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이슈 한국사 - 둘만 모여도 의견이 갈리는 현대사 쟁점
박태균 지음 / 창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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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정치 회담) 두번째 회의에서 베트남 문제를 다루면서 베트남을 분단하는 안이 나왔습니다. 남쪽은 자유시장체제, 북쪽은 공산주의체제로 해서 17도선을 중심으로 남북을 가르게 되죠.

그렇게 분단이 되었지만 제네바에서 열강들과 남북 베트남은 분단 후 2년 내에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치르도록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2넌 후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 정부가 이 결정을 거부했습니다. 남북총선거 대신 남쪽에서만 선거를 실시했습니다. 그것도 매우 심각한 부정선거였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내전으로서의 게릴라 전쟁이 시작됩니다. 부패하고 외세에 의존하는 남베트남 정부에 반대하는 남베트남 사람들의 투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1956년부터 시작된 이 전쟁을, 1954년까지 계속된 독립전쟁에 이은 제2차 베트남전쟁이라고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본다면 북한의 침략에 의해 시작된 한국전쟁과는 자못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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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 지음 / 창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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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L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

그런데 이 귀중한 기본합의서를 두고 대한민국은 국회의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비준하는 절차를 밟지 않았다. 1992년 2월17일 기본합의서에 노태우 대통령이 서명하고 국무총리와 모든 국무위원이 부서해 대통령령으로 관보에 싣는 걸로 공식 절차를 마무리했다. 결과적으로 기본합의서에 법적 구속력을 부여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북쪽이 조선노동당 중앙위 6기19차 전원회의(1991년 12월24일)와 중앙인민위원회·최고인민회의상설회의 연합회의(1991년 12월26일)를 거쳐 김일성 주석의 비준을 마친 사실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대한민국이 남북 정상회담 합의(6·15 공동선언, 10·4 정상선언, 4·27 판문점선언, 9·19 평양공동선언)를 국회 동의를 거쳐 비준하지 않는(또는 ‘못하는’) ‘악습’의 선례다. 정권교체 때마다 대북정책의 승계·단절을 둘러싼 논란과 ‘남남갈등’ 격화의 불쏘시개 구실을 하는 중대한 ‘입법 미비’ 상황의 지속이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25777.html#cb

NLL을 누가 그었든 간에 북한 측에서는 그 선을 승인한 적이 없을니다. 북한은 1970년대 초반까지 아무 말이 없었고 NLL은 자연스레 바다 위의 군사분계선이 되었던 거죠 그런데 1970년대 초부터 북한이 갑자기 이전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NLL이 문제가 되었죠 사실 1970년대 초부터 북한이 NLL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는지는 지금도 의문입니다. 1900년대 말부터 계속퀸 안보위기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1972년 이후 남북관계가 악화되었기 때문인지 그 이유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니면 북한의 해군이 어느정도 군사력을 갖추는 것이 1970년대 초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편 1991년에 NLL에 대한 합의가 있긴 했습니다. NLL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1991년 노태우 정부 시절에 이뤄진 남북기본합의서에그와 관련된 조항이 있습니다. 제11조에 보면 남과 북의 불가침 경제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찰하여온 구역으로 한다."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지금까지 쌍방이 관찰하여온 구역‘에는 NLL도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남북기본합의서가 우리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무효가 된 것이죠 사실 지금도 북한과 NLL 문제로 다툼 때는 남북기본합의서 이야기를 하면 됩니다. 북한 쪽에서도 인정한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남쪽에서는 유효하지 않기 ㄷ대문에 사실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 P162

2007년의 10.4 공동선언에도 NLL 관련 부분이 있습니다. 그때 남북한은 서해에 평화구역과 공동어로구역을 설치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공동어로구역을 보면 NLL 주변으로 합의되어 있습니다. 곧 북한 쪽에서 NLL을 인정했다고 보면 되는 거죠.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10.4 공동선인을 무효화시켰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와 2007년의 10.4 공동선언을 다시 살려낸다면 NLL이 더이상 문제될 이유가 없습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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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L
북방한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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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스탈린의 예상은 틀렸는가?

결과적으로 보면 세 사람 모두 바보였습니다. 실상은 전쟁이 발발하고며칠 만에 미군이 바로 파견됩니다. 그들은 미국의 의도를 잘못 읽었던것입니다. 근데 여기에 역사의 역설이 있습니다. 당시 상황으로만 보면그들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렇게 판단했을 것입니다. 역사의 역설은당시가 미국이 굉장히 수세에 몰리는 순간이었다는 바로 그 지점에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1949년 미국은 중국이라는 시장을 잃은데다 소련의 핵개발로 소련에 대한 군사적 우위도 잃어버렸습니다. 위기에 몰린 미국은 새로운 대책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1949년말부터 1950년 사이에 미국은 대외정책을 바꾸었습니다.
1949년 6월의 주한미군 철수만 보면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판단이 맞습니다. - P124

미국 쪽의 힘이나 원조 재원 자체가 모자랐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한 발 물러서서 일본이나 서유럽에 집중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진영이 1949년을 기점으로 세력이 커지니까 미국 쪽에선 더이상 밀려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공세적으로 나가자‘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면서 ‘국가안보회의 문서 68번‘이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문서는 미국의 대외관계변화를 보여주는 아주 상징적인 문서입니다. 그 문서에 담긴 가장 중요한 전략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미국은 밀리면 안 된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미국정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이 문서를 공식적으로승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승인을 했죠.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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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스탈린은 전쟁으로 마음을 바꿨는가?

주한미군 얘기가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주한미군이 철수(49년6월)하기 직전에 김일성이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를 찾았습니다 1949년 5월, 그때 김일성도 스탈린한테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겠다는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스탈린이 의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이 남한에 있는 미군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죠. 또 북한군은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미군뿐만 아니라 남한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의 인식은 1950년에 갑자기 바뀝니다. 1950년 1월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오고 싶으면 오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1949년 말까지는 김일성이 그렇게 가겠다고 해도 오지 말라고 했었죠. 북한 입장에서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그래서 김일성이 1950년 봄에 다시 모스크바를 가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은 3월 말에 가서 4월에 스탈린을 만났습니다. 그때는 남쪽의 공산당 책임비서였던 박헌영도 같이 갔습니다. 그리고 셋이서 합의한 거죠. ‘전쟁하자. 이젠 된다‘ - P122



전쟁을 벌여도 된다고 판단한 중요한 근거가 되는 세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그중 두 가지가 1949년에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들은 한국전쟁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첫째가 1949년에 일어난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입니다.

둘째가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입니다. 원래원자폭탄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었습니다. 즉 1949년에 미국의 원자폭탄 독점이 끝난 것입니다. 1949년은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이 큰 힘을 얻는 시기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이 공산주의 혁명을 했고, 미국과 대등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원자폭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남한에서 주한미군까지 철수한거죠. 주한미군 철수가 전쟁을 벌여도 되겠다고 판단한 세 번째 근거입니다.

미국의 군사고문단은 남아 있지만 정규군은 없는 한반도 상황을 두고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핵심 주제는 미국의 참전 여부였습니다. 이때 세 사람 모두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거라고 내다봤습니다. 중국이 공산화되는데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근거였습니다. 중국에도 개입하지 않았는데 한반도같이 하찮은 곳의 전쟁이 미국이 개입할 리가 없다고 본 거죠. 그러고서는 김일성이 가져간 전쟁 계획안을 스탈린이 승인하고, 이어서 두 달 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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