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3월에 내리는 비는 봄비라고 불립니다. 3월의 비가 겨울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초봄에 내리는 비는 겨울에 내리는 비보다 잔인한 거 같습니다. 이른 봄에 내리는 비는 추위를 몰고 오니까요. 까탈스러운 추위입니다.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 없는 추위입니다. 이런 비가 내리는 봄날에 우산 이외에 들어야 하는 짐이 많으면 그건 참 낭패입니다. 어딘가 들어갔다가 나올 때마다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하는 것도 아주 귀찮습니다. 느닷없는 말이지만 비가 온다고 우산을 들고 감독을 봤던 클린스만이 떠오릅니다. 클린스만의 웃는 모습은 아주 미웠습니다. 웃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싫을 수 있을까. 인간의 웃는 모습이 이 정도로 혐오스러울 수 있을까. 웃는 얼굴이 그렇게 미워 보일 수 있다니. 무라카미 류도 무의식 중에 들리는 웃음소리는 폭력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식을 가지고 있는데도 웃는 모습이 혐오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건 석방되어서 나온 대통령이 지지자들을 향해 웃을 때 모습입니다. 그건 충격이었고 공포에 가까웠습니다. 이후 여러 매체에서 그 모습을 보여줬는데 저는 그럴 때마다 채널을 돌려야 했습니다. 단지 웃음 짓는 모습만으로 혐오를 넘어 분노와 충격을 느끼게 할 수 있다니.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어 비를 맞으면 비는 아주 차갑습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초봄의 차가운 비는 땅에 닿아 시가 됩니다. 시는 온 세상에 내려와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시는 슬퍼서 몸이 차가워지는 거죠. 초봄의 비는 슬픔을 안고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또 힘든 주말을 불면으로 보내겠습니다.

 

너는 록을 듣지 않아 https://youtu.be/Bq0JS2uiduE?si=ZeFcLX1b9V-HYZ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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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향기를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곳은 골목이라고 생각되는 거 같다. 봄날의 골목은 그야말로 생명이 느껴지는 거야. 벌레들도 많아지고 길고양이들도 따뜻한 곳으로 나와서 볕을 쬐고. 겨울 동안 듣지 못했던 새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 소리가 봄의 골목을 시끄럽게도 하지만 잘 들으면 운율이 있어 새 따위에게 놀라곤 한다.

여기 보이는 골목은 지금은 전부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서 없다. 휴대폰이 있어서 이렇게 바로바로 골목의 봄날을 담을 수 있었다. 골목의 틈으로 봄이 되면 어김없이 민들레가 올라온다. 그건 아무리 봐도 너무나 신기한 일이다. 녹색의 그것이 겨울의 차갑고 딱딱하고 검은 바닥의 틈 사이로 올라와서 얼굴을 내민다. 그리곤 이내 골목의 풍경을 봄으로 바꾸어 놓는다. 민들레는 잡초지만, 잡초라서 튼튼하고 생명력이 고래 심줄 같아서 좋다. 민들레를 좋아하는 이유가 단순하지만 그래서 좋아하는 이유가 확실하다. 우효도 민들레를 불렀잖아. 일상을 보내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낸 노란색을 그렇게 자주 볼 수 없다. 자연이 만들어낸 노란색은 불순물이 낀 노란색이 아니라 샛노란 색이다. 노란 꽃잎처럼 내 맘에 사뿐히 내려앉으라고 우효도 노래를 불렀다. 민들레는 잡초라서 민들레 같은 사랑은 질긴 것 같다.

나는 봄의 골목을 좋아해서 이 도시의 골목을 매년 담았는데 많은 골목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요즘은 생각한다. 분양도 안 되는데 고층 아파트는 끊임없이 짓는다. 집 없는 사람에게 그냥 나눠주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렇게 대단위 아파트를 짓는 것일까. 아무튼 사라진 골목의 사진은 나중에 신문사에 팔아먹어야지.

골목에 봄이 오면 방향제 냄새가 난다. 아지랑이 냄새라고 할까. 집집 마당에 심어 놓은 나무가 봄에 잎을 올리면서 허브처럼 향이 난다. 목련에서 나는 향 같은 거 말이지. 그러면 그 자리에 서서 미친놈처럼 냄새를 흠흠 맡는다. 이런 방향제 향은 골목에서만 나는 거 같다. 도로나 아파트 단지에서는 봄이 와도 나지 않는다. 물론 도심지 안에서도 안 난다. 그래서 봄이 되면 조깅하고 돌아올 때 골목으로 다니는데 봄의 방향제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봄의 골목은 따스한 정감 같은 게 있다. 대문을 열어 놓고 저녁에 아버지들이 집에 오시면 된장찌개 끓이고 고등어 굽는 냄새가 골목에 퍼지고 말이야. 요즘은 아파트에서 고등어 잘 못 굽다가는 옆집에서 항의 들어 온다메.

골목의 곳곳에 봄을 알리는 민들레와 초록초록한 잡초가 벽면에 그려 놓은 벽화와 어울렸다. 이 골목들이 전부 아파트로 바뀌어서 아쉽다. 이렇게 골목을 지나가면서 사진을 담다가 방향제 향이 나면 그 자리에 서서 향을 맡는 거지. 그러면 기시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국민학교 때 봄 소풍 갔던 그때가 생각나기도 하고. 요즘처럼 미세먼지 같은 건 없어서 봄 소풍 가면 재미있었다. 뿌옇고 먼지 낀 시야가 아니라 맑고 청명하니까 놀기 좋았다. 김밥이 터져 있고 조금 상한 듯한 맛이 나고 사이다는 시원하지 않아서 밍밍한데 그래도 맛있었다.

방송 같은 곳에서 골목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볼 수 없다고 하는데, 뛰어노는 아이들을 볼 수 없는 게 아니라 골목을 볼 수 없다. 어제는 조깅하면서 보니 초딩 아이들은 지금도 놀이터에서 시끄럽고 혼돈스럽게 놀더라고. 그 어려운 나는 반딧불을 부르면서 말이야. 또 조금 달리다 보니 가방을 전부 인생 네 컷 입구에 던져 놓고 그 속에서 깔깔거리면서 시끄럽게 놀더라고. 장소가 바뀌었지,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이런 봄날의 골목의 계단에 건방진 자세로 앉아서 하루키의 초현실 소설을 읽고 있으면 좋다. 그러다가 골목에서 독서 모임을 하면서 그늘에 앉아서 책 읽고 서로 이야기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봄에 내리는 비는 땅에 떨어져 시가 되는 것 같다. 시는 골목에 내려와 풍경을 바꿔 놓는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람들은 골목에 떨어진 봄비에서 시를 느끼지 못한다. 시는 가까이 있는데 못 보는 거지. 아름다움은 주위에 널려 있는데 멀리 있는 아름다움을 보려 하니까 힘든 거지. 그러다 보면 골목은 전부 사라질 것이다.


요즘 내란 불면에 헌제 선고 기다리느라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라 뭐라고 해야 할 것 같아서 봄의 골목 이야기를 한번 해봤다. 이 상태로 주말을 보내야 한다니. 이 상태로 또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한다니. 이렇게 기분이 별론데 입맛은 왜 떨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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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봄나물은 없는 냉장고 털어 비빔밥



봄이 되면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봄나물로 비빔밥을 많이 먹는다. 비빔밥의 주재료는 나물이다. 나물을 이렇게 많이 먹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나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그건 아마도 나물은 채식이고 채식은 건강과 관계가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아니면 나물 비빔밥은 그냥 맛있어서?

나물은 해 먹기 까다로운 음식이다. 삶고 데치고 살짝 볶기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봄이 오면 새싹으로 비빔밥을 먹는다. 삶고 데치고 할 필요 없이 생으로 비빔밥을 해 먹는다. 이렇게 비빔밥을 먹으면 좀 더 상큼하고 좀 더 건강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고플 때 냉장고를 털어서 비빔밥을 해 먹어도 맛있다. 비빔밥의 장단점은 같은 재료를 널어놓고 먹을 때보다 맛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비빔밥으로 먹게 되면 도파민이 뇌를 때려서 이게 배가 부른 지 덜 부른 지 잊어버리게 만든다. 그래서 신체는 그만 처넣어!라고 하지만 뇌가 정신이 없어서 바닥이 보일 때까지 비빔밥을 퍼먹는다.

봄이 되면 나오는 비빔밥이 새싹 비빔밥이다.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새싹 비빔밥. 새싹은 말 그대로 새싹이다. 들판에 자라는 모든 새싹에는 독이 있다. 새싹이 자라면 새들이 바로바로 쪼아 먹어야 하지만 새들은 절대 새싹에 입 대지 않는다. 새싹은 자기 방어를 위해 새싹이 오를 때 독을 품고 있다. 고사리에도 독이 있다. 고사리는 아마 발암물질에 들어가 있다. 1급 발암물질이다. 고사리를 삶아서 먹으면 괜찮은데 생으로 먹게 되면 그게 좀.

뭐 판매하는 새싹 비빔밥 재료나 식당에서 먹는 새싹 비빔밥이야 괜찮겠지만 호기롭게 봄이라 들판으로 나가 내 새끼 신선한 거 먹여야지 하며 새싹을 씩씩하게 채취하여 비빔밥으로 잘못 먹다가는, 소레와 좃또,,,

요즘 가장 핫한 위고비 역시 도마뱀 독에서 발견한 물질이다. 갈라몬스터라 불리는 이 도마뱀은 먹지 않고 1년을 살 수 있는데, exendin-4라는 성분이 자체적으로 분비가 되는데 그게 먹는 걸 억제하는 뭐 그런, 위고비의 성분인 GLP-1이 도마뱀 독 성분과 비슷한데 맞으면 뇌를 건드려 소화 활동을 느리게 만들고 포만감을 잔뜩 느끼게 해서 밥을 먹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부작용이 나타난다.

한국인은 생으로 뭔가를 먹는 걸 좋아해서 간천엽도 많이 먹는다. 근데 요즘 소에서 나온 생간이 뭐랄까, 소는 원래 위가 네 개라서 여물을 먹고 위에 저장했다가 꺼내서 계속 씹어서 느리게 소화를 시키는데, 투뿔 같은 마블링이 낀 소를 만들기 위해서 여물 대신 곡물을 먹인다. 무슨 말이냐? 기름이 낀 소를 만든다. 소가 뭐랄까 썩 건강하지 않다.

간도 지방이 많이 낀 간이겠지. 그래도 굽고 튀기고 삶고 해서 먹으면 괜찮으나 건강하지 않은 소의 간을 생으로 자주 먹는다? 이게 인간에게 좋을 리 없다. 그렇지 않을까. 인간은 참 독을 좋아한다. 독이 있는 벌침을 피부에 놓기도 하고, 복어 독도 먹어서 마비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그런 걸 보면 인간은 참 알 수 없는 존재다. 냉장고를 털어 비빔밥을 먹다 보니.

바닷가로 해초로 비빔밥을 자주 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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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 라고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내가 그 이유를 알고 있지는 못하다. 어떤 책이든 읽기 전의 나보다 읽은 후의 내가 조금의 변화가 있거나 생각이 달라졌다면 그 책은 성공적이라고 본다. 소설도 마찬가지로, 소설을 읽기 전과 후가 전혀 변화가 없다면 그 소설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분명하지만, 허구다. 소설 속 이 허구를 비틀어서 현실을 직시한다. 내가 경험해보지 않았더라도 소설을 통해, 상상의 세계를 통해 그것을 조금씩 빨아들이고 습득할 수 있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먹듯이.

지금 정국이 요동치는 비상시국이다. 고요할 것만 같았던 2018년도에도 폭력 사태에 관한 뉴스가 흘러넘쳤다. 피범벅이 돼라 주먹을 휘둘러 아내를 죽인 남편의 사건도, 칼로 얼굴을 여러 번 찔러 죽인 피시방 사건도, 맘카페의 언어폭력으로 자살까지. 교촌치킨 회장의 친척이 주방에서 휘두르는 갑질의 폭력을 뉴스를 통해서 접했다.

이런 끔찍한 사건도 화면을 통해 뉴스로 보면 제삼자의 입장에서 안타깝고 애달파 하지만 뉴스가 지나가면 그걸로 보통 그만이다. 딱하고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우리는 당사자가 아니기에 그렇게 와닿지 않는다. 대한항공 갑질도 온 국민의 공분을 샀지만, 지금은 대부분 싹 잊었다.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잊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하트시그널이 나오면 거기에 집중하는 게 보통 우리다. 어쩔 수가 없다. 제삼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로 이런 문제를 잘 풀어내면 잊지 않을 수 있다. 잊지 않는 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게 진실이 되고 그 진실이 사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 속 에리의 방을 보는 제삼자의 시점과 같다. 에리는 폭력으로 인해 그 방에 갇히게 되었다. 그 폭력이란 언어적이며 어린 시절부터 너는 예쁘다, 말 잘 듣는다, 물건정리를 잘하는 아이다. 어지럽히지 않는 아이다. 다른 아이와 다르다 같은 폭력이 에리를 그 방에 갇히게 했다. 벽 안으로 밀어 넣은 폭력. 언어폭력. 착한 콤플렉스를 지니게 만드는 폭력이다. 이런 폭력은 주체가 없다는 게 큰 문제. 가해자가 없다는 것이다.

독자는 에리의 방을 보며 에리의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단지 그뿐이다. 그건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가 뉴스를 통해서 폭력을 접하는 것과 비슷하다. 직접경험의 부재가 우리를 방관자로 만든다. 그러나 이 소설을 다 읽어가는 동안 서서히 에리가 당한 폭력, 그것이 부당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흡수하게 된다. 소설의 장점이다.

2025년 지금 각종 언어폭력이 SNS를 수놓고 있다. 언어폭력 중에서도 어떤 게 무섭냐면, 오히려 공격하고 음해하는 공격은 방어해야 할 논리가 비교적 적립되어 있다. A 유형은 이렇게 대처하고 B 유형은 이렇게 하는 매뉴얼이 있어서 그렇게 하면 된다. 하지만 어설프게 나를 위하는 사람. 내 편인데 나를 누르려거나 이기고 싶어서 빙빙 꼬는 사람. 칭찬인데 뾰족한 바늘이 들어가 있는 폭력이 더 무섭다.

소설 속에는 이런 수많은 유형의 인간들이 나오고 또 이야기를 통해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같다. 순전히 나의 생각일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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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남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사정을 끌어안고 살아가잖아. 인간은 그래서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 되기도 한다.

10미터 정도의 우물에 빠지는 게 아니라 빠지는 기분이다. 전보다 깊게. 10미터인 줄 알았는데 빠지고 보니 하늘이 너무 멀리 있다. 누구도 나의 소리를 듣지 않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도 모른다. 손을 뻗어봐야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 기분이다.

과거를 되돌릴 순 없지만 같은 실수를 두 번 하고 싶진 않다. 실수를 실패로 망하느냐, 실력으로 되살리는 건 오직 자신뿐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날 밀어내려 하면 힘을 내서 더 세게 잡아줘야 하는 거다. 누군가의 도움을 몹시 바라는데 마음과 다르게 몸이 반응할 때가 있다. 그때 누군가 나의 손을 잡아주면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도와 달라고 용기를 내지 못할 때 누군가 내미는 손은 뿌리치지 말자.

마지막엔 모두 괜찮아질 거다. 괜찮지 않으면 마지막이 아니니까. 그러니 힘들고 지치고 분하고 억울해도 마지막에 가서는 괜찮아질 거라고 믿자. 희망이라는 게 가장 배신을 잘하지만, 마지막에는 괜찮아질 거라고, 정말 괜찮아질 거라고 믿자.

꿈을 꾸면 악몽을 꿀 때가 있다. 평소에는 꿈 따위 꾸지 않는데 작년 12월, 그리고 요 한 이틀 또 악몽을 꾼다. 내용이 아주 기분 나쁘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진격의 거인에서 거인들이 벽을 넘어 들어오잖아. 거대하고 징그럽고 뜨겁고 냄새나는 거인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막 잡아먹는데 그 사람들 속에 내가 껴 있는데, 설마 나는 안 잡히겠지, 다른 사람이 잡아먹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닐 거야,라고 확신하는데 그만 거인에게 잡혀 입으로 들어가는 순간 놀라서 깬다. 이거 정말 기분이 안 좋다.

주말 동안 불안과 분노와 충격 때문에 속보와 뉴스를 멀리하고 일을 하며 글을 쓰고 책을 보다가 가끔 스레드에 들어와 보면 충격과 분노를 어떤 식으로든 풀려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왜 우리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판사 한 놈이 전 국민의 주말을 깡그리 망가트렸다. 정신적 마비로 지내야 했다. 헌제 선고가 다음 주로 미뤄지면 이런 상태로 또 일주일을 보내야 한다. 막연한 불안으로 악몽을 꾸며 잠을 설치고, 안 마시던 술을 마시고, 분노 때문에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짜증을 낼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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