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등지서

사도세자의 피 묻은 적삼, 누가 과연 충신인가? 오동나무로 짠 뒤주, 나는 세자 죽인 일을 후회한다.”

영조가 사도세자 신주 아래 깔아둔 요의 솔기를 뜯고 그 안에 간직하게 했던 진짜 속내가 이렇게 해서 비로소 세상에 드러났다. 오랫동안 칼집에 들어 있던 칼이 스르렁 소리를 내며 빠져 나오자, 대신들은 심장과 뼈가 다 덜덜 떨렸다.

금등은 비밀문서를 쇠줄로 묶어 단단히 봉해 넣어둔 상자를 일컫는 말이다. 개봉할 수 없는 문서란 의미다. 금등지서에 적힌 두 구절은 고사가 있다. 당나라 때 안금장과 한나라 때 전천추는 충성스러운 간언으로 이름 높던 신하였다. 또 한나라 무제武帝는 강충江充의 참소로 여태자戾太子를 죽였다. 나중에 무고인 것을 알게 된 무제가 강충의 일족을 멸하고, 태자 죽인 일을 후회하여 귀래망사지대歸來望思之臺를 세웠다.

그러니까 금등지서에 적힌 내용의 의미는 이러했다. ‘내 아들 사도세자가 간신의 모함으로 오동나무로 짠 뒤주에 갇혀 원통하게 죽었다. 이를 위해 바른말로 간언할 안금장과 전천추 같은 신하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한무제가 죽은 아들을 위해 세웠다는 귀래망사지대를 생각하면서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고, 돌이킬 수 없는 그 시간을 깊이 후회한다.’

청천벽력의 말씀이었다. 생전에 사도세자는 홍계희洪啓禧를 임금과 세자를 이간한 강충과 같은 인물로 지목하여 비판한 일이 있었다. 노론 벽파는 금등지서 속에서 귀래망사지대 언급을 접하고는 깊은 충격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동안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 < 파란 2, 정민 지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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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다산 연구에 중간은 없었다. 천주교 측에서는 다산이 한때 배교했지만 만년에 회개해서 신자로 죽었고, 국학 쪽에서는 신자였다가 배교한 뒤로는 온전한 유학자로 돌아왔다고 했다. 다산의 천주교 신앙은 일반적인 범위를 훨씬 상회하는 심각한 것이었다. 그의 배교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 진실은 중간에 있는데 전부냐 전무냐로 싸우면 답이 없고, 다산의 정체성만 흔들린다. 사람이 이랬다저랬다 할 수는 있어도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

- < 파란 2, 정민 지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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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논쟁

동아시아에서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우상숭배로 규정한 칙서는 가톨릭의 해묵은 논쟁과 문제 제기, 그리고 이에 대한 오랜 토론 끝에 내려진 결론이었다. 이 결정은 이전부터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신부들의 보유론적 관점과 적응주의 원칙을 거부한 것이었다. 이 문제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은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관점과 스페인의 원조를 받은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등의 교조주의적 관점이 충돌하면서 야기된 긴 논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필 이때 북경에서 프랑스 예수회 교단이 해체 축출되면서 프란치스코회 교단이 새로 자리 잡은 시점인 것이 화근이었다. 프란치스코회 출신의 구베아 주교는 이승훈이 조선으로 돌아간 이듬해인 1785년에 북경에 부임했고, 예수회 출신 양동재 신부는 이미 광동으로 밀려난 상황이었다. 당시 서양 선교사들의 선교권 쟁탈전은 전쟁에 가까웠다. 이 해묵은 선교권 전쟁의 와중에서 정작 새우등이 조선에서 터졌다. - < 파란 1, 정민 지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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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 평생의 굴레




다산에게 서학, 즉 천주교는 평생 헤어날 수 없었던 굴레였다. 결정적 순간마다 천주교 신앙 문제가 다산의 발목을 낚아챘다. 정조의 눈먼 사랑과 두둔이 없었다면 다산은 진즉 죽었을 목숨이었다.

조선 천주교회의 창립과 확산, 그리고 참혹한 박해의 과정에서 다산은 늘 한복판에 있었다. 조선 천주교회 창립 주역인 이벽은 큰형수의 동생이었고,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조선 교회 창설의 리더 역할을 맡았던 이승훈은 누나의 남편이었다. 형님인 정약전과 정약전의 스승 권철신, 권일신權日身 형제도 초기 교회 창립의 핵심 주역이었다.

형 정약종은 평신도 대표로 있으면서 『주교요지主敎要旨』란 천주교 교리서까지 썼다. 그의 아내 유소사柳召史 체칠리아와 딸 정정혜丁情惠, 아들 정하상丁夏祥은 모두 순교하여 가톨릭교회의 성인품에 올랐다. 먼저 세상을 뜬 큰아들 정철상丁哲祥은 복자福者가 되었다. 큰형 정약현의 딸 정난주丁蘭珠는 무력으로 쳐들어와서라도 종교의 자유를 얻게 해달라는 탄원으로 온 조선을 발칵 뒤집어놓은 황사영黃嗣永의 아내였다. 조상의 신주를 태우고 제사를 거부해 천주교 탄압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게 한 윤지충尹持忠은 다산과 사촌 간이었다. 윤지충을 천주교로 끌어들인 것도 바로 다산 형제였다. 정약종과 윤지충 또한 2014년 복자품에 올랐다.

다산과 친가나 외가로 4촌 이내 범위 안에서 가톨릭교회의 성인과 성녀가 셋, 복자가 셋씩이나 배출되었다. 순교자 수는 훨씬 더 많다. 사우師友를 포함해 다산과 관련된 순교자 명단은 초기 조선 가톨릭교회의 핵심 그룹 그 자체였고 또 전체였다. 그의 집안은 성인과 순교자의 가문이었다.
< 파란 1, 정민 지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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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헌법의 전제, 왕권체제가 더 강력하다
- 미국의 독립을 유지하려면 왕권체제와 유사한 행정권 우위가 필요하다. 다만 견제 장치가 필요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13개 주가 결성한 공동체를 보존해야 하며, 이 공동체의 힘으로 눈앞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공동체를 해산하고 13개 식민지가 각자 원래의 독립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거의 왕권이나 마찬가지인 집중된 행정권이 필요하다. 그래야 아직 대부분이 왕권의 지배를 받는 유럽 각국에 대항할 수 있다. 연방주의자는 왕권이 민주보다 강력하고 효율적이라고 믿었기에 왕권의 개념을 가지고 행정권을 구축하는 사상의 모험을 감행했다. 그런 후에 몽테스키외가 내세웠던 삼권분립의 상호 견제 이론을 동원해 확대된 행정권을 제한하고, 주권재민이라는 엄격한 헌법 정신을 통해 국가의 모든 행정권을 견제 및 구속한다.

그들은 영국의 정치를 잘 알고 있었기에 영국을 본보기로 한 정치 제도 구축을 확고하게 포기했다. 이를 대신한 것이 몽테스키외와 루소의 정치 이론을 근본으로 하는 이념이었다. 미국 헌법에 담긴 이념은 근원과 내력을 지녔다. - < 미국 헌법을 읽다, 양자오 지음, 박다짐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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