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뒤처진 야만인들을 상대하고 있고, 그들을 다스릴 유일한 방법은 야만인들과 허영심 많은 난쟁이 왕국 술탄들에게 공포를 불어넣고 모두를 두들겨패서 복종하게 만드는 것뿐이야.
슈츠트루페는 우리 도구지. 너도 마찬가지야. 우린 너희가 상상도못할 정도로 규율이 잡히고 고분고분하고 잔인해지기를 바라지. 너희가 망설임 없이 우리 지시에 따르는 낯두껍고 비정한 허풍쟁이가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너희에게 값을 잘 치러주고, 너희를 마땅히 존중해줄 것이다. - P134

자신들로서는 기원조차 알 수 없는 공허한 야망이자 결국 그들을 지배할 목적이었던 명분을 맹목적으로, 살인적으로 끌어안고 계속 분투했다. 짐꾼들은 말라리아와 이질, 탈진으로 여럿씩 죽어나갔다. 아무도 굳이 그 사람들의 숫자를 세지 않았다. 그들은 그야말로 겁에 질려 탈영했다가 피폐해진 시골에서 죽어갔다. 나중에 이런 사건들은 기이하고 무심한 영웅담으로, 유럽에서 벌어진 엄청난 비극에 곁들여지는 이야기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이 시대는 그들의 땅이 피로 젖고 시체로 어지럽혀진 시기였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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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살던 마을에는 다시 가본 적이 없어. 옛날 식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네. 이 마을에 와서 살면서 알게 된 건데, 그곳이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더군, 사실 여기 오기 전에도 고향 가까운 곳에 살게 되리라는 걸 알았지만 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애썼지." - P40

진짜 오빠와 언니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장난삼아 놀리고 아프게 하더라도 그녀는 두 사람을 오빠와 언니라고 생각했다. 때때로 둘은 매우 고의적으로 그녀를 때렸다. 그녀가 성질을 돋울 만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녀에게는 막을 힘이 없어서 때렸다. - P51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그녀를 더욱 슬프고 작게 만드는 것들, 이 세상에서 혼자만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들은 따로 있었다. 매야 다른 애들도 매일 맞는 것이었으니까.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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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꽃 소년 - 내 어린 날의 이야기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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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기만 한 귀한 시간들을 귀한지도 모르고 지나쳐버린 걸 이제와 후회해서 뭐 하겠냐만, 그럼에도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 시간들을 떠올리며 후회할 수 밖에 없기에 참 착잡하다.

이럴때면 다들 저마다의 먹먹한 맘을 한 켠에 두고, 오늘 하루를 또 살아 나가고 있을거라는 생각을 급히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P. 13) “이건 하느님의 실수가 분명하당께요. 어쩌케 날씨 좋고 풍성하고 아름다운 봄가을만 요로코롬 짧고 바쁘게 만들었당가요. 하느님의 실수가 아니믄 심술이랑께요.”

“좋은 날은 말이제, 짧아서 좋은 것이여. 귀한 건 희귀하니께 귀한 것이고. 그랑께 감사함이 있고 겸손함이 있는 거제. 하이튼 하느님한테 답장 오믄 나한테만 살짝 알려주드라고잉. 하하하.”


하늘은 높푸르고 대추 밤 호두도 따야하고, 가을 운동회랑 소풍도 가야해서 바쁜, 그러면서도 좋은 날 많은 봄가을이 짧아 아쉬움을 말하는 아이 ‘평이’에게, 좋은 날은 짧아서 좋은거라는 신부님 말씀에 난 왜 울컥 하는건지.

좋은날을 떠올리니, 그 자체만으로 좋으면서도 같이 회상하고, 또 같이 계속 누리고 싶지만 그럴수가 없는 떠나간 사람들이 떠올려져 내가 그렇게 먹먹한 감정을 느끼는가 보다.

아버지와 할머니를 일찍 여윈 후, 허우룩한 마음이었을 평이는 그럼에도 씩씩하고 식구들 챙길줄도 아는 속 깊은 어른스러운 아이다. 그 속마음을 모를 수가 없기에 참 대견하면서도 애잔하다.

어찌나 동네 사람들에게도 싹싹한지 모른다.
나는 평이처럼 넉살도, 수더분한 면도 다 부족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대차지도 않아 그림자처럼 주변을 서성이다 맛있는거나 ‘쓰윽’하고 가져가 보는 것으로 내 마음을 표현해보는 사람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혼자만의 시간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사람으로써, 서로들에게 살뜰한 사람들이 내뿜는 에너지만으로도 나란 사람은 서서히 충전이 필요해진다.

‘아,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거지?’

이런 나일지언정 박노해 시인의 어린시절 이야기 속, 서로 다붓다붓 정을 나누는 모습은 보기만해도 흐뭇하고 충만한 감동과 깨달음을 얻게 한다.
본명인 박기평으로 살아갔던, 모두가 평이라고 불렀던 그 시절에 함께 했었던 사람들이, 이 아이에게 들려주는 말들과 굳이 또 말로 하지 않아도 참된 인간의 길을 알려주는 행동들이, 여러면으로 부족한 나란 사람에게는 자극제가 되기도 하고, 필요했던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도 해줬다.


모내기를 앞두고 논일을 도와주는 일손들을 위해 부지런히 음식을 준비하다가, 갯장어 손질 중 손을 다친 어머니.
대신에 급히 어머니가 알려준대로 장어요리를 해버려야(?) 하는 8살 평이.

그 어린것이 어머니 손에서 뿜는 붉은 피를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이미 가슴이 두근두근 머리가 하얗게 질렸을텐데, 생전 해 보지도 않은 요리까지 해야 했으니, 그 막막함과 부담감과 분주함의 식은땀이 안 봐도 생생하여 내가다 초조했다.

더구나 자기집 논일을 도와줄 일꾼들을 위해 정스러운 마음으로 푸지게 차려주고 싶었을 어머니 대신 아닌가. 이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으니 8살 인생에 이 또한 얼마나 큰 사건이었을까.

그럼에도 평이는 인생 첫 요리를 잘 마쳤고, 자신이 아플 때 받았던 정성들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꿰매고 온, 어머니 이마의 수건을 올려 땀을 닦아줄 줄 아는 다부진 아이였다.

(P. 81) 울 엄니가 크게 베인 손을 움켜쥐고 핏방울 떨구며 홀로먼 황톳길을 걸어가던 꿈같이 어질하고 절박했던 그날 이후, 나에게 요리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기치 않은 어느 날, 준비도 연습도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울며 기도하며 내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주어지면,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꼭 해내야만 하는, 내인생의 모든 것이 그날 정오에 시작되었다.
생각할 때마다 아뜩하고 목이 메이는 나의 첫 요리. 내 인생의 첫 요리.


이야기에 빠져서 들여다보는 내내, 자꾸만 책 장수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해가며 읽었다. 최종회를 남긴 드라마를 보며 ‘아, 이제 다 끝나가네.’ 하면서 아쉬워하듯 그 마음을 오랜만에 느껴본 것 같다.


재밌다. 글이 너무 재밌다.
토끼털 귀마개를 하고 누빈 솜옷을 입은 찐빵 같다던 방물장수가 사랑방에 모인 마을 사람들 앞에서 펼치는 말 보따리는 청산유수가 따로 없고, 실감나는 묘사에 나도 사랑방 어디 한 귀퉁이에 자리펴고 앉아서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이날 방물장수에게 어렵게 얻어 낸 무협지를 호롱불 밝혀 밤새도록 홀린 듯 읽으며 품었을 평이의 장대한 꿈도 그려지는 듯 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마음 한 켠이 아려온다.

성실하고 좋은 어른들이 계시는 모두가 정답게 지내던 시절속에서, 조금씩 자라났을 아이 ‘평이’가 바라본 세상은, 기대했을 세상은, 분명 무협지를 보며 키웠을 그 꿈을 키울만한 가치가 있는 따뜻한 세상이었을텐데......

(P. 104) 봉지 속에 꽃씨들이 땅에 묻혀 새근새근 연초록 새싹을 내밀고 그 환하고 해맑은 얼굴로 향기를 날리며 피어날 봄을 기다리며, 내안에도 나만의 속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누군가의 살아온 길을 들여다보니, 그 사람이 걸어간 길을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배짱 좋던 아이가 어느 새 자라나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향해 노동자의 권리를 말하고, 민중의 고통을 덜어주려 평등과 희망과 사랑을 말하는 길 위에 서 있게 할 수 있었던 그 힘의 뿌리가 되었을 부모님과 할머니와의 이야기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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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엄니가 크게 베인 손을 움켜쥐고 핏방울 떨구며 홀로먼 황톳길을 걸어가던 꿈같이 어질하고 절박했던 그날 이후, 나에게 요리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기치 않은 어느 날, 준비도 연습도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울며 기도하며 내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주어지면,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꼭 해내야만 하는, 내인생의 모든 것이 그날 정오에 시작되었다.
생각할 때마다 아뜩하고 목이 메이는 나의 첫 요리. 내 인생의 첫 요리.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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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책들과 함께하는 주말날씨는 맑음이다.

새벽에 일어나 방 안 공기를 바꾸려고 창문을 열었는데 꽤나 쌀쌀한 바람이 들어와서 놀랐다. 시원이 아니라 추웠다.
습하고 후덥지근했던 날을 생각하면 더 좋았지만...

얼른 문을 반만 닫고, 박노해 시인의 <눈물꽃 소년>을 펼쳤다.
책 표지가 민트색인데 보기만 해도 밝고 상쾌하다.

이분이 ‘평이’라고 불리던 어린시절을 담은 자전 수필인데, 아직 3분의 1정도 밖에 못 읽었지만 읽기 너무 잘 한 것 같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 전라남도의 작은 마을인 ‘동강’에서, 아버지를 여윈 어린아이 평이를 걱정해 온 동네 사람들이 사기를 북돋아 주듯 칭찬을 아끼지 않고 챙겨주는 모습이 가슴 뭉클했다.
또 그에 힘입어 어른들 부탁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이 어딘가 애잔하지만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이번에 함께 구매 한 책이 또 있다.

인디라 간디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던 1975년에서 1977년을 주요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인도 뭄바이 파르시 집안에서 태어난 로힌턴 미스트리의 <적절한 균형>이다.

인도는 1947년 독립 이후 카스트제도가 법적으로는 폐지 되었지만,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의 인식에 뿌리를 내리고 굳어버린 만큼 차별은 존재한다. 한 개인을 이 계급에 기준을 삼고 나눈다는 것이 끔찍할 뿐이다. 거대한 국가권력이 저지른 폭력 앞에 맞서 버텨낸 사람들의 강인함을 알 수 있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선택했다.

벽돌책이지만 글자크기가 작지 않아서 압박감 없이 꽤 잘 읽힐 것 같다. 자간과 줄간격도 맘에 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권 더.

아우슈비츠에 수감 되었던 프랑스 극작가 샤를로트 델보의 <우리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는 레지스탕스 혐의로 체포 되었던 그녀의 회고록이다. 살아 돌아온 자로써 목숨을 잃은 동료들을 생각하며 사명감으로 적었을 것이다.
영화나 책으로 많이 접해도 늘 익숙하지 않는 고통과 참담함을 주는 아우슈비츠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 또한 기대된다.


오늘이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이라서 그런지 역사의 한 순간이 되는 끔찍한 그 날들을 목격한 분들의 시선에도 집중하게 된다.
노동운동을 하며 현장의 진실을 기록하며 투쟁하며 희생했던 박노해 시인의 할머니께서 어린 손자에게 하신 말씀이 왠지 오늘 더 먹먹하게 다가온다.

(P. 33) ˝우리 평이는 겨울이면 동백꽃을 쪼옥 쪼옥 빰시롱 ‘달고 향나고 시원하게 맛나다’ 했는디, 올해 동백꽃 맛은 어쩌드냐아. 나는 말이다, 아가. 네 입에 넣어줄 벼꽃도 깨꽃도 감자꽃도 아욱꽃도 녹두꽃도 오이꽃도 가지꽃도 다 이쁘고 장하고 고맙기만 하니라. 이 할무니한텐 세상에서 우리 평이가 젤 이쁘고 귀한 꽃이다만 다른 아그들도 다 나름으로 어여쁜 꽃으로 보인단다. 아가, 최고로 단 것에 홀리고 눈멀고 그 하나에만 쏠려가지 말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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