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드라시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자기네가 당했던 부당한 억압의 역사는 분명하게 드러내면서도 이중제국 시절 크로아티아를 비롯한 발칸 민족들의 독립투쟁을 오스트리아와 손잡고 짓밟은 일이나 영토를 회복하려는 욕심에 나치 독일과 손잡았던 사실은 입에 올리지 않는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과거사를 일관성 있는 태도로 소화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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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민족국가였던 오스트리아에서는 헝가리인, 이탈리아인, 폴란드인이 잇따라 봉기해 독립을 요구했다. 특히 헝가리 왕국에서는 코슈트 러요시가 독립선언과 함께 공화정을 선포하였고 헝가리 독립군은 오스트리아군과 황제에 충성하는 크로아티아 왕국[2] 총독 요시프 옐라치치의 군대를 무찌르고 헝가리 전역을 장악했다(나무위키)

언드라시(Andrássy Gyula, 1823-1890)는 오늘날 슬로바키아공화국에 속하는 곳에서 태어났다.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백작의 아들이었던 그는 소년 시절부터 민족주의 정치 운동에 참여했고 세체니 이슈트반의 눈에 들어 스물세 살에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848년 귀족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크로아티아 영토전쟁에 종군했으며 헝가리혁명 정부의 명에 따라 이스탄불로 파견되어 오스만제국 정부의 협력을 끌어내려고 했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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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과 파리에서 십 년 망명 생활을 하면서 유럽의 정세와 사회 변화를 연구하고 외교를 공부한 끝에 언드라시는 정치적 급진주의와 결별하고 1858년 헝가리로 돌아왔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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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제국을 헝가리왕국과 오스트리아왕국으로 분할하되 두 왕국의 왕을 요제프 황제가 겸직하고 헝가리의 내치는 총리를 따로 지명해 맡기는 방안이었다. 1867년 대타협이 성립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출범했고 언드라시는 헝가리왕국의 총리직과 제국의 외무장관 자리를 받았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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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후반 마차시 1세의 마지막 황금기가 끝난 후 독립 공화국을 설립한 1918년까지 머저르의 후예들은 오스만제국과 합스부르크제국의 지배를 받고 살았다. 1867년의 ‘역사적 대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성립한 후에야 헝가리 사람들은 독일어와 함께 자기의 언어도 공용어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게 끝은 아니었다. 헝가리는 나치 독일과 소련의 침략과 지배를 겪었으며 새 헌법을 채택하고 자유 선거를 실시한 1990년에 처음으로 독립한 민주공화국이 되었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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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없었던 카를 6세가 자신이 죽고 나서 영토가 갈가리 찢어질까 걱정한 나머지 딸과 딸의 자손이 영토를 상속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칙을 만들어 둔 덕분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0년 권력을 쥐었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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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지위는 ‘신성로마제국 황후’였지만 실제로는 40년 동안 합스부르크제국을 통치한 황제였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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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가 오로지 타고난 성격과 재능 덕분에 유능한 군주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남자 형제가 없었기에 어려서부터 군주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고 권력 행사와 관련한 직접 간접 경험을 쌓았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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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씨

시씨의 유별난 ‘헝가리 사랑’은 언드라시(Andrássy Gyula) 백작과 관련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합스부르크제국은 헝가리 무장독립투쟁의 지도자 언드라시를 ‘국가의 적’으로 간주했다. 붙잡지 못한 반란의 수괴가 얼마나 미웠는지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하고 인형을 교수대에 매달기까지 했다. 그랬던 언드라시가 긴 망명 생활을 끝내고 돌아와 갑자기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하면서 헝가리의 자치를 허용해 달라고 제안했을 때 시씨는 호감을 품었던 듯하다. 요제프 황제와 언드라시 백작은 1867년 헝가리왕국에 국방·재무·외교를 제외한 자치권을 부여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을 출범시켰다. 황제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왕을 겸했고 언드라시에게 헝가리 총리와 제국 외교장관 자리를 주었다. 제국의 변방이었던 헝가리는 국가의 지위를 얻었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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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11세기 스위스 북부 아르가우 지방의 어떤 귀족이 합스부르크(Habsburg)라는 성(城)을 지었다. 그때만 해도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시골 귀족이었을 뿐인데, 2백 년쯤 지났을 때 후손 한 사람이 독일 지역 봉건영주들의 왕으로 뽑혔고 그 아들이 오스트리아 영지를 물려받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주로 혼인을 통해 보헤미아·헝가리·스위스 티롤·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손에 넣었고 15세기 중반부터 3백여 년 동안 신성로마제국 황제 직위를 대물림했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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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은 중세 봉건 귀족들의 느슨한 ‘정치적 동호회’였고 황제는 일종의 명예직에 지나지 않았다. ‘신성’할 것도 없었고 ‘로마’에 있지도 않았던 그 제국의 황제는 나폴레옹 군대가 유럽 대륙 전체를 장악했던 1806년 제국의 해체를 공식 선언했다. 그런데 그가 다스린 나라는 그때 처음으로 실체를 가진 제국이 되었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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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의 대성벽은 합스부르크제국의 심장을 보호하는 갑옷이었다. 정략결혼으로 영토를 획득했고 전쟁에는 지극히 무능했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도시 전체를 둘러싼 대성벽을 축조하고 바깥에 외성벽을 한 겹 더 쌓았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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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서대문-인왕산-북악산을 돌아 낙산-동대문을 거쳐 남산으로 다시 이어지는 한양도성의 길이는 18.6킬로미터다. 그것이 조선의 수도 한양의 크기였다. 링은 북쪽 도나우 운하 구간까지 다 합쳐도 5.4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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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황제를 오늘의 빈을 창조한 주역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가 통치했던 19세기 후반에 빈은 예술·건축·문학·의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유럽 최고 수준의 도시가 되었다. 우리가 지금 보는 빈은 어쨌든 그가 성벽을 철거한 덕분에 태어났다. 그는 새로운 문화를 북돋운 계몽 군주도 아니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역한 반동적 전제군주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백 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빈 시민들은 황제를 잊지 않았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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