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형성된 당=국가제
공권력 창출의 난관과 당의 등장중국에서는 사회전체를 대표하는 공권력을 사회 속에서 창출하는 것이 어려웠다. 임의단체 대표제 권력 구상도 미성숙한 상태에서 위기를 맞았다. 여기에 사회를 대신해서 일정한 정책을 수행하고 통일적으로 사회를 규율하는 임의단체로서 권력 집중 원리를 가진 당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 P252
선거에 의한 공화정 창출의 실패 그러나 실시된 선거의 실상은 매우 초라했다. 광둥에서는 선거 비용 부담의 명목으로 선거권자에 부과된 노역에 대응하는 면공비를 내주는 식으로, 한 현당 수만 명의 표가 매수되어 당선이 확보되었다. 낙선후보에 대해서 당선자가 배상을 지불할 것을 후보자들이 사전에 약속하는 연맹 배상 및 출자자를 현 정부 자리에 임명하는 것을 사전에 약속하여 선거자금을 모으는 합고 연합 등이 널리 행해졌다. 후난에서도 성 본부 단계부터 선거인 명부가 위조되었고 그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표의 매매와 무력 쟁탈이 발생했다.이렇게 해서 선출된 현장 및 성 의회 의원이 사회에서 권위있는 집행자 및 결정기관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광둥 등의 상황을 보면 당선자들도 자신들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후난에서도 ‘민주적 헌법‘을 제정자 자신이 무시했고 의회는 자오형티 총사령관을 통제할 수 없었다. - P248
임의단체 대표제실체가 없었던 선거제도에 비하면 이것은 사회적 기반을 갖는 권력형성으로 일보전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태인 단체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자치운동성 권력을 지탱하는 단체 가운데 몇 개가 앞에서 본 ‘전제국가형의 단체‘였다는 문제만이 아니다. 이른바 구식 사단만이 아니라 신식 사단도 기초가 강고하지 못했다. 후난의 농민협회가 자립적인 조직력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은, 북벌군이 북상했을때 경이적으로 조직을 확대했으면서도 그런 조건이 사라졌을 때 급속하게 해산된 데서도 볼 수 있다. - P251
유럽,일본과 다른 중국의 근대국가 건설
일본과 비교해서 분명해진 첫 번째 중요한 점은 중국 전제국가에서 근대국가로 이행할 즈음에는 이른바 시민혁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주제의 폐절, 중간 단체 특권의 부정, 봉건적 토지소유에서 근대적 토지소유로의 이행 같은 변혁들은 모두 절대주의에서 근대국가로 이행할 때 나타난 특수한 현상에 불과했다. 중국의 경우 영주제는 물론 특권적인 중간단체도 단순한 지주제와는 다른 봉건적 토지소유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것들의 폐절이 변혁과제가 될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집중력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통일적인 국가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양무운동은 물론 신해혁명이나 난징 정부조차 종래 사회 편성의 근본적인 변혁이나 권력구조의 폐절과 재구축 없이도 새로운 정권을 창출했다. - P233
영주제적 분권성을 내부에 갖지 않고 상대적으로 느슨한통합을 이미 실현한 국가를 전제로 하여, 그것이 근대적인 정책을 시행하는 주체로 변화한다. 동시에 그 정책들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통합 능력을 배양한다라는 상호규정적인 두 가지 과제를 달성해가면서 중국은 연속적으로 근대국가에 접근해갔다. 5장에서 본 대로 양무운동 · 광서신정 · 베이징 정부 · 난징정부라는 일련의 시대는 연속성을 가지면서, 점차 근대경제 건설을 위한 일관성과 통합성을 갖춘 정책이 정비되던 단계였다.동시에 약간의 후퇴국면을 포함하면서도 그 정책들을 실현시킬 정치적 역량이 증대해가는 과정이었다. 중국에서는 정부가 시행하는 정책의 근대화 과정이 근대국가 건설과정이었다. - P234
개항 전 시장의 존재양태는 개항 후 양국 면업의 동향을 규정했다. 면화시장이었던 중국은 영국의 기대와 달리 외국면제품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개항 직후에 수입이 증대한 것은 오히려 인도산 면화였다. 면포시장 형성이 전국적으로 시작되었던 일본에는 고기면포機綿布보다 값이 싼 영국 기계제면포가 급속히 유입되어 선진지대면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방직분리를 이루고 있었던 고기방직업자는 상대적으로 싼 기계 제면사로 원료를 변경하여, 곧 방직설비의 중간적 개량을 거쳐 원시적 산업혁명으로 나아갔다.면업에 관한 한 중국에서는 일본에 비해 상품생산이 일찍 시작되었고 유통의 양적 확대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생산과 소비의 조직화, 생산의 분업화가 진행되지 않았고 그것이 어느 단계 이후 거꾸로 시장이 사회 전체로 확대되는 것을 제약하면서 대량 생산의 전개를 가로막았다고 생각된다.
봉건제의 병농분리 대 전제국가의 병농분리- 봉건제는 군사계급의 성장- 전제국가는 현금재정의 확대
기본적으로 농민을 군사편성에서 제외했다. 일본 율령 군제의 모범이었던 부병제는 폐지되고 이후에는 용병제가 기본이 되었다. 초기 전제국가가 병농일치를 기본으로 하였던 것에 대비되는 ‘병농분리‘가 이때 실현되었다. 봉건사회에서 분리는 지배계급이자 사회관리의 중추를 점하는 무사가 무력을 점유하는 과정이었지만,전제국가에서의 병농분리는 조세납입으로 군대를 지탱하는 농민에게서 용병을 창출해내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은 전제국가 최대의 업무를 인민의 노역이 아니라 재물로 유지하는 체제로 변경하는 것을 의미했고, 재정은 액면상 현저하게 팽창하게 되었다. - P167
부모를 정중히 장례 지내고, 해야 할 것을 다 마친 다음에는 장남이 집을 소유하고 그에 딸린 모든 것을 소유합니다. 땅이나 그 밖의 물건들은 아들 사이에 분배됩니다. 아들이 있는데 딸들이 유산을 분배했다는 말은 아직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 <하멜표류기> 중에서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3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