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업다이크의 "토끼" 4부작이 완간되었다. 1편인 <달려라 토끼>는 2011년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재간행된 바 있었는데, 이번에 같은 시리즈로 2-4편이 한꺼번에 간행된 것이다. 원래부터 4부작 모두를 간행할 계획이었지만 사정이 있어 늦어진 것인지, 아니면 1편만 내려다가 뒤늦게 2-4편까지 내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완간이라니 반갑다.


2편 <돌아온 토끼>는 과거 축약본만 있었으니 완역본은 이번이 처음이고, 3편 <토끼는 부자다>도 안정효 번역본이 절판된 이래 첫 재간행이며, 4편 <토끼 잠들다>는 이번에 처음 소개되는 셈이다. 물론 "토끼" 시리즈는 본편인 장편 4부작 외에도 외전으로 주인공 사후의 이야기인 중편 "토끼 기억되다"가 더 있다고 하니, 보기에 따라서는 '완간'이 아닐 수도 있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니, 맨 처음 읽은 업다이크의 소설은 비교적 덜 유명한 <이브의 도시(Roger's Version)>였고, <달려라 토끼>는 그 다음에야 읽었지만 그닥 재미있지는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미국 중산층의 부부 생활에 초점을 맞춘 풍속 묘사가 그의 작품 세계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듯하니, 어린 시절의 나귀님으로선 선뜻 공감하기 어려웠으리라.


물론 비슷한 내용이지만 의외로 묘한 여운을 남긴 작품도 있기는 했으니, 바로 연작 단편집 <벌거숭이들(Too Far to Go)>이다. 매번 이런저런 갈등으로 위기를 겪다가 어찌어찌 봉합되는 중산층 부부 이야기인데, 맥락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밤중에 둘이 차에 앉아 있다 남의 눈을 피해 납작 엎드려 서로를 끌어안은 상태로 마무리되던 편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업다이크의 소설이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인데, 그의 전성기인 1970년대 미국 사회의 성 개방 풍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스와핑(부부 교환)에 대한 묘사가 반복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다. 그런 시대상을 보여주는 논픽션이 게이 탈리즈의 <네 이웃의 아내>라면, 픽션으로는 아마 업다이크의 소설들을 꼽아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오죽하면 1978년 <커플스>의 역자 후기에서 장왕록 교수도 (에세이스트로도 유명했던 장영희 교수의 부친이다) 표현이 과하다 싶은 부분은 생략했다고 밝혔을까.(시대적 한계를 보여주는 언급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 번역서는 완역본이 아니었다는 뜻이니 살짝 아쉽다). 문득 어린 시절 업다이크를 읽다가 '오, 이게 된다고?'라 생각했던 장면이 몇 가지 떠오른다!


업다이크는 장왕록 교수와 친분도 있었고, 펜(PEN) 대회 참석 차 서울을 방문한 적도 있었다.(이때 존 치버도 동행했다. 그의 일기에는 후배 업다이크와 친하면서도 츤츤댔던 것으로 나온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도 일찍부터 많이 번역되었고, 나중에는 미국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자리잡으면서 노벨문학상에 대한 기대 때문에 신작도 거듭 간행된 것 아닌가 싶다.


다만 풍속 소설로서의 장점이 무려 반세기 뒤인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한계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또 한편으로는 미국식 사고와 생활 방식이 전세계에 익히 알려진 지금이야말로 "토끼" 시리즈를 읽기에는 오히려 적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최근 사회 분위기상 필립 로스처럼 페미니즘 비평의 철퇴를 맞을 가능성도 없진 않겠지만...




[*] 업다이크의 장편 소설 26편 가운데 우리나라에 간행된 것은 절반인 13편쯤 되는 듯한데, 책장을 뒤져 보니 1970년대에 나온 번역서가 몇 권 있어서 소개해 볼까 싶다.


<돌아온 토끼(Rabbit Redux, 1971)>(이덕형 옮김, 덕문출판사, 1974). 역자서문에 과도한 표현이며 불경한 언어를 일부 삭제한 초역본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반인반마: 센토(The Centaur, 1963)>(이덕형 옮김, 덕문출판사, 1974 초판; 1977 중판). 서지학 측면에서 하나 흥미로운 실수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출판사가 이사하면서 판권면을 새로 인쇄해 덧붙였는데, 실수로 1977년 중판이 아니라 1974년 초판이라고 인쇄했다. 즉 판권지에 '초판'이라 나오더라도, 그 밑의 원래 판권지를 확인해야 사실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다.


<커플스(Couples, 1968)>(장왕록 옮김, 경영문화원, 1978). 나중에 다른 출판사에서 재간행되기도 했다.


<결혼(Marry Me, 1976)>(이경수 옮김, 까치, 1978).


<벌거숭이들(Too Far to Go, 1979)>(김성열 옮김, 여원출판사, 1980). 업다이크는 첫 단편집 <같은 문>에 수록된 "그리니치 빌리지의 문"(1956)을 시작으로 '메이플 부부'가 등장하는 연작 단편을 17편이나 썼고, 1979년에 이를 한 권으로 엮어 간행했다. 다만 이 번역서에는 그중 14편만 골라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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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김정은이 전용 열차로 중국에 다녀오면서 또다시 화제가 되었다. 지난번 트럼프와의 회담 당시에도 굳이 기차로 중국을 지나서 베트남으로 넘어가는 여행길을 선택해 화제가 되었는데, 당시 청와대에서도 그런 번거로운 여정에 열심히 의미 부여를 했던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소련제 전용기가 낡아서 울며겨자먹기로 전용 열차를 사용했을 뿐이라고 전한다.


어쩌면 비행기보다 기차를 선호하는 것이야말로 북한 김씨 일가의 취향인지 고집인지도 모르겠는데, 김정은에 앞서 그 아비 김정일이 무려 모스크비까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따라 전용 열차로 오갔었기 때문이다. 그때에도 굳이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기차를 이용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 추측이 있었는데, 십중팔구 불안한 처지에 신변 보호의 목적이 아니었을까.


흥미롭게도 2001년 여름 김정일의 모스크바 방문 당시 문제의 전용 열차에 동승했던 러시아 관료의 수기가 우리나라에도 <동방특급열차: 김정일과 함께한 24일간의 러시아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다. 당시 러시아 극동지구 총괄 행정관이었던 저자 풀리코프스키는 푸틴의 초청을 받은 김정일과 국경 도시 하산에서 만나서 모스크바까지의 왕복길에 동행한다.


안전을 위해 김정일의 전용 열차 앞뒤로 러시아 철도 당국과 외교 당국의 요원들이 탑승한 열차가 줄지어 달리는 형국이었다는데, 저자는 긴 여정 내내 종종 김정일의 부름을 받고 전용 열차에 탑승해서 대화를 나누었다고 회고한다. 풀리코프스키의 눈에 비친 김정일은 의외로 식견이 넓고 예리하며, 무엇이든지 간에 직접 확인해야만 만족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물론 김정일과 나눈 대화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전용 열차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저자도 그리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십중팔구 외교와 보안상의 문제 때문이 아니었을까. 대신 이 책에서 저자는 남북한의 역사와 사회, 양국과 러시아의 관계 등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자세히 서술했는데, 아마 이 주제에 무지한 러시아 독자들을 위한 배려였을 법하다.


차라리 김정일의 발언이나 전용 열차, 하다못해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대해서라도 좀 더 언급했다면 모르겠는데, 뭔가 조금 설명하다 말고 남북한 역사 등의 여담으로 흐르다 보니, 아무래도 두서없고 산만한 느낌이 강해서 자료 가치는 예상보다 높지 않을 법하다. 오히려 군인 출신인 저자가 체첸 참전과 아들 전사에 대해 짧게 언급한 부분이 더 눈길을 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김정일의 전용 열차는 무려 그 아비 김일성의 집권 당시에 스탈린이 선물로 제공한 것이라고 한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일본 제작설을 부인하면서, 다만 이후에 추가 장착된 설비는 일본에서 제공했을 수도 있다고 단서를 달았다. 내부 설비는 상당히 안락한 편이며, 심지어 운행 상황을 알 수 있는 전자 지도까지 스크린에 나왔다고 전한다.


하지만 김정일과 환담 중에도 에어컨이 영 신통치 않아서 땀이 흘렀으며, 저자가 탑승한 호위 열차에서도 에어컨은 물론이고 급수조차 불안정해서 애를 먹었다고 회고하는 것을 보면, 그 당시 북한과 러시아 모두가 기반 시설 노후화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겪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손님과 주인 모두 피차 궁핍한 상태에서 만났으니 상당히 겸연쩍지나 않았을까.


명색이야 전용 열차이고, 각종 편의 시설과 안전 장치까지 갖추었다지만, 실상은 70년도 넘은 구 소련 시절의 물건을 계속 사용하는 셈이라니 (일각에서는 스탈린의 선물이 이미 박물관에 가 있고, 이후 새로 만든 열차라는 주장도 있지만) 시대착오적인 것은 물론이고, 어찌 보자면 거듭된 실정으로 파탄 위기에 처한 세습 정치와 국가 경제의 상징 같기도 하다.


북한의 세습 정치는 사실상 사이비 종교나 다름없는 수준인데, 현재의 최고 지도자 김정은은 나름 외국 물까지 먹었다면서도 무려 3대 사이비 교주 노릇을 순순히 이어받아 행하고 있으니 그 머릿속이 궁금해진다. 이번에는 딸까지 동행해서 향후 4대째 세습까지도 의도하지 않느냐는 추측까지 나왔는데, 정말 현대 사회에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귀님이 본 김정은의 모습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언젠가 관광객 유치를 위해 새로 개장한 북한 스키장을 순시하던 중에 혼자 리프트를 타는 모습이었다. 측근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에는 스스로를 잘났다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렇게 별다른 안전 장치도 없이 공중에 떠 있다 보면 일종의 '현타'도 오지 않았으려나. 과연 그때 그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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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프란체스코 교황의 타계와 새로운 교황 선출 즈음에 교황 사전 몇 종을 꺼내 뒤적이다 문득 대립 교황에 대한 내용에 흥미가 가서 이런저런 참고자료를 덩달아 뒤적였는데, 마침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황당무계한 '대립 후보' 사건이 벌어지기에 그 유사성을 한 번 지적해 볼까 생각만 하다 평소처럼 차일피일했더니만 여름도 가고 가을이 되었다.


두 번 세 번 피곤하게 자꾸 질문하지 말라는 계절의 당부도 있었지만, 그래도 솔직한 것이 장점이라는 또 다른 조언을 유념하여 주섬주섬 생각을 정리하며 참고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문득 새로운 교황 선출을 앞두고 갑자기 관련서를 찾는 독자가 늘면서, 오래 전 절판된 존 줄리어스 노리치의 <교황 연대기>가 덩달아 재간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나귀님도 그 책을 예전에 사다 놓았는지, 안 사다 놓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 책장을 뒤지다 보니, 같은 저자의 대표작 <비잔티움 연대기>는 나오는데 <교황 연대기>는 나오지 않는다. 뭐, 재간행되었다고 하니 천천히 사도 되겠지 싶기도 했는데, 이쯤 되니 비잔틴 제국에 관한 책은 또 뭐가 있었는지 궁금해 더 살펴보았더니 <비잔틴 제국 비사>라는 책이 나온다.


최근 수년 사이에 비잔틴 제국 관련 1차 사료들이 비록 중역본으로나마 번역되어 화제가 된 바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알렉시아드>이고, 또 하나가 프로코피오스의 <비사>이다. 다만 몇 년 전에 구입하며 훑어보았더니 의외로 영역자 서문에서부터 오역이 적지 않았다. 아무래도 신뢰할 수 없는 번역 같아 팽개쳐 두었는데, 다시 읽어보니까 역시나 문제가 많았다.


역사 전공자도 아닌 번역자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책을 옮기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만들려면 최대한 성실하게 번역했어야만 비전공자 중역본이라는 한계를 만회할 수 있었을 터이다. 하지만 막상 번역본과 그 대본이라는 영역본을 대조하면 누락은 물론이고 오역도 적지 않은 탓에, 학술적 가치는 고사하고 일반 독서용으로도 불만족스러운 수준이다.


공짜 알바할 생각은 없으니, 수두룩한 오역 중에 특히 웃기는 것 하나만 지적하자면, 제9장 "가장 타락한 여인 테오도라가 황제의 사랑을 얻은 방법"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코미디 배우로서 그녀는 수갑을 차거나 뺨 맞는 연기 따위로 관객들을 즐겁게 했다."(121쪽) 즉 유스티니아누스의 황후 테오도라가 젊은 시절 무대에 섰다는 설명의 한 대목이다. 


그런데 여기서 "수갑을 차거나 뺨 맞는"이라고 옮긴 구절은 차라리 "귓방망이와 귀싸대기"(cuffed and slapped) 정도로 옮겨야 맞다. 십중팔구 "귓방망이"(cuff)를 "수갑"(handcuff)의 축약형이라 착각한 듯한데, '넘어지고 자빠지는' 슬랩스틱 코미디의 한 장면에 대한 묘사에서 난데없이 "수갑"이 등장하는 이유를 가만 생각해 보기만 했어도 오역은 없었으리라.


사실 오역보다 더 큰 문제는 누락과 첨언이어서, 영역문에는 버젓이 나와 있는 부연 구절을 종종 삭제하고, 거꾸로 영역문에는 나오지도 않은 구절을 종종 덧붙이기도 했다. 여하간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려면 참고할 만하겠지만, 중역본이라는 한계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영역문에 충실한 것까지도 아닌 까닭에, 설령 완독하더라도 찜찜한 느낌이 남을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논란의 여지가 있게 번역된 프로코피오스의 <비사> 자체도 상당한 논란이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유실되었다고 간주되다가 17세기에 재발견되며 위작 의심도 받았고, 최고 권력자에 대한 노골적인 찬사를 내놓았던 이전 저서와는 정반대로 황당무계한 수준에까지 치닫는 노골적인 인신공격을 펼치기 때문에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의문이다.


비잔틴 제국 초기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법전 편찬 등 다양한 업적을 남긴 군주인데, 그 행적을 자세히 기록해 후세에 알리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저술가가 바로 프로코피오스였다. 그런데 한때는 아첨꾼 소리를 들을 정도로 찬사 일변도였던 바로 그 저술가가 군주 부부의 갖가지 범죄와 만행과 음모 등을 시시콜콜하게 기록한 <비사>를 후세에 남긴 것이다.


프로코피오스의 주장에 따르면, 황제와 황후는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해서 국가 정책을 멋대로 주물렀으며, 필요하다면 외교와 전쟁에 대한 결정까지도 하루아침에 뒤집고, 매관매직을 비롯한 각종 부패에 연루된 것은 물론이고 사유 재산 몰수까지도 수시로 자행했다. 물론 오늘날 비잔틴 제국 관련서에서는 대부분 언급 자체가 없는 내용들이다.


특히 황제와 황후에 대한 인신공격이야말로 가장 놀라운, 어찌 보면 황당무계하기 때문에 차마 믿기가 어려운 내용이기도 하다. 황제에 대해서는 잔인하고 속물적인 성격인데다, 실제로는 인간이 아니라 마귀의 현현이라고까지 주장하는가 하면, 황후에 대해서는 창녀 출신으로 하루에 남자 수십 명을 상대할 만큼 음란하다면서, 어쩐지 꽤나 익숙한 비난을 가한다.


내용의 신빙성은 둘째 치고 저자의 의도조차 가늠하기가 어려우니, 오늘날의 역사학계에서는 <비사>를 과장이 심해서 신빙성이 떨어지는 자료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듯하다. 설령 일말의 진실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황제가 몸뚱이 없이 머리만 날아다녔다는 둥, 보좌에 앉은 모습을 보니 사람이 아니라 마귀였다는 둥의 주장과 뒤섞이니 당연히 믿기가 힘들다.


일각에서는 프로코피오스가 황제의 실각에 대비해서 일종의 보험으로 <비사>를 집필했다고도 보는 모양이다. 실제로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위 중 반란으로 정권이 위태했던 일도 있었으니, 자칫 황제의 측근으로 지목되어 숙청당할 처지가 되면 비장의 카드로 쓰려고 그 비리를 낱낱이 적어둔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권력형 비리 때마다 증거로 제시되는 녹취록처럼.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프로코피오스의 <비사>에서 고발한 최고 권력자 부부의 만행 가운데 일부는 우리나라의 지난 정권에서 벌어진 권력 남용 사례 가운데 최근 특검을 통해 밝혀진 내용과도 유사한 부분이 없지도 않다. 매관매직과 각종 특혜를 남발하며 공익 대신 사익을 추구했다는 점부터 시작해서, 영부인의 과거 이력 논란도 한때 떠들썩했었으니 말이다.


대통령이 밤새 술을 퍼마시고 다음날 출근을 하지 않았다는 둥, 영부인이 무속인의 조언을 신봉해서 국정 운영에 개입했다는 둥, 심지어 부부가 선상 파티를 위해 해군 함정을 동원했다는 둥, 현대 사회에서는 차마 상상하기도 어려운 갖가지 월권 혐의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니, 지금 여기가 21세기 대한민국인지 6세기 콘스탄티노플인지 헛갈릴 정도다.


솔직히 지금 우리로서도 차라리 가짜 뉴스였으면 좋겠다 싶은 수준이니, 만약 앞으로 1500년 뒤에 유일하게 남은 사료가 '김건희 특검 보고서'뿐이라면, 프로코피오스의 <비사>에 대한 오늘날의 반응과 유사하게 후손들도 위작이거나 과장이라고 여기지 않으려나. 심지어 검사 출신 대통령이 법정 출석을 거부하며 속옷 바람으로 농성했다는 기록까지 발굴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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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로스앨러모스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금고털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이건 단순히 외모나 성격에서 유래한 별명이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실제로 건물 곳곳의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남의 금고 문을 따고 다녔기 때문이다. 무려 핵무기 개발에 관련된 일급 기밀 서류가 하나같이 잔뜩 들어 있는 금고 문을 말이다.


그 시작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자기 사무실에 있는 금고의 잠금 장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해서 뜯어보게 되었고, 원리를 이해하고 나자 청각과 촉각을 동원해 다이얼 맞추는 방법을 연습하게 되었으며, 나중에 가서는 다른 금고에도 적용되는지 시험해 보았고, 신형 금고가 들어올 때마다 응용 방법을 궁리하다 보니, 어느새 준 전문가 수준이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동료들을 놀려주는 용도로만 사용했지만, 나중에는 일급 기밀을 다루는 사무실의 보안 수준이 낮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한 번은 고위직 사무실의 대형 금고를 불과 몇 분 만에 열어서 관련자를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는데, 평소처럼 근무자들이 사무실 금고를 열어 놓은 채로 일하면 비밀번호가 유출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파인만은 과거 경비가 삼엄했던 로스앨러모스의 철조망에 인부들이 뚫은 개구멍을 발견하자, 그 사실을 직접 신고하는 대신 일부러 초소를 거쳐 나갔다가 개구멍으로 들어오는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경비원의 주의를 끈 적도 있었다. 장난기 다분한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뭐든지 스스로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던 평소의 교육 신념과도 일맥상통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고위직 사무실의 대형 금고를 여는 시범 직후에 새롭게 내려온 보안 강화 지시로 인해 생겨난 의외의 결과에 파인만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파인만 교수가 다녀간 사무실에서는 반드시 금고 번호를 바꾸라'는 신규 업무 지침을 귀찮게 생각한 근무자들이 그 다음부터는 파인만이 문간에 나타나기만 해도 '들어오지 말라!'면서 손을 내저었다기 때문이다.


수백수천억의 예산이 들어가는 일급 기밀 정부 사업을 더 신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타당한 지적에도, 정작 실무자들은 전반적인 보안 수준을 높이는 대신 '파인만만 들여놓지 않으면 된다!'는 편법으로 반응했으니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더 황당한 것은 이런 식의 보안 불감증이 무려 80년 뒤인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정부 기관에 만연하다는 점이겠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일급 기밀 정부 사업이 진행 중인 사무실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금고털이를 취미로 삼았던 물리학자야말로 가장 큰 위험 요인으로 간주될 법도 하겠다. 하지만 실제로는 근무자가 금고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는 긴급 상황에서 열쇠공 대신 파인만을 불러 해결한 경우도 많았다니, 대부분의 동료들에게는 '걸어다니는 열쇠꾸러미'로 요긴하지도 않았을지.


하지만 "금고털이" 파인만도 독학으로 기술을 터득한 아마추어였기에, 나중에 로스앨러모스에 상주하게 된 전문 열쇠공이 대형 금고를 열었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찾아가 새로운 기술을 배우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열쇠공은 금고를 여는 기술을 전혀 모른다며 손사래쳤고, 도리어 "금고털이"의 소문을 익히 들었다며 파인만에게 기술을 공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다면 지난번 금고는 어떻게 열었냐고 묻자, 열쇠공은 사람들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즉 공장 출하 시 금고의 비밀 번호는 보통 0000이나 1111로 단순하게 정해져 있는데, 문제의 금고에서도 혹시나 해서 그 번호를 입력해 보았더니만 손쉽게 열리더라는 거다. 파인만이 혹시나 싶어 또다시 사무실마다 돌아다녔더니 정말 다섯 중 하나 꼴로 열렸다던가.


지금 새삼스레 이 일화를 떠올린 까닭은, 얼마 전 난리 난 보증보험 해킹 사고에서 통신 장치의 비밀번호가 공장 출하 시 설정인 0000 그대로였다는 조사 결과 때문이다. 최근 거대 통신사를 비롯해 곳곳에서 보안 사고가 빈발하는 상황이니, 어쩐지 앞으로 그 분야 종사자에게는 파인만 책이 필독서가 되어야 할 듯하다. 물론 뭐든지 알아도 안 하는 게 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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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임명된 유홍준이 최근 인기 폭발이라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 감독을 만나서 오윤의 <무호도>가 그려진 부채를 선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박물관의 까치호랑이 '굿즈'가 덩달아 인기라니 이제는 <무호도>도 상품화되나 싶어 검색했는데, 정식 굿즈까진 아니고 흰 부채에 유홍준이 직접 오윤의 그림을 모사해서 만든 선물인 모양이다. 


판화가 오윤은 이른바 민중 미술의 대표 작가이다 보니, 한때 여러 출판사의 책 표지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었던 것처럼 고단한 사람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 대번 떠오르지만, 때로는 <무호도>처럼 보자마자 웃음을 자아내는 의외의 해학적인 작품도 만든 모양이다. 나귀님은 우연히 헌책방에서 구입한 <오윤, 동네사람 세상사람>이라는 화집에서 처음 봤었다.


지난번에 민속학자 조자용이 까치호랑이 민화의 재발굴을 주도했던 사연에 대해서 잠깐 언급했는데, 열화당에서 나온 <한국 호랑이>라는 책에 관련 도판이 다수 들어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야 생각났다. 오랜만에 책을 다시 꺼내 뒤져 보니, 제1장 "호랑이 그림" 도입부에서 네 페이지에 걸쳐서 이 책에 실린 도판에 나오는 호랑이 머리 38종을 한데 모아 놓았다.


까치호랑이와 보통(?) 호랑이, 회화와 조각이 뒤섞여서 일관성은 살짝 떨어지지만, 한국 미술에 묘사된 호랑이 그림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은 대부분 모아 놓은 듯하니,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제법 유용한 자료일 수도 있겠다. 나귀님은 열화당의 '한국기층문화의 탐구' 총서에서 제1권 <한국무신도>와 <한국 호랑이>만 갖고 있는데, 아쉽게도 두 권 모두 절판본이다.


나귀님은 <한국 호랑이>를 수년 전 알라딘 우주점에서 우연히 구입했는데, 이때에도 알라딘의 원칙 없는 중고 판매 때문에 골탕을 먹은 바 있다. 구입 당시 정가 35,000원의 신판이라고 했는데, 막상 받아 보았더니 정가 20,000원이라고 나온 구판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객센터에 항의해서 판매가 산정 비율에 구정가를 적용하고 차액을 환불받는 과정을 거쳤다.


알라딘에서는 어떤 책의 신판이 나온 경우에는 곧바로 구판 정보를 데이터베이스에서 지우기 때문에 중고 판매 과정에서 종종 이런 착오가 생긴다. 한정판 수작업 그림책으로 유명한 <나무들의 밤>도 알라딘에는 4쇄본이 45,000원이라고만 나오지만, 나귀님이 과거 우주점에서 구입한 2쇄본은 정가 41,000원인데도 정가 45,000원을 기준으로 가격을 산정했었다.


만약 알라딘이 헌책 말고 새책만 취급했다면 이런 식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관리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중고샵과 우주점에서 매입하는 중고 상품까지 연동되는 상황이라면 좀 더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게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지금까지도 품질 관리가 허술한 것을 보면, 늘 그래왔듯이 '호갱님'들이 알아서 피하는 게 최선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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