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일 서정(春日抒情)


재잘거리는 철쭉이 핀 산책로
두 개의 등산 스틱으로 걸아가는 노인
나에게는 두 개의 안경이 있다
근거리용과 원거리용
늙음에는 돈이 필요하다 아주 간절하게

이미 라일락이 진 자리
아파트 잔디밭의 개똥 금지 표지판을
좌절 금지로 매번 읽는다

다시 서른 살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난 가지 않겠어, 어떻게, 그 시간을
다시 살아내라고, 그냥 여기에서
두 다리를 땅바닥에 꽉 붙이고
오래된 흉터를 어루만지면서
쉼표는 왜 그리 많은지
마침표를 찍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

며칠 전 꿈에서 사라진 새끼 고양이의 행방을
오늘 새벽의 꿈에서 확인한다
작은 방 창문 건너편
두 마리의 새끼 고양이는
봄볕 아래 자꾸만 헤살거리며

곧 겨울이 오겠구나
엄마, 이제 여름이 올 거야
아직은 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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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그들은 여행 중이었다 200자 원고지에다 글을 쓰던 시절의 사람들,
신춘문예 당선 소감의 그들은 무작정 길을 떠났고 그렇게 길 위에서
당선 소식을 들었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그들의 여행을 상상했다
기차에는 홍익회의 카트가 시시때때로 오가며 구운 계란과 오징어,
그리고 밀감을 팔았을 것이다 12월이었으니까, 성탄절 즈음이겠지
지난주에는 유리막대가 주르륵 세워져 있는데, 하나가 깨지는 꿈을
꿨다 재수없는 꿈이군 오늘 하루는 조심해야겠어 다행히 하루 종일
별일이 없었다 시시하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는 식기 건조기에
차곡차곡 포개어 놓는다 이걸로 끝이야 아무 일도 없는 하루
삐익삐익, 건조기의 20분은 눈썹이 되어 떨어지고 뚜껑을 여는 순간,
느린 화면으로 재생되는 싸구려 머그컵이 바닥에 조각조각 삼켜지고
아, 그랬군, 그런 거였어 나는 비로소 안도했다 깨어진 유리 막대의
꿈이 완벽히 실행되었으니까 부엌 바닥은 진창이 되어 내 발은 한없이
가라앉고 나의 여행은 안온하게 실패한다 이제 홍익회의 카트는
더이상 운영되지 않는다고 한다 입안에서 우물거리던 세월이
원고지가 아닌 컴퓨터의 키보드 자판으로 환원될 때, 나는 응답하지
않는 자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쓰지도 않은 200자 원고지는
아직도 책꽂이에 한 무더기가 있다 베란다에 들어온 도둑 고양이가
새끼를 두 마리 낳고는 사라졌다 나는 새끼 고양이들이 부담스럽다
베란다에서 내어던지면 고양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가
꿈에서 깼다 고양이의 척추는 매우 유연하므로 살아날 것이다
내가 무자비하게 세상에 내던지는 나의 글들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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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당신은 색종이에 그린다
나무와 고양이와 강아지, 그리고 유령
파인애플과 사과, 튤립도 있다
당신의 그림 솜씨는 너무나도 형편없다
당신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당신의 어머니는 당신의 그림을 보고 늘 웃는다

잘 들지 않는 부엌 가위,
당신은 아주 여러 번, 그 가위를 버리려고 했지만
결국 그 가위는 당신 어머니의 손에서
검정 유성펜의 선을 따라서 찬찬히, 정확하게
죽음에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오리기의 시간

자르고 남은 자투리에는
쪼그라든 하트와 쭈글거리는 나뭇잎
노랑 강아지의 가슴에 하트를
회색 유령의 가느다란 손에 잎사귀를
튤립에 심장을 뚫어서 피가 뚝뚝 흐르는데
하트로 틀어막고 잎사귀를 떨어뜨리게

당신은 오려진 조각들의 종착역을 알지 못한다
오랫동안 간이역은 후회와 죄책감으로 촘촘히 이어져
당신의 어머니가 지나가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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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성야(復活 聖夜)


야, 하고 부르는 소리에 눈이 떠진다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남자의 얼굴
나는 큰소리로 주기도문을 외우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귀신은 말하지 않아요
말을 하는 무언가라면 그게 더 무섭죠
젊은 무당은 그렇게 말한다

화장실 타일의 모서리가 툭, 깨진다
새끼손가락만 한 세월이 목에 콱, 박힌다
이 집에서 너무 오래 살았다
그래도 귀신을 본 적은 없었는데

남자의 얼굴은 어두웠고 넙데데했다
나쁜 놈이겠지, 분명
악은 순회하며 곳곳에 누렇게 뜬 자국을 남긴다

공동묘지 옆의 아파트에서 살았는데요
집에서 귀신을 자꾸 보다가
결국 못 살겠다 싶어서 이사를 갔어요

오래전, 귀신을 보았다는 어느 여자의 글을 읽고는
나는 도망가지 말아야지 하고는
귀신 퇴치법을 검색한다
가만있자, 오늘은 부활절이군
부활 계란을 삶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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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라일락이 밭은기침을 내뱉습니다
바람이 가쁘게 향기를 흩어버립니다
나는 라일락이 져버리는 날을 헤아립니다
하루,
이틀,
사흘,
라일락의 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소식을 참으로 늦게 들었습니다
당신의 눈은 오랫동안 멀어있었고
당신의 육신은 그저 고단했습니다
당신의 봄은 라일락과 함께 멀어집니다

일을 하다가
손가락이 잘려 나가고
발목이 으스러지며
허리가 바수어지는
내가 알지 못하는 당신

당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당신의 구겨진 낡은 옷깃 사이에
가만히 속살거리며
그래도 누군가는 들을 것입니다
이 봄이 지나가기 전에

나는 들었습니다
당신의 부서진 날개가 푸르게
펄럭이는 소리를
당신이 날아간 그곳
라일락의 향기가 문신처럼 새겨집니다




*대기업의 휴대폰 하청공장에서 일하다가 산업재해를 입은
노동자가 있습니다. 이진희 씨(1987-2025)는 그 사고로 시력을 잃었고,
뇌출혈로 오랫동안 투병하다 세상을 떴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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