은 책 중 하나가 <모비딕>인데, 이렇게 맛도리 단편들을 먼저 만나게 되었다. 가문의 사업이 파산하고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학업도 중도에 포기해야 했던 허먼 멜빌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열세 살 때부터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다고 한다. 힘겨운 시절 속에서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으며 보고 느낀 것들이 그의 작품에 깊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읽기 전에는 알 수가 없으니, 일단 분량도 적고 제목부터가 왠지 재미있을 것 같은 「꼬끼오! 혹은 고귀한 수탉 베네벤타노의 노래」를 펼쳤다. 빚에 쪼들리는 한 남성(입담이 상당히 좋음)이 등장한다. 입에 모터를 달았는지 험난하고 가혹한 세상을 향해 알아듣는 사람들이나 알아듣겠지 하는 심정처럼 쉴 틈 없이 말을 쏟아낸다. 가진 게 없어 문제지, 마음만큼은 고상한 이 남성에게 세상이 도와주질 않아 비참할 따름인데… 아, 일단 재밌다. ㅋㅋㅋ (모비딕은 급행으로 장바구니로!) 이따금 부담을 낮춰주는 듯한 안녕! 흥!처럼 가벼운 표현으로 거리감을 좁혀주기까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쓴웃음을 주는 입담 뒤로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며 세월을 보내다가 삶의 불행에 초연해지는 인간의 마음에 가득 찬 음울함이 무겁게 내리누른다. 자본주의의 비극과 불행 속에서 그가 본 것,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나는 드넓게 굽이치는 평원, 산들, 마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농가들, 큰 숲과 작은 숲, 시내, 바위, 초원을 둘러보면서 생각했다. 결국 이 거대한 대지에 인간이 만들어 내는 자취들이란 얼마나 하찮은가. 그러나 대지는 인간에게 자취를 남긴다. (p. 71)

저 아래 평원에서 배고픈 주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목숨을 빼앗길 운명에 처해 있는 하잘것없는 수탉 한 마리가 아무 뜻 없이 뉴올리언스에서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기리는 계관시인처럼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 나는 언덕 위에서 부루퉁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p. 75)

썩은 가로장 울타리를 녹슨 못들로 오래 지탱시키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60년의 겨울과 여름에 걸쳐서 얼었다가 달궈지는 과정을 거듭해 온 막대기들에 무슨 수로 사라져 버린 나뭇진을 다시 주입시킬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썩어 빠진 가로장 울타리를 썩어 빠진 가로장들로 수리하려는 한심한 시도이며, 많은 농부들이 그런 작업을 하다가 결국은 요양원에 들어가고 만다. (p. 85)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 외 40편> 랭스턴 휴스

‘할렘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 랭스턴 휴스의 소개 글을 통해 그는 흑인 고유의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접했던 흑인문학과는 또 다른 면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이들의 표현 수단이었던 연주가 내 감성을 자극했고, 그런 의미로 제목부터 끌리는 표제작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를 가장 먼저 펼쳤다. 예술가들을 후원해 주는 백인 ‘웰즈워스’ 여사와 그녀가 후원하는 흑인 소녀 ‘오시올라’에 관한 이야기다. 가난했지만 학교에서 독일 선생님께 피아노 레슨을 배웠기에 기초를 다질 수 있었던 오시올라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교회에서 성가대 반주를 하며 돈을 모아 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 웰즈워스 여사는 오시올라의 뛰어난 실력을 소문으로 듣고 오로지 예술성에 대한 확신으로 후견인이 되어주기로 한다. 그런데 예술에는 품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녀의 가치관에 이 소녀를 끼워 맞추려고만 한다. 이 작품은 흑인의 고통과 저항을 드러내기보다는 오시올라가 자기만의 삶의 리듬을 따르는 모습에 마음을 무척 개운하게 해주었고, 그녀가 연주하는 흑인 블루스와 경쾌한 재즈는 당당함과 얽매임이 없으며 통제받지 않는 앞으로의 삶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오르게 했다.

그녀가 블루스를 연주할 때 저음은 작은북들의 소리처럼, 고음은 작은 플루트들처럼 소리를 냈다. 땅속 깊은 곳과 까마득하게 높은 하늘의 두 음들의 경계 안에서 그녀의 음악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했다. 클럽의 손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블루스 음악에 맞춰 춤을 출 때면 브릭톱은 “헤이! 헤이!” 하고 추임새를 넣곤 했다. 오시올라는 크릴용 살롱에서 그녀의 음악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연미복을 빼입은 청중들 앞에서 쇼팽의 에튀드를 연주할 때만큼이나 행복했다.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 p. 102)



<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 윌리엄 트레버

단편소설의 거장이라고 하는 윌리엄 트레버의 「욜의 추억」이 나를 방구석에서도 지중해의 고요함과 산들바람을 느끼게 해주더니, 갑자기 지저분한 남자가 나타나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며 만끽하고 있는 여유를 침범하려 한다. 묻지도 않았거늘 자신의 이름은 ‘퀼런’이며 추방당한 아일랜드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아일랜드 출신이지만 영국으로 이주한 윌리엄 트레버가 이 남성의 심정을 잘 알 수밖에 없겠구나 싶다. 소외감과 죄책감을 느끼는 이방인의 심정을 말이다. 고맙게도 ‘아그네스’라는 여성이 그의 눈에 담긴 불안함에 동정을 느끼며 인내심 있게 이야기를 들어준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다. 기억 속에 담고 있는 어린 시절의 아픔을 말하는 입과 고통을 담은 눈빛에서 슬픔을 알아봐 주며 상처받은 손등에 손가락 끝을 조심히 갖다 대는 것으로 위로의 마음을 전하는 아그네스의 모습은 나 역시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한다. 그저 설익은 마음으로 그치더라도 말이다. 퀼런이 불운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욜은 나에게도 멋진 해변 휴양지였지만, 지금은 마냥 그럴 수가 없다.

생전 처음보는 이 남자가 감상적인 이야기를 계속하기를 바랐다. (「욜의 추억」, p. 13)


자로 잰 듯이 살 수 없는 내가 흘린 먼지를 주워 담을 순 없기에 나와 같은 사람의 모습에 공감해 보고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일을 상상하며 또다시 대충 구겨서 안 보이는 구석으로 치우기도 해봤다. 이들의 삶은 누구나의 인생처럼 아름답기만 하지 않았고 사랑도 다양했다. 빛바랜 할머니의 물건들, 주인은 떠나고 세월만 쌓여가는 장신구를 보며 이유도 모른 채 울적해진 소녀의 마음처럼 불가사의한 사랑을 느껴보기도 하고, 권태로운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중 세월만 흐를 뿐 사랑을 갈망하는 것은 젊을 때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마침표가 없기에 새로운 외면의 세계를 향해 미친 듯이 달리는 남자를 통해 체념할 수 없는 마음의 위험과 포기할 수 없는 그의 마음에 부질없음을 내내 읊조려 보기도 했다. 특히, 고되거나 포기하고 싶거나 누구를 원망하고 싶은 심정이 들 수밖에 없는 삶을 더 주목했는데, 대체로 동정심과 연민이 담긴 손길을 바라지 않았고, 우려의 시선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없을 만큼 이 모든 것이 지나갈 일처럼 받아들이고 사는 듯했다. 이런 모습에 나는 권여선 작가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 p. 80)

그리고 윌리엄 트레버는 등장인물 아그네스의 목소리를 빌려 “세상은 우리한테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두 사람의 말이 냉혹한 현실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나는 왜 단 한 줄의 글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머무는 것일까? 분명 무언가 내 마음을 건든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 말로 옮기지 못해 닿지 못한 말들을 대신 적어 알려준다는 마음이 들어,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하는 삶으로 방향을 틀도록 만든 것일까? 말하려 했던 수많은 시도에 귀를 기울여 그 감정을 하얀 종이 위에 짧은 호흡으로 써 내려가기까지 겪었을 글쓴이의 노력이 감동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대부분 공감이 가는 대상이나 와닿는 이야기를 만나면, 그다음 장의 이야기를 기대하고, 책을 덮고 나면 또 다음에 들려줄 이야기를 기대한다. 기대한다는 것! 순수한 이 감정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에너지가 아닐 수 없다. 모두가 잠든 늦은 밤 혹은 이른 새벽, 나 홀로 떠진 눈을 끔벅거리며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떠올려지는 생각들을 따라가다가 나는 오늘 하루 몇 번의 기대를 하며 지냈는지 물어본다. 아무런 기대 없이 하루를 움직였던 긴 터널을 지나고 나니, 이제서야 단 한 권의 책만으로도 기대감으로 들뜨게 하는 이 순간의 값어치가 절대 작지 않음을 실감한다.

흐트러져 있던 마음을 움켜잡아 한 곳으로 모아보는 시간 그 자체를 즐겼다. 어쩌다 보니 습관적으로 늘 올곧은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나 자신을 잊고 말이다. 몇 주에 걸쳐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읽다 보니 6권의 책에 대한 애정이 그새 많이 쌓였다. 인도의 후덥지근한 공기와 무거운 흙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그리고 지중해의 산들바람을 타고 날리는 담배 연기와 잔에 담긴 독한 술의 향기까지, 아편 향에 취해, 술에 취해, 이야기에 취해 아주 어질어질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저 좋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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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2-09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거 전집 있으요~~~ 아직 읽은 책은 없지만 언젠가는 읽으려고 항상 대기중인 전집..^^;;

곰돌이 2025-12-09 10:10   좋아요 0 | URL
저도 이따금 하나씩 쏙쏙 뽑아먹으려고 합니다. yamoo님의 리뷰를 읽어볼 날을 기다릴게요!! 언젠가는 볼 수 있겠죠 ㅋㅋㅋ

새파랑 2025-12-09 1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현대문학세계문학단편집 모으는데...
사긴 사는데 너무 방대해서 몇권 못읽었습니다 ㅋㅋ

곰돌이 2025-12-09 18:18   좋아요 1 | URL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뚱실함…ㅋㅋ 천천히 여유를 두고 읽어보자요!!
 

<우리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중에서...

하루보다 더 긴 것은 무엇일까? 하루가 흐르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P80

낮이다.
습지는 안개를 뚫고 나온 태야의 노란 빛줄기로, 차가우면서도 희부연 빛으로 해쓱하다.
안개가 걷힌 습지는 태양 아래 다시 액체로 흐른다.
완전히 낮이다.
키 큰 황금빛 갈대들이 반짝이는 습지 위의 낮이다.
공포에 질린 눈을 한 벌레들이 지친 습지 위의 낮이다.
삽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
옮기는 여자들은 점점 더 끌개를 낮게 끈다.
인간 형상의 벌레들이 죽어가는 습지 위의 낮이다.
흙덩이는 들어 올리기 불가능해진다.
이것은 낮의 끝까지의 낮이다.
허기, 열병, 갈증.
이것은 저녁까지의 낮이다.
허리는 고통 덩어리다.
이것은 밤까지의 낮이다.
얼어붙은 손들, 얼어붙은 발들.
이것은 태양이 저 멀리 성에로 만든 수의(壽衣) 속 나무 형상을 어슴푸레 빛나게 하는 습지 위의 낮이다.
이것은 영원을 향한 낮이다. - P80

"봤어? 봤어?튤립이야."
모든 시선이 그 꽃에 쏠린다. 여기는 얼음과 눈의 사막인데,
어떻게 튤립이. 창백한 두 이파리 사이에 분홍빛이 어떻게.
우리는 그 꽃을 바라본다. 얼굴을 후려치던 싸락눈을
우린 잊는다.

하루종일 우리는 그 튤립을 생각한다.

아침에, 호수 길로 나가는 교차로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희망의 순간을 만났다.

그것이 어장을 관리하는 SS의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추억을, 그리고 아직도 다 말라 없어지지 않은 우리 안의 이런 감정을 증오했다. - P98

심장은 추위로 졸아들고, 오그라든다. 오그라들어
아프다. 갑자기, 뭔가가, 내 심장에서 부서진다. 심장이
흉곽에서, 그러니까 심장을 제자리에 위치시키는 주변의
모든 기관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 같다. 나는 내 안에서
떨어지는, 갑자기 떨어지는 돌 하나를 느낀다. 그것이
나의 심장이다. 경이로운 행복이 몰려든다.
차라리 이 취약하고 까다로운 심장이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
어쩐지 가벼워지며 몸이 이완된다. 행복의 가뿐함이 이런 것이겠지. 모든 게 내 안에서 녹는다. 행복의 액체성이 밀려온다. 나는
다 내려놓는다. 죽음에 나를 내맡기니 너무나 달콤하다.
사랑보다 더 달콤하다. 다 끝났다는 것을, 고통받는 것도,
투쟁하는 것도, 더는 뛸 수 없는 이 심장에 불가능을
요구하는 것도 다 끝났다는 것을 알고 나니. - P104

우린 서로 떨어지고 싶지 않다. 우린 서로를 보호한다. 동기 옆에 머물고 싶어 한다 자기보다 더 약한 동기 앞에, 그래야 그녀를 향한 매를 대신 맞을 수 있으니까. 약한 동기 뒤에, 그래야 넘어지려는 그녀를 붙잡을 수 있으니까. - P143

난 철저히 소유한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죽음과 대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쓸모없는 지식이다.
존재한다고 믿지만, 살아 있는 게 아닌 어떤 세계에서
그 모든 지식은 알게 된다 해도 쓸모없다. - P328

어떻게 해야 도망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나를 해체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과거에 붙들리지않고, 벽에, 사물에, 추억에 부딪히지 않을 수 있을까?
동시에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어. 점도가 없는 것처럼.
점도는 없는데 베일 것 같았어. 모든 것에 멍이 들었고,
온몸이 다 퍼런 멍 자국으로 뒤덮인 기분이었어. 실제로는
피부의 어디도 아프진 않은데도.
그 이후... 나는 어떻게 해냈던가? 이따금 나는 그걸 묻곤 해.
잘 모르겠어. -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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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가을이 왔구나 했는데, 벌써 가려나 보다.
시린 찬 바람이 여전히 낯설고 와닿지 않는 이별을 더 실감 나게 한다. 예전에는 어려웠지만 지금은 조금 가능해진 게 있다면 ‘좋은 것’을 붙잡고만 싶어하지 않고 놓아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피할 수 없으니 말이다. 해마다 다 함께 오던 장소에 인원수가 달라져 몇 년 만에 다시 오니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영 쉽지가 않았다. 모두가 드러내지 않으려고 해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리움 탓에 어쩔 수가 없으니 말이다.

굳이 애써 놓아주지 않는 것도 있다.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바닥에 피어 있는 들꽃의 예쁨마저도 찾아내고 알아봐주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인 엄마는 “꽃도 지면 다시 피는데…” 라며 모처럼 내색을 한다. 멈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놓기까지의 망설임을 알 수밖에 없기에 더 세게 팔짱끼며 안아주었다. 애쓴다고 놓을 수 없는 마음은 서로 더 따뜻하게 품어주면 되니까!

머릿속을 떠다니는 말들이 우리의 침묵을 채우는 동안 정년퇴직 이후로 아빠의 십팔번이 된 “가장 긴 하루하루를 산 것 같은데 지나고 나니 순간이야.” 이 말 한마디가 공간을 메우며 나와 엄마의 슬픔을 가져가려 한다. 낯간지러운 말은 여간해서 내뱉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이 건넨 서로를 위로하는 이 말 속에 담긴 뜻이 다시 원동력이 되어 내 사람들에게 행복한 시간과 추억을 더 많이 만들어주고 싶은 욕심을 품게 한다. 그래서 나는 영상으로 이 순간을 기록한다. 사진도 좋지만 사진보다 더 좋은 건 영상이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 예전에는 내가 카메라만 들이대도 부끄러워하고 정신 사납다고 뭐라고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누구도 뭐라 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며 촬영에 응해준다. 서로 같은 마음인 거다.


이제니 <새벽과 음악>중에서...

잊지 않기 위해서. 잃지 않기 위해서. 무언가 기억하기 위해서. 무언가 간직하기 위해서. (p. 17)

도착하는 순간에야 알 수 있는 것을, 그 무엇을 기다리면서. 매일의 책상 위에서. 삶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흐릿한 믿음에 의지한 채로, 모든 순간을 다시 의심하고 부정하면서. 알고 있는 이름을, 얼굴을, 표정을, 색깔을, 소리를, 거리를, 공간을 잊고. 마치 처음 본다는 듯 이 세계를 바라보면서. 손가락과 심장으로. 순간속에서 순간을 향해. (p. 224)


읽고 싶었던 책을 구매하면서 허전함을 채우려 했나 보다.
올해 읽었던 책 중 더 읽어보고 싶은 작가의 책과 그동안 궁금해했던 작가의 책 몇 권을 골라봤다. 아무래도 내가 꾸준히 관심을 갖는 키워드가 전쟁, 혁명, 디아스포라, 차별 등이라서인지 경계에 선 자들의 이중적인 정체성으로 인한 혼란과 애환을 담은 이야기를 가까이하는 것 같다. 좀 더 폭넓게 접하고 싶은 욕심도 없지 않아서 다양하게 읽으려고 시도를 조금씩 하고 있다.


<저항의 멜랑콜리>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앞서 읽었던 <사탄탱고>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저자의 묵직한 메시지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실존적 불안으로 인한 무력감과 절망감으로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겪고, 더 나아가 신체적으로도 문제가 생기는 일이 이제는 흔한 증상처럼 여겨지는 게 현실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들여다보는 동안 집착으로 가열된 내 마음을 식혀주지 못한 채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해소되지 않는 불안함을 느꼈던 과거를 떠올려보기도 했던 것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항의 멜랑콜리>도 책장을 넘기자마자 낯선 공간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과 함께 밀려오는 공포감, 이 음울한 분위기가 끌린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행복한 해결을 기대할 실질적인 근거는 아주 빈약했지만 플라우프 부인은 낙관론의 거짓된 유혹에 저항 할 수 없었다. 기차는 어딘지 모를 곳에 또다시 정차하고 몇분 동안 줄곧 출발 신호를 기다렸으나, 그녀는 차분하게 ‘무언가 그래도 진척을 보이고 있다’ 위안 삼으며, 규칙적인 브레이크의 끼익 소리에 따라오는 정지의 시간마다 날선 조바심을 억눌렀다. (p. 18)

그 많은 뜬소문, 그 소문을 주워섬기는 그 많은 사람을 접한 뒤에, 이제는 직접 제 눈에 ‘모든 것이 못쓰게 되었다’는 현실이 생생히 보였다. (p. 27)


<프레스코> 서보 머그더

등장인물이 남긴 여운이 오래갔던 <도어>와 <아비가일>을 읽고 나서 계속 기웃거리기만 했는데, 오후 일정까지 깨고 밥푸리 김밥 한 줄을 드시면서 다 읽어버리셨다는 Falstaff님의 100자 평에 구매를 더 미룰 이유가 없는 듯하여 이번에 모셔왔다. 책을 펼쳐 책장을 넘기는 데 반가웠다. 서보 머그더의 글을 읽을 때 느꼈던 음... 뭐랄까.... 저자의 성품인지 모르겠으나 파고드는 감정 속에서도 뚝뚝하지 않은 산들산들함을 느꼈던 그 기분을 다시 느껴서였다. 담고 있는 내용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그때 마침 아버지는 제네바에 가 계셨고 한 열흘은 지나야 돌아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세계 개신교 국제회의에 우리 지역을 대표해 참석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것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두가지의 희망. 그것은 주교가 되는 희망과 아들을 하나 얻는 희망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9년 전에 그는 이 희망을 가슴속에 품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두 가지가 한꺼번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아들 이슈트반 대신에 딸 어누슈커가 태어났고, 그 뒤를 이어 바로 아내가 정신병에 걸린 것이다. (p. 59)


<자유> 조너선 프랜즌

가장 최근에 읽은 <인생 수정>을 눈이 뻐근하도록 재미있게 읽었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앞부분만 조금 훑어봐서 알 수는 없지만 공감가는 인물이 아직 등장하지 않아서인지 <인생 수정>을 읽었을 때만큼 느낌이 오진 않는다. 아무래도 강간을 당한 딸에게 엄마가 취한 행동과 말 때문에 어이가 없어서 그런 걸 거다. 더 읽어봐야 알 수 있으니, 눈의 뻐근함이 좀 가셔지거든 나중에 만나는 걸로!!

그 당시 그녀는 개인적으로 직접 칭찬을 듣는 게 너무 불편한 이유가 자기가 희생정신이 강하고 협동정신이 뛰어나서 그렇다고 믿었다. 필자가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라 칭찬은 음료수와 같은 거였다. 칭찬에 대한 갈증이 해소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 게 차라리 낫다는 걸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안 것 같다. (p. 75)


<뭇 산들의 꼭대기> 츠쯔젠

중국 소설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츠쯔젠의 <가장 짧은 낮>을 읽는 동안 중국 소설에 선입견이 있는 분들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드러내기 전에 자신의 서리와 눈은 온 마음을 다해 따뜻하게 녹여야 한다는 그녀의 말 한마디가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중국의 변방 지역 소수민족의 삶을 장편 소설로 담았다. 아름다운 문체로 담아내는 자연 풍경과 함께 펼쳐지는 때론 흠칫 놀랄 만큼 자극적일 수도 있는 상황,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인물을 통해 내 삶도 되돌아보게 만든다. 마음을 풀어지게 만드는 순박하면서도 응큼한 모습에 잠시 잔웃음도 지어보고 말이다.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이런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힘든 시기를 다 같이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 늘 어떤 힘을 얻게 된다. 읽고 나면 한결 기분도 좋아지고 말이다.

솥 안의 넓고 길고 고른 탕면에 비계 찌꺼기와 배추를 넣자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두 사람은 부뚜막 앞에 쭈그리고 앉아 후루룩후루룩 바닥을 드러내도록 먹어치웠다. 다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나니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왕슈만은 트림을 하고 물을 한 바가지 떠서 얼굴을 씻고 난 뒤 보따리에서 복숭아색 저고리를 꺼내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신치짜에게 슬그머니 자신 같은 신부도 괜찮으냐고 물었다. 열기가 끓어오른 신치짜는 고개를 끄덕일 새도 없이 왕슈만을 끌어안고 따사로운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다. (p. 19)


<블러드 차일드> 옥타비아 버틀러

흑인 여성 ‘다나’가 시간 여행이라는 믿기 어려운 상황에서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닌 흑인 노예의 삶을 겪는 자로써 벌어지는 일을 담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재미있게 읽었다. 혐오스러운 인간에게 점점 순응하는 그녀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이 힘들었고, 다나가 어지럼증을 느끼며 다시 과거로 돌아갈 때마다 철렁거리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마침, 이 책이 눈에 띄는 바람에 겟겟!! 지구를 떠나 또 다른 공간에서 외계 생명체와 접촉하며 살아간다든지 임신을 하게 된 남자를 다룬 소재는 지금이야 낯설지 않게 볼 수 있지만 이 소설의 표제작 「블러드 차일드」가 발표된 시기(1984년)를 생각하면 그녀의 상상력이 놀랍다. 외계 생명체의 번식을 위해 선택된 인간의 몸에 알을 키우는 등의 SF적 요소 안에 담고 있는 가장 큰 핵심은 사랑과 희생인 것으로 보인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 알았다. 평생 그 이야기를 들었다. 졸리고 조금은 기분 좋기도 한, 익숙한 침이 찔러들어왔다. 그다음에는 트가토이의 산란관이 눈먼 탐침을 들이밀었다. 고통 없이, 수월하게 찌르고 들어왔다. 너무나 쉽게 들어왔다. 트가토이는 천천히 파도치듯 움직이면서 근육에 힘을 넣어 내 몸속으로 알을 밀어넣었다. (p. 24)


이번에는 그동안 관심을 두고 있었던 작가의 작품들이다. 역사를 기반으로 한 소설을 좋아한다. 일단, 도미니카 공화국을 32년 동안 통치한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의 만행과 암살 사건을 다룬 <염소의 축제>부터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한 <내 이름은 빨강>도 재미가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추리 소설답게 도입부가 몰입력을 확 끌어올리면서도 예술과 미술이 내게는 친근하지 않아서인지 살짝 주춤하게 만들었지만, 이 소설이 품고 있을 ‘의미’가 궁금하다. 이슬람 미술의 특징 정도라도 알아보고 난 뒤에 읽어봐야겠다.

사실 이 책들보다 가장 읽고 싶었던 것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와 서보 머그더에 이어서 헝가리 작가인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헝가리 혁명(1956년) 이후 21살의 나이에 스위스로 망명했다고 한다. 책 앞부분의 줄거리만 조금 말해보자면, 전쟁 중 살 길이 막막한 어머니 손에 이끌려 쌍둥이 형제가 할머니에게 맡겨진다.엄마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이라고 하지만, “전쟁은 오래갈 거다. 하지만 나는 저 애들에게 일을 시키면 되니까, 걱정 마라. 여기선 공짜로 먹여줄 수는 없다.”라는 칼날 같은 할머니 말 한마디에 이 형제의 앞날이 읽힌다. 그리고 처참한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린 쌍둥이 형제의 삶이 사실적이면서도 담담하게 서술된다.


<염소의 축제>, <천국은 다른 곳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분노가 온몸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었고, 용암의 강이 머리까지 기어올랐고, 머리는 마치 탁탁거리며 불타는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고 열까지 세었다. 분노는 통치하는 데뿐만 아니라 심장에도 나빴고, 까딱하다간 심근경색에 이를 수도 있었다. 지난밤에는 ‘마호가니의 집’에서 너무 분노가 치민 까닭에 미쳐버릴뻔 했다. 그는 곧 침착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는 분노를 통제하는 한 가지 방법을 알고 있었다. 시치미를 떼고서 최악의 인간쓰레기들을 예의 바르고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필요한 경우에는 배신자들의 아내나 아이들, 형제나 자매들에게도 그렇게 했다. 그것이 바로 그가 32년 동안 한 나라의 무게를 온통 어깨에 짊어진 채 다닐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염소의 축제>, p. 47)

“이 곳이 천국입니까?”
“아닙니다, 아가씨 천국은 다른 모퉁이에 있습니다.” (<천국은 다른 곳에>, p. 22)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 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p. 13)

나도 그림 속 사내처럼 나 자신만의 초상화를 갖고 싶었다. 아니, 내 주제를 알아야지! 내가 아니라 우리 술탄이 그렇게 그려져야만 했다! 술탄과 술탄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 그의 세계를 보여 주는 모든 것을 그리고 싶었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한 권의 이야기책으로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p. 59)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

우리가 물을 가득 받은 물통을 언청이에게 내밀었다. 소녀가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왜 진작 날 도와주지 않았니?”
“네가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덩치 큰 세 녀석이 덤비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니?”
“네 물통을 놈들 대가리에 던져버리든지, 손톱으로 얼굴을 온통 할퀴어놓든지, 불알을 발로 걷어차든지, 그도 저도 안 되면, 고함을 치고, 울부짖기라도 해야지. 아니면 아예 달아났다가 나중에 다시 오든가.” (p. 46)


<오래된 빛> 존 밴빌

내가 그녀의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까, 여기 한 해가 소멸해가는 이 부드럽고 창백한 날들 속에서? 머나먼 과거의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우글거리고 대개는 그게 기억인지 내가 만들어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 둘 사이에 별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차이가 있다 해도,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기억을 만들어내 꾸미고 윤색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 말을 믿는 쪽이다. ‘기억 여사’께서는 은근한 속임수에 대단히 능하니까. 돌아보면 모든 게 유동적이어서 시작도 없고 어떤 끝을 향해 흘러가지도 않는다. 적어도 내가 경험하게 될 끝을 향해서는, 최종적이고 완전한 정지라면 몰라도. (p. 14)


괜히 이것저것 적다 보니 출간 소식이 기다려지는 작가도 있어 적어본다. 독일계 러시아인들의 삶을 다룬 구젤 야히나의 <나의 아이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짊어진 무게와 불행한 삶 속에서도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었던 ‘빅토리아’라는 여성의 강인한 삶을 다룬 셸리 리드의 <흐르는 강물처럼>도 너무 잘 읽어서 이들의 또 다른 작품도 만나볼 수 있길 기대한다. 이 공간이 지니의 요술램프는 아니지만 비벼보고 비벼본다... ㅋㅋㅋ 요즘 조금 마음이 헛헛했는데 새 책을 반갑게 받아들고 조금씩 읽어보는 동안 신나기도 하고 즐거웠기에 조금씩 또 내 온도를 찾아갈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지나가는 가을을 아쉬워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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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12-06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빛....올해 읽은 책 중 단연 탑입니다. 존 벤빌...‘바다‘도 좋았는데, 정말 대단한 작가여요.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이 충격적인 소설이야 뭐, 말할 필요도 없고요.

좋은 책 많이 읽으시네요! 참고하겠습니다~

곰돌이 2025-12-06 13:36   좋아요 0 | URL
조금씩 읽어보는 동안 내심 잘 골랐구나 싶었답니다. (큭큭) 젤소민아님의 올해의 책을 제가 고르게 되어 왠지 뿌듯한데요? ㅋㅋ 시간을 두고 섭렵해 보겠습니다!!
 

<인생 수정> 중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시간은 한없이 느려지고, 한 단어와 다음 단어 사이 공간에서 예기치 못한 영원의 시간을 발견했다. 혹은 단어 사이의 공간에 갇힌 채 서서, 그를 놔두고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자기 안의 경솔한 소년이 어둠에 묻힌 채 숲속을 헤매느라 쿵쿵 부딪는 동안, 공간에 갇힌 어른 앨은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기묘한 긴장감 속에서 이 작은 소년을 지켜보았다. 공포에 질린 소년이 여기가 어디인지, 이 문장의 숲에 들어섰던 지점이 어디인지 모르면서도 얼떨결에 빈터로, 숲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이니드가 기다리고 있을 빈터로 들어서지는 않는지 지켜보는 것이었다. - P23

아버지는 수많은 낯선 이들 사이에 서 있는 아들을 발견하고는 얼굴이 환해졌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 달려들듯이 칩에게 벌컥 다가와 그의 손과 손목을 밧줄이라도 되는 양 꼭 쥐었다. - P28

"요즘 기분은 좀 어떠세요, 아빠?" 칩이 가까스로 물었다.
"이보다 더 좋으면 천국이고, 이보다 더 나쁘면 지옥이겠지." - P33

"나는 내가 좋아요. 그게 뭐 어때서요?"
그는 그것이 뭐가 문제인지 말할 수 없었다. 멜리사의 어디가 문제인지 전혀 지적할 수 없었다. 그녀의 자기애 넘치는 부모, 연극적 태도와 자신감, 자본주의에 대한 열렬한 애정, 자기 또래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점. ‘매혹적 내러티브’마지막 수업 때의 느낌이, 그가 모든것에 대해 실수했다는 느낌이 이 세상은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고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며 문제는 그 자신한테 있다는 느낌이 너무도 강렬하게 되살아나는 바람에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야 했다. - P92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진정 상태가 되었다. 몸을 숙이고 한 손을 다른 손으로 잘 받치고는 버터 돛을 단 범선이 뒤집히지 않게 접시에서 높이 들어 올렸다. 그는 입을 벌렸고, 물 위에 둥실둥실 떠 있는 듯한 배를 쫓아가 꿀꺽 삼켰다. 해냈다. 해냈어. - P104

어느 여름날 1막을 다시 읽다가 구제할 길 없이 엉망이라는 사실에 새로이 충격을 받은 그는 바람을 쐬러 서둘러 밖에 나가서는 브로드웨이를 걸어가 배터리 파크시티의 벤치에 앉았다. 허드슨강 바람이 옷깃으로 스며들었고, 쉴 새 없이 윙윙대는 헬기 소리와 트라이베카에 사는 백만장자 어린아이가 고함치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는 가운데 그는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팔팔하고 건강한데도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니. 일을 잘하기 위해 푹 자고 건강관리에 신경 쓰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낯선 여자들과 시시덕거리며 마가리타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신나게 휴가 기분을 내지도 못했다. 이렇게 실패하느니 병이 나 죽어가는 편이 훨씬 나을 듯했다. 데니즈의 돈과 줄리아의 선의, 자기 자신의 능력 및 지금껏 배운 것,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경제 호황의 기회만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건강한 육체까지 강가에서 햇볕을 쬐며 헛되이 날리고 잇었고, 이 때문에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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