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개발붐과 와하비즘의 전파

사우디는 이슬람권 각국의 지식인과 노동자들을 국내로 끌어들였다. 국내의 개발을 담당할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무슬림형제단 대원 등 이슬람 지식인들이 자국의 탄압을 피하고 일자리를 찾아서 사우디로 왔다. 이집트, 팔레스타인, 레바논, 시리아, 수단, 인도 등 서남아시아에서 대학 졸업장을 가진 젊은이와 지식인, 노동자들이 사우디 등 걸프 지역 왕정 국가로 몰려들었다. 1975년경에는 이런 이민자들의 수가 120만 명에 달했다. 이 중 60.5퍼센트가 아랍 출신이었다. 이 수는 1985년이 되면 515만 명으로 는다 - <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지음 > 중에서

사우디 등에서 돈을 벌어 1970년대 후반부터 귀국한 이들은 본국에서 중산층으로 편입됐다. 사우디 와하비즘의 세례와 물질적 혜택을 누린 이들은 서구화를 지향하던 전 세대 중산층과는 달리 독실한 무슬림의 삶을 영위했다.

사우디도 외국 이민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이집트 등에서 온 이슬람주의 지식인들은 사우디 학계 등지에서 쿠틉 등의 이론에 바탕한 정치적 이슬람을 전파했다. 외국의 이슬람주의 지식인들이 전파하는 정치적 이슬람은 와하비즘 토양과 결합해, 사우디에 지하드주의의 씨를 뿌리기 시작했다.- <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지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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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중동전쟁과 석유위기

1973년 10월 6일, 이집트는 시리아와 함께 이스라엘을 전면적으로 침공했다. 4차 중동 전쟁이었다. - <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지음 > 중에서

전쟁 와중에,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한 공개적인 군사 지원을 밝혔다. 아랍권은 격앙했다. - <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지음 > 중에서

미국의 이런 조처에 대응해, 대부분 아랍 국가들로 구성된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이 전쟁으로 이미 급등한 유가를 70퍼센트나 인상했다. 19일에 닉슨 행정부가 이스라엘에 대한 22억 달러의 원조를 의회에 요청하자, 리비아가 선두로 미국에 대한 석유 금수를 단행했다. 최대 석유 수출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다른 아랍 국가들도 20일, 리비아를 뒤따랐다. 석유 금수는 산유량 감축이 덧붙여지며, 서유럽 국가들과 일본에도 이어졌다. - <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지음 > 중에서

유가는 갑자기 배럴당 3달러에서 무려 네 배인 12달러까지 폭등했다 - <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지음 > 중에서

1969~1974년까지 사우디 정부 예산은 92억 달러였는데, 그 향후 5년 동안은 1,420억 달러로 무려 열다섯 배 가까이 증가했다. - <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지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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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대전을 이해하려면 지리적 지식이 필요하다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국경이 곧 요단강이다. 팔레스타인 자치구는 요단강 서안 즉 west bank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거점 암만은 요단강 동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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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치적 테러의 기원

1968년 7월 23일,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의 엘알 여객기 납치 사건은 현대 정치적 테러 투쟁의 기원이다.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로마에서 출발해 이스라엘 텔아비브로 향하던 이스라엘 여객기를 납치해 알제리 알제에 착륙시켰다. 게릴라들은 나머지 승객들을 석방하고는 이스라엘 시민과 승무원들만을 인질로 잡았다. 이들은 5주간이나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끌며 인질석방 협상을 이어갔다. 결국 이스라엘이 아랍 게릴라 16명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모든 인질들이 풀려났다. 게릴라들도 신변을 보장받았다. 아무도 죽지 않고,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그 정치적 목적을 달성했다.

엘알 여객기 납치 사건은 곧 뒤따를 수많은 여객기 납치와 공격의 원조 격 사건이었다. 처음에 납치범이나 당국은 인명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테러의 횟수가 더해지면서 이런 자세도 바뀌어갔다. - <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지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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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전쟁과 세속주의의 패퇴

시나이, 예루살렘, 서안, 골란 고원이 이스라엘의 점령지가 됐다. 서안 지구 등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건설할 국가의 땅으로 유엔이 예정한 곳이었다.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 땅, 골란 고원은 시리아 땅이었다. 전쟁은 6일 만에 종료됐다. 현대전 사상 가장 압도적이고 신속한 승리였다. 그것도 한 나라가 인구 수십 배의 세 나라를 상대로 한 승리였다.

6일 전쟁은 중동 현대사의 전환점이었다. 세속주의 근대화 세력과 이슬람주의 세력 사이의 관계가 다시 조정됐다. 대중과 지식인들이 6일 전쟁에서 완패한 나세르 등 세속주의 근대화 지도부 세력에 실망했다. 이들의 심적 공백을 이슬람주의 세력이 채우기 시작했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를 넘어, 시리아, 요르단, 아랍에미리트 등 아랍과 중동, 더 나아가 이슬람권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 <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지음 > 중에서

아랍 국가들에서 정권을 잡고 있던 세속주의 근대화 지도부들은 대중의 지지를 잃고 독재정권이 되어갔다. 대표적으로 나세르는 모욕을 당했고, 이집트에서 그의 신화는 깨졌다. 그는 아랍 세계에서 지도력을 상실했다. 그저 물리력으로 정권을 버티는 권력자로 추락했다. 시리아와 이라크에서는 바스주의자들이 득세했다. 국가를 찬양하는 사회주의에 아랍민족주의가 결합된 바스당에는 장교들이 대거 가입하면서 군국주의 성향까지 덧붙여졌다 - <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지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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