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奇跡)


루르드(Lourdes) 순례를 다녀오신 수녀님이
기적의 샘물을 담아서 보내주셨다
나는 그 물을 엄마의 머리에 바르기로 한다
물론 엄마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엄마의 머리에 발라주고 남은 물은
나의 모니터와 키보드에 발라주었다
물론 때깔 좋은 시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올해는 일 억을 모을거야
엄마는 일기장에다 그렇게 썼다
엄마의 일 억
나의 첫 장편 영화
첫 시집
서울 변두리의 아주 작은 아파트
그들은 모두 같은 궤도의 별들이다

서럽도록 갈망하는 것들의 뿌리는 깊고
기적에 기대어 휘청거리며 걷는다
병약한 믿음 한 방울이
파릇하게 샘물에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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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絕版)


절판된 시집(詩集)을 읽는다
주문을 해도 오지 않는 책들
죽거나
미치거나
잠적(潛跡)해버린
시집의 주인들

꿈속의 칠판에는 내가 쓴 시가 있다
흘러내리는 시어(詩語)의 행방을 쫓다가
절판된 시집 한 권을 줍는다

눈부신 시들은 쉽게 잊혀져
붉은 눈거죽의 세월
견디어 내야지

간절한 것은 너무나도 늦게 온다
무겁게 세어진 흰 머리카락들
시편(詩篇) 사이에 켜켜이

유고 시집(遺稿詩集)을 담보할 수 없는
어떤 재능에 잠시 귀 기울이다가
가만히 책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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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개


새벽, 검정개가 눈꺼풀 위로 지나간다
점심, 정신 나간 미친년과 말싸움을 했다
저녁, 1층의 사이코는 현관문을 부서져라 닫는다
5월, 미나리는 점점 더 억세진다
억세지는 모든 것들의 끝에서 검정개가 웃는다







못난이


못난이 참외를 샀다
값이 너무 싸서 샀다
겨울에 잔뜩 사놓은 못난이 사과를 다 먹을 무렵
못난이지만 맛있다
못난이를 먹는다고 인생이 망가진 것도 아닌데
삐딱한 웃음이 찔끔

냉장고에는 못난이 파프리카도 있다
빨강색 못난이는 싱싱한데
노랑색 못난이는 주글주글
못난이에도 등급이 있다
괜찮은 못난이와 아주 못난 못난이
못난이는 가난하고
못난이는 부끄럽고
못난이는 좀 슬프다
못난이 시를 쓰게 될까 봐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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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운 어깨


2년째 어깨가 가렵다
팥알을 반으로 쪼갠 것 같은
작은 알약을 삼킨다
자기 전에 한 알씩
거미줄의 잠이 집을 짓는다

가려움의 기원을 알지 못한다
알고 있지만 침묵하기로 한다
그냥 약을 먹고 웃음을 짓는다

5월, 희끗희끗 지는 철쭉이
나를 닮았다
좋은 시절은 너무나 짧고 아프다

불길하게 늙어버린 여자가
조화(造花) 상자를 들고 간다
신산스러운 삶

여자를 피해서 걷는다
어깨가 가렵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려움은 충분하지 않고
연둣빛 어깨를 사부작사부작 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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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생(生)


모든 생을 꿈꿀 수 있으나
오직 단 한 번의 생을 살 수 있을 뿐이다

목이 늘어진 티셔츠에
피곤한 몸을 구겨 넣고는
글을 써내려간다
내가 살아내지 못한 어떤 삶에 대해

흘러내리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눈꺼풀이며 시간이다
조절력을 잃어버린 눈은
저도수(低度數)의 안경에 정착한다

모니터의 흐릿한 화면에는
거대한 습지가 있다
코끼리가 지나가는데
새끼를 품은 회색관두루미는
둥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지켜 내야 할 것이 있으므로

활짝 날개를 편다
코끼리가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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