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타계 소식을 듣고 뉴스를 보니 10여 년 전 한국 방문 당시의 영상이 나온다. 문득 그때 광화문 광장에서의 행사에서인가 교황을 직접 만났던 세월호 유가족 중에 '유민 아빠'로 알려진 사람이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나중에 바깥양반하고 앉아 있다 교황 이야기가 나오기에 유민 아빠 이야기를 언급했더니, 그렇잖아도 추모글을 올렸더라 대답한다.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교황 알현이 평생 소원이라고 알고 있다. 한때 우리나라의 어느 사이비 종교 지도자도 교황을 만났다는 거짓 주장을 홍보에 이용할 정도였으니, 그 권위와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따라서 유민 아빠의 경우에도 특별한 경험을 한 것만큼은 분명해 보이는데,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딱히 남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처지까진 아니었다.


물론 유민 아빠가 했다는 부탁대로 교황이 세월호 사건 처리에 대해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할 수는 없었으리라 짐작되고, 또 이후의 상황 전개만 보아도 압력 따위는 있지 않았음이 분명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한편으로는 각국 지도자보다 더 큰 권위의 상징인 교황까지 만난 이상, 이제는 산 사람의 입장에서 더 호소할 곳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제아무리 잊지 말자 다짐했어도 잊을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11년째인 올해에는 나귀님도 당일까지 미처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유가족은 아직도 진실 규명을 주장하지만, 이제는 사실상 불가능해진 목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유가족이 여전히 몸부림치는 사이에, 책임을 방기했던 대통령은 물론이고 선장을 제외한 선원들도 모두 석방된 상태다.


지금 와서 세월호 사건의 가장 끔찍한 부분은 도무지 결말이 날 기미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교황을 만나고, 정권을 바꾸고, 선체를 인양하고, 조사를 진행해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로 11년 전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심지어 유가족 측에서도 조사 결론에 대해 계속 의문을 제기하며 사건에 마침표 찍기를 완강히 거절한다는 폭로 아닌 폭로까지 나왔었다.


이쯤 되니 세월호와 유가족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칭 '촛불 정권'에서도 마무리하지 못했으니, 이제 이 사건은 수많은 조롱과 폄훼 속에 영영 미완결 상태로 남게 되지 않을까. 어찌 보면 유민 아빠의 교황 알현 모습이 유독 씁쓸하게만 기억되는 이유도 그래서일지 모른다. 이 세상에는 끝내 안 되는 일이 있었으니까.


유민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김훈이 훗날 기고문에서 언급한 현금 6만 원이 떠오른다. 평생 받은 중에서도 가장 많았으리라 짐작되는 용돈을 갖고 떠났지만, 결국 쓰지 못한 지폐만 물에 젖어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과연 그 돈은 지금 어디 가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유가족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써서는 안 될 돈으로, 화폐가 아니라 유품이라고 간주되지 않을까.


김훈이 그 6만 원의 구매력을 언급하기에, 11년 뒤인 지금의 가치를 따져보니 물가 인상을 반영해 대략 7만 4천 원쯤 되었다. 마침 어제 지인의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그 열 배쯤 되는 돈을 한 달 용돈으로 원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큰 돈이 누군가에게는 작은 돈이고, 그 돈을 주려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서글프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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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중고매장에 안도 다다오 도록이 있어서 구입했다. 저자와 출판사가 똑같은 구판도 이미 갖고 있었지만, 저 건축가가 아직 건재한 상황에서 도록의 부제가 "1975년부터 현재까지의 작품 전집"이니, 구판의 간행년도인 2007년부터 신판의 간행년도인 2023년 사이에 추가된 내용이 있을 듯했다. 물론 실제로는 추가 분량만큼 삭제도 있어 쪽수는 비슷했지만.


추가 내용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톰 포드와 리처드 버클리의 주택과 마굿간'이었다. 건축주가 마주인 모양인지, 미국 뉴멕시코의 산꼭대기에 있는 개인 소유 목장에서 말 여러 마리를 기르면서 관리하는 시설을 지었는데, 비록 안도 다다오 특유의 콘크리트와 원형과 복도와 연못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 용도를 생각하면 뭔가 좀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도대체 톰 포드가 뭐 하는 사람인가 궁금해 구글링해 보니, 구찌와 이브생로랑 같은 브랜드에서 근무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라 한다. <싱글맨>과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영화를 감독해서 호평을 받은 이력도 있다는데, 두 권 모두 원작 소설이 나와 있다. 함께 이름을 올린 리처드 버클리는 예상대로 동성 배우자인데 2021년에 이미 사망한 모양이다. 


그런데 안도 다다오 도록에서는 두 사람 소유의 건축물 중에 '마굿간'만 보여주고 '주택' 이야기는 없어서 그 현재 상태가 궁금해졌다. 설명에 따르면 마굿간과 그 부속 건물만 먼저 완성되었고, 거기서 자동차로 15분쯤 걸리는 부지에 예정된 "절벽 위에 자리잡고, 마굿간에 있는 것과 유사한 투영 연못도 곁들인" 주택은 여전히 설계 중이라고만 했기 때문이었다.


구글링해 보니 해당 주택은 결국 건축이 불발되고 말았는지, 지금 와서 검색해 보면 안도 다다오가 톰 포드를 위해 설계한 건물이라고는 단지 저 마굿간과 그 부속 건물뿐인 것으로만 나온다. 그나마도 이를 포함한 목장 전체가 2016년에 무려 1천억 원에 매물로 나왔는데, 이후 유찰을 거듭하다가 결국 절반 가격인 500억 원에 새로운 주인에게 매각되었다고 한다.


나귀님이 안도 다다오를 좋아하는 까닭은 빛의 교회나 스미요시 주택처럼 유난히 비좁고 불편하며 폐쇄적인 구조물을 매력적이라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설계한 미술관이나 주택 단지 같은 대형 구조물을 보면 감탄과 동시에 그 실용성에 대해 의문을 느끼게 마련이었는데, 위에 언급한 마굿간과 그 부속 건물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의 의문이 따라다녔다.


현대 건축의 거장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만 해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건물이지만, 정작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불편을 호소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또 다른 거장 르 코르뷔지에도 실제 거주민을 배려하지 않은 설계로 악명이 높아서, 급기야 어느 공동 주택에서는 주민 모두가 건축가의 의도와 배치되는 방향으로 개조를 일삼았다고도 전한다.


결국 이상과 현실의 대립이 벌어진 셈인데, 건축의 경우에는 설계자의 의도도 중요하지만 거주자의 편의도 중요한만큼, 이런 갈등이 생겨나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만한 일이다. 안도 다다오의 출세작인 스미요시 주택만 해도, '이곳에 실제로 사는 분들이 더 대단하다!'는 어느 건축 전문가의 평가가 있으니만큼, 건축가와 거주자의 뜻이 일치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그런데 이번 안도 다다오의 최신(이라고는 말하지만, 실제로는 지난 20여 년 사이의) 작업들을 도록에서 살펴보고 있으니, 대형 건축물의 경우에는 실용성 의문에다가 낯설음과 공허함의 느낌마저 새삼스레 받게 되었다. 인상적이라 여겼던 빛의 교회며 스미요시 주택이며 4X4 주택 같은 비교적 작은 구조물에 비해서는 역시나 지나친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매립 사업을 위해 토사를 채취하면서 망가진 자연 환경을 되살리는 프로젝트인 아와지 유메부타이가 그러한데, 그 결과물이 결국 콘크리트 더미라는 점은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콘크리트라 하더라도 수십 년 세월이 지나면 결국에는 부서지고 무너지게 마련이 아닌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물론 그것까지 건축가의 의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나귀님이 너무 속물이라서 '가성비' 걱정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멕시코의 몬테레이 소재 개인 주택 같은 경우에도 산중턱 경사면에 설치한 인피니티풀 형태의 투영 연못을 보니, 제아무리 이상이고 예술이라도 결국 '돈지랄'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물론 세계적인 건축 거장에게 마굿간 설계를 맡긴 또 다른 '돈지랄'만큼은 아니겠지만...




[*] 안도 다다오는 김건희와의 회동 소식이 전해져서 화제가 된 적도 있다. 당시 김건희의 갖가지 부적절한 행보와 관련해서, 건축에 문외한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쁜 일본인' 정도로 폄하되었던 모양인데, 애초에 예술계에서 꽤나 행세하고 다닌 사람이었으니 저 건축가와의 친분을 쌓을 만도 해 보인다. 이 대목에서 문득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은 건축이야말로 큰 돈이 오가는 사업이다 보니, 갖가지 구설수는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권력자나 벼락부자의 변덕을 맞출 수밖에 없으니, 어떤 면에서는 건축가나 예술가도 거기 부화뇌동하는 측면이 없지 않을 것이고, 여차 하면 명성 대신 오명만 얻게 되는 경우도 있을 터이니 말이다. 어찌 보면 안도 다다오 측에서도 이번 한국 대통령 탄핵 심판 결과에 문자 그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는 않았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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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신촌 나간 김에 땡땡거리 옆 지하 헌책방에서 (정부의 단속을 피해 암암리에 운영되는 헌책방이기 때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서울에서 제일 유명한 빵집 근처 지하에 있기 때문이다) 구입한 책은 달랑 두 권뿐이었는데, 하나는 앞서 언급한 지학사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한 권이고, 나머지 하나는 <재앙의 월요일: 사상 최악의 판결들>이라는 문고본이었다.


교육과학사에서 나온 '법학교양총서' 가운데 한 권인데, 최종고가 저술한 올리버 웬델 홈스 약전을 비롯해 일반인도 읽어볼 만한 법학 관련 교양서가 여럿 들어 있는 시리즈다. 비록 번역과 편집은 좋지 않은 편이지만, 최근 다시 번역된 칼 슈미트의 책도 몇 권 있었고, 여성 법조인이 본인의 강간 피해 체험을 서술한 <진짜 강간>이라는 특이한 번역서도 있었다. 


<재앙의 월요일>은 부제에 나온 것처럼 미국 연방대법원의 역대 판결 가운데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것 22건을 소개하는 책이다. 미국 헌법 200주년인 1987년에 초판이 간행되었는데, 흑인 최초의 연방대법관으로 유명했던 서굿 마셜이 쓴 서문이 달려 있었다. 지금 검색해 보니 35년 후인 2023년에 제5판이 간행되었는데, 수록된 판결은 38건으로 절반 이상 늘어났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름 그대로 연방 헌법에 대한 해석을 담당하는 최고 기관으로,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와도 유사한 기능을 담당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물론 미국은 여러 주로 구성된 합중국인 까닭에,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면 우리나라와는 많은 차이가 있고, 사실 우리나라도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기능 구분이 말끔하지 않아 논란의 불씨는 남아있다고).


"재앙의 월요일(블랙 먼데이)"이라는 제목은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매주 월요일에 선고되던 전통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종교의 자유, 결사의 자유와 프라이버시권, 표현의 자유, 평등권, 형사피고인의 권리, 재판을 받을 권리라는 주제별로 예를 들어 동성애, 음란물, 인종 차별, 여성 참정권, 삼진아웃제 등이 얽힌 사건에 대해 연방대법원이 내린 판결을 분석한다.


보통은 당시의 통념상 불법이라 간주되는 행위가 벌어지고, 이후 경찰과 법원을 거쳐 단죄가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판결 불복이 일어나며 상고하여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온 사례가 대부분이다. 절도 같은 진짜 범죄도 있지만, 경찰의 무리한 단속도 있고, 인종이나 성별에 대한 차별에 항의하는 뜻에서 활동가들이 의도적 범법 행위로 판결을 구한 경우도 있다.


제목과 부제가 암시하듯 저자가 '오판'이라고 본 판결 중에는 드레드 스콧 사건처럼 시대적 통념에 굴복한 사례가 많지만, 애초에 연방대법원의 기능이 합헌 여부 판단인 이상 '미드'에서 종종 묘사되는 것처럼 파격적이고 극적인 판결을 기대하긴 힘들다. 아울러 이 책에 나온 판결 중 일부는 훗날 뒤집혔지만, 나머지는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점도 유념할 만하다.


한국 헌법재판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미국 연방대법원에 대한 비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대법관의 정치 성향에 따라서 판결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혹이다. 쉽게 말해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부각된 '사법의 정치화'와 '정치의 사법화' 논란과도 유사한데, 거의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 왔으니 이제는 그 논란조차 연방대법원의 전통 가운데 일부인 셈이 아닐지.


거기에 종신제라는 특성상 일부 대법관은 현직 대통령의 후임자 지명을 저지하기 위해 병중에도 출근을 강행한 일화까지 있었으니,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찬사와 비판 모두 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흑인이나 여성이나 기타 소수자 출신 대법관이라 해서 항상 동류에게 유리한 판결만 내린다는 보장은 없으니, 정치 논리로 사법을 재단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된 사례들을 보면, 대법관이라 해서 항상 쉽게 정답을 도출하는 것은 아니어서, 이런 방향으로 가자고 중지를 모았다가도 한두 명이 입장을 선회해서 결론이 뒤바뀐 경우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단순한 변덕이나 외압의 결과로 봐야 할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그만큼 해석의 여지가 많다고, 또는 법치의 근본적 한계라고 봐야 하지 않으려나.


연방대법원에 재직하는 내내 소수 반대 의견에 서는 경우가 많아서 '위대한 이의제기자'로 일컬어진 올리버 웬델 홈스만 해도, 발달장애인의 강제 불임 시술을 다룬 '벅 앤드 벨' 사건에서 합헌 의견을 내며 "3대째 천치로 충분하지 않은가"라고 일갈해서 두고두고 비판을 받았던 것을 감안하자면, 과연 이 세상에 모두를 만족시킬 판결이 있기는 한지 의문도 든다.


사실 '사법의 정치화'와 '정치의 사법화'는 법조계뿐만 아니라 정치권이 야기한 문제이기도 하다. 최근 우리나라의 탄핵 심판을 둘러싸고 제기된 갖가지 의혹과 예단에서도 드러났듯이, 심지어는 재판관의 성향이며 출신을 놓고 인신 공격성 발언까지 나왔으니, 이런 '흔들기'를 통해서 헌법재판소의 권위가 실추되며 판결 불복 심리가 팽배했던 것은 당연지사였다.


여야를 막론하고 툭하면 사법부를 소환하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국민 모두에게 법률과 판결에 대한 불신만 조장한 셈이 아닐까. 대통령이고 여당이고 야당이고 간에 기존 법률의 빈틈을 찾아 각자의 입장에 걸맞게 이용하려 들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최근 대통령 권한 대행의 헌법재판관 후보 지명을 놓고 또다시 터진 논란 역시 그 연장이라 할 만하다.


일단 편법의 물꼬를 터 놓았으니 앞으로 여야의 대치 과정에서 법률과 판결을 둘러싼 혼란도 지속되지 않으려나. 급기야 이제는 어떤 판결이 나오더라도 '불복하면 그만이다' 식 태도가 난무하니, 이걸 과연 법치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이처럼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법조인조차도 난생 처음 가 보는 길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셈이다 보니 혼란도 불가피해 보인다. 


일반 국민이라고 사법부의 존재를 몰라서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차 시비건 층간 소음이건 상식 선에서 적당히 합의하고 넘어가면 되는 일을 일단 소송부터 걸어보고 재판까지 끌고가는 것은 누가 봐도 과도하지 않은가. 그런데 일반 국민조차도 비상식적이라 생각해서 시도하지 않는 일이 정치권에서는 오히려 상식이자 권리로 통한다니 이상한 일이다.


급기야 개헌 주장도 나오던데, 누군가의 일갈처럼 과연 지금의 혼란이 모두 헌법 때문이냐는 의문을 유념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아무리 헌법이라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재앙의 월요일>에 수록된 논란의 판결들이 이미 증명했고, 나아가 편법을 도모하는 세력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지금 우리나라의 혼란스러운 현실이 이미 증명한 셈이니...




[*] 미국 연방대법원에 대한 책으로는 '워터게이트'를 보도한 밥 우드워드의 <지혜의 아홉 기둥>과 제프리 투빈의 <더 나인>이 있지만, 저마다 특정 시기를 다룬 것이다 보니 전체상을 조명하기엔 아쉬워 보인다.(아울러 오역과 오타에 대한 지적이 많다!) <최후의 권력, 연방대법원>이라는 책도 있지만, 대법관이었던 저자 존 폴 스티븐스의 회고가 중심이다 보니 역시나 한계가 있어 보인다. 대법관 개인에 대해서도 전기나 자서전이 여럿 나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될 정도면 십중팔구 이력이나 판결로 인해 유독 주목을 받은 경우이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블랙먼, 판사가 되다>가 그러한데, 여성의 낙태 권리를 인정한 '로 앤드 웨이드' 사건으로 유명한 (또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는 '악명 높은') 대법관 해리 블랙먼(1970-1994 재임)의 전기이다. 여성 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1993-2020 재임)와 소니아 소토마요르(2009-현재)도 전기와 자서전 등이 여럿 간행된 듯한데, 역설적이게도 판결보다는 오히려 성별과 인종에서 비롯된 상징성 때문에 더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닌가 의심해 볼 만하다. 마찬가지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대법관 가운데 한 명인 올리버 웬델 홈스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전기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은 <홈즈 평전: 미국법의 사이비 영웅>은 부제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듯이 흔히 진보 성향으로 평가된 저 인물을 보수의 입장에서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내용이다. 물론 비판의 여지도 있는 인물이고, 어느 누구라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겠지만, 국내에는 본격적인 전기조차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해당 인물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 더 먼저 나온 격이니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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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중에 <대온실 수리 보고서>라는 것이 있어서 혹시 남산 식물원이나 서울대공원 식물원 같은 유리 구조물의 보존 관리에 대한 논픽션인가 싶어 클릭해 보니 의외로 소설이다. 그래도 창경원 식물원을 소재로 다루었다기에 호기심이 생겨 해상도 떨어지는 알라딘 미리보기로 대강 살펴보았는데, 그리 흡인력 있는 내용까진 아닌 듯하니 안 읽어도 그만일 듯하다.


얼마 전 바깥양반이 요즘은 소설을 읽어도 영 재미가 없다면서, 아무래도 우리보다 나이 어린 작가의 경우에는 한글 전용 세대이다 보니 어휘 자체부터 제한적이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한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정양완 선생의 에세이에서 '거드쳐주다'와 '창거려주다' 같은 생경한 서울 사투리(?)며 독특한 문장이 의외로 참 재미있었던 기억도 나고.


재미있는 소설은 처음 한두 문장, 길어야 처음 한두 페이지에서 뭔가 '느낌'이 온다고 믿는 나귀님이다 보니, 요즘은 각종 화제의 신간을 미리보기하다가 영 밍밍한 느낌에 포기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다면 나귀님 기준으로 재미있는 소설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가장 최근의 사례로 (그래 봤자 몇 년 전이지만) 크누트 함순의 <땅의 혜택>이라고 말해야 되겠다.


함순의 책은 <생태학의 역사>라는 책에서 '구약성서 비슷한 간결한 문장'이라는 평가를 접하고서 흥미를 느껴 읽게 되었으며 (참고로 <생태학의 역사>는 알라딘 중고샵에서 구입했는데, 딱 그 부분을 읽고 나서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파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결국 반품했다!) 다음에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서 페이지를 넘기다 완독해버린 거였다. 


그나저나 창경궁 이전 창경원 시절에 여러 번 가본 나귀님이지만, 의외로 식물원에 가본 기억은 없다. 인터넷에서 창경원 시절 평면도를 찾아보니 동물원은 서쪽 끝에 있고 식물원은 동쪽 끝에 있는데, 그 시절 창경원이라면 당연히 호랑이며 코끼리 같은 동물을 구경하러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보통이니, 멀리 떨어진 식물원까지 굳이 가볼 이유는 없었을 법하다.


옛날 사진을 모아 놓은 앨범에서는 케이블카 오가는 창경원 연못 앞에서 가족끼리 찍은 사진을 본 기억도 있으니, 늘 왼쪽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오른쪽에도 가보기는 한 것 같고, 어쩌면 식물원에도 한두 번은 들어가 봤을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동물원에 대한 기억도 가물가물해진 지금에 와서는 식물원에 대한 기억 따위 아무리 더듬어도 나올 리 만무하다.


예전에 창경원 동물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길 때에 안전을 고려해서 한밤중에 이동했다는 뉴스도 접한 적이 있는데, 이후 창경궁으로 복원한 이후에는 한 번만 가봤나 했었던 것 같다. 언젠가 알라딘 대학로점 가느라 창경궁 앞으로 버스 타고 지나가 보니, 근처 고가도로도 없어지고 홍화문 앞도 예전 기억처럼 넓고 웅장하지는 않기에 새삼스레 놀라기도 했었다.


창경원 관련서로는 당시 그곳 동물원에 근무했던 사육사 오창영과 김정만의 에세이를 갖고 있는데, 동물원보다는 동물에 대한 설명 위주인 책이다 보니, 구입 당시에만 해도 자료 가치가 높아 보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낡은 감이 없지 않다. 드문드문 언급된 동물원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았다면, 사라진 모습을 알아볼 자료로 오히려 귀하게 여겨지지 않았을까.


최근에 에버랜드의 판다 가족이 인기를 끌면서 담당 사육사들도 강바오니 송바오니 하면서 덩달아 인기를 끄는데, 앞서 말한 창경원 사육사 오창영과 김정만도 꾸준한 언론 기고와 방송 출연으로 이름을 많이 알린 경우에 해당한다. 특히 김정만은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라는 동물 퀴즈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해서 얼굴이며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으리라 본다.


그런데 지금은 '사육사'를 '주키퍼'라는 영어 명칭으로 일컫는 풍조도 생긴 모양인데, 실제로 하는 일이야 큰 차이가 없으니 뭔가 불필요한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강바오와 송바오가 근무하는 에버랜드에서 유독 그렇게 칭하는 듯한데, 선배 격인 오창영과 김정만이 무려 정식 수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육사'로 호칭되었음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하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라는 책 제목에 나와 있듯, 창경궁 대온실은 식물원 이전 후 한동안 방치되다가 수리를 거쳐 다시 식물원으로 사용되고 있다니, 나중에라도 시간 되면 한 번 찾아가 봐야겠다. 내친 김에 남산 식물원도 오랜만에 가볼까 싶어서 지금 다시 검색해 보니... 2006년에 이미 철거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그냥 옛날 추억으로만 떠올려 봐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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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바깥양반 성화로 신촌에 벚꽃 보러 갔다가 알라딘에 들러 허탕만 치고 (예전에는 책장 맨 꼭대기까지 물건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장식품만 놓여 있고, 1층 가운데 매대도 절반은 팬시용품뿐이다) 혹시나 싶어서 단골 헌책방에 들러 보았더니 지학사 오늘의 세계문학 가운데 하나인 <광야의 집>(호세 도노소 지음, 김창환 옮김, 1988)이 눈에 띄어 구입했다.


이 시리즈를 모으기 시작한 것이 1990년대 초였으니까, 대략 30년째 찾아다닌 셈인데 아직 완질을 갖지는 못했다. 전34권으로 알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두 권이 비었으니까, 어쩌면 평생 다 사지는 못할 수도 있겠다. 물론 지금이라도 중고로 구하려면 구할 수 있지만, 절판본을 만나는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 언젠가 때가 되면 만나겠지 여유를 부린 까닭이다.


아주 흔치는 않은 시리즈인데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까닭은 그 대부분을 단 한 번에 구매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서울역에서 남영동 쪽으로 큰길에 헌책방이 대여섯 군데 있었는데, 하루는 그중 맨 끝에 있는 별빛서점에 들렀더니 이 시리즈 가운데 스물대여섯 권이 꽂혀 있었다. 생소한 작품이며 작가가 대부분이었지만, 무슨 내용인가 궁금해서 모조리 샀다.


지학사라면 대부분 교과서와 참고서 출판사로 기억하겠지만, 한때는 단행본을 간행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벽호'로 브랜드명이 바뀌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성과물이 '오늘의 세계문학'이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와 작품을 해당 언어 전공 교수가 번역했다는 점인데, 그래서인지 아직도 유일한 번역서로 남은 것들이 많다.


세계문학전집이라면 지금도 영미유럽 작가에 편중된 것이 문제로 지적되는데, 이 시리즈는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중남미 등 이른바 제3세계 작가를 많이 소개했다. 당시 노벨문학상을 이미 받은 작가로는 클로드 시몽, 월레 소잉카, 나집 마흐푸즈, 나딘 고디머를 넣었고, 유력 후보로 거론된 작가로는 치누아 아체베, 응구기 와 시옹오, 막스 프리쉬를 넣었다.


훗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페터 한트케의 작품도 하나씩 넣었으니, 이 시리즈의 선구안도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영미유럽 작가 중에서 앤서니 버제스, 토머스 핀천, 마가렛 앳우드, 조이스 캐롤 오츠 등을 넣었던 것도 당시로서는 꽤나 특이했고, 중국 작가 중에서 장애령을 넣었던 것 역시 특이했다.


나귀님 입장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작품은 역시나 버제스의 대표작 <시계태엽 오렌지>의 번역본인 <조직과 인간>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영국판이 아니라 미국판을 번역 대본으로 삼았다는 점이 특이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미국판은 영국판의 맨 마지막 장을 삭제함으로써 더 암울하고 충격적인 결말을 제시했지만, 저자의 허락을 받지 않아서 논란이 되었다.


반면 나중에 번역된 민음사의 <시계태엽 오렌지>는 영국판을 대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미국판의 결말에서 수년 뒤의 상황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도 고스란히 실려 있다. 물론 편집자나 출판사가 감히 저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멋대로 내용을 가감한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작품의 내용을 감안해 보면 영국판보다 미국판의 결말이 더 그럴싸하게 여겨진 것도 사실이다.


생각해 보니 미국판의 결말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결말과도 똑같은 셈이니, 어떤 면에서는 저자의 의견보다 편집자/출판사의 의견이 더 정확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여하간 나귀님은 <조직과 인간>을 통해 미국판의 결말이 유일무이한 결말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영화에도 그렇게 나왔으니까!) 나중에야 또 다른 결말이 있다고 하기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 다음으로 흥미로웠던 작품이 바로 그제 타계한 페루의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녹색의 집>이다. 중앙일보사 세계문학전집에 들어 있던 <빤딸레온과 위안부들>을 먼저 읽었는지, 아니면 이 작품을 먼저 읽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여하간 수많은 '목소리'가 정신없이 교차되면서 사건의 윤곽이 점차 뚜렷해지는 서술 기법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후 <미라플로레스에서 생긴 일>과 <궁둥이>를 읽고 나서부터는 이 작가의 책이라면 일단 사고 보는 버릇이 생겨 버렸는데, 막상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에 한동안 절판되었던 책들도 재간행되고, 새로운 작품이 대거 번역되는 것을 보니 어쩐지 관심마저도 시들해져서, 지금은 읽은 것보다 읽지 않은 것이 더 많은 채, 마루 책장 한구석에서 먼지만 쌓여 가고 있다.


그런데 이 작가의 책 중에서도 막상 읽고 나니 살짝 어리둥절했던 경우가 있었으니, 사실 원저자가 문제라기보다는 번역자가 문제였던 경우다. <픽션에 숨겨진 이야기>라는 책인데, 원래는 1968년에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했던 강연 내용을 수정해서 내놓은 것이다. 판형도 작고, 분량도 적어서 150쪽에 불과하지만, 원문도 수록되다 보니 번역문은 그 절반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번역자의 무지와 편집자의 부재다. '알렉상드르 뒤마'를 '알레한드로 듀마스'로, '플로베르'를 '플라우베어'로 오기한 것은 물론이고 수많은 오타도 들어 있다. 아마존 토착민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벨기에 탐험가를 가리켜 "그 역시 마르께스이다"(60쪽)라고 첨언한 것이 있어서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만, 무려 '후작'(marques)의 오역이다!


그런데 제아무리 오역과 오타가 그득한 몰골이라도 이 책을 감히 내버릴 수 없는 까닭은, 그 내용이 바로 <녹색의 집>의 창작 과정에 대한 회고이기 때문이다. 즉 어린 시절 잠깐 살았던 동네의 유곽인 "녹색의 집"을 멀찍이 지켜보며 느낀 호기심부터, 청년 시절 아마존에서 목격한 원주민과 선교 단체와 범죄 조직에 대한 기억이 뒤섞여 저 소설이 나왔다는 거다.


즉 "소설을 쓴다는 것은 스트립쇼와 비슷한 의식이다"(11쪽)라는 상당히 당혹스럽기까지 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강연록은 바르가스 요사 나름의 창작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스트립걸이 음탕한 조명 밑에서 옷을 벗어 던지며 자신의 감추어진 매력들을 하나하나 보여주는 것처럼, 소설가도 역시 작품들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자신의 은밀한 부분들을 발가벗는다."


하지만 소설은 단순한 노출로 그치지 않는다. "물론 둘 사이의 차이점은 있다. 소설가가 자기 스스로 내보이는 것은 스트립걸이 전개하는 것처럼 자신의 감추어진 매력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장 추한 부분, 즉 그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향수, 실수, 원한 등과 같은 악마이다." 아울러 "소설가는 옷을 반쯤 벗고 시작해서,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옷을 입는다."


이후의 강연 내용에서 드러나듯이, <녹색의 집>은 그의 수많은 기억들이 뒤섞이고 변형되어 현실에서 재창조된 허구이다. 소설의 내용이 현실의 사례와 정확히 대응하지는 않더라도 근거가 없지는 않으니, 저자의 다음과 같은 정의에 딱 들어맞는 셈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전위된 스트립쇼이고, 모든 소설가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노출광들이다."(11-12쪽)


강연 말미에서 바르가스 요사는 저 소설을 발표한 이후, 그 소재가 된 유곽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 번 날을 잡아 방문하려 했지만 번번이 이런저런 이유로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고 언급한다. 때로는 불가피한 사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충분히 기회가 있었는데도 저자 스스로가 막판에 결정을 번복해서 방문을 취소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어쩌면 노출 후 이미 옷을 도로 입은 까닭일까. "이야기를 쓰는 데 필요한 첫 번째 자극물이었던 개인적인 경험(일상생활, 꿈, 듣기, 독서)들은 창작 과정 동안 아주 심술궂게 감추어져서, 소설이 끝났을 때에는 어느 누구도, 때때로 소설가 자신조차도, 모든 허구의 이야기 안에 길게 늘여져 있는 자서전적인 그 마음을 용이하게 귀담아 들을 수가 없다."(11쪽)


하지만 저자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고, 오랫동안 찾아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녹색의 집>의 소재를 제공한 "그 도시, 그곳의 사람들, 그곳의 모래밭조차도 나를 자유롭게 풀어 주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그러면서 덧붙인 강연문의 마지막 몇 마디는 마치 지금까지 모든 작품 창작의 토대였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보내는 마지막 인사처럼 들리기도 한다. 


"여러분들 중에 누구라도 우연히 삐우라에 가서 만가체리아를 둘러보고 '녹색의 집'을 방문한다면, 만가체리아 사람들과 아비딴따들에게 내가 계속해서 그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말을 제발 전해 주십시오. 각고의 노력으로 그들에 대한 글을 쓰는 데 지루한 3년을 보냈고 (...) 아직도 나의 마음속에는 계속해서 그들이 남아 있다고 전해 주십시오."(72쪽)



[*] 그나저나 <픽션에 숨겨진 이야기> 번역자의 약력을 살펴보니, 다른 번역서 중에는 마르케스의 단편집 <이방의 순례자들>도 있었다! 교통사고가 나서 전화를 쓰려고 우연히 정신병원에 들어갔다가 정신병자로 오해받아 영영 나오지 못하게 된 여자의 이야기라든지, 딸의 썩지 않는 시체를 트렁크에 넣어 다니며 바티칸에서 성녀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처럼 기괴하면서도 인상적인 단편이 많았는데, 지금 와서 다시 읽어 보면 바르가스 요사의 번역서처럼 잘못된 문장이 줄줄이 나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이미 오래 전에 사다 놓은 (아마 한 번 읽기도 했던 것 같은)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중남미 소설 개론도 이 양반 번역이라니, 그건 또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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