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쯤에는 자유시장이 격퇴되었다고 말하는 게 안전했다. 밀턴 프리드먼은 이미 오래 전에 패배를 인정했다. 그는 숨을 거두기 2년 전인 2004년 이렇게 썼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생각은 사회주의자였고 실천은 자유시장이었는데, 지금은 생각은 자유시장이고 실천은 심각한 사회주의자이다. 우리는 이념의 싸움에서는 대체로 이겼다(그런 싸움에는 영원한 승자가 없다). 우리는 사회주의의 진전을 멎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역전시키지는 못했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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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을 도울 수 있게 어린이들에게 긴 여름 휴식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학사일정이 아직도 뉴욕 같은 도시들에서 실시되고 있는 미국의 학교들보다 아시아의 학교들이 훨씬 더 잘 해내는 게 놀라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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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시스템과 벼라는 작물은 적은 농지로 많은 사람이 먹고살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예를 들어 16세기 섬나라 일본은 같은 섬나라인 영국과 비교해 6배 많은 인구를 부양했다. - <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이나가키히데히로 지음, 서수지 옮김 > 중에서

15세기 유럽에서 밀을 뿌려 수확한 양은 종자 대비 3~5배 정도에 불과했다. 반면 벼는 17세기 무렵 종자 대비 20~30배의 수확을 올렸을 정도로 생산성이 뛰어났다. 오늘날에도 벼는 종자 대비 120~140배의 수확량을 얻지만 밀은 20배 정도의 수확량밖에 얻지 못한다. - <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이나가키히데히로 지음, 서수지 옮김 > 중에서

아시아는 유럽과는 상황이 달랐다. 아시아에서는 해마다 논에 벼를 재배할 수 있었고 심지어 이모작도 가능했다. 지금도 벼를 수확한 뒤 밀이나 보리를 재배하는 식으로 이모작을 하는 곳이 있다. 유럽에서는 3년에 한 번 밀을 재배했으나 아시아에서는 1년간 쌀과 밀을 모두 수확할 수 있는 셈이었다 - <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이나가키히데히로 지음, 서수지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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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인 문제가 있을 때 대리인들은 생산량을 과소보고하는 식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하지만 중국의 대약진운동 당시 지방관료들은 생산량을 과대보고했다. 과대보고의 결과는 공출량의 증가와 그로 인한 기아 문제였다.

이해가 안되는 것은 다음 대목이다. ˝안후이의 한 인민공사에서 무상급식을 실시하자 마오쩌둥은 당장 그 방법을 승인하며 전국적으로 선전했다.˝(379쪽)

무상급식은 공출된 곡식을 재배분하는 것으로 기아의 해결책으로 보인다. 왜 무상급식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이들이 굶어 죽었나?

농촌의 현실에 입각해서 생산 가능한 수확량을 있는 그대로 보고하는간부는 반혁명분자로, 수정주의자로, 부르주아의 끄나풀로 몰렸다. 양지성의 묘비』 제1장에 따르면, 허난 성 신양 현(信陽系)에서는 현실을 있는그대로 말했던 한 간부가 계속되는 취조 끝에 결국 맞아 죽고 말았다. 진실을 말하면 맞아 죽을 판이니 모두가 알아서 자발적으로 통계를 조작했다. 한 마지기의 땅에서 1,000킬로그램 이상의 곡물을 생산하겠다는 허황된 목표라도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상급 정부에서 그 예상치에 따라서 곡물을 공출했다. - P377

마오쩌둥의 야심은 경쟁적인 허위 보고를 낳았다. 허위 보고는 생산 단위의 공출량을 늘렸다. 곡식을 빼앗긴 농민들은 굶주려야만 했다. 죽음의 사기극에 모두가 말려든 상황이었다. 악화일로의 현실을 외면한 채 관영매체는 날마다 거짓 보도만 일삼고 있었다. 관료 조직은 통계를 날조하고, 지식인들은 눈치만 보며 입을 닫았다. 지방정부의 말단 간부들은 상부의 지령에 따라서 로봇처럼 인민을 향한 폭력을 자행했다. -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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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1세는 5년 후인 1199년에 사망했고 그의 동생 존이 왕위에 올랐다. 존왕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형 리처드 1세를 더 오래 붙잡아달라고 뇌물을 바치려 했던 인물이다. 그 역시 형의 뒤를 이어 과중한 세금으로 백성을 수탈한 악명 높은 군주였다. 17년의 재위 기간 중 병역면제세를 11차례나 부과했고, 심지어 전쟁이 없던 해에도 거두어 갔다. 형이 부과했던 토지세 위에 새로운 토지세를 부과했고 납부를 거부하면 토지를 몰수했다. 또 다른 십일조를 부과하고 수출입관세도 도입했다. 또한 일종의 상속세를 신설해 영지와 성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귀족들이 내기 벅찰 만큼의 기부금을 요구했다. 왕은 돈을 받고 관직을 팔았으며 이렇게 관직을 산 사람들은 특히 삼림에서 거둬들이는 세금과 벌금으로 투자금을 회수하려 했다. 여기서 로빈 후드 이야기가 탄생한다. - <세금의 세계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2306

북부와 동부의 귀족들은 왕과의 봉건계약 파기를 선언하고 신군 Army of God을 자칭하며 런던으로 진격해서 점령해버렸다.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븐 랭턴Stephen Langton이 왕과의 평화협상을 중재했다. 런던에서 서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인 러니미드의 템스 강변에서 광범위한 정치 개혁을 담은 협정이 체결되었다. 귀족들의 동의 없이 새로운 세금을 부과할 수 없으며 병역면제세와 다른 세금도 함부로 부과하지 못하도록 했다. 귀족의 불법 감금을 금지하고 신속한 재판을 명시했다. 평민과 교회의 권한도 보장되었다. 귀족들은 런던을 반환하고 군대를 해산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존왕을 믿지 않은 귀족들은 해산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왕은 약속을 깨고 교황에게 호소했고, 교황은 당연히 그 협정이 “수치스럽고 모욕적이며 부당하다”라며 반란 귀족들을 파문했다. - <세금의 세계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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