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더미를 뒤지다 보니, 지난번에 사다 놓은 아도르노의 <신극우주의의 양상>이라는 얄팍한 책이 나온다. 제목이 그럴싸해 보여서 혹시 최근의 한국 상황에 대입해 볼 만한 내용이 나오는지 궁금해 뒤적여 보았는데, 원래 1967년의 강연을 재간행한 것인 데다, 역사적 맥락이 다른 까닭인지 충분히 아전인수할 만한 내용까지는 찾지 못해서 유감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조금 뒤적이다가 식탁에 놓아 두었더니, 바깥양반이 약속 있다며 밖에 나가면서 '오, 아도르노' 하고 냉큼 집어가기에, 나중에 들어오면 무슨 내용이더냐고 물어봐야지 생각했는데, 이후로 며칠이 지나도록 가방에 넣고 돌아다니기만 하지 정작 펼쳐보지는 않은 모양이어서 아쉬웠다. 혹시나 싶어 다시 뒤적여도 역시나 딱히 마음에 드는 구절은 없었다.
아도르노며 벤야민이라면 한때 바깥양반이 이것저것 뒤적여 보던 모양인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솔직히 그걸 한 번 보고 제대로 다 이해했을 것 같지는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문화적 차이이다. 예를 들어 아도르노가 어느 글에서 호프만스탈을 언급하고 지나갔을 경우, 그 문장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호프만스탈 책을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으니.
그나마 호프만스탈은 유명 작가이니 미미하나마 번역서가 있기라도 하지,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도통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두루뭉실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건 독자뿐만 아니라 번역자도 마찬가지여서, 애초부터 번역자가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문장이라면 독자로서도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아도르노의 경우는 이런 경우가 유독 많았던 듯하다.
예를 들어 아도르노의 비교적 짧은 글들로 이루어진 <미니마 모랄리아>의 경우, 우리말 번역본은 최문규(2000)와 김유동(2005)의 2종이 있지만, 둘 중 어느 것도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어서, 종종 문맥을 따라가는 것조차도 벅찬 흔적을 보여준다. 예전에 바깥양반 어깨 너머로 훔쳐보다 발견한 사례를 소개하자면, 테오도르 슈토름의 소설을 인용한 다음 구절이 있다.
미니마 모랄리아(224쪽):
"'같이 걸을래, 리자이?' 그녀는 검은 눈으로 나를 못 믿겠다는 듯 쳐다보았다. '걷자고?' 그녀는 느리게 대꾸했다. '그래.' '왜 그래, 어디 가려고?' '천 가게에! 너 새 옷 사고 싶지 않니?' 나는 어색하게 말했다. 그녀는 깔깔 웃으면서, '가, 그냥 내버려 둬!' '아니, 단지 천 조각, 천 조각만 리자이!' '물론, 인형을 입힐 천 조각만, 그건 비싸지 않을 거야!'"
한줌의 도덕(238쪽):
"'리자이, 산책할까?' 그녀는 까만 눈으로 나를 못 믿겠다는 듯 쳐다보았다. '산책하자고?' 그녀는 느린 말투로 반복했다. '정신차려! 도대체 어디로 갈려구?' '엘렌크람머로! 너 새 옷 사고 싶지 않니?' 나는 바보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소리내어 웃었다. '나를 그냥 내버려 둬! - 아니야, 그냥 헝겊 조각만 사지!' '헝겊 조각을, 리자이?'" - '물론이지! 인형을 입히기 위해서는 헝겊 조각만으로 족하지. 그것은 비싸지 않을 거야!'"
아무리 읽어봐도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서 해당 구절의 출처라는 슈토름의 소설 <폴란드인 포펜스펠러(Pole Poppenspäler)>의 독일어 원문을 찾아서 내용을 확인해 보니, 양쪽 모두 화자와 대사를 잘못 연결해 놓은 경우에 해당했다. 알기 쉽게 두 사람의 대사를 희곡처럼 배열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은 꽁냥꽁냥 대화였다.
소년: 같이 좀 걸을래, 리자이?
소녀: 걷자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소년: 너 어디 가는 건데?
소녀: 천 가게에!
소년: 너 새 옷 사려고?
소녀: 가, 귀찮게 하지 말고! 하여튼 그건 아니야, 단지 천 조각만 사려는 거지.
소년: 천 조각만, 리자이?
소년: 물론, 인형 옷 만들 천 조각만, 그건 비싸지 않을 거니까!
결국 김유동 번역은 문맥을 완전히 놓쳤고, 최문규 번역도 일부 문맥을 놓쳤기 때문에 오역이 나오고 말았다. 물론 리자이가 인형 옷을 사건 강아지 옷을 사건 아도르노의 전체 주장, 또는 사상을 허물어트릴 만큼 중대한 실수라고는 볼 수 없겠지만, 문제는 아도르노의 문장에서 이런 인용이나 언급이 빈번하다 보니, 번역자의 헛다리도 빈번하게 나온다는 거다.
그러니 기껏 번역서를 한 권 읽고 나서도 과연 제대로 이해하기는 한 건지 의문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톨스토이의 유명한 단편 제목을 김유동과 최문규 모두 "순교자의 소나타"라고 오역했는데, 그 제목의 유래인 베토벤의 2중주는 원래 프랑스의 바이올린 연주자 '로돌프 크로이처'에게 헌정한 작품이기 때문에, 흔히 말하듯 "크로이처 소나타"라고 해야 맞다.
음악에 문외한인 독자가 읽었다면, 혹시 어느 순교자에 대한 종교 음악인가 하고 오해하지는 않을까. 결국 번역자의 한계로 인해 독자의 한계가 자연스레 생겨난 셈이니 아쉬울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일단 아도르노를 제대로 이해하는 번역자/연구자가 나온 다음에나 독자도 그 혜택을 입을 법하니, 당분간은 두 권 모두 절판 상태로 남겨두는 것이 상책이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