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오후 4시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혼자
놀이터 옆 벤치에 앉아있다
가만가만 숨을 내쉬며
천천히 부채질한다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늘 그 시간에 나오는 동네 사람들

누런 염색 머리의 늙은 여자는
비척거리며 걷는 아픈 개를 풀어놓고
말 많은 영감은 젊은 날을 늘어놓는다
누군가 쪄온 옥수수를 나누어 먹으며
그들만의 정겨운 오후 4시

하지만, 오늘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검은색 스카프를 두른 외로움이
할머니의 어깨 위에 앉아서
재잘거리는 소리를 낸다

어디를 가시오?

이쪽 집에서 저쪽 집으로요

행인이 상냥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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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삭(添削)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등지고 날면
더 잘 날아갈 수 있다고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내게는 없었다

어깃장을 놓으며
악다구니를 쓰며
욕을 퍼붓다가
울음을 터뜨린다
백날 해봐야 안 되는걸

바람의 첨삭(添削) 선생을 진작에 찾아갈 걸
바람의 독에 말라버린 황무지의 공항
마지막 남은 관제사는 도망가 버렸다

다시 한번 시동을 걸어본다
바람의 소리를 들어라
바람의 결을 읽어라
바람과 함께 노래해라
바람을 첨삭할 수 있다고 믿는
바보들과 작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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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1일


장마는 끝났다
참외는 끝물이다
옥수수는 조금 더 먹을 수 있다

아침 6시 반
아파트 경비는 기다란 삼각 괭이로
놀이터의 흙을 고른다
쿡쿡 탁탁 
굳은 흙을 헤집었다가
다시 평평하게 만드는 일
아무 의미도 없는 일
매일 똑같은 하루

살아온 여름보다
살아갈 여름날은
이제 적게 남았다

열대야로 설친 잠이
푹 꺼진 낡은 소파로
꾸벅꾸벅
쏟아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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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리


죽어가는 산호초에서
불가사리가 번성하고 있다더군
과학자들은 불가사리를 사냥하고 있어

불가사리는 그저
죽어가는 산호의 몸뚱이를
먹고 살기 위해 뜯어먹을 뿐인데
그걸 죽이다니

그 불쌍한 불가사리를
내 머릿속에 풀어두자
너의 푸르스름한 눈웃음과
희디흰 손과
단정한 입술을
천천히 뜯어먹을 수 있게

붉은 촉수가 잘라버린
불온한 손가락 하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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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어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
폭염특보가 발효 중입니다
라디오는 기계음의 목소리를
미적지근한 온수로 흘려보낸다

휘적휘적 더운 물길을 헤치며
집안을 천천히 걷는다
이 바다는 참으로 따뜻하다

작은 열대어 한마리
스르륵
갈라진 아가미에는 커다란
낚시 바늘이 눈물처럼 꿰어져 있다
나는 눈물을 똑똑 떼어서 버린다
너는 눈물을 뚝뚝 흘린다

너의 바다는 참으로 먼 곳에 있으며
어쩌면 나는 그곳에 닿지 못할 것이다
그 바다를 떠올리는 일은 끝없이 가여워

손바닥만큼 열려 있는 부엌의 창문
자그맣게 웃는 소리를 내며
스르륵
열대어가 가버린 자리
내 손바닥에는 바늘 모양의 문신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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