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개발계획의 수정
- 미국의 압력에 의한 수출진흥 정책과 환율 정상화 선회
- 하지만 남아 있는 수입대체산업화와 대기업 중심의 경제성장 지향




1962년 11월부터 군사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수정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시점에서 미국이 군사정부에 요구한 사항은 제철소와 종합기계제작소 건설을 비롯한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의 포기와 수출의 증대를 위한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 계획의 입안과 실시과정에서 사기업의 역할을 제고해 야한다는 것이었다.

군사정부는 1963년 4월 본격적인 수정작업에 착수하여, 
민정이양 선거 후인 1964년 2월 ‘보완계획‘을 발표하였다 투융자의 순위에서는 수출과 관련된 부분이 제1순위로 떠올랐고 수출계획에 구체적으로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이나 수공업", "생산코스트의 인하", "수입대체 산업에 편중되어 온 투자방향을 수출산업 위주로 전환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는 미국이 군사정부 직후부터 요구한 사항이었으며, 코머의 보고서에서 강조된 부분과 동일한 내용이었다. 수출과 관련하여 이전에 중요하게 고려되었던 쌀 수출이 언급되지 않았던 점 역시 보완계획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 P336

저개발국의 산업개발 형태를 수출주도형으로 전환하는 것은 케네디 행정부의 후진국 정책에서 나타나는 특징의 하나였다. 케네디 대통령이 1961년 5월에 발표한 "섬유산업 원조를 위한 7개항 계획 seven-Point Program of assistance to the textile industry"은 저개발국가에게 수출 기회를 확대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다. 케네디 행정부 안에서 한국의 미국에 대한 면직물 수출에 대하여 미국의 기업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이것을 제한하자는 의견이 제출되기도 하였지만, 공법 480에 의해서 한국의 쌀과 텅스텐 수출이 제한되는 상황이었지만, 미국의 대한원조의 목적 중의 하나는 "한국의 수출을 진흥하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인하여 오히려 할당량을 더 많게 해야 한다는 권고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1963년 면직물 수출을 둘러싼 한미 간의 갈등은 이러한 문제 때문에 발생하였다.

수출주도형의 강조는 한국 정부의 재정수지 적자를 줄임으로써 미국의 대한원조를 감축할 수 있다는 점과 환율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는 이점이 함께 고려된 것이었다. 품질이 좋지 않은 한국제품이 수출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원화의 평가절하가 필수적이었다. 

한국 내 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수출을 주요한 전략으로 하는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주장이 나타났지만, 1960년대 초반까지 1차 산품이 아닌 제조업 중심의 수출전략에 대한 생각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1965년의 대한정책 문서에서도 한국의 수출을 촉진할 수 있는 시장을 미국 스스로가 만들어 주어야 할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경제정책의 수정은 경제개발계획의 내용 수정에만 그치지 않았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자유무역체제를 지향하는 경제정책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1964년의 환율조정과 금리제도의 채택, 수출진흥을 위한 세제의 개편, 1965년 이후 청와대에서 수출진흥확대회의의 개최, 1967년 수입자유화의 확대를 위한 네가티브 시스템의 도입 등은 1963년 이전의 경제정책과는 정반대의 정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 과정에서도 군사정부와 군사정부의 뒤를 이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정책 수정 및 개혁 과정에 일부 개입하였다.

일례로 미국의 국가자문위원회는 한국의 환율체제와 환율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실시하여 1963년 10월 말 정책을 완성하였다. 완성된 환율정책안은 한국인들과의 협의를 거쳐, 한국인들이 국제통화기금의 승인을 받는 형식을취했다. 역금리제도 역시 경제기획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영향력이 관철된 것이었다. 국내외 경제학자들이 1963년이나 1964년을 한국 경제발전의 기점으로 설정한 것은 이 시기에 제반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 P339

보완계획의 성립은 미국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지만, 보완계획을 통해 미국의 의도가 전적으로 관철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계획 자체의 내용을 보면, 박정희 정부가 특정 부분에서 이전의 계획이 가지고 있었던 특징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제철소와 종합기계제작소 등 많은 양의 외화를 필요로 하는 산업은 보완계획에서 제외되었지만, 수입대체를 목적으로 하는 비료, 정유, 시멘트 산업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산업목표로 남아 있었다. 특히 비료의 경우 경제기획원안보다 투자량이 더 증가하였다. - P340

미국이 중소기업 중심의 정책을 강조하였고213 ‘보완계획‘ 내에도 중소기업의 진흥을 통한 수출정책이 포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부는 대기업 중심정책을 고수하였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 

미국 국제개발처의 처장은 경제개발계획의 수정작업이 진행 중이던 1962년 말 자본이 부족한 한국의 경우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개발이 적합할 것이라는 점을 경제기획원장이었던 김유택과 상공부장관 유창순에게 직접 권고하였다. 이 자리에서 유창순 장관은 대기업 중심으로 계획을 실행하겠다는 것이 군사정부의 방침이라고 답변하였다. 

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 28일 부정축재자 처리위원회를 설치하여 대기업의 소유주들을 구속하였지만, 군사정부는 이들로 하여금 비료, 제분, 시멘트,
화학섬유 등 핵심적인 수입대체산업 분야에 투자하도록 유인하고 대기업 소유의 은행주식을 몰수한 후 풀어주었다. 이후 산업개발과정에서 나타나는 대기업에 대한 여러 가지 특혜와 8.3 조치로 대변되는 재벌기업에 대한 적극적 뒷받침은 미국이 대한경제정책으로 구상하고 있었던 경제개발의 방향과는 다른 박정희 정부와 대기업 간의 유착, 중소기업의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부의 대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개발정책은 재벌이라고 하는 독특한 한국식의 기업형태를 만들었다.  - P340

한국의 경제개발의 시작은 수출주도형이 아니었다. 본고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1950년대와 1960년대 초까지 경제개발계획의 내용에서 나타나듯이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은 균형성장론의 내용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사회의 공감대를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군사정부 역시 사회적 공감대를 넘어서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할 수 없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지식인이나 관료, 그리고 군인과 정치인 중에서 수출을 통해 산업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수출에 대한 강조는 1963년이 지나면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고, 미국의 도움을 통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성공적인 수출증대가 이루어지면서 1968년을 즈음하여 ‘수출입국‘이라는 표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1965년 이후의 경제정책은 ‘수출‘에 중점을 두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농업분야에 대한 투자가 강조되고, 내수를 위한 산업정책이 계속 실시되었던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 P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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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경제기획원이 발표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주요 내용.
- 국가주도 : 국영기업
- 균형성장 + 주요 산업 불균형(전력과 중공업)
- 내자 중심 : 통화개혁


경제기획원에서 발표한 계획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산업화 전략이 균형성장론과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 계획에서 공업화의 목표로 ‘에너지원의 개발, 경제구조의 균형적 개발‘,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고용의 증대‘, ‘수출증대‘, ‘기술의 진흥‘의 순서로 중요도를 설정하였다. ‘‘‘  - P320

공업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졌던 바와는 달리 수출주도보다는 경제구조의 균형적 개발이 더욱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산업화 전략에서는 핵심사업에 중점적으로 투자하는 방식의 불균형성장론을 따르고 있지만, 목표에서는 수입대체산업화와 산업 간의 균형성장이 제시되었다. 

산업화 전략에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비료공장, 정유공장, 제철공장의 건설로, 군사정부 이전의 계획 내용을 계승하고 있다. 1차 산품을 중심으로 한 수출의 강조, 농림수산업 17.2%, 비료 4%, 전기 11.7%, 운수업 12.3% 에 대한 중점적 투자,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내자총액의 약 10%, 차관을 합하여 정부 총투자재원의 14% 등은 민주당 정부의 계획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이러한 투자계획으로는 2차 산품의 수출은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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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토우의 재발견
-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 자본주의 발흥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을 대체하는 새로운 정신
- 군부 지도자에 대한 새로운 평가. ˝새로운 지도력은 지식인-상인-군인의 연합˝이 되어야 한다. 젊고 농촌 출신이 바람직하고 전통적인 지배계급이 아니어야 한다 등등. 군대조직은 저개발국가에서 특권적 지위에 있지 않은 가난한 농촌 출신의 능력있는 젊은이들이 지도적 지위로 가는 유일한 길.



저개발국가들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식민지적인 경험으로 형성된 사회간접자본이며, 이것이 도약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강력한 민족주의를 형성시켰다는 것 역시 로스토우가 지적하고 있는 저개발국 또는 제3세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외부의 침입이 민족주의 태동하였지만, 그것이 후진국 근대화의 힘을 추동할 수 있는 최고의 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파악하였다. 

식민지의 경험뿐만 아니라 피부색으로 인한 열등감‘으로 인한 민족주의가 만연하고 있다는 분석은 저개발지역을 체험하거나 분석한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인식이지만,
로스토우의 분석이 가지는 특징은 이러한 민족주의가 자본주의의 이윤 동기 못지않게 저개발국가에서 경제개발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동력이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경제개발계획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의 하나가 정부의 계획에 대한 국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들고 있다. 즉, 국민적 통합성을 중시하는 것이다. 로스토우는 민족주의에서 유발되어 국민적 단합에 기반을 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민국가확립이 경제개발계획의 실행에서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특히 그의 경제성장 단계론 중에서 선행조건 충족의 단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민족주의는 자본주의적인 이윤동기에 못지않은 원동력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국민적 통합성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력을 경제개발계획으로 적극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이용은 다른 한편으로 민족주의를 이용하려고 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에 대한 대응이며, 민족주의가 적대화되지않도록 근대화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방안이었다. 
- P149

따라서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1950년대에 제3세계에 대하여 부정적 - 경제 개발의 수행을 통한 선진국화가 불가능하다는 것과 제3세계의 민족주의가 미국에 적대적인 성향으로 발전할 것 - 으로 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던 민족주의가 제3세계를 적극적으로 세계자본주의 체제 내로 흡수할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즉, 제3세계의 민족주의는 이들 국가들이 쉽게 공산화될 수 없도록 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유고나 중국, 그리고 북한은 공산주의 혁명 이후 소련 중심의 세계 공산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경향을 보였다. - P150

이러한 사회개혁에 대한 주장과 관련하여 눈에 띄는 것이 후진국 내의 지배세력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전근대적인 생산관계와 연결되지 않은, 그리고 해당 지역에서 가장 근대화된 기구와 관련이 있는 계급이나 계층을 새로운 사회지배 엘리트로 등장시키는 사회개혁이 경제개발원조의 가장 중요한 조건의 하나로 제시되었다. 

이들 새로운 정치지도력은 젊고, 농촌 출신이 바람직하며, 이들은 전근대적인 경제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인물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지도력은 지식인-상인-군인의 연합이 되어야한다고 설정하였다. 그럴 때 이들이 전근대적인 생산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개혁을 수행하면서 근대적 산업화에 더욱 매진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지도력의 창출에서 군대조직, 또는 군인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특히 강조되었다. 실제로 당시 군대조직은 저개발국가에서 특권적 지위에 있지 않은 가난한 농촌 출신의 능력있는 젊은이들이 지도적 지위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으며, 저개발국에서 군대는 기술적이고 행정적인 부분을 연마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또한 로스토우는 1950년대를 통해 등장한 군부정권의 군사 엘리트들은 공산주의적인 성향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있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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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브라이트, 평화봉사단이 아주 오래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1961년에 시작된 프로그램이구나.


사회개혁을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서 1950년대 미국은 교육 원조와 교환 프로그램 등을 통해 저개발지역에 긍정적인 미국관을 심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1960년대에 들어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1961년의 ‘풀브라이트 헤이즈 Fulbright-Hays 법안‘ 의 성립으로 미국 정부의 문화적 노력이 하나의 법안으로 통합되었다. 이 법안으로 새로운 교환계획, 미국의 책과 정기간행물의 번역, 미문화원의 활동에 대한 지원, 국제학술대회에 대한 지원, 해외의 미국학에 대한 지원 등이 강화되었다.

 1961년 이후 미국은 저개발국에 대학생들로 구성된 평화봉사단 peace corps 을 파견하기 시작하였고, 한국에도 많은 평화봉사단원들이 파견되었다. 평화봉사단원은 개개인에 따라 다양한 성향을 보였지만, 평화봉사단의 파견은 저개발 사회의 국민들이 미국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과 함께 이들의 생활의식의 개혁을 기도한 것이었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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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1년의 민족주의 발흥


한편, 4.19 혁명으로 인해 미 행정부가 받았던 또다른 충격은 한국에서 민족주의의 엄청난 고양이었다. 2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50년대 후반 미국 내에서 저개발지역 민족주의의 힘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한국에서 민족주의의 고양은 대한정책을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동인이 되었다. 1959년의 콘론보고서는 한국 내부에서 사회주의적 경향의 고양을 통해 새로운 움직임이 대두되고 있음을 경고한 바 있다. 후술할 팔리 Farley 보고서를 비롯한 1961년 초반 이후에 나온 미국의 문서들에서 나타나는 민주당 정부의 위기에 대한 인식 역시 4.19 혁명 이후의 민족주의 고양에 대한 위기의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 P250

미국은 이승만 정부 붕괴의 한 원인이 민족주의의 발양에 있다고 보았으며, 
민주당 정부 시기의 통일운동, 한미경제협정 반대운동 등 민족주의적인 흐름이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주요한 흐름이며, 동시에 한국을 내부적인 위기로 끌고 갈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정면 정부의 등장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한 것은 5·16 쿠데타였다. 미국은5·16 쿠데타를 4.19 혁명에서 발현된 민족주의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였다. 쿠데타 세력의 민족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요소는 민주당 정부 시절에 이룩된 한미 간의 공조에 균열이 가도록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경제개발을 위한 중요한 동인으로 작동하였다. 

즉, ‘사회주의적이고 미국에 협조적이지 못하다는 점과 함께 민족주의적‘이라는 인식은 미국의 대한정책에 부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 적극적으로 근대화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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