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에는 마당이 있었다. 마당은 내가 뛰어놀기에 넓고 컸다. 그렇지만 마음 놓고 그 마당에서 뛰어놀지 못했다. 마당의 한구석에는 도사견을 키우는 우리가 있었다.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 놓은 우리에는 도사견 여섯 마리가 숨을 할딱거리며 침을 끊임없이 흘리고 있었다. 도사견 우리 곁으로 갔다가 형용할 수 없는 냄새와 회백색의 눈빛으로 초점을 잃고 어딘가를 향해 있는 도사견들이 무서웠다.

밤이면 우리의 지붕에 천을 덮었다. 마당에는 여섯 마리의 자유를 잃은 숨소리가 깔려있어서 밤에는 마당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도사견들이 먹는 밥은 사료가 아니었다. 내 눈에 그건 개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처럼 보였다. 배를 채우고 나면 도사견들의 눈빛은 보통 집에서 키우는 개의 눈빛이 아니었다. 눈은 벌겋고 입에서 흐른 침으로 우리의 바닥은 늘 축축했고, 개 비린내가 나를 덮칠 것 같아서 빨리 마당을 지나쳐야 했다.

어느 날 동네의 남자들이 마당에 모였다. 동네의 아이들도 마당 밖에서 마당 안을 구경했다. 모진 바람의 기운이 감돌았다. 창문에 들러붙어 겨우 마당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그날 끔찍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도사견 중 한 마리를 동네의 남자들은 끌어냈다. 끌어내자마자 몽둥이로 머리와 몸을 내리쳤다. 도사견은 아프다고 짖었지만, 남자들은 도사견보다 더 충혈된 눈으로 몽둥이질을 멈추지 않았다. 도사견의 힘이 기진맥진해졌을 때 담벼락 쪽으로 끌고 갔다.

담벼락의 반대편에는 동네의 남자 몇이 줄을 잡고 있었고 줄의 끝은 이쪽 마당으로 넘어와 있었다. 마당에서 도사견을 잡고 있던 남자들은 도사견의 목에 줄을 묶었다. 그리고 신호를 보내자 담벼락 건너편에 있던 남자들이 줄을 잡아당겼다.

도사견이 벽면으로 끌려 올라가면서 목이 졸려 숨이 차오르는 모습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도사견은 보이는 하늘의 색이 일그러졌을 것이다. 그때 도사견은 대단한 양의 똥을 몇 무더기 쌌다. 그건 힘을 줘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항문이 열려 흘러내리는 것이다. 항문이 열린다는 건 사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동네의 아이들은 신나서 소리를 질렀고 도사견은 혀가 20센티미터는 더 빠져나와 벽 위로 얼굴이 끌려 올라갔다. 마당에 있던 남자 중 한 사내가 말을 했다. 이렇게 해야 육질이 부드럽지. 그리고 벽에 매달려있는 도사견의 몸을 마구 때렸다. 도사견은 아프다고 깨갱깨갱하는 소리를 내고 발버둥을 쳤지만, 동네의 남자들은 한 마리의 도사견을 사정없이 몽둥이로 내리쳤다.

피가 터지고 똥이 하염없이 나왔다. 심장이 놀라 팽창하고 폐가 제구실을 잃어버렸다. 벽 위로 끌려 올라가는 도사견을 보는 다른 도사견들도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었다. 냄새는 걷잡을 수 없이 마당을 휩쓸었고 처절한 생명이 끝나가는 절규의 소리는 나의 귀를 우악스럽게 파고들었다.

그 순간 도사견의 붉은 눈과 마주쳤다. 살려줘 제발, 내가 왜 죽어야 하나요. 그때 탁!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도사견의 머리가 깨지고 말았다. 줄에 매달린 도사견 밑에는 똥과 피가 지정할 수 없는 분비물과 섞여 쳐다볼 수도 없었다. 나는 그날 이후 어떤 무엇인가를 향한 분노가 있었던 것 같다. 뚜렷한 목적이 없는 분노는 어디를 향해서 뻗어나가야 할지 모른 채 그대로 커버렸다.

어릴 때 봤던 이 장면은 꿈에 가끔 나타나서 나를 악몽으로 이끌었다. 땀을 흘리며 일어나면 어김없이 그 도사견의 눈빛이 떠올랐다.

마당이 있던 우리 집으로 굴러 들어온 깜순이는 처음에는 두려움을 잔뜩 보이고 이를 드러내며 경계했지만, 새끼도 낳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를 보면 꼬리를 흔들었고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매일 만나는 나에게 이마를 내밀고 만져달라고 했고 깜순이는 머리를 쓰다듬으면 기분이 좋은 듯 눈을 반쯤 감고 졸기도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다가와 코를 킁킁거리며 나의 냄새를 그렇게 맡았다. 꼭 영원히 기억해버리겠다는 식으로

“아마 깜순이는 그랜드캐니언의 꼭대기에서도 까마득한 바닥의 냄새를 맡을 거야.” 올 댓 재즈에서 올리브가 말했다.

깜순이는 낯선 냄새를 친숙하게 받아들이려는 듯 학교에 갈 때, 학교에서 올 때 내 다리에 붙어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머리를 내밀었다. 가끔 깜순이를 데리고 동네 어귀를 돌아다니다가 어딘가에 앉으면 내 옆에서 가만히 앉아 졸음에 겨운 눈을 하며 코를 내 쪽으로 향하고 고개를 약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깜순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짧은 털의 감촉은 부드럽고 기분이 좋았다.

개와 인간의 만남. 개는 어쩌다가 인간의 생활 속으로 들어왔을까. 개는 개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인간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한, 지구상에서 가장 불행하면서 가장 행복한 동물이다

인간처럼 여지를 남겨두고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며, 한 번 사랑하게 된 주인은 마지막까지 그 사랑으로 주인을 바라보게 된다. 설령 주인에게 버림받아 쓰레기봉투에 넣어져 버려져도 개는 주인을 잊지 못하는 아주, 아주아주 바보 같은 존재다.

개는 아이와 비슷하여 늘 옆에서 돌봐줘야 한다. 개는 자신이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래서 꼭 나이 먹지 않는 아이와 비슷하다.

교무실에서 담임이 찾는다는 전화가 왔다. 불쾌한 감정을 지니고 교무실 문을 여니 집에서 전화가 왔다며 받아보라는 것이다. 깜순이가 곧 죽을 것 같다고 엄마가 말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나를 기다리는 것 같다고 했다. 담임에게는 말해놨으니 집으로 오라는 것이다.

깜순이의 마지막 모습은 뭐랄까.

인간과는 달리, 깜순이는 나를 향해 반드시 했던, 매일 하는 자신만의 행동을 꼭 해야 하는 것 같았다. 늘 그 시간대에 나를 반기면서 꼬리를 흔들며 손을 핥아야 한다는 명분이 깜순이에게는 확고하게 있는 것 같았다.

대문을 열고 깜순이가 누워있는 개 집 앞으로 가면서 깜순이를 불렀다. 깜순이는 힘없이 쓰러져 있다가 꼬리를 몇 번 아래위로 움직였다. 깜순이는 폐에 문제가 생겼다. 복수가 자꾸 찼다. 노산했고 나이가 많아서 수술이 어려워 약을 먹였는데 깜순이는 약을 먹일 때마다, 아니 왜 이렇게 맛도 없는 걸 나에게 먹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약을 먹이면 소변이 계속 나와서 복수가 조금씩 빠졌지만 망가진 폐는 되돌릴 수 없었다. 깜순이는 나를 보더니 어렵게 몸을 세워 내 다리의 냄새를 맡고 손을 한 번 핥고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그것이 깜순이의 마지막이었다.

개는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줘버리고 사랑을 한다. 우리처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직선적이라 어쩌면 확고한 그들의 사랑에 조금 놀라기도 하지만 그들에게서 행복한 감정을 우리는 더 많이 느낀다. 그들은 온몸을 다해 주인을 사랑한다. 그래서 개는 불쌍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

깜순이는 파트라슈처럼 어딘가에서 주인의 방임과 구박으로 버려졌는데 우리 집으로 와서 나를 주인으로 생각하고 받아준 모양이다. 깜순이는 눈을 감지 못했다. 개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한다. 그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은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몸이 따뜻할 때 깜순이를 계속 안고 있었다. 혀가 이만큼 나와 입에서 계속 이물질이 옷으로 흘렀다. 내 뒤로 아이들이 학교에서 조퇴하고 와서 가만히 서 있었다. 개구리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잘 가, 깜순아. 그동안 즐거운 기억을 잔뜩 주고 가서 고마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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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3-11 2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의 최후에 대하여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그 장소가 마당이 아닌 개고기 집이었죠. 예전에 개도둑이 많았는데 마당의 개를 훔쳐 개고기 집에 팔아버렸죠. 한 겨울 하루 종일 찾아다니다 해질 무렵 다리 건너 개고기 집에서 목이 매달리는 개를 보고 울며 이름을 부르며 그 다리를 달려가는데 중간쯤 지날 무렵 뒷통수에 일격을 당해 축 늘어지는 개를 보고 주저앉아 울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 마지막으로 번쩍 빛나던 푸른 안광이 아직도 선합니다. 평생 개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죠.

교관 2025-03-12 11:25   좋아요 0 | URL
어떤 기억은 추억보다 아파서 칼로 마음을 긁어 내는 것 같아요
 

이반에게 상처받고 이고르에게 위로받은 아노라



이번 쾌거를 올린 아노라를 보면 이반이 일주일같이 있어 달라며 만 달러를 부른다. 그때 애니가 만이천 달러를 달라고 하고, 이반이 오케이를 한다. 이어서 애니는 이반 네가 만 달러만 달라고 해도 나는 오케이였어,라고 말하고, 이반은 삼만 달러라도 주려고 했지, 같은 대사를 한다. 이 장면이 꽤 유쾌하게 흘러간다. 나는 이 장면이 아주 좋았는데 션 베이커는 이 장면을 ‘귀여운 여인’을 오마주 했다.


귀여운 여인에서 에드워드가 비비안에게 일주일같이 지내자 한다. 그때 비비안은 큰 마음먹고 삼천 달러를 부르는데 에드워드는 흔쾌히 오케이 한다. 그리고 비비안은 에드워드에게 이천 달러라도 응했을 거라고 말한다. 그때 에드워드는 사천 달러라도 줄 뻔했지라며 아주 유쾌하게 그 장면을 연출했다.


귀여운 여인은 안 그런 것 같지만 청불이다. 비비안 역시 몸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한다. 아노라만큼 시각적인 장면은 없지만 대사가 매운맛이 많다.


콘돔을 종류 별로 꺼내서 어떤 곧휴에는 어떤 콘돔이 어울린다부터, 루카라는 친구는 비비안이 있는 호텔에 와서 노부부에게 부인이 보는 앞에서 곧휴를 입으로 하면 얼마라며 흥정도 막 한다.


아노라와 귀여운 여인을 보면서 우리나라 요즘 영화는 뭐 하나 그런 생각이 든다. 무슨 말이냐 하면 ‘검은 수녀들‘ 같은 경우 무서운 건 차치하더라도 전혀 맵지 않다. 재미가 없으면 흥미라도 있어야 하는데 둘 다 없는 그 어려운 길을 간다. 악마가 욕 도 못 한다. 1975년에 나온 엑소시트의 악령은 너네 엄마 벌봐에 어쩌고 하며 개쌍욕을 퍼붓는다.


근래 우리나라에서 만든 우리나라 영화는 전부 밍숭맹숭하다. 독립영화를 많이 보는데 독립영화는 요즘 잘 만들어서 거의 상업영화 수준인데, 상업영화 수준이라서 밍숭맹숭하다. 아주 못 만들면 열나게 비난하고 조롱하고 까겠는데 밍숭맹숭하게 만들어서 까는 것도 기운이 떨어진다.


재미가 없지는 않은데 잘 만들지도 못했다. 근래에 나온 한국 영화가 전부 그렇다. 밍숭맹숭하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현실에서 못 하는 거 영화를 통해 한 번 겪어 보자는 건데, 욕도 못 해, 액션도 이상해, 대사도 그렇고 그래. 영화 만드는 사람들아 좀 미쳐서 만들어줄래.  


션 베이커 자리에 한국 감독이 있었다면 아노라는 어떻게 변했을까. 감독들아 대중 눈치 보지 말고 만들고 싶은 거 만들어.  https://youtu.be/pPYbwiZaOkk?si=y5_NyzIOrkTQ6H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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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뷰가 좋은 카페에 간다. 카페에 앉아서 바다 뷰, 도심지 뷰, 또는 논 뷰 등 탁 트인 경치를 바라보는 카페를 좋아한다. 그런데 내가 가는 카페는 골목에 있는 아주 작은 카페로 창문으로 오래되고 단단한 골목의 벽이 보인다. 나는 벽 뷰를 좋아한다. 앞이 딱 막힌 벽을 보는 게 좋다. 벽은 마치 나에게, 푸른 하늘이 보고 싶어? 하지만 볼 수 없어.라고 하는 것만 같다. 아직 계절의 추위가 사람들의 옷깃에 매달려 카페로 딸려 들어온다. 그 느낌을 받으며 벽을 멍하게 보고 있으면 벽이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의 피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카페에는 책이 있다. 나는 그 책을 뽑아 들었다. 어제도 읽었고 오늘도 읽는다. 제목이 벽 속의 다른 벽이다. 벽을 깨고 싶어 하는 벽의 이야기다. 초현실이며, 극사실주의에다가 온통 은유로 가득한 모호한 책이다. 모더니즘을 깨는 이야기다. 해체에 가깝다. 형식과 틀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다. 그래서 어렵다. 인간도 단단한 벽을 두르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벽이 더 완고해진다. 그러다 보면 도저히 깰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카페에 앉아서 벽을 보는 건 좋다. 골목의 벽은 봄이 되면 벽과 벽 사이에서 생명의 태동을 볼 수 있다. 녹색의 그것들이 고개를 들고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면 벽을 보는 재미가 최고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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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봄눈이 떨어지고, 얼굴을 건드리는 바람이 기분 좋아질 것 같다. 여기는 다른 지역보다 이른 벚꽃의 만개를 본다. 해가 붉은 깃의 꽁지를 달고 하루를 달에게 반납하고 나면 팡이 팡이 열린 봄송이가 그림처럼 펼쳐서 초현실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러나 만개한 벚꽃을 보는 건 너무 아름다워서 슬프다. 벚꽃과 불꽃은 닮았다. 불꽃과 벚꽃은 찰나적이다. 오직 우리 의식에 지워지지 않는 점을 찍는다고 김혜리 기자도 말했다. 완성의 순간 수십만 개의 소멸로 흩어진다. 절정은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벚꽃의 만개와 꼬리를 흔들며 비명을 지르며 올라 한 지점에서 터지는 불꽃은 무섭도록 닮았다.


불꽃의 색이나 형태는 잊어버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보는 것이다. 불꽃놀이하는 날 누구와 보냈는지 만큼은 계속 생각나서 추억이 되니까. 불꽃은 금방 사라져 버리지만 추억은 영원하니까. 벚꽃 역시 그러하다. 그리하여 너무 아름다워서 슬프다. 세상에는 그런 기묘한 것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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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4개월 동안 끊었던 

찌개와 마요네즈를 듬뿍 먹었습니다. 

반찌개세력의 밥상 장악, 

브로콜리의 식당장악 시도, 

채소폭거 등 

세계에서 콜레스테롤을 몰아내려는 

파쇼행위에 대한 상황을 

알리기 위한 대국민 호소에, 

저는 개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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