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공모전(公募展)


수상자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걸 모르는 바보들이 그림을 그린다

실력에 돈이라는 금칠을 해야 이길 수 있다
금칠, 이라는 단어가 역겨운가?
그렇다면 당신은 파리의 삶을 살아라
유명한 선생님의 화실에 들어가서
열심히 발바닥을 비빈다
떨어지는 흙가루를 캔버스에 칠한다

심사의 과정은 공정하다
그림을 씹어먹을 수 없는 사람을 떨어뜨린다
부실한 치아로 그림을 씹다가
틀니를 끼고 젊은 날을 내다 버린 사람들

심사위원이 말한다

너의 그림이 떨어진 이유는
유기성(有機性)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매일매일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번번이 떨어진다

30년 후,
늙은 낙선자의 전시회가 열린다
캔버스에는 부서진 치아들이 반짝인다
특별한 금색의 기원은 낙선자만이 알고 있다
그림이 마음에 든 누군가가
그림을 백 원에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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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내 하나 알려드리지
복숭아는 씨앗에서 껍질까지의 거리가
길어야 맛이 좋더군요
큰 복숭아가 좋은 거라는 걸
이상하게 돌려 말하는 복숭아 장사꾼

오늘 먹은 복숭아는 아기 주먹만 했다
복숭아의 씨앗에서 껍질까지
손톱 두 개가 겨우 들어갈까 말까

신맛과 단맛 밍밍한 맛이
한숨을 쉬면서 어우러져
이런 복숭아를 만든 나무에게 저주를
아니지,
씨앗에서 껍질까지의 거리를 늘리지 못하는
더위 먹은 가난을 비난하도록 하지

커다란 복숭아를 먹는 인간들은
시를 쓰지도 못할 것이며
복숭아의 진심에 진입할 수도 없다
얻어맞은 아기 복숭아가 운다
슬프지만 안도하는 심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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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서리


냉장고 문을 열다가 왼쪽 발을 부딪쳤다
엄지 발톱의 모서리가 툭, 하고 떨어져 나갔다

절름절름 다친 이리처럼 걷는다
먹잇감을 가진 이리를 따라가다가
인정사정없이 뜯겼다
등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하늘은 짙푸르다
돌아갈 집 따위는 언제나 없었다

부러진 발톱을 내려다 본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떨어져 나간 모서리 때문이다
회색의 압력을 견디는 모서리

누군가가 말하길
모서리를 살릴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모서리에 낀 푸른 이끼가
숨을 쉬는 소리를 들었다

이끼가 가느다란 팔을 내밀어
자그마한 집을 짓는다
모서리가 조금씩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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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매(月梅) 정육점


아주머니는 왼손에 검은색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고기 자르는 기계에 손가락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의 정육점은 엄마의 단골 가게였다

월매(月梅) 정육점

나는 왜 정육점의 이름이 춘향(春香)이 아닌지 궁금해지곤 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 보니 춘향은 남자를 잘 만나 팔자를 고쳤고
그래서 먹고 살 근심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런 딸과는 달리 월매는 퇴기(退妓)로서 살아갈 방편이 필요했을지도

작달막한 체구에 늘 웃는 얼굴이었던 아주머니의 가게는 잘 되었다
아주머니의 남편도 정육점에서 같이 일했지만
내 기억 속에 늘 고기를 썰어서 내어주던 사람은 아주머니였다
가끔은 아주머니의 이름이 월매라고 생각했다

정육점은 아주머니의 살림집과 이어져 있었다
한번은 엄마가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작은 방 문턱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일고여덟 살 된 아이 하나는 TV 만화를 보고 있었고,  
내 또래일지 아니면, 좀 어리게 보이는 형은
방바닥에 엎드려 공책에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방
어떤 기억은 세월이 흘러도 너무나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어느 날, 아주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육점을 홀로 꾸려가던 아저씨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
내가 중학생 때의 일이다

오늘 아침, 식탁에 가만히 앉아있는데
월매 아주머니 생각이 났다
아주머니의 잃어버린 손가락에 분홍색 손톱이
잘 자라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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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세탁실에서는 비가 샌다
나는 여러 개의 바가지를 갖고 있다
비가 샐 때 쓰는 커다란 바가지
빗방울이 구불구불 기어다닌다

빗방울은 작고 동그란 입으로
가난, 이라고 외치고 다닌다
나는 너무 창피해서 빗방울의 입을
있는 힘껏 틀어막으려 했지만
빗방울이 내 손목을 꺾어버렸다

빗방울이 튄 세탁기가 소리를 질렀다
꺼억꺼억, 다 죽어갈 것처럼
세탁기는 사실 죽을 때가 되었다
이십 년을 살아온 세탁기는
요새 쇳조각을 뱉어내고 있다

빗방울이 바가지를 밀쳐내고는
삐딱하게 웃으며 말한다

죽는 게 낫지

오늘도 뜨개질을 한다
빗방울의 기대가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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