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를 팔아먹은 공산주의자들

수년간 국가를 희생시키며 개인적 부를 축적하는 데 몇 안 되는 진짜 제약은 체포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 덕분에 그런 거리낌도 사라졌다. 소련경제를 통제하는 관료들은 각자의 지위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앞을 다퉜다. 놀랍게도 한때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자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동독에 주둔한 소련군 장군들은 NATO의 위협에 대해 더 이상 걱정하지 않고 연료와 군용품을 암시장에 팔았다. 자유 기업의 싹을 근절하도록 훈련받은 KGB 관리들은 상품거래소를 만들었다. 국가계획위원회인 고스플란 관리는 소련 경제의 작동 방식을 둘러싼 해박한 지식을 이용해서 개인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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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권과 먹튀, 타라소프

큰돈을 버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공산품이나 원자재를 인위적으로 낮게 책정한 정부 가격으로 사서 훨씬 비싼 시장가격으로 파는 것이었다. 소련의 첫 백만장자인 아르툠 타라소프가 개척한 이 방법은 나중에 소련에서 성공한 사업가 다수가 따라 했다. 모스크바 시의회에서 엔지니어로 일한 타라소프는 소련의 폐품으로 미국 달러를 버는 법을 알아냈다. 나라 곳곳에서 고철을 샅샅이 찾아내어 헐값에 사서 서방국가에 판 다음 그 돈으로 컴퓨터를 구입해 러시아에 팔았다. 이 사업은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며 규모가 금방 커졌다.

타라소프는 1990년 말 수익성이 훨씬 더 좋은 석유 사업에 뛰어들었다. 새로 출범한 러시아 정부를 설득하여 자기 회사인 이스토크Istok가 원유 수백만 배럴의 수출허가권을 얻게 했다. 타라소프는 85센트에 해당하는 루블화로 원유 1배럴을 사서 해외에 20달러에 팔았고 이런 거래로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타라소프가 러시아 당국과 서명한 계약에 따라 이스토크는 프랑스 은행 계좌에 자금을 보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전제 조건도 있었다. 석유 판매로 얻은 외화는 “수확 ’90”이라는 인센티브 제도에 따라 러시아 농민들에게 이미 약속한 소비재 물품을 사는 데 사용해야 했다.43

1991년 4월 초 타라소프를 비롯해 타라소프와 함께 일하던 사업가들이 러시아를 떠났다는 뉴스가 나왔다. “수확 ’90”에 배정한 돈도 프랑스 은행에서 사라졌다. 러시아 농민들은 또다시 손해를 봤다. 정부 조사에 따르면 농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기 위해 마련한 수입-수출 협정에서 농민들이 얻은 유일한 혜택은 하자가 있는 고무 부츠 수천 켤레뿐이었다. 검찰은 타라소프를 “횡령”과 “배임” 혐의로 기소했지만 공소시효 때문에 정식 기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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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 대 옐친
- 사회주의를 재정의하려던 고르바초프
- 고통스런 전향을 겪은 옐친


스타일과 성격보다 훨씬 큰 차이는 가장 결정적인 질문, 즉 “공산주의는 끝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태도였다.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재정의해서 그 의미를 많이 퇴색시키려는 의지는 있었어도 공산주의 이념을 완전히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러시아가 11월 9일에 선택했다고 알려진, 돌이킬 수 없는 “사회주의 선택”에 대해 말했다. 고르바초프에게 레닌은 난공불락의 권위로 남았다. 반면 옐친은 고통스럽고도 공개적인 전향 과정을 겪었다. 공산당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에 자극을 받아서 가장 기본적인 정치적 신념을 재검토하고 더 이상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옐친의 지적 발전에서 한 가지 전환점은 미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1989년 9월, 더 구체적으로는 텍사스 휴스턴의 슈퍼마켓을 방문했을 때였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식품과 가정용품이 깔끔하게 쌓여있는 선반이 끝도 없이 이어진 광경에 놀라기도 했고 낙담하기도 했다. 미국을 처음 방문한 다른 소련인 방문객과 마찬가지로, 그런 모습은 옐친에게 자유의 여신상이나 링컨기념관과 같은 관광명소보다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그런 광경이 이례적이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더 그랬다. 대부분 소련인이 상상할 수 없는 풍부한 소비재 상품을 일반 시민이 몇 시간씩 줄을 설 필요 없이 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전부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칙칙한 공산주의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상대적으로 특권층인 엘리트에 속하더라도 서방의 슈퍼마켓 방문은 온몸이 마비되는 충격을 받게 된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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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특수 공고 출신들이 상급 기능공으로서 양성되었다면, 1990년대 공고 학생들은 보통 기능공으로서 양성되었다는 점이 또한 크게 다르다. 오히려 1990년대에는 상급 기능공 양성 기관이 직업 훈련원으로 바뀌었다는 데 큰 특징이 있다.

1993년 신경제 5개년 계획 인력 계획에서는 일반 기능공 양성을 민간 훈련원에 맡기고, 공공 훈련원은 기능 대학이나 직업 전문 학교로 개편하는 직업 훈련 정책을 세웠다. 즉, 공공 훈련원은 국가적인 전략업종과 기업들이 실시하기 어려운 특수 직종 및 고급 기능공 훈련에 중점을 두도록 전략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시설이 우수한 공공 훈련원은 기능 대학으로 개편하여 고급 기능공을 양성하도록 했고, 나머지 공공훈련원은 직업 전문 학교로 개칭하여 특수 대상자 양성 훈련, 향상·전직 훈련 위주로 운영하도록 계획하였다. 신정부가 계획한 이러한 공공 직업 훈련원의 역할 변화는 기능 인력 양성에서 중심의 변화를 예고한 것이었다.

즉, 1970대는 우수 기능공 양성이 특수 공고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신정부에서는 공공 직업 훈련원으로 그 역할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공고는 2.1 체제를 실시하면서 학교교육을 줄이는 정책으로 가면서, 공공 직업 훈련원을 대학으로 승격시킨 계획은 우수 기능 인력 양성에서 공고와 직업 훈련원의 역할을 과거와 뒤바꾼것이었다.

그러므로 1990년대 공고 졸업자들은 산업 현장에서 단순 기능직에종사하는 수준으로 하락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신경제 5개년계획의 직업교육정책을 통하여 1990년대 공고 학생들은 1970년대와 같이 경제 발전에 필요한 핵심 기능 인력으로서 양성된 것이 아니라, 중소 제조럽체의 단순 기능직 인력난을 해소...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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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993년간 부족 현황에서 1-4규모 기업에서는 숙련 기능자의 부족 인원이 가장 많았던 반면에 5규모 이상의 기업에서는 미숙련 기능자의 부족 인원이 많았다. 즉 499인 이하 기업은 숙련 기능자가 가장많이 부족하였고, 500인 이상의 대기업은 미숙련 기능자가 부족한 대조적인 현상을 보였다.
그런데 미숙련 기능자의 부족과 숙련 기능자의 부족은 서로 상당한차이가 있다. 미숙련 기능자는 직업 훈련원이나 공업계 고교의 졸업자들이 해당되므로, 이들 인력이 부족했다는 것은 양성 인원의 절대수가부족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들이 생산 기능직으로의 입직을 기피해서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숙련 기능자의 경우는 양상이 다르다.
이들 인력이 부족한 것은 이들이 타 직종으로 전직했거나 회사를 옮겨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 P297

1990년대 공고 확대 정책이나 「2.1 체제」 실시는 이러한 기능 인력부족 현황을 토대로 분석함으로써 그 성격과 타당성을 점검할 수 있다.
노동부의 정의에 따르면 숙련 기능자는 6개월 이상의 기능 습득을 요하는 기능 직종에서 3년 이상의 경력이 있는 자이고, 미숙련 기능자는현재 교육 중에 있는 자이므로, 공고 학생이나 갓 졸업생은 미숙련 기능자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1990년대 인력 정책에서 공고 확대는 미숙련 기능자의 공급을 늘리는 것이었다. 현장 실습을 1년으로 한 「2.1 체제」 역시 미숙련 기능자의 공급 확대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위의 인력 부족 현황에서는 숙련 기능자의 부족 인원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므로 공고 확대를 통한 미숙련 기능자 양성은 노동 시장의 어려움에 맞게효율적으로 계획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숙련 기능자를 공급하려면공고 재학 기간과 현장 경력을 고려할 때 적어도 6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1990년부터 공고, 일반계 고교 직업교육과정, 직업 훈련원 등의수용 능력을 늘리는 정책이 1992년의 조사에서 정책 효과가 거의 없었다는 응답이 많았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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