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들은 아이들을 소중히 하는데 아이들도 부모를 공경합니다. 그 이유는 부모가 죄를 지어 도망갔을 때는 아이들이 그 죗값을 받아야 하며,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는 부모가 그 죗값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노예나 그와 비슷한 사람들은 거의 아이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커서 일을 할 만하면 그들의 주인이 그들을 데리고 가기 때문입니다. - <하멜표류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32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행자를 위한 숙박 시설, 즉 여관은 그다지 없습니다. 여행자들은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면 담을 쌓아 올린 집에 들러서 그 집에 귀족이 없으면 잠을 청할 수 있고 밥은 자기가 먹을 만큼의 쌀을 내놓습니다. 집주인은 즉시 이것으로 밥을 지어 반찬과 같이 대접해야 합니다. 마을에서 흔히 이런 것을 교대로 하는데 누구도 이를 기피할 수는 없습니다 - <하멜표류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32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예의 수는 전 국민의 반 이상이 됩니다. 그 이유는 자유민과 노예, 또는 자유민과 부인과 노예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노예로 인정되기 때문입니다. 노예와 노예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그 여자 노예의 주인에게 소속됩니다. - <하멜표류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32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역사를 보면 조선 시대 균역법이 대표적인 인두세입니다. 균역법은 1인당 군포 1필을 바치는 세금인데, 군포 1필은 요즘으로 치면 100만 원 정도라고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민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는 액수지요. 군역법은 기존의 2필이던 군포를 1로 줄인 획기적인 제도라고 평가받지만, 1필도 백성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을것 같습니다. 조선도 청나라처럼 인두세를 없애는 개혁을 했더라면훨씬 좋았을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병농분리의 두 가지 길




송대의 주호객호제, 호등제에 보이듯이 농민편성 자체가 소유를 기준으로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직역의 형태로 농민은 말단행정업무에 동원되었다. 동시에 기본적으로 농민을 군사편성에서 제외했다. (일본 율령 군제의 모범이었던) 부병제는 폐지되고 이후에는 용병제가 기본이 되었다. 초기 전제국가가 병농일치를 기본으로 하였던 것에 대비되는 ‘병농분리‘가 이때 실현되었다. 봉건사회에서 병농분리는 지배계급이자 사회관리의 중추를 점하는 무사가 무력을 점유하는 과정이었지만,
전제국가에서의 병농분리는 조세납입으로 군대를 지탱하는 농민에게서 용병을 창출해내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은 전제국가 최대의 업무를 인민의 노역이 아니라 재물로 유지하는 체제로 변경하는 것을 의미했고, 재정은 액면상 현저하게 팽창하게 되었다. 국가적 물류시스템의 정비가 요청되고 전매제도가 강화되었으며, 국가적 지불수단으로 동전이 대량으로 공급되었다.

행정 형식이 정비되고 전제가 순화됨에 따라 점차 사회로부터 국가가 분리되었다. 이런 조건에서 소농민경영의 발전은 ‘경지를 부여받은 농민의 군사편성‘이라는 초기 전제국가의 원칙을 변경시켰다. 전제국가의 통합능력은 저하되기 시작했다. - P1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