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판단은 미학적 판단과 비슷하다는 데에 있다. 어떤 그림을 봤을 때, 당신은 그 그림이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보통 즉각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설명해 달라고 하면, 당신은 이것저것 말을 지어낸다. 무언가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실제로는 알지 못해도, 당신의 해석자 모듈(기수)은 (가자니가가 자신의 뇌 분할 연구들에서도 밝혀냈듯) 갖가지 이유를 만들어 내는 재주가 아주 뛰어나다. 당신은 그 그림을 좋아하는 그럴싸한 이유를 하나 찾아...... -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행복>, 조너선 하이트 지음 / 왕수민 옮김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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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어떤 사람의 주장을 논박했을 때, 대체로 그 사람이 마음을 바꾸어 당신의 생각에 동조하던가? 당연히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깨트린 그 주장은 애초부터 그 사람이 그런 입장을 가진 원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판단이 이미 내려진 뒤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행복>, 조너선 하이트 지음 / 왕수민 옮김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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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 직관, 순간적 판단들은 끊임없이 자동적으로 일어나지만(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이 《블링크Blink》에서 묘사했듯),34 문장들을 줄줄이 꿰어 다른 이에게 내놓을 논변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또 기수뿐이다. 도덕적 주장에 있어서는 코끼리에게 기수가 해 주는 역할이 단순히 조언자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때에는 기수가 변호사라도 되듯 여론의 법정에 서서 다른 이들에게 코끼리의 관점을 납득시키기 위해 싸움을 벌인다. -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행복>, 조너선 하이트 지음 / 왕수민 옮김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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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 들어 다마지오는 안와전두피질의 특정 영역이 손상되면 환자들이 대체로 감정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환자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은 어떤 감정을 당연히 느껴야 하는 상황에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며, 이들이 보인 자동 반응(거짓말 탐지기 조사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반응들)에 대한 연구를 봐도 이런 환자에게서는 우리 같은 일반인이 끔찍하거나 아름다운 광경을 봤을 때 보통 경험하는 순식간의 신체 반응이 분명 나타나지 않았다 -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행복>, 조너선 하이트 지음 / 왕수민 옮김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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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론이나 논리적 능력은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지능 테스트나 사회 규칙 및 도덕 원칙 관련 지식에서도 이들은 일반인에 필적하는 능력을 보여 준다.19
그렇다면 이들이 문밖을 나서 세상을 만나면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사람을 심란하게 만드는 감정에서 해방된 만큼, 고도로 논리적인 사람이 되어, 우리 같은 이의 앞을 가리는 갖가지 감정의 안개를 걷어 내고 완벽한 합리성이 길을 꿰뚫어 보지 않을까? 실제로는 그 정반대다. 이들은 간단한 결정이나 목표 설정조차 버거워하게 되며,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삶이 차차 무너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행복>, 조너선 하이트 지음 / 왕수민 옮김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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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눈앞에는 수십 개의 선택지가 어른거리지만 정작 내면에서는 당장 호불호의 느낌이 들지 않는다. 즉, 모든 선택지의 장단을 자신의 추론으로만 면밀히 따져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감정이 없다 보니 개중에 어느 하나를 고를 이유를 거의 찾을 수 없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바깥으로 눈을 돌려 세상을 바라본 순간, 벌써 감정 두뇌들이 즉각적이고 자동적으로 여러 가능성들을 평가해 놓고 있다. 또한 보통은 그중 한 가지 가능성이 누가 봐도 가장 좋은 선택지로서 단박에 우리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이성을 사용할 필요를 느끼는 것은 어떤 가능성 두세 개가 똑같이 좋아 보일 때뿐이다.
인간의 합리성은 정교한 정서에 기대는 바가 무척이나 크다. 어떤 식이든 우리의 추론이 제대로 작동하는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정서 두뇌가 아주 원활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행복>, 조너선 하이트 지음 / 왕수민 옮김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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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 실시의 방해물
- 이데올로기
- 이해관계


(대동법의) 기본 아이디어는 이미 임진왜란 때부터 나왔지만 실행하는데는 10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충청도 시범 실시 (효종) → 전라도 확대 실시 (현종)를 거쳐 비로소 전국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틀이 만들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한 번 자리 잡은 제도에 대한 경직성은 극복하기 쉽지 않다.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임토작공에 대한 집착이다. 임토작공은 지방 제후가 천자에게 토산품을 바치며 충성을 맹세한다는 개념을 담고있다. 토산품 대신 쌀이나 포로 바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았다. 하지만 조선 땅에서 옛 중국의 문명을 재현하고 싶어했던 조선 사대부들에게 이를 포기하는 것은 정서적으로 거친 반발을 가져왔다.

두 번째는 부유층의 반발이었다. 공물은 기준이 일정치 않았지만, 대체로 호, 즉 가구를 기준으로 책정했다. 즉 부유층이든 하층민이든 납세액이 같았다. 그런데 대동법은 토지 1결당 12두의 쌀 또는 이에 해당하는 가치만큼의 포(무명)를 내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과거에는 땅을 많이 갖고 있더라도 한 가구당 부담액이 비슷했는데 이제는 소유한 토지(재산)에 따라 부담액이 더늘어나게 된 것이다. 가장 격렬한 반발이 나온 지역도 땅 부자가 많은 호남이었다.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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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동아시아 은 교역망


당시 중국의 최대 안보 위협은 몽골이 버티고 있는 북방이었다. 수도 베이징은 만리장성 바로 아래에 있었고, 과거 몽골에 실제로 지배당한 적도 있었기에 북방을 방비하는 데 세금의 상당량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남쪽의 해양 진출에 계속해서 대규모 예산을 편성하기란 어려웠다. 또한 포르투갈이나스페인에게 해양 진출이 나라를 살리기 위한 간절한 돌파구였다면, 중국에게 해양 진출은 꼭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중국은 자급자족이 가능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정화의 대원정도 굳이 따지면 명나라의 위상을 위한 과시용에 가까웠다.

(중국) 북방의 긴장은 중국의 은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았다. 전국에서 은이 부족해졌고, 남쪽 해안에서는 은의 밀무역이 성행했다. 중국에서는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이 1대 6이었지만, 일본에서는 1대 12였다. 즉 일본은 은이 훨씬 쌌다. 중국의 절반 가격이었다. 

그래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무역상들은 일본에서 은을 사서 중국에서 금과 교환하는 방식으로 막대한 시세 차익을 남길 수 있었다. 이를 본 일본도 밀무역에 나섰다. 16세기 후반 중국으로 유입된 은은 2,100~2,300톤 정도인데 일본산 은이 1,200-1,300톤 정도였다고 한다. 이익이 짭짤했으니 위험을 무릅쓸 여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 P244



조선에서 탄생한 연은분리법이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 1533년이다. 5년 뒤 일본은 조선 정부와 거래할 무역품으로 은철 315근을 가져왔다. 기록상 일본이 무역품으로 은을 가져온 것은 이때가 최초다. 그만큼 은이 풍부해진 것이다. 이후 일본은 은을 대규모로 조선으로 가져와 거래했는데, 얼마나 많이 유통이 되었는지 조선의 은 가격이 폭락했다. 1538년 은 1냥 당 면포 4필이던 것이 4년 뒤인 1542년에는 은 1냥 당 면포 반 필로 그 가치가 8분의 1로 뚝 떨어졌다.

이렇게 조선으로 들어온 은은 다시 조선의 대중국 무역 자금으로 이용되었다. 세계 2위의 생산량을 자랑하던 이와미 은광의 막대한 은이 조선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면서 동아시아 무역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이다. 그것을 촉발한 것은 조선의 노비와 양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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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한랭화와 해금정책



한편 명나라의 해금 정책으로 인해 가장 피해를 본 이들은 해상 무역 세력이었다. 그래서 명나라 초기 해안을 침략한 왜구도 해금 정책에 반발한 해상 무역 세력으로 볼 수 있다. 일부 중국인 무역상들이 왜구에 가담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하나 덧붙이자면 명나라가 상업이나 무역을 억누르고 농업을 장려하는 쪽으로 회귀한 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1368년)한 14세기 후반은 한랭기의 충격이 수십 년간 쌓인 때였다. 그렇기 때문에 급선무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농업 생산성을 회복해야 했다. 그러니 백성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점포에서 주판을 잡기보다는 시골의 농지로 돌아가 호미와 괭이를 들기를 바랐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 개국한 조선도 비슷한 정책을 폈다. 어떤 학자들은 조선의 수도가 개경에서 남쪽인 한양으로 이동한 것이 삼남(충청·전라·경상) 지역의 식량 생산성이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이라고도 본다.
한랭화로 인해 황해도나 평안도, 경기 북부에서는 이전보다 쌀농사를 짓기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식량 생산은 남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고려 말 왜구의 침략으로 식량 생산지와 수도의 거리를 더욱 좁힐 필요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명나라와 조선의 중농억상정책은 원나라와 고려에 대한 부정일 수도 있지만, 기후가 만든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인류 문명은 결국 기후와 얼마나 친숙해지느냐에 흥망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온 것이 고려 말인 이유도 기후 영향이 컸다. 최근 지적되고 있지만 원나라는 목화씨 반출을 막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굳이 이때 목화씨를 고려로 들여온 것은 백성들이 추운 기후에 적응하려면 더 따뜻한 소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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