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의 심장부


1998년 그린스펀이 브룩슬리 본 앞에서 가르치듯 설명한 대로 파생상품 가격은 본래 ‘기초자산 시장‘의 가격에 대응해야 했다. 모기지 보험 파생상품은 실제 주택을 사고파는 현실의 부동산 사업에 관한 정보를 종합해야 했다. 그러나 2000년 상품선물 현대화법이 통과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관계가 역전되었다. 

퀀트 공식은 주택 가격이 상승하면 주택 소유자들의 부도 위험이 줄어든다고 계산했고, 이에 따라 신용파생상품의 가격도 낮아졌다. 그러자 은행은 이를 모기지를 더 발행해도 문제가 없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퀀트 공식은 주택시장 전체를 고려해 위험을 계산했으므로 은행과 신용평가기관들은 AAA등급으로 평가되는 모기지 묶음에 구체적으로 어떤 모기지가 들어 있는지 알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혹은 그렇게 믿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지름길을 앞에 둔 은행들이 그 ‘정보‘에 의문을 품을 이유가 없었다. 은행이 버는 수익 대부분이 모기지를 발행하고 이를 유가증권으로 묶어 연기금과 다른 은행에 판매하는 데서 나왔다. 그리고 은행이 더 많은 돈을 빌려줄수록 주택 가격이 상승했고, 퀀트 모형은 사람들이 모기지를 상환하지 못할 위험이 낮아진다고 평가했다. 

퀀트들이 사용한 모형은 부정확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 위험이 날로 커지는 상황에서 시장에 모기지가 더 안전해진다는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퀀트 모형이 보낸 신호는 주택 시장을 조정해 거품을 키우는 되먹임 고리를 만들었고, 부동산 건설업계는 호황을 맞았다. 개의 꼬리가 몸통을 흔들었고, 마법이 현실 세계를 지배하고 재정리했다. 모두 정보 비대칭과 기만적인 가격을 만든 잘못된 공식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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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선물시장의 등장과 규제


마법 경제는 곧 실물 경제를 훌쩍 넘어섰다. 1875년 일간지 <시카고트리뷴>은 시카고 곡물 산업의 실물 시장 규모를 2억 달러로 파생상품 시장 규모를 그 열 배에 달하는 20억 달러로 추산했다. 투기자들은 위험 프리미엄에 만족하지 않고 선물 가격에 막대한 금액을 베팅했다. 파생상품이라는 마법의 서류가 나오기 전만 하더라도 밀이나 돼지고기에 투기하기란 엄두도 못 낼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실물 상품을 투기하려면 창고를 빌리고 상품을 인도받아 저장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투기자는 선물을 매입하기만 하면 되었다. 실물경제와 마법경제를 나누는 벽은 머지않아 사라졌다. 투기자들은 밀, 귀리, 돼지고기 등의 공급을 독점해 실물 시장을 장악함으로써 선물 가격을 조작하려 했다. 파생상품시장에서 벌어지는 투기가 실물 시장을 바꾸고있었다. 개의 꼬리가 몸통을 흔든 것이다. ** 가격은 걷잡을 수 없이 출렁였고, 시장은 다시 혼돈에 빠졌다. 결국 1934년 프랭클린 루스벨트대통령이 시장을 규제하고 투기를 제한하자 비로소 질서가 찾아왔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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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과 물가 정보

신뢰할 수 있는 전신 서비스가 미국 유럽 인도 호주 및 일본을 연결한 것은 1860년대 1870년대가 되어서였다 전시는 실시간으로 다른 나라의 물가를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수출 업자들은 더 이상 불확실한 상태로 상품을 선적할 필요가 없었다. 수출할 물건을 실을 선박이 닻을올리기 직전까지 수출업자는 선적 목적지를 변경하거나, 해외 고객에게 더 높은 가격을 요구하거나, 가격이 오르기를 희망하며 상품을창고로 다시 옮길 수 있게 됐다. 마찬가지로 수입업자는 가격과 공급동향에 대한 최신 정보를 기반으로 약정을 하고 앤트워프에서 판매할 밀을 러시아, 호주, 아르헨티나 또는 북미 가운데 어느 곳에서 구입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지를 마지막 순간에 결정할 수 있게 됐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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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 무역항과 수입세 장악

 1635년부터 2세기 이상 동안 일본은 유럽 상인들이 한 곳에서만 무역하는 것을 허용했고, 중국 상인들도 다른 한 곳에서만 무역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외국 사상의 확산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수입세 징수를 용이하게 하기도 했다. 중국은 1685년 모든 수입품에 20퍼센트의 관세를 부과했으며, 1757년에는 모든 대외무역은 광저우남부 항구에 있는 세관을 통과하도록 요구했다. 상인이 그러한 부과금을 지불했든 회피하기 위해 추가비용을 들였든, 수입업자의 청구서에는 통행료와 관세가 추가됐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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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관세들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지역 통치자와 종교 관계자는 화물이 강을 건너거나 마을에 들어올 때마다 통행료를 걷었다. 독일이 아직 공작령, 자치주, 공국, 독립 도시국가 등의 집합체였던 1500년대 후반에 한 스위스 무역상은 바젤과 쾰른 사이에서 31번의 통행료를 내야 했다고 보고했으며, 1765년 그의 후손들은 바이에른에서만 거의 500곳에서 부과된 세금에 직면했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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