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考試)


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이걸 해야하나 생각한다

비 오는 밤에 모기향을 피운다
비가 와도 날아다니는 모기는 있겠지
쓴맛이 나는 내 피를 내어줄 생각은 없다

엊그제는 책상 밑에서
죽어있는 바퀴벌레를 발견했다
10년 만에 보는 바퀴벌레였다
이곳에 먹을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절망으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TV에서는 소림사 다큐가 나온다
11살 소년은 5살에 소림사에 들어왔다
소년의 정체성은 소림사이다

창문을 열면 붉은 시멘트가 보이는
이 고시원의 정체성은 고시(考試)이다
고시를 갈아서 들이마시면
내 정체성은 고시가 된다

인생은 운빨이라는데
운(運)은 나에게 빚진 것이 없으므로
앞으로도 내게 올 생각이 영영 없다

창틀에 끼어있는 단풍나무의 씨앗에는
퇴거(退去)라고 쓰여있다
천천히 씨앗을 씹어서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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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약(眼藥)


누런색의 안약을 넣는다
이 안약을 넣으면 눈에서 눈물이 난다
눈은 매일 조금씩 쪼그라들고 있다
돈에 환장한 의사가 처방한 일용할 안약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눈에 넣고
눈이 멀기를 기다린다

눈이 멀어지면
누런 양말의 흰색이 왜 돌아오지 않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흰색은 처음부터 가짜였고
전과 32범 사기꾼의 양말처럼
뒤꿈치에는 회색의 침이 늘 고여있다

어차피 당신의 눈은 멀어질 거란 말입니다

의사의 호통에 나는 아픈 눈을 찡긋하며 웃는다
외눈박이 의사는 무례를 꿀꺽 삼키고는
피 냄새 나는 안약을 처방한다

이번 안약은 붉은색이다

돈이 있었다면 한쪽 눈은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남은 생애 동안 맹인으로 살아갈 밖에
당신처럼 외눈박이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두 눈이 다 멀어버리는 게 낫지

눈에서 피가 똑똑 떨어진다
손가락에 피를 묻혀서 시를 쓴다
자정(子正)의 바람이 시를 천천히 말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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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괭이


어린 상괭이는 부둣가에 드러누워 있었다
허여멀건한 배를 드러내고는
아기 손톱같은 이빨에는 피가 흥건했다

이런 걸 찍어야지, 이런 게 진짜야

사진 선생은 연달아 셔터를 눌러대었다
학생들은 진저리를 치며 자리를 떴다

나는 죽음은 아름답지 못하므로
상괭이의 사진을 찍지 않으려고 했다
그 부둣가에는 도무지 사랑할 만한 것이 없었다
어부들은 아침부터 사진 찍는다고 욕설을 퍼부었고
선착장의 인부는 바다를 향해 오줌을 내갈겼다

사각의 프레임 안에 들어오지 않는 더러운 소문
마침내 버려지고 잊혀진 것들
상괭이가 나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차마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오늘 아침, 상괭이가 웃으며 걸어나왔다
스무 번의 여름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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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interview)


너의 인터뷰를 읽는다

그러니까, 문학은 내 운명인 거죠

운명이라는 말을 쉽게 하지 마라
나이 먹어서 자아실현 못한 것들이
꼭 그런 말 쓰더라
시간은 남아돌고 할 일은 없고
이름은 돋보이고 싶고
문화센터 대학원 들쑤시며 다니다가
글이나 끄적거리는 거지

콜센터 알바나 요양보호사를 할까도
생각해 보았다가

너, 두 가지 다 안 해 봤다는 거네
쌍욕 먹어가며 하는 콜센터 알바가 어떤지
치매 노인 뒤치다꺼리가 얼마나 힘든지
너는 네 손톱의 거스러미만큼도 알지 못해

시는 연필로 꾹꾹 눌러서 씁니다
그래야 진짜 같아서요

기름 줄줄 흐르는 마호가니 책상에
iMac 하나 올려놓고 쓰면서 무슨 연필 타령이냐
거짓말의 클리셰(cliché)가
대상포진 바이러스처럼 번지는
너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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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惡德)


커다란 곰 인형이 이 더운 대낮에
누런 배때기를 드러내고 누워있다
물크러진 코에서는 회색 콧물이 줄줄
튿어진 입에서는 부러진 바늘이 한 움큼
찢어진 분홍 리본을 목에 칭칭 두르고
그냥 죽어버릴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비웃자
바늘이 사람들의 눈을 찔러대어서
비명소리가 아파트를 뒤흔들었다
누군가 구급차를 불렀지만
구급차는 아무도 싣지 않고 떠났다

의류수거업자도 내팽개쳐 버린 곰 인형은
모리타니의 해변에 닿지 못한다
곰 인형을 버린 주인의 악덕은 그런 것이다

당신이 화장실에서 피우는 담배 연기가
우리집 천식 환자를 더 병들게 하고 있소
그런 악덕을 쌓지 말고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시오

나는 위층과 아래층 승강기 옆에다
반창고로 종이를 붙여놓았다
그 순간, 갑자기 기침이 쏟아지면서
천식 환자의 삶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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