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번 프란체스코 교황의 타계와 새로운 교황 선출 즈음에 교황 사전 몇 종을 꺼내 뒤적이다 문득 대립 교황에 대한 내용에 흥미가 가서 이런저런 참고자료를 덩달아 뒤적였는데, 마침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황당무계한 '대립 후보' 사건이 벌어지기에 그 유사성을 한 번 지적해 볼까 생각만 하다 평소처럼 차일피일했더니만 여름도 가고 가을이 되었다.
두 번 세 번 피곤하게 자꾸 질문하지 말라는 계절의 당부도 있었지만, 그래도 솔직한 것이 장점이라는 또 다른 조언을 유념하여 주섬주섬 생각을 정리하며 참고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문득 새로운 교황 선출을 앞두고 갑자기 관련서를 찾는 독자가 늘면서, 오래 전 절판된 존 줄리어스 노리치의 <교황 연대기>가 덩달아 재간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나귀님도 그 책을 예전에 사다 놓았는지, 안 사다 놓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 책장을 뒤지다 보니, 같은 저자의 대표작 <비잔티움 연대기>는 나오는데 <교황 연대기>는 나오지 않는다. 뭐, 재간행되었다고 하니 천천히 사도 되겠지 싶기도 했는데, 이쯤 되니 비잔틴 제국에 관한 책은 또 뭐가 있었는지 궁금해 더 살펴보았더니 <비잔틴 제국 비사>라는 책이 나온다.
최근 수년 사이에 비잔틴 제국 관련 1차 사료들이 비록 중역본으로나마 번역되어 화제가 된 바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알렉시아드>이고, 또 하나가 프로코피오스의 <비사>이다. 다만 몇 년 전에 구입하며 훑어보았더니 의외로 영역자 서문에서부터 오역이 적지 않았다. 아무래도 신뢰할 수 없는 번역 같아 팽개쳐 두었는데, 다시 읽어보니까 역시나 문제가 많았다.
역사 전공자도 아닌 번역자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책을 옮기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만들려면 최대한 성실하게 번역했어야만 비전공자 중역본이라는 한계를 만회할 수 있었을 터이다. 하지만 막상 번역본과 그 대본이라는 영역본을 대조하면 누락은 물론이고 오역도 적지 않은 탓에, 학술적 가치는 고사하고 일반 독서용으로도 불만족스러운 수준이다.
공짜 알바할 생각은 없으니, 수두룩한 오역 중에 특히 웃기는 것 하나만 지적하자면, 제9장 "가장 타락한 여인 테오도라가 황제의 사랑을 얻은 방법"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코미디 배우로서 그녀는 수갑을 차거나 뺨 맞는 연기 따위로 관객들을 즐겁게 했다."(121쪽) 즉 유스티니아누스의 황후 테오도라가 젊은 시절 무대에 섰다는 설명의 한 대목이다.
그런데 여기서 "수갑을 차거나 뺨 맞는"이라고 옮긴 구절은 차라리 "귓방망이와 귀싸대기"(cuffed and slapped) 정도로 옮겨야 맞다. 십중팔구 "귓방망이"(cuff)를 "수갑"(handcuff)의 축약형이라 착각한 듯한데, '넘어지고 자빠지는' 슬랩스틱 코미디의 한 장면에 대한 묘사에서 난데없이 "수갑"이 등장하는 이유를 가만 생각해 보기만 했어도 오역은 없었으리라.
사실 오역보다 더 큰 문제는 누락과 첨언이어서, 영역문에는 버젓이 나와 있는 부연 구절을 종종 삭제하고, 거꾸로 영역문에는 나오지도 않은 구절을 종종 덧붙이기도 했다. 여하간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려면 참고할 만하겠지만, 중역본이라는 한계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영역문에 충실한 것까지도 아닌 까닭에, 설령 완독하더라도 찜찜한 느낌이 남을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논란의 여지가 있게 번역된 프로코피오스의 <비사> 자체도 상당한 논란이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유실되었다고 간주되다가 17세기에 재발견되며 위작 의심도 받았고, 최고 권력자에 대한 노골적인 찬사를 내놓았던 이전 저서와는 정반대로 황당무계한 수준에까지 치닫는 노골적인 인신공격을 펼치기 때문에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의문이다.
비잔틴 제국 초기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법전 편찬 등 다양한 업적을 남긴 군주인데, 그 행적을 자세히 기록해 후세에 알리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저술가가 바로 프로코피오스였다. 그런데 한때는 아첨꾼 소리를 들을 정도로 찬사 일변도였던 바로 그 저술가가 군주 부부의 갖가지 범죄와 만행과 음모 등을 시시콜콜하게 기록한 <비사>를 후세에 남긴 것이다.
프로코피오스의 주장에 따르면, 황제와 황후는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해서 국가 정책을 멋대로 주물렀으며, 필요하다면 외교와 전쟁에 대한 결정까지도 하루아침에 뒤집고, 매관매직을 비롯한 각종 부패에 연루된 것은 물론이고 사유 재산 몰수까지도 수시로 자행했다. 물론 오늘날 비잔틴 제국 관련서에서는 대부분 언급 자체가 없는 내용들이다.
특히 황제와 황후에 대한 인신공격이야말로 가장 놀라운, 어찌 보면 황당무계하기 때문에 차마 믿기가 어려운 내용이기도 하다. 황제에 대해서는 잔인하고 속물적인 성격인데다, 실제로는 인간이 아니라 마귀의 현현이라고까지 주장하는가 하면, 황후에 대해서는 창녀 출신으로 하루에 남자 수십 명을 상대할 만큼 음란하다면서, 어쩐지 꽤나 익숙한 비난을 가한다.
내용의 신빙성은 둘째 치고 저자의 의도조차 가늠하기가 어려우니, 오늘날의 역사학계에서는 <비사>를 과장이 심해서 신빙성이 떨어지는 자료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듯하다. 설령 일말의 진실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황제가 몸뚱이 없이 머리만 날아다녔다는 둥, 보좌에 앉은 모습을 보니 사람이 아니라 마귀였다는 둥의 주장과 뒤섞이니 당연히 믿기가 힘들다.
일각에서는 프로코피오스가 황제의 실각에 대비해서 일종의 보험으로 <비사>를 집필했다고도 보는 모양이다. 실제로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위 중 반란으로 정권이 위태했던 일도 있었으니, 자칫 황제의 측근으로 지목되어 숙청당할 처지가 되면 비장의 카드로 쓰려고 그 비리를 낱낱이 적어둔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권력형 비리 때마다 증거로 제시되는 녹취록처럼.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프로코피오스의 <비사>에서 고발한 최고 권력자 부부의 만행 가운데 일부는 우리나라의 지난 정권에서 벌어진 권력 남용 사례 가운데 최근 특검을 통해 밝혀진 내용과도 유사한 부분이 없지도 않다. 매관매직과 각종 특혜를 남발하며 공익 대신 사익을 추구했다는 점부터 시작해서, 영부인의 과거 이력 논란도 한때 떠들썩했었으니 말이다.
대통령이 밤새 술을 퍼마시고 다음날 출근을 하지 않았다는 둥, 영부인이 무속인의 조언을 신봉해서 국정 운영에 개입했다는 둥, 심지어 부부가 선상 파티를 위해 해군 함정을 동원했다는 둥, 현대 사회에서는 차마 상상하기도 어려운 갖가지 월권 혐의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니, 지금 여기가 21세기 대한민국인지 6세기 콘스탄티노플인지 헛갈릴 정도다.
솔직히 지금 우리로서도 차라리 가짜 뉴스였으면 좋겠다 싶은 수준이니, 만약 앞으로 1500년 뒤에 유일하게 남은 사료가 '김건희 특검 보고서'뿐이라면, 프로코피오스의 <비사>에 대한 오늘날의 반응과 유사하게 후손들도 위작이거나 과장이라고 여기지 않으려나. 심지어 검사 출신 대통령이 법정 출석을 거부하며 속옷 바람으로 농성했다는 기록까지 발굴된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