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개


새벽, 검정개가 눈꺼풀 위로 지나간다
점심, 정신 나간 미친년과 말싸움을 했다
저녁, 1층의 사이코는 현관문을 부서져라 닫는다
5월, 미나리는 점점 더 억세진다
억세지는 모든 것들의 끝에서 검정개가 웃는다







못난이


못난이 참외를 샀다
값이 너무 싸서 샀다
겨울에 잔뜩 사놓은 못난이 사과를 다 먹을 무렵
못난이지만 맛있다
못난이를 먹는다고 인생이 망가진 것도 아닌데
삐딱한 웃음이 찔끔

냉장고에는 못난이 파프리카도 있다
빨강색 못난이는 싱싱한데
노랑색 못난이는 주글주글
못난이에도 등급이 있다
괜찮은 못난이와 아주 못난 못난이
못난이는 가난하고
못난이는 부끄럽고
못난이는 좀 슬프다
못난이 시를 쓰게 될까 봐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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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운 어깨


2년째 어깨가 가렵다
팥알을 반으로 쪼갠 것 같은
작은 알약을 삼킨다
자기 전에 한 알씩
거미줄의 잠이 집을 짓는다

가려움의 기원을 알지 못한다
알고 있지만 침묵하기로 한다
그냥 약을 먹고 웃음을 짓는다

5월, 희끗희끗 지는 철쭉이
나를 닮았다
좋은 시절은 너무나 짧고 아프다

불길하게 늙어버린 여자가
조화(造花) 상자를 들고 간다
신산스러운 삶

여자를 피해서 걷는다
어깨가 가렵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려움은 충분하지 않고
연둣빛 어깨를 사부작사부작 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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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생(生)


모든 생을 꿈꿀 수 있으나
오직 단 한 번의 생을 살 수 있을 뿐이다

목이 늘어진 티셔츠에
피곤한 몸을 구겨 넣고는
글을 써내려간다
내가 살아내지 못한 어떤 삶에 대해

흘러내리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눈꺼풀이며 시간이다
조절력을 잃어버린 눈은
저도수(低度數)의 안경에 정착한다

모니터의 흐릿한 화면에는
거대한 습지가 있다
코끼리가 지나가는데
새끼를 품은 회색관두루미는
둥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지켜 내야 할 것이 있으므로

활짝 날개를 편다
코끼리가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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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審査評)


내가 응모하지 않은 공모전의 심사평을 읽는다
이 심사평은 참으로 길다
삐딱한 웃음을 지으며 무관심을 곤두세우고
5페이지의 오돌토돌한 검은 먼지들을
이리저리 훑어나가며
비로소 안도한다
2500편을 써낸 250명에 내가 있지 않음을

늘어진 엿가락처럼 흐물거리며
알아먹지도 못하는 말들을 주절주절
그런 걸 무슨 심사평이라고

우리 아파트의 경리(經理)가 쓴 안내문이
심사평보다 더 간결하고 명징하다
나는 경리한테 글쓰기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당신은 시를 잘 씁니다
계속 쓰세요

chat GPT에게 내가 쓴 시를 보여주고는
이 인공지능 사기꾼의 말에
홀딱 속아넘어갈 뻔 했다

울지 말아야지
앞으로 나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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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小說家)의 언니


소설가 K가 내 동생이에요

K의 언니는 연극 공연을 보러 간 내 옆자리에 앉았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하는 연극이었는데,
돈이 없는 나는 학교에서 하는 그런 연극을 자주 보러 갔다

내가 K를 본 적이 있었던가?
비좁은 학교 복도를 지나다니다가 두어 번 본 것도 같다
K는 학생 시절에 일찍 등단해서 약간은 스타의 느낌이 났다
평범한, 일반인 스타의 느낌,
이라고 쓰고는 뭔가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지만
어떻게 달리 고칠 수도 없다 아무튼,
K는 소설책 표지에 나온 K의 사진과
진짜 똑같이 생겼다 K의 언니도 K와 많이 닮았다

K의 언니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자신이
복지관에서 어르신들이 참여하는
연극 공연 연출을 하고 있노라고 했다
소설가의 언니도 특이한 일을 하고 있었다

K는 내가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작가로 아주 잘 나갔다
문제는 그게 단편에만 적용된다는 사실이었다
K의 첫 장편은 폭삭 망한 수준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최근에 K의 두번째 장편이 아주 오랜만에 나왔다
나는 K의 소설은 이제 더이상 궁금하지 않지만,
가끔 K의 언니가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는 궁금했다

짧은 대화에서도 참으로 인간적인 향기가 나는 사람
소설가의 언니는 그런 사람 같았다
그날, 나와 K의 언니가 본 연극 공연의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토록 명민했던 내가 이제는 정말 늙었다는 생각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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