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수정> 중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시간은 한없이 느려지고, 한 단어와 다음 단어 사이 공간에서 예기치 못한 영원의 시간을 발견했다. 혹은 단어 사이의 공간에 갇힌 채 서서, 그를 놔두고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자기 안의 경솔한 소년이 어둠에 묻힌 채 숲속을 헤매느라 쿵쿵 부딪는 동안, 공간에 갇힌 어른 앨은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기묘한 긴장감 속에서 이 작은 소년을 지켜보았다. 공포에 질린 소년이 여기가 어디인지, 이 문장의 숲에 들어섰던 지점이 어디인지 모르면서도 얼떨결에 빈터로, 숲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이니드가 기다리고 있을 빈터로 들어서지는 않는지 지켜보는 것이었다. - P23

아버지는 수많은 낯선 이들 사이에 서 있는 아들을 발견하고는 얼굴이 환해졌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 달려들듯이 칩에게 벌컥 다가와 그의 손과 손목을 밧줄이라도 되는 양 꼭 쥐었다. - P28

"요즘 기분은 좀 어떠세요, 아빠?" 칩이 가까스로 물었다.
"이보다 더 좋으면 천국이고, 이보다 더 나쁘면 지옥이겠지." - P33

"나는 내가 좋아요. 그게 뭐 어때서요?"
그는 그것이 뭐가 문제인지 말할 수 없었다. 멜리사의 어디가 문제인지 전혀 지적할 수 없었다. 그녀의 자기애 넘치는 부모, 연극적 태도와 자신감, 자본주의에 대한 열렬한 애정, 자기 또래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점. ‘매혹적 내러티브’마지막 수업 때의 느낌이, 그가 모든것에 대해 실수했다는 느낌이 이 세상은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고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며 문제는 그 자신한테 있다는 느낌이 너무도 강렬하게 되살아나는 바람에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야 했다. - P92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진정 상태가 되었다. 몸을 숙이고 한 손을 다른 손으로 잘 받치고는 버터 돛을 단 범선이 뒤집히지 않게 접시에서 높이 들어 올렸다. 그는 입을 벌렸고, 물 위에 둥실둥실 떠 있는 듯한 배를 쫓아가 꿀꺽 삼켰다. 해냈다. 해냈어. - P104

어느 여름날 1막을 다시 읽다가 구제할 길 없이 엉망이라는 사실에 새로이 충격을 받은 그는 바람을 쐬러 서둘러 밖에 나가서는 브로드웨이를 걸어가 배터리 파크시티의 벤치에 앉았다. 허드슨강 바람이 옷깃으로 스며들었고, 쉴 새 없이 윙윙대는 헬기 소리와 트라이베카에 사는 백만장자 어린아이가 고함치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는 가운데 그는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팔팔하고 건강한데도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니. 일을 잘하기 위해 푹 자고 건강관리에 신경 쓰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낯선 여자들과 시시덕거리며 마가리타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신나게 휴가 기분을 내지도 못했다. 이렇게 실패하느니 병이 나 죽어가는 편이 훨씬 나을 듯했다. 데니즈의 돈과 줄리아의 선의, 자기 자신의 능력 및 지금껏 배운 것,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경제 호황의 기회만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건강한 육체까지 강가에서 햇볕을 쬐며 헛되이 날리고 잇었고, 이 때문에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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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샀다. 독서의 계절이라는 그럴싸한 이유가 부추긴 것은 아니고 그저 구매욕이 뿜뿜하여 오랜만에 여러 권을 한꺼번에 샀다. 10월에 구매한 책들 중에서 제일 먼저 펼친 것은 츠쯔젠의 <가장 짧은 낮>인데 두껍고 무겁고 튼튼하며 표지도 예쁘다. ‘내 문학의 강’이라는 제목의 저자의 말을 적어본다.

“점점 흐려지는 노안으로나마 어느 정도는 푸른 풀과 밤하늘의 별빛, 비와 이슬과 눈물, 꽃과 밥 짓는 연기를 볼 수 있다.”

기력이 청년 시절만 못하다고 고백하며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시든 풀과 차가운 눈일 때가 더 많다고 한다. 이제는 어딘가 생기를 잃고 마음을 시리게 하는 것들이 더 눈에 들어오더라도 푸르른 풀이 시들기까지, 이슬이 맺히고 비가 내리다가 눈으로 변하기까지의 그 과정 속에서도 무언가를 발견해오며 살아왔을 것이다. 한순간도 흐름을 멈춘 적이 없었던 자신의 문학을 강으로 표현한 저자에게 흐르는 대로 주어진 대로 흘러가는 강물 속에서 발견한 것들을 이 책에 담았을 것 같은 기대감을 조금 누르고, 횔덜린의 시선집 <생의 절반>을 조금 훑어보다가 눈길이 머무는 시를 발견했다.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신성(神性)의 상(像)이네.
하늘 아래 있는 듯, 대지의 사람들은 떠도네,
위를 보네. 그러나 마치 천문(天文)을
읽어내는 듯, 인간은 무한을, 풍족함을
모방하네. 한 겹의 하늘이
과연 풍족하던가? 은빛 구름들은
마치 꽃잎과도 같은데. 그러나 바로 저곳에서
이슬과 물기가 내려오는 것이네. 허나
저 푸름, 한 겹의 푸름이 꺼져버리고 나면 드러나는
흐린 것, 대리석을 닮은 것, 마치 청동처럼 빛나는,
풍족함의 징표.


단순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그러면서도 그 단순함 속에 숨겨진 가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이 내겐 필요하다. 특히,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놓치고 있던, 잊고 있던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독서가 참 좋은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비슷한 이유로 독서를 하는 것 같은데 괜히 거창하게 얘기하고 있다. 점잖은 척 하려니 여간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뒤에서 자꾸 누가 옷을 잡아당기는 것 같다. 세상을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분들의 글을 읽으면 목적의식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고 마음이 가다듬어지기도 해서 편안해진다. 그런 이유로 박완서 작가님의 책도 곧잘 읽는다. 중고로 구매했는데 뒤에 붙은 스티커를 살살 떼어내서 책상이나 바닥에 떨어진 먼지를 한 번씩 ‘톡톡’ 붙여서 버리고, 앞부분만 슬쩍 들여다봤다.

공부를 못하는데다가 산동네 아이 티가 더덕더덕 나는 촌스러운 옷차림을 한 아이는 자연히 외톨이 신세였다. 그러나 그걸 그닥 고통스러워한 것 같지는 않다. 동네 아이들과 다른 학교를 다니니까 으슥한 인왕산길을 혼자서 등하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걸 즐기면 즐겼지 무섬을 탄 것 같지도 않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공상을 할 수 있었다. 그 길은 어린 날의 나의 꿈길이었다. 구질구질한 산동네와 나보다 잘난 아이만 있는 교실로부터의 해방구였다. (<기나긴 하루>, p. 28)

외출할 일이 있으면 정성들여 손을 씻지만 대강 씻고 무심히 외출한 적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고 사람을 만날 때면 열심히 내 손을 테이블 밑으로 감추지만 속으로는 엉뚱한 상상력으로 비죽비죽 웃음이 나온다. 며칠만 나의 때 묻은 손톱을 간직하면 열 손가락 손톱 밑에서 푸릇푸릇 싹이 돋지 않을까. 내 손톱 밑에 낀 것은 단연 때가 아니라 흙이므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p.17)


살만 루슈디의 책은 <무어의 마지막 한숨>을 시작으로 너무 재밌어서 여러 권을 후루룩 보는 바람에 조금 천천히 볼 생각이다. 물론, 한 치 앞을 내다보는 재주가 없어 장담이란 건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찍먹을 하는 중에도 냅다 들이붓고 와구와구 먹어버리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지만 읽을 수 있는 책이 몇 권 남지 않았으니 아껴봐야겠다.

그 시대가 우리 모두를 영원히 변화시켰다. 다만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우리의 미래가 말해주리라. (<2년 8개월 28일 밤>,p. 17)

매일 쏟아지는 환영과 계시로 가득 찬 이 꿈의 시는 아직 제 코앞밖에 못 보는 단조로운 사실에 짓뭉개지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꾼 본인은 경이로운 이야기, 특히 그를 벼락출세하게 해줄 수도 있고 목숨을 빼앗아갈 수도 있는 한 이야기에 의해 자신의 문 밖으로 쫓겨났다. (<피렌체의 여마법사>, p. 23)


은행나무의 세계문학 에세 시리즈 중 조너선 프랜즌의 <인생 수정>은 제법 두꺼워서 좀 더 나중에 읽어야지... 하면서 앞부분만 조금 훑어보는데, 책장이 계속 넘어가는 거다. 지금 읽고 있는 똑같이 두꺼운 <가장 짧은 낮> 다음으로 읽을 책으로 정해진 듯하다. 다만, 새털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알 수가 없긴 하다.

강요된 이송과 수송이 잇따르자 그나마 어렴풋이 유지되던 질서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 결과 손잡이 하나가 반쯤 떨어져 덜렁대는 채로 먼지 주름 장식을 켜켜이 단 노드스트롬 백화점 쇼핑백은 내쫓긴 난민의 비극적 정서를 자아냈다. 뒤죽박죽된 <주부생활>더미와, 이니드의 흑백 스냅사진과, 상추를 살짝 익히는 조리법을 담은 채 갈색으로 산화된 신문 쪼가리와, 이번 달 전화와 가스 요금 고지서와, 50센트 이하의 채무는 무시하라는 상세한 설명을 담은 임상검사 센터의 첫 번째 통지문과, 무료 크루즈 여행 때 화환을 목에 건 이니드와 앨프리드가 속을 파낸 코코넛에 담긴 음료를 홀짝이며 찍은 사진과, 자식들 중 두 아이의 지금까지 남아 있는 출생증명서 따위로 가득 찬 채. (<인생 수정>, p. 15)


그건 그렇고, 배송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겠지만 책 모서리가 눌려져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살짝 쓰리다. 만지작거린다 한들 소용도 없는데 괜히 자꾸 만져본다...(흐윽) 미련 둔다고 달라지는 건 없으니 이번에 처음 만나보는 작가의 책인 옌롄커의 <물처럼 단단하게>와 커트 보니것의 <나라 없는 사람>과 <제5도살장>으로 시선을 얼른 돌려본다. 조금씩 읽어보는 동안 공통점을 발견했다. 넋 놓고 봤다가는 이 책들도 책장이 계속 넘어갈 것 같다는 거다.

빌리는 노망이 든 홀아비로 잠이 들었다가 결혼식 날 깨어났다. 1955년에 하나의 문으로 들어갔다가 1941년에 다른 문으로 나왔다. 그 문으로 다시 들어가니 1963년의 자신이 나왔다. 자신의 출생과 죽음을 여러 번 보았다, 그는 그렇게 말한다, 그 사이의 모든 사건과 무작위로 만난다. (<제5도살장>, p. 39)

나는 드레스덴이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폭격 이전에 멀쩡했던 드레스덴을 보았고 폭격이 멈췄을 땐 방공호에서 빠져나와 폐허가 된 드레스덴을 보았다. 그로부터 생겨난 반응 중에는 분명 웃음이 있었다. 맹세컨대 웃음은 안도를 갈구하는 영혼의 산물이다. (<나라 없는 사람>, p. 13)

저를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과 보라색을 띤 그녀의 입술을 발견했습니다. 하늘이여, 땅이여, 언제 첫번째 단추를 풀었는지 그녀의 두 손이 두번째 단추에서 떨리고 있었습니다. 일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그렇게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물처럼 단단하게, p. 39)


존 말코비치 주연의 <미스터 블레이크>를 봤다. 영국의 잘나가는 사업가였던 블레이크가 아내가 죽은 뒤 은퇴하고 처음 그녀와 만났던 프랑스 저택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이 저택의 주인 여성 역시 4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 게스트하우스 운영을 중단한 상태였다. 편안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영화다. 특히, 이 저택에서 키우는 사랑스러운 고양이만큼이나 주인공 역할의 말코비치가 발랄(?)하면서도 귀엽게 나온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찾은 저택에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이전에 주변을 향해 온화하면서도 강력한 힘으로 희망을 놓치지 않게 해주는 블레이크를 보면서 한 사람의 온기로 여러 사람이 활력을 찾고 다 같이 어우러지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게 보는 내내 굉장히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리고 횔덜린의 시를 다시 한 번 읽어봤다. 꽃이 피었다가도 지듯이 구름이 끼고 비가 세차게 오다가도 또 그 비를 맞고 새싹이 푸른색을 띠며 돋아난다.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좋은 책과 영화를 보고 나니, 사소한 일상 속에서 ‘희망’이 청동처럼 반짝이며 빛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단, 너무나 당연한 이 사실을 늘 망각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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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탱고 - 2025 노벨문학상 수상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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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 머그더 이후 두 번째로 만나는 헝가리 작가인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작품 <사탄탱고>는 제목에서도 느껴지는 강렬함이 책의 도입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미 절망적인 감정을 넘어 그 어떤 것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고 회복될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람이 허공을 향해 흩뿌리는 부정적인 말들이 확신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요람과 관의 십자가에 결박되어 경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 그는 결국 냉혹한 즉결심판을 받고 어떤 계급 표식도 부여받지 못한 채, 시체를 씻는 사람들과 웃으면서 부지런히 피부를 벗겨내는 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가차 없이 인생사의 척도를 깨닫고 말리라, 돌이킬 수도 없이. (p. 15)

공허함으로 가득 찬 헝가리 시골의 버려진 집단농장. 이곳 주민들은 외부의 위협에 공포를 느끼고 불안감 속에서 제대로 된 일상을 살지 못하고 있으며, 시큼한 곰팡이 냄새가 가득한 집과 바닥 곳곳에 자라나는 잡초는 이곳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라기보다는 떠나야 하는 곳처럼 느끼게 한다. 매일 밤 대야에 담긴 따뜻한 물을 간절히 바라는 남자, 집 안에서 나는 악취를 느끼지 못한 채 바깥을 감시하며 사람들에 대해 기록하는 일에만 온 정신을 기울이는 의사, 고함을 지르며 짐차에 짐을 싣고 몰락한 이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또 다른 사람들.

이 소설은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낯선 세계에 서서히 진입하다가 완전히 몰두하여 잡념이 머릿속에 끼어들 여지가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되는, 독서를 통한 몰입 그 자체의 황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줄거리는 핵심 사건을 피하고 간략하게만 적으려 한다.) 특히, 긴 호흡 안에 담긴 인간의 심리를 앞선 발자국을 따라가듯 똑같이 진창길을 밟으며, 시월의 찬 바람에 날리는 그 모든 것을 낚아채고 휘어잡으며 구덩이에 빠져버린 것들까지 모두 갈고리로 끌어올리듯 구석구석에 남겨진 잔상까지도 음미해보길 감히 권해본다.


번개가 번쩍하는 순간,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리는 비를 맞고 들어온 한 노인, 차장 ‘켈레멘’이 암묵적으로 마을의 집합소가 된 술집으로 들어와 젖은 모자를 벗고 쥐어짠 다음, 술집 주인이 내민 독주를 마신다. 그리고 분명 기대하는 것이 있는 마을 사람들은 그가 새로운 소식을 들려줄 것이라는 내적 확신을 가지고 있다. 모든 질서가 깨져버린 이곳에서 변화가 있기를 바라며 불확실성 속에서 들뜬 마음으로 노인의 말을 기다려본다.

누군가에게 확신을 불어넣고 그의 덧없는 실존을 온전한 존재로 고양시키는 기억은, 어떤 사태로부터 기억 자체의 질서에 따라 실마리를 끄집어내고 기억과 인생 사이의 거리를 단지 그 기억을 지니고 있다는 경직된 만족감으로써 무마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p. 128)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 이 두 사람이 죽은 게 틀림없다고 믿었다. 두 사람의 부활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면서도 이들이 다시 마을에 돌아온다는 소문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사람들의 가망 없는 상황을 구제해줄 목자 이리미아시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라며 다시 희망을 품기 시작한다. 그건 그렇고, 켈레멘이 들려줄 말이 꽤 있을 것 같은데 어째 속도를 내지 않는다. 속이 탄다. 인내심을 가져본다. 어차피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때가 되면 알게 될 테니 말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하루하루가 똑같은 날들의 무력함 속에서 기대감을 갖게 되었으니 변화를 간절히 바래본다. 그러나 그 기대감조차 헛된 생각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마을 사람들이 제각기 갖는 절망감은 술집 문틈으로 막아보려 해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과 함께 이들을 에워싸고만 있다. 굳이 의미를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게 만드는 이 무거운 공기 속에서 어둠이 두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듯 그저 숨죽여본다.

끝나가는 시월의 밤은 고유한 리듬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말이나 상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질서에 따라 나무들을, 비와 진창길을, 노을과 서서히 내려앉는 어둠을, 피로하게 움직이는 근육을, 정적을, 구부러진 길과 풍경을 두들겼다. 머리카락은 무리하게 움직여야만 하는 몸과는 다른 리듬을 따랐고, 성장과 몰락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럼에도 수없이 두들기고 되울리는 한밤의 소리들은 짐짓 절망을 가리는 한 가지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한 장면 뒤로 불현듯 또 다른 것이 모습을 드러내고, 눈에 보이는 경계를 넘어서면 현상들은 서로 관련이 없어졌다. 마치 영원히 닫히지 않는 문처럼, 틈이, 균열이 있었다. (p. 132)

살인적인 가을과 아무런 희망도 없는 겨울 그리고 요란하지만 충족을 주지 않는 봄 (p. 147)


사람이 집중하다 보면 당연히 모든 감각 기관이 활발해지지만, 책을 읽는 동안 나를 가장 예민하게 만든 것은 청각이었다. 이 소리에 굉장히 민감해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둘러싸인 공간을 채우고 있는 불분명한 것으로부터 여러 위험성과 가능성을 감지하는 사람들을 긴장한 상태로 들여다봐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긴장감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지도 못한 채 상대의 감정을 파악해 가며 눈치껏 행동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오늘의 하루가 누군가의 힘이나 기분에 따라 결정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은가. 이 막강한 힘을 자신에게 방망이 휘두르듯 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이고, 내 언니들이며, 내 오빠였던 소녀 ‘에슈티케’가 등장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사람은 감히 아래에서 위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렇듯 사람의 기분에 맞추어 살아가야 했던 사람에게 용기를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에슈티케는 경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며 감정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이런 연약한 소녀의 복잡한 내면까지 읽고 그 순한 마음을 거침없이 낚아채가는 사람은 원하는 것을 얻기 때문이다.

에슈티케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희망을 앗아가게 만드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가벼워지고 싶어 하는 소녀가 조금 숨을 쉴 수 있도록 정적이 시간을 내어준다. 그렇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이런 에슈티케에게 전쟁으로 두 눈을 잃고 장터나 술집에서 하모니카를 불어서 번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소년 ‘코린’이 말을 건넨다.

“눈이 먼 다는 건 아주 멋진 일이란다, 얘야.” (p. 167)

숨죽인 채 살아가는 사람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비극과 닮은 쉼 없이 긴 호흡의 문장이 가슴을 짓누르는 듯하다. 덧없는 삶에서 벗어나려 해봐도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길에서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것이 절망적인 이 세상을 드러내기만 했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이 삶을 아무 소용이 없게 만들었다.

소녀는 고양이의 눈에서 공포와, 무력한 짐승의 고통을 보았다. 절망적인 고양이에게 있어서 마지막 희망은, 자신을 먹이로 내줌으로써 어쩌면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고양이의 두 눈은 어둠을 가르는 스포트라이트처럼 지난 몇 분의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 소녀와 고양이가 한데 엉켰다 떨어졌다를 거듭한 싸움의 순간들을. 소녀는 자신이 천천히 고통스럽게 쌓아 올린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p. 174)


내가 이 책을 읽는 동안 보고 싶었던 장면이 있다면, 그것은 소녀의 울음이었다. 어른들도 살아가기 힘든 이 세상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더 이상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차라리 소리 지르며 으왕 하고 울길 바랬다. 에슈티케의 눈물 대신 세찬 바람과 함께 차가운 비만 내린다. 고성을 지르고 괴로움을 온몸으로 내비치는 모습보다도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더 괴로웠다. 모든 것이 평온해지고 괴로움이 사라지기까지의 소녀의 숨 막히는 현실을 우리는 똑같이 숨죽인 채 지켜만 봐야 한다. 우두커니 서 있는 바보처럼 말이다.

비통한 바람이 부는 황폐한 마을에서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실존적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실리를 쫓아 움직이고 서로를 경계하며, 비난하고, 조롱하면서도 불안과 혼란 속에서 절박하게 ‘구원’을 바란다. 점점 커지는 기대가 불러온 허상이 사람들에게 솔깃한 말로 속삭이고, 매혹적인 안도감에 금세 현혹된 사람들은 다시 내일이면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한다. 과연 이들은 어디에서 확신을 얻은 것일까.

라슬로는 나약한 영혼을 꿰뚫고 유혹하는 사람과 마음을 움직이는 말 한마디에 낙관적 편향에 빠져 객관적으로 구분할 능력조차 상실한 자들의 삶의 줄을 당기며 서로 의지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불안한 관계 속에서 겪는 갈등을 통해 인간 본연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황량함으로 온몸이 무겁게 눌려진 채로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고통에 나는 과연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묻는다.

두려움에 찬 눈을 그냥 감아버리겠는가?
깊숙이 파고드는 통증을 잊기 위해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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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ass 2025-10-17 0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번 노벨상 수상작가를 벌써 읽으셨군요!! 저는 청개구리 심보가 또 나와서 몇년후에 접할듯 한데...몰입감 최고라는 평에서 살짝 흔들리는 중^^

곰돌이 2025-10-17 05:47   좋아요 1 | URL
다음 장이 궁금해서 계속 읽게 만드는 몰입도는 초반에 특히 그랬어요! 줄거리보다는 라슬로의 메시지를 포착해 나가는 것에 더 흥미를 느꼈던 것 같아요. 천천히 여유를 두고 마음이 원할 때 읽어보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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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 탱고>를 펼쳤다.
본격적으로 읽기 전,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어서 앞부분만 읽어보려고 했는데 금세 100쪽을 넘겨버렸다.

모든 것을 훑고 가버린 듯한 황폐한 마을이 등장한다.
습하고 축축하면서도 시큼한 곰팡이 냄새로 가득한 방에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과 떠날 시기를 노리는 사람들이 내뿜는 두려움과 무력감이 생생하게 전달되어 머릿속에 한 장면, 한 장면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간다.

진창길을 걷느라 진흙이 덕지덕지 붙은 부츠를 신은 남자들과, 강박이 느껴질 만큼 끊임없이 사람들을 기록하는 의사까지... 쓸만한 물건들은 모두 드러내어 버려진 물건과 함께 남겨진 듯한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동안 소리까지 민감해지면서 나마저 집요한 관찰자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아직 윤곽이 분명치 않은 그 형체를 보고 싶게 만드는 궁금증 때문인지 책장이 계속해서 넘어가고 있다.


- 밑줄 -

그는 요람과 관의 십자가에 결박되어 경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 그는 결국 냉혹한 즉결심판을 받고 어떤 계급 표식도 부여받지 못한 채, 시체를 씻는 사람들과 웃으면서 부지런히 피부를 벗겨내는 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가차 없이 인생사의 척도를 깨닫고 말리라, 돌이킬 수도 없이. (p. 15)

매일 밤 대야에 담긴 따뜻한 물만 있으면 돼. (p. 26)

두 사람은 몇 시간 동안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수킬로미터를 걷는다. 어쩌다가 하늘에 별 하나가 반짝이는 것도 같지만, 짙은 어둠이 내내 이어진다. 어쩌다가 달도 모습을 드러내긴 하지만 달은 그 아래 자갈길을 걷는 두 지친 방랑자들처럼,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는 마주치는 모든 장애물을 통과해 마침내 새벽이 올 때까지 하늘의 전장(戰場)을 가로질러 도주하는 중이다. (p. 70)

혼자서는 절대로 저지할 수 없다고 느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모든 것-집들과 담장들, 나무와 들판, 공중에서 하강하며 나는 새들, 배회하는 짐승들, 육신을 가진 인간들, 욕망과 소망들을 파괴하고 소멸시키는 힘에 맞설 수는 없었다.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는 인간의 삶에 대한 위협적인 공격에 헛된 저항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음험한 몰락에 자신의 기억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의 모든 것, 벽돌공이 쌓고 목수가 만들고 여인들이 바느질한 모든 것이, 남자들과 여자들이 애써 이룬 모든 것이 저승의 물살에 어지러이 휩쓸려 형체가 불분명한 액체로 화한다 해도 오로지 기억만은, 그가 맺은 계약이 깨져 죽음과 몰락이 그의 뼈와 살을 공격하기 전까지는 살아 있을것임을 그는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p.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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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10-09 1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시작하자! 마음 먹기가 쉽지 않아서 그렇지 첫 장 넘기면 곧바로 확 빨려 들어간 몇 안 되는 책이었답니다. 이 책 읽으신다는 것 만으로도 반가워서 말입죠.

곰돌이 2025-10-09 20:58   좋아요 2 | URL
한두 장만 읽어보고 느낌만 조금 가져보자!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세상에나... 페이지 터너! (참고로 이 책은 Falstaff님 리뷰를 읽고 땡투까지 했답니다.)

그레이스 2025-10-09 21:25   좋아요 2 | URL
폴스타프님이 원조셨군요 ^^

페넬로페 2025-10-09 21:45   좋아요 2 | URL
역시 폴스타프님👍👍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10-09 20: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 작가님 노벨문학상 수상하셨네요!

곰돌이 2025-10-09 20:59   좋아요 1 | URL
오~!! 괜히 기쁘네요. 전 참고로 살만 루슈디를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었어요...ㅎㅎ

페넬로페 2025-10-09 2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곰돌이님
선견지명 있으십니다^^

곰돌이 2025-10-09 20:59   좋아요 1 | URL
곰돌둥절!!! ㅎㅎ 어쩌다가 이렇게 책 읽은 시기와 맞아떨어졌어요. 얻어 걸렸는데 그래도 왠지 기쁘네요, 곰돌으쓱!! ㅎㅎ

2025-10-09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0-09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5-10-09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발표하는거 보고 방금 샀는데,,, 곰돌이님께 땡투를 했더라구요.
전에 장바구니에 넣을때 곰돌이님 리뷰나 피드 보고 한듯요.^^
발표 직전까지 제가 왜 긴장을 했는지...^^ 암튼 축하합니다~~

곰돌이 2025-10-09 21:44   좋아요 1 | URL
우연히 <사탄탱고>를 펼치게 되어 그레이스님께 축하까지 받게 되네요. 하하!! 또 곰돌둥절입니다!! 이 책의 작가님이 조금 무섭게 생기셔서 분위기에 압도되었는데 책은 술술 잘 넘어가네요!! (아무말 대잔치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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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중에서...

이제 펄롱은 과거에 머물지 않기로 했다. - P19

가끔 펄롱은 딸들이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걸 보며ᅳ성당에서 무릎 절을 하거나 상점에서 거스름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걸 보면서ᅳ이 애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한 기쁨을 느끼곤 했다.
"우린 참 운이 좋지?" 어느 날 밤 펄롱이 침대에 누워 아일린에게 말했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그렇지." - P20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ᅳ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 P29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고 펄롱은 검게 반짝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강 표면에 불 켜진 마을이 똑같은 모습으로 반사되었다. 거리를 두고 멀리서 보면 훨씬 좋아 보이는 게 참 많았다. 펄롱은 마을의 모습과 물에 비친 그림자 중에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 P67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니?" 펄롱이 말했다. "말만 하렴."
아이는 창문을 쳐다보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친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처음으로 혹은 오랜만에 친절을 마주했을 때 그러듯이. - P81

그게 가능할지, 아니면 어떻게 할지, 정말 뭔가를 할 것인지, 진짜로 거기 갈 것인지 생각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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