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중동전쟁의 결과
- 요르단의 서안지구 점령
- 이집트의 가자지구 점령



전쟁은 결국 이스라엘이 유엔 결의안에 규정된 자신들의 영역 이상을 확보하는 완승으로 끝났다. 다만, 요르단은 서안 지구를 차지했고, 이집트는 가자 지구를 차지했다. 전쟁 뒤 건국에 성공한 이스라엘로부터 요르단은 별다른 대가를 지불받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자국의 힘에 자신감을 가지자, 요르단과의 협력이 절실하지 않았다. 요르단이 서안 지구를 점령해 이스라엘 국내의 많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떠안아주자, 이스라엘로서는 더 이상 아쉬울 것이 없었다. 반면 압둘라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수용함으로써,
정치적 기반이 취약해졌다. 불만에 찬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압둘라의 통치력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 P393

이런 상황은 시오니스트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 건국 전쟁, 팔레스타인/아랍 입장에서 보면 ‘나크바Nakba‘로 치달았다. 아랍어로 재앙, 참화라는 뜻인 나크바는 75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추방 사태를 의미하는 ‘팔레스타인 참화‘라는 뜻의 고유명사가 됐다.

전쟁은 두 단계로 진행됐다. 1단계는 유엔 결의안 181호가 가결된 다음 날인 1947년 11월 30일부터 영국이 완전철수하고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된 1948년 5월 15일까지의 내전이다. 2단계는 이스라엘 건국의 선포를 저지하려는 주변 아랍국가와 이스라엘의 전쟁이다.

1948년 5월 15일부터 1949년 3월 10일까지 진행된 이 전쟁은 흔히 1차 중동전쟁 혹은 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불린다.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는 현대 중동분쟁의 시작이었다. -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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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주의와 민족주의

특히, 유대인에게 성지로의 집단적 귀환은 시온에서 최후의 집단적 구원을 징조하는 세상의 종말을 의미할 뿐이다. 시온이 있는 예루살렘은 종교적 성지일 뿐이다. 유대인의 조국 땅이거나, 나라를 재건할곳은 아니었다. 기독교도, 무슬림, 불교도가 성지를 갈망하고 순례하기는 하지만 그곳을 조국이거나 돌아가서 종교 왕국을 세울 곳으로 상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해서 국가를 건설하자는 시오니즘의 출현은 근대 이후 반유대주의와 민족주의 조류를 배경으로 한다.
시오니즘을 국제적인 정치 운동으로 이끈 헤르츨 이전에 시오니즘은중부 및 동부 유럽에서 18세기 이후 출현했다. 유대인을 물리적으로박해하고 동화를 거부한 포그롬(조직적인 탄압과 학살) 등 근대의 반유대주의가 고조되는 사회에서 유대인들은 도피처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반유대주의는 민족주의 조류와 짝을 이뤄 출현했다. 그리고민족주의 흐름을 맞이한 유대인의 대응 또한 제 정체성을 민족화하는것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쇠락하는 가운데그 영역 안에서 섞여 살던 종족과 종교 집단들이 민족주의를 추구하자, 유대인 역시 유대교를 기반으로 자신들을 ‘민족‘으로 재정의한 것이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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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유대인 격리지 확대로 유대인 차별이 절정에 오르던18세기 말 서구에서는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 프랑스를 필두로 ‘모든 인민이 법 앞에서 평등할 것"이라는 이념에 따라 유대인 해방 물결이 번졌다.
서구에서 유대인 해방령은 유대인에게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첫째는 말 그대로 유대인 해방을 통한 법적·제도적인 차별과 금기의 폐지였다. 유대인을 국민국가 내에서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함으로써, 법적으로는 기존의 차별과 금기를 폐지했다. 둘째, 차별과 금기를 폐지하는 대신에 그동안 유대인에게 부과하지 않던 의무가 생겼다. 유대인 자치가 없어지고, 군역 등의 의무가 부과됐다. 국민국가 내에서 동등한 시민으로서 인정한다는 것은 독립적인 유대인 공동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유대인 해방령은 현실에서는 차별적인 효과를 낳았다. 유대인 상류층은 이 해방령을 전기로 제도적인 굴레를 완전히 제거하고, 세속화속에서 주류 사회로 동화해갔다. 하지만, 대다수 하층 유대인에게는 관습적인 차별은 그대로 존재하고 유대인에 대한 기존 보호막만을 제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서방에서는 어쨌든 유대인에게 동등한 시민구을 부여하고, 그 공동체를 해체했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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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와 제후들

제후들이 성직자의 재산을 회수할 수 있게 되고 종교적인 사안에 간섭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자, 종교개혁은 빠른 속도로 새로운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튜턴 기사단의 전임 단장, 헤센의 영주 필리프, 독일의 변방 요새인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총독, 슐레스비히 공작과 브라운슈바이히 공작, 만스펠트의 백작 등이 개종을 하고 자신들의 영지에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특히 북부 독일의 도시들에 영향을 주었고, 슈파이어에서 재소집된 의회가 황제의 명령으로 종교개혁을 중지할 것과 보름스 칙령을 실행할 것을 요구하자 제국의 도시 가운데 3분의 2가 로마와 결별을 선언했다. 14개 도시와 여섯 제후가 이 결정에 과감하게 반기를 든 것이다. 그리고 이때(1529)부터 이들에게는 ‘프로테스탄트(항거하는 자)’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했다 - <종교개혁 : 루터와 칼뱅,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올리비에크리스탱 지음, 채계병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c5S1PMkNvfERzMo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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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독일인이 아닌 사람들(즉, 로마)이 루터를 재판하는 것을 거부하며 루터를 철저히 자신의 보호하에 두었다. 한편 빈민과 농민들은 루터의 메시지에 나타난 사회적인 내용에 대하여, 즉 성직자들의 특권 비판과 공적인 구제제도의 개혁에 대해 열렬히 환영을 표시했다. - <종교개혁 : 루터와 칼뱅,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올리비에크리스탱 지음, 채계병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MEKkDJPjKR7eiUu46

신실한 신앙에 대한 기대감, 민족주의, 반교권주의, 로마 교회에 대한 반감, 성직자들의 축재에 대한 증오감 등 이미 독일 사회의 곳곳에 퍼져 있던 감정들이, 루터의 메시지가 약간 왜곡되기는 했지만 호응을 얻도록 만들어주었다. - <종교개혁 : 루터와 칼뱅,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올리비에크리스탱 지음, 채계병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Wi3vuYgo58FJ3Btz7


그림 중앙에는 요한 프리드리히가 배치됨으로써 종교개혁에 참여한 작센 지방의 중요성을 암시하고 있다. - <종교개혁 : 루터와 칼뱅,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올리비에크리스탱 지음, 채계병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Piaxxz1AWfqY4kj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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