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상인이 지배하는가 - 권력의 역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선
데이비드 프리스틀랜드 지음, 이유영 옮김 / 원더박스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고대의 직업분류

전사 귀족
- 전사 역할 대 가부장 역할

현인
- 사제 역할 대 테크노라트 역할

상인
- 단기 이득 추구 대 장기 이익 추구

노동자
- 피지배 대 공동체적 연대

고대인들 역시 이러한 전개 양상을 간파했다. 고대인들은 사회를 원자화한 개인들의 총합으로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각자의 사유재산에 따라 분류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경제적 계급의 총합으로 보지도 않았고, (후쿠야마처럼) 이데올로기적 당파의 총합으로 보지도 않았다. 고대인들은 사회를 직군의 총합으로 봤고, 각각의 직군은 고유한 에토스(ethos)를 조성한다고 믿었다. 중세 서구사회는 이런 직군 체계를 로마 원정군 단위 체계의 일종인 ‘ordines (질서)‘에서 따온 orders(편제 또는 계층)‘라고 불렀다. 인도에서는 이미 ‘카스트 (castes)‘라는 단어로 직군 체계를 명명하고 있었다. - P14

그렇다면 주요 카스트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근대 이전 농경사회의 여러 사상가들은 다음 네 가지를 대표적 카스트로 꼽았다. 현인 · 사제(sages/priests), 지배자 - 전사(rulers/warriors), 그리고 상인(merchants)과 소작농(peasants)이다. 물론 여기에 덧붙이거나 빼는 경우도 있었다.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는 세 유형으로 나누는 경우가 더 흔했다. 즉, 기도하는 사람들(oratores), 싸우는 사람들(bellatores), 일하는 사람들(laboratores)이었다. 당시 사람들 대부분은 아버지와 선조들의 직업을 따랐기 때문에 직업이 외부인에게 닫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즉,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들의 직군에 속하고 그에 맞는 관습과 에토스 속에서 성장했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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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상인이 지배하는가 - 권력의 역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선
데이비드 프리스틀랜드 지음, 이유영 옮김 / 원더박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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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이해관계 그리고 직업
- 마르크스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역사의 동력, 후쿠야마는 가치체계의 차이.
- 직업 층위에서 둘은 결합된다.
- 직업, 직종의 차이와 대립과 연합으로 세계사를 서술할 수 있다.



논의에 앞서 역사적 변화를 추동하는 동력에 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해 마르크스와 후쿠야마는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있다. 마르크스는 역사 변화의 원동력이 경제적 이익집단 또는 ‘계급‘이라고 봤으나, 후쿠야마는 근대를 끌고 온 원동력이 ‘상이한 이데올로기 간의 갈등‘이라고 봤다 - P12

하지만 가치 체계와 경제적 이해관계를 싹둑 잘라 나누는 접근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가 양자 모두로부터 동기를 부여받으며, 우리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가치는 직업이라는 일상의 메커니즘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 P13

 투자은행 분야에 종사하며 사회주의자가 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지역 사회복지 부서에서 일하며 자유시장주의자가 되기는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동료와 잘 지내고 승진의 사다리를 타고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바란다면 종사하고 있는 일터의 기본적 가치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테면 일터의 관습과 행동양식, 또는 프랑스 사상가 피에르 부르디외가 명명한 ‘아비튀스(habitus)‘ 같은 것들이 기본적 가치들이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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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거란전쟁과 대장경

전쟁의 와중에서도 고려가 이처럼 대규모 사업을 벌인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고려는 이미 한 차례 대장경을 판각한 일이 있었다. 바로 1010년 거란과의 제2차 전쟁 때였다. 당시 임금과 신하가 판각을 맹세하자 개경까지 들어왔던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났다고 한다. 이때 만든 대장경을 부인사에 보관했는데, 1232년(고종 19년) 2차 몽고 침입 때 불타버렸다. 그래서 새롭게 대장경을 만들면 다시 부처의 도움으로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gdVnuH88LEBQwqC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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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요 10조 중 8조

왕건은 전라도 나주 지역의 호족 오다련의 딸 장화왕후에게서 낳은 혜종을 후계자로 삼았다. -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AS9kiWbA9fMXJcxJ7

「훈요 10조」가 후세의 위작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거란의 침략 때 불타 없어졌던 「훈요 10조」가 다시 등장하게 된 과정도 의혹을 부채질하고 있다. 원본이 불타버렸다던 「훈요 10조」는 우연히 경주 출신 최항의 집에서 발견되어 현종에게 바쳐졌다. 현종은 신라계를 외가로 하고, 지지기반 역시 신라 계열의 신하들이었던 왕이다 -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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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화백회의와 로마 원로원의 공통점


신라에서는 왕이 간절히 바랐던 불교가 왜 이렇게도 힘들게 공인됐을까? ...... 그 이유는 우선 신라가 왕권국가로서의 틀을 갖추지 못하고 귀족들의 권력이 막강했던 데 있다. 12개 소국의 연합국가였던 신라는 귀족회의인 화백회의에서 주요 국사를 결정하고, 골품제라는 신분제를 두어 지배층의 지분을 나눠줘야 할 정도로 귀족의 권한이 막강했다. ........
귀족들의 하층민 지배 근거는 바로 자신들이 하늘신의 자손이라는 ‘무속적’ 성격에 있었던 것이다. -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G9k3WfaXEB1t5A7TA



신라는 남녀차별이 거의 없을 만큼 여성의 지위가 어느 시대보다 높았다. 여자도 상속권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경제권도 쥐고 있었다. 여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절에 시주를 한 기록도 나온다. 또한 혼인을 하더라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남편의 지위와는 별도로 계속해서 보장되었다. 신라는 고대 모계사회의 전통이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오랫동안 남아 있었는데, 이는 두 나라보다 늦게 유교문화를 수용한 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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