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매(月梅) 정육점


아주머니는 왼손에 검은색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고기 자르는 기계에 손가락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의 정육점은 엄마의 단골 가게였다

월매(月梅) 정육점

나는 왜 정육점의 이름이 춘향(春香)이 아닌지 궁금해지곤 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 보니 춘향은 남자를 잘 만나 팔자를 고쳤고
그래서 먹고 살 근심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런 딸과는 달리 월매는 퇴기(退妓)로서 살아갈 방편이 필요했을지도

작달막한 체구에 늘 웃는 얼굴이었던 아주머니의 가게는 잘 되었다
아주머니의 남편도 정육점에서 같이 일했지만
내 기억 속에 늘 고기를 썰어서 내어주던 사람은 아주머니였다
가끔은 아주머니의 이름이 월매라고 생각했다

정육점은 아주머니의 살림집과 이어져 있었다
한번은 엄마가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작은 방 문턱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일고여덟 살 된 아이 하나는 TV 만화를 보고 있었고,  
내 또래일지 아니면, 좀 어리게 보이는 형은
방바닥에 엎드려 공책에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방
어떤 기억은 세월이 흘러도 너무나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어느 날, 아주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육점을 홀로 꾸려가던 아저씨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
내가 중학생 때의 일이다

오늘 아침, 식탁에 가만히 앉아있는데
월매 아주머니 생각이 났다
아주머니의 잃어버린 손가락에 분홍색 손톱이
잘 자라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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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세탁실에서는 비가 샌다
나는 여러 개의 바가지를 갖고 있다
비가 샐 때 쓰는 커다란 바가지
빗방울이 구불구불 기어다닌다

빗방울은 작고 동그란 입으로
가난, 이라고 외치고 다닌다
나는 너무 창피해서 빗방울의 입을
있는 힘껏 틀어막으려 했지만
빗방울이 내 손목을 꺾어버렸다

빗방울이 튄 세탁기가 소리를 질렀다
꺼억꺼억, 다 죽어갈 것처럼
세탁기는 사실 죽을 때가 되었다
이십 년을 살아온 세탁기는
요새 쇳조각을 뱉어내고 있다

빗방울이 바가지를 밀쳐내고는
삐딱하게 웃으며 말한다

죽는 게 낫지

오늘도 뜨개질을 한다
빗방울의 기대가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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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考試)


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이걸 해야하나 생각한다

비 오는 밤에 모기향을 피운다
비가 와도 날아다니는 모기는 있겠지
쓴맛이 나는 내 피를 내어줄 생각은 없다

엊그제는 책상 밑에서
죽어있는 바퀴벌레를 발견했다
10년 만에 보는 바퀴벌레였다
이곳에 먹을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절망으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TV에서는 소림사 다큐가 나온다
11살 소년은 5살에 소림사에 들어왔다
소년의 정체성은 소림사이다

창문을 열면 붉은 시멘트가 보이는
이 고시원의 정체성은 고시(考試)이다
고시를 갈아서 들이마시면
내 정체성은 고시가 된다

인생은 운빨이라는데
운(運)은 나에게 빚진 것이 없으므로
앞으로도 내게 올 생각이 영영 없다

창틀에 끼어있는 단풍나무의 씨앗에는
퇴거(退去)라고 쓰여있다
천천히 씨앗을 씹어서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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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약(眼藥)


누런색의 안약을 넣는다
이 안약을 넣으면 눈에서 눈물이 난다
눈은 매일 조금씩 쪼그라들고 있다
돈에 환장한 의사가 처방한 일용할 안약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눈에 넣고
눈이 멀기를 기다린다

눈이 멀어지면
누런 양말의 흰색이 왜 돌아오지 않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흰색은 처음부터 가짜였고
전과 32범 사기꾼의 양말처럼
뒤꿈치에는 회색의 침이 늘 고여있다

어차피 당신의 눈은 멀어질 거란 말입니다

의사의 호통에 나는 아픈 눈을 찡긋하며 웃는다
외눈박이 의사는 무례를 꿀꺽 삼키고는
피 냄새 나는 안약을 처방한다

이번 안약은 붉은색이다

돈이 있었다면 한쪽 눈은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남은 생애 동안 맹인으로 살아갈 밖에
당신처럼 외눈박이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두 눈이 다 멀어버리는 게 낫지

눈에서 피가 똑똑 떨어진다
손가락에 피를 묻혀서 시를 쓴다
자정(子正)의 바람이 시를 천천히 말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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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괭이


어린 상괭이는 부둣가에 드러누워 있었다
허여멀건한 배를 드러내고는
아기 손톱같은 이빨에는 피가 흥건했다

이런 걸 찍어야지, 이런 게 진짜야

사진 선생은 연달아 셔터를 눌러대었다
학생들은 진저리를 치며 자리를 떴다

나는 죽음은 아름답지 못하므로
상괭이의 사진을 찍지 않으려고 했다
그 부둣가에는 도무지 사랑할 만한 것이 없었다
어부들은 아침부터 사진 찍는다고 욕설을 퍼부었고
선착장의 인부는 바다를 향해 오줌을 내갈겼다

사각의 프레임 안에 들어오지 않는 더러운 소문
마침내 버려지고 잊혀진 것들
상괭이가 나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차마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오늘 아침, 상괭이가 웃으며 걸어나왔다
스무 번의 여름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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