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종영한 <지락실 3>에서 가장 웃겼던 장면은 이른바 '전남친 토스트' 퀴즈였다. 인터넷 밈의 일종이라는데, 그 명칭을 이미 아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이영지는 영 생소했던 모양인지 '이걸 모든 사람이 다 아느냐', '내가 지금 당장 라이브 진행해 확인해 보겠다', '전남친이 안 들어갔는데 어떻게 전남친 토스트냐' 하고 노발대발 항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때 본 장면을 새삼스레 상기한 까닭은 알라딘의 광고 중에 "김혜순, 아시아 최초 국제문학상 수상"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최근 다양한 수상 실적을 내는 작가이니 뭔가 또 받기는 받았겠구나 짐작하면서도, 솔직히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국제문학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영 감감하기만 했다. 혹시 남들은 다 아는데 나귀님 혼자 모르는 걸까?


아이러니하게도 나귀님은 저 김혜순이라는 시인의 책을 아직 한 권도 읽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에 관한 글은 이미 한 번 쓴 적이 있었는데, 역시나 이번 사안과 마찬가지로 그가 수상한 해외 문학상의 정확한 명칭이 무엇인지에 대한 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알라딘의 오락가락 행태만 봐도 '뭔지 모르지만 칭찬하자'는 속물근성이 드러났기 때문이고.


지난번에는 김혜순이 "전미도서상"(National Book Awards)을 수상했다며 알라딘에서 대대적으로 광고했는데, 알고 보니 명칭이 유사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National Book Critics Circle Awards)을 말하는 것이었다. 역시나 나귀님이 지적한 한강의 "부커상 수상"과 살만 루시디의 "부커상 3회 수상"처럼 명칭의 유사성에서 비롯된 오류가 반복되었던 셈이다.


결국 모두들 그 상이 무슨 상인지도 모르면서 추켜세웠던 셈이니 참으로 낯간지러운 일이다. 물론 상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니 널리 알려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아닌 정보를 유포해서는 곤란하다. 이런 식이라면 10년 쯤 뒤에는 한강이 실제로는 '부커상' 본상을 받은 적 없다는 사실에 근거해 노벨문학상 음모론을 주장하는 '한진요'도 등장할 만하지 않겠나.


이번에 김혜순이 받은 문학상을 알라딘에서는 "2025 국제문학상"이라고도 지칭했는데, 이렇게 하면 실제로 "국제문학상"이라는 상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국제적인 문학상"을 탔다는 건지 헛갈린다. 구글링해 보니 정식 명칭이 "국제문학상"(Internationaler Literturpreis, ILP)인데, 종종 뒤에 "세계 문화의 집"(Haus der Kulturen der Welt)이 붙는 모양이다.


주한 독일 대사관 홈페이지에 올라온 설명에 따르면, "세계 문화의 집"은 1988년 설립된 독일 정부 기관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비유럽 (즉 영미유럽권 이외의?) 국가의 여러 분야 예술을 독일에 소개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바로 이 기관에서 2009년부터 제정한 "국제문학상"은 독일어로 처음 번역 소개되는 해외 산문을 대상으로 시상하는 듯하다. 


따라서 정식 명칭은 "국제문학상"이라도, 일반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언론에서 쓴 것처럼 "세계 문화의 집 국제문학상"이라고 적어 주든가, 아니면 "독일 국제문학상"이라고 적어주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수상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저게 도대체 무슨 상인지 알아보려고 나귀님처럼 공연히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서이다.


이전에도 지적했듯이, 한강의 "말라파르테상" 수상 실적을 익히 알고 있는 독자라도, 정작 저 문학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또는 그 연원인 독일계 이탈리아인 작가가 정확히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단적으로 알라딘에서도 "추천도서" 메뉴의 "해외문학상" 항목에 "말라파르테상"을 집어넣었지만, 수상작이라곤 역시나 한강의 책 하나뿐이다.


알라딘의 다른 "해외문학상" 항목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어쩌다 한국 작가나 작품이 수상한 경우에만 추가되다 보니 정말 너무 생소한 상들도 많고, 그나마도 완전하거나 충실한 목록과는 거리가 멀다. 마치 "부커상"과 "부커상 번역 부문"을 줄곧 (심지어 기꺼이!) 혼동했던 것처럼, 마치 국내 작가의 수상 실적 외에는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듯한 태도이다.


그러니 차라리 우리 모두의 무지와 편견을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 솔직하고 편리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이미 널리 알려진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 이외의 수상 실적은 모조리 '기타 등등' 정도로 퉁치고 넘어가는 것도 방법이겠다. 전미도서상이건 전미비평가협회상이건, 말라파르테상이건 말레피센트상이건, 어차피 아는 사람도 없고 알고 싶은 사람도 없어 보이니...



[*] 글을 쓰고 나서 보니, 김혜순의 시집 <죽음의 자서전> 표지 하단 (띠지인가?) 노란색 바탕에 적힌 수상 실적 가운데 "2019 미국 최고 번역도서상"이라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것 역시 생소한 명칭이어서, 도대체 뭐를 가리키는 건지 궁금해 구글링해 보았다. 알고 보니 미국 로체스터 대학(University of Rochester) 산하의 온라인 문학 잡지 스리퍼센트(Three Percent) 주관으로 2008년부터 시상한 '최우수 번역도서상'(Best Translated Book Award, BTBA)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위에서 설명한 내용대로 주관사 이름을 넣어서 '스리퍼센트 최우수 번역도서상'이라고 해야 적절하지 않겠나 싶었는데, 막상 위키피디아의 해당 도서상 항목에 들어가서 2019년 시 부문 수상자를 살펴보니 김혜순이 아니라 브라질 시인 힐다 힐스트라고 나온다. 알고 보니 김혜순은 그해의 최종 후보 5인에 들었을 뿐이었는데, 표지에는 마치 그 문학상을 실제로 수상한 것처럼 착각하게끔 적은 것이다. 차라리 "도서상 후보작"이라고 썼다면 모를까, 무작정 "도서상"이라고 해 놓으면 그 위의 다섯 가지 수상 실적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수상작"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 발 양보해서 "문학상 후보작"이라고 홍보하더라도, 전미도서상이나 퓰리처상처럼 훨씬 더 권위 있는 문학상을 제외하면 "후보작" 이력까지 홍보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이듬해인 2020년까지만 시상하고 결국 중단된 '스리퍼센트 최우수 번역도서상'의 인지도에 비해서는 뭔가 좀 과도해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김혜순이 이번에 수상했다는 '독일 세계문학상'의 2017년 "후보작" 가운데 하나였지만, 정작 해당 작가나 작품의 정보에서는 그와 같은 이력이 굳이 강조되지는 않고 있는 듯하니 말이다.(아니, 이건 거꾸로 '독일 세계문학상' 측에서 자랑스러워할 만한 이력이 아닐까. 훗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자기네가 더 일찍 주목했다는 점에서, 말하자면 뛰어난 눈썰미를 입증한 셈이니까).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수상 실적 홍보 자체는 나쁠 게 없지만, 이 과정에서 부정확한 정보를 유포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은가, 심지어 저자에게도 누가 되는 일이 아닌가 싶어 해 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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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사후에 간행된 무명 시절의 파리 체류기 <가변 축일>을 보면, 하루는 선배 작가 포드 매독스 포드와 함께 카페에 앉아 대화를 나누다가 수상해 보이는 대머리 남자가 지나가는 모습을 목격하는 일화가 소개된다. 포드는 저 남자가 힐레어 벨록(1870-1953, 영국의 작가 겸 정치인)인데, 방금 눈이 마주쳤지만 내가 일부러 모르는 척한 거라고 '쎈척'을 한다.


그런데 그날 늦게 다른 친구와 어울리던 헤밍웨이 앞에 또다시 대머리 남자가 지나가게 된다. 아까 들은 정보를 토대로 헤밍웨이가 '저 남자가 힐레어 벨록이라던데' 하고 말하자, 함께 있던 친구가 어이없어하며 이렇게 대답한다. '무슨 소리야, 저건 악마숭배자 알레이스터 크롤리(1875-1947, 영국의 오컬트 연구자)잖아. 자칭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인간 말이야.'


크롤리를 벨록으로 오인한 포드의 발언은 물론이고, 이를 답습한 헤밍웨이의 발언도 단순한 실수인지, 아니면 어떤 의도에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헤밍웨이로선 이 일화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인지, 당시 집필 중이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원고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똑같이 재현했다고 전한다.(물론 완성본에서는 삭제되었다고 전하지만).


20세기 초에 활동한 오컬트 연구자 알레이스터 크롤리는 여러 가지 기행을 벌였고, 급기야 앞서 소개한 일화에서 헤밍웨이의 지인이 언급한 것처럼 다채로운 악명을 쌓은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오늘날은 신지학이며 오컬트며 하는 영성 연구 자체를 허무맹랑하다고 간주하는 것이 대세이지만, 크롤리를 대마법사로 추앙하는 소수의 추종자도 여전히 있는 모양이다.


지금은 오히려 일종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인 사례가 헤비메탈 가수 오지 오스본의 노래 "미스터 크롤리"이다.(노래에서는 "크라울리"라고 발음한다). 사실은 나귀님도 이 노래를 통해 그 이름을 처음 접한 셈이었는데, 당시에는 헤비메탈 가수마다 악마, 마법, 해골 같은 음산한 상징을 앞다투어 차용하던 시절이니 그럴 만도 했었다.


오지 오스본이 한때 몸담은 밴드 블랙사바스도 그 이름이며 외관에서 풍기는 불길한 이미지를 마케팅에 적극 활용한 사례라고 하던데, 솔로 시절의 오스본은 한 술 더 떠서 다양한 충격적 기행을 시도하며 악명을 쌓아 올렸다고 전한다. 급기야 미국의 보수 기독교계며 학부모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반발하면서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에 성공했으니 재미있는 일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악마주의'라기보다는 '상업주의'의 산물에 불과했지만, 나귀님도 교회 다니던 시절이었으니 그런 행동이 곱게 보일 리 없어 한동안 외면했었다. 한 번은 동네 작은 '음악사'에 <스피크 오브 더 데블> 음반이 전시된 것을 보고 기겁한 적도 있는데, 지금 다시 봐도 징그러워선지 최근 발매반에서는 원래의 표지 이미지를 축소해 집어넣은 듯하다.


이쯤 되면 "미스터 크롤리"도 저 오컬트 연구자를 추앙하는 내용인가 싶지만 (심지어 저 노래와 동명인 국내 유일의 크롤리 전기도 이 노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실제로는 당신 과대망상 아니냐며 조롱이며 비아냥을 날리는 내용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귀님처럼 오지 오스본의 노래를 통해 크롤리를 알게 되는 사례가 여전히 많다는 점은 아이러니이다.


이렇게 악명 높던 오지 오스본도 나이가 들면서 '어둠의 군주'(악마)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게 되고, 급기야 식구들을 출연시킨 <오스본 가족>이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까지 나오며 '쎈척하는 할배'로 이미지가 많이 달라진 모양이다.(개인적으로는 그의 명곡 "크레이지 트레인"을 스윙재즈 스타일로 편곡해서 무려 팻 분(!)이 부른 그 주제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오지 오스본이 어제 76세로 사망해서 뉴스에까지 나왔다. 마침 월초에 있었던 고별 공연 영상에서는 차마 일어나지도 못하고 앉아서 노래하는 모습이 살짝 측은하기도 했었다.(몇 년 전에 조니 미첼도 비슷한 모습으로 골골대며 공연하는 모습이 나오기에, 한동안 싫어했던 마음이 싹 녹아버렸던 적이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훗날...)


지난번 프린스의 타계 직후 미국은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도 추모 열기가 뜨거운 것에 놀란 까닭은 그가 생존 시에 종종 논란을 몰고 다녔다고 기억했기 때문이다. 오지 오스본의 타계 직후 반응도 비슷한 느낌인데, 비록 기행을 벌이기는 했어도 결국 노래가 좋았으니 긍정적으로 기억되는 셈이려나.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크롤리도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만...




[*] 헤밍웨이의 파리 시절 회고록은 1970년대 휘문출판사의 <헤밍웨이 전집>에 수록된 것으로 처음 접했는데, 지금은 2000년대 들어 새로 나온 번역본만 해도 서너 가지가 된다. 위에서 언급한 힐레어 벨록의 저서 번역본도 두 가지나 되고, 심지어 알레이스터 크롤리의 저서 번역본도 있다! 사후 100년이 다 되어가는 중에도 여전히 추종자가 있는 것을 보면, 크롤리의 인기도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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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다던 장마가 되돌아오기 직전, 무려 35도에 달하는 무더위 속에 에어컨도 없는 집구석에 앉아 있노라니, 지금이야말로 <파리, 텍사스> 이야기를 한 번 정리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었다. 영화도 진즉에 봤고, 음반도 여름마다 챙겨 들었지만, 샘 셰퍼드의 대본을 영한대역으로 간행한 번역서는 오래 전에 사다만 놓고 한 번도 들춰보지 않은 참이었기 때문이다.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니 폭우가 쏟아지기에 뭔가 또 타이밍을 잘못 잡았나 싶더니만, 습기를 먹어 여기저기 무너진 책더미를 수습하며 일주일을 보내고 나니 무더위가 돌아와서 다시 한 번 그 영화와 음반과 대본 이야기를 하기에 제격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가능하다면 오래 전부터 벼르던 '나스타샤 킨스키 5종 세트' 이야기까지 정리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마도 영화 <파리, 텍사스>에서 가장 의아한, 그렇기에 흥미를 자아내는 부분은 바로 그 제목일 것이다. 이건 미국의 지명 표기법에 따라 "텍사스 주 파리"를 나타내는데, 영화에서는 가정 파탄 이후 홀로 떠돌아다니던 주인공이 바로 그곳에 정착하고 싶어 땅을 사 두었던 것으로 언급된다. 정작 실제로 나오지는 않는 그 실존 지명이 맥거핀 노릇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제목 표기에 대해 설명하려고 보니, 문득 이와 유사하게 제목을 번역한 미국 소설이 하나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바로 셔우드 앤더슨의 연작 단편집 <와인즈버그, 오하이오>인데, 이것 역시 "오하이오 주 와인즈버그"라는 가공의 마을을 가리킨 것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줄곧 "와인즈버그, 오하이오"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나귀님도 각별히 좋아하는 작품이어서 번역서도 여러 권 갖고 있는데, 혹시 새로운 번역이 더 나왔나 궁금해서 알라딘에 들어와 검색해 보니, 뜻밖에도 셔우드 앤더슨의 단편 선집이 최근에 나온 모양이다. "숲속의 죽음"과 "계란"처럼 여러 차례 이런저런 단편 선집에 수록되었던 작품뿐 아니라, 나귀님도 처음 보는 작품들이 여럿 들어 있으니 흥미로워 보인다.


그런데 새로 나온 번역서에서 개인적으로는 참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표지다! 앞표지에는 글자 장난질만 쳐 놓았고, 제목과 저/역자명 같은 필수 정보는 뒤표지에만 들어 있으니, 혹시 제작 과정에서 실수로 앞뒤가 바뀌기라도 한 것은 아닌가 궁금할 지경이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 나귀님 혼자서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 내친 김에 셔우드 앤더슨의 장편 번역서 두 권을 오랜만에 책장에서 꺼내 보았다. 양쪽 모두 분량이 많지 않다 보니 다른 작품과 함께 수록되는 바람에 골수 팬을 제외하면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법하다. 여하간 <와인즈버그, 오하이오> 이외의 작품이 오랜만에 나왔으니 반갑기는 반가운데, 도대체 저놈의 표지는 왜...


(1) 가난한 백인 농부(Poor White, 1920): <와인즈버그, 오하이오 (외)>(셔우드 앤더슨 지음, 한명남 & 김병철 옮김, 주우세계문학 39, 주우, 1982) 수록.


(2) 어두운 청춘(Dark Laughter, 1925): <인간희극 / 어두운 청춘>(윌리엄 서로이언 & 셔우드 앤더슨 지음, 이호성 옮김, 세계문학전집 8, 을유문화사, 1964 초판; 1976 14쇄)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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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에서 한국 문화를 소재로 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라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해서 인기를 끄는 모양이다. 물론 제목부터 낯간지러우니 나귀님으로서는 굳이 볼 이유가 전혀 없는 작품이기는 한데 (차라리 그 시간에 <마법소녀를 동경해서>를 한 번 더 보겠다!) 인터넷과 유튜브는 물론이고 뉴스에서도 다들 그 이야기뿐이니 자연스레 귀동냥하게 된 셈이다.


그런데 유튜브 쇼츠로 본 장면 중에서도 한 가지만큼은 상당히 흥미로웠으니, 바로 한국 민화의 내용을 재해석했다는 까치와 호랑이 캐릭터였다. 특히 퍼런 몸뚱이에 누런 안광으로 사뭇 위협적이게 등장했다가 어째서인지 얼빠진 행동만 하는 호랑이의 모습이 우스웠는데, 민화의 해학적인 묘사처럼 퉁방울 눈과 뻐드러진 송곳니 때문에 해외에서도 인기라고 한다.


이쯤 되니 문득 까치호랑이 민화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고 할 법한 작품을 발굴한 사람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를 오랜만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2000년에 타계한 민속학자 조자용이 바로 그 사람인데, 이전부터 민화와 민속에 대한 연구로 종종 이름을 접했지만 자세한 이력까지는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어느 일본인의 책을 통해 그 사연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책은 <한국의 마지막 표범>이다. 저자 엔도 키미오(遠藤公男, 1933년생)는 분단 상황에서 각각 북한과 남한에 머무르며 철새를 연구하다 서로의 생존 사실을 알게 된 조류학자 원홍구와 원병오 부자의 이야기를 다룬 <아리랑의 파랑새>의 저자로도 유명하고, 최후의 한국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를 추적한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도 저술했다.


그중 표범 책은 호랑이에 비해 줄곧 폄하되던 저 맹수가 1960년대까지도 나타났다는 기록을 접한 저자가 1980년대에 한국을 직접 방문해 관련 장소와 인물을 취재하는 과정을 그렸다. 흥미롭게도 이 책의 후반부는 저자가 조자용의 도움을 얻어 1965년 표범을 포획한 사람을 직접 만나러 가는 내용을 다루었는데, 이 과정에서 저 민속학자의 이력이 자세히 소개된다.


조자용(1926-2000)은 이북 출신으로 해방 직후 월남해서 미군 부대의 하우스보이를 거쳐 미국에 유학했고, 하버드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귀국해서 건설회사 대표로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그러다 하루는 취미인 골동품 수집을 위해 시내 고물상에 들렀다가, 당시 초등학생인 딸 에밀레가 구석에 놓인 까치호랑이 민화를 마음에 들어 해서 사주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우연히 구입한 물건이 오늘날에는 까치호랑이 민화 중에서도 최고작으로 손꼽히게 되었으니, 초등학생 어린이의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았다고 해야 할 법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에밀레는 불과 열두 살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머지않아 조자용도 건강 악화로 사업을 정리하고 딸의 이름을 딴 '에밀레 박물관'을 설립하여 민속학 연구에 몰두했다 한다.


1967년에 조자용이 발굴한 까치호랑이 민화는 이후 '에밀레박물관 소장품'으로 알려졌지만, 지금 다시 검색해 보니 어느새 '호암미술관 소장품'으로 소장처가 바뀌었다. 2000년을 전후해 조자용 부부가 모두 타계하고 박물관도 문을 닫으며 매각된 것이 아닌가 싶은데, 그러다 보니 이제는 최초 발견자인 '에밀레'의 이름과는 연관성이 없어져 살짝 아쉽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 나귀님도 수년 전 엔도 키미오의 책을 통해 조자용의 이력을 알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박물관도 폐관하고 저서도 절판되어 더 자세한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다. 최근 다시 살펴보니 그 사이에 <조자용 전집>도 간행되고, 인터넷에도 관련 추모글과 연구 논문이 여럿 게시되었기에 반가웠지만, 까치호랑이 발굴 비화는 없는 듯해 아쉬운 마음에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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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더미를 뒤지다 보니, 지난번에 사다 놓은 아도르노의 <신극우주의의 양상>이라는 얄팍한 책이 나온다. 제목이 그럴싸해 보여서 혹시 최근의 한국 상황에 대입해 볼 만한 내용이 나오는지 궁금해 뒤적여 보았는데, 원래 1967년의 강연을 재간행한 것인 데다, 역사적 맥락이 다른 까닭인지 충분히 아전인수할 만한 내용까지는 찾지 못해서 유감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조금 뒤적이다가 식탁에 놓아 두었더니, 바깥양반이 약속 있다며 밖에 나가면서 '오, 아도르노' 하고 냉큼 집어가기에, 나중에 들어오면 무슨 내용이더냐고 물어봐야지 생각했는데, 이후로 며칠이 지나도록 가방에 넣고 돌아다니기만 하지 정작 펼쳐보지는 않은 모양이어서 아쉬웠다. 혹시나 싶어 다시 뒤적여도 역시나 딱히 마음에 드는 구절은 없었다.


아도르노며 벤야민이라면 한때 바깥양반이 이것저것 뒤적여 보던 모양인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솔직히 그걸 한 번 보고 제대로 다 이해했을 것 같지는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문화적 차이이다. 예를 들어 아도르노가 어느 글에서 호프만스탈을 언급하고 지나갔을 경우, 그 문장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호프만스탈 책을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으니.


그나마 호프만스탈은 유명 작가이니 미미하나마 번역서가 있기라도 하지,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도통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두루뭉실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건 독자뿐만 아니라 번역자도 마찬가지여서, 애초부터 번역자가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문장이라면 독자로서도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아도르노의 경우는 이런 경우가 유독 많았던 듯하다.


예를 들어 아도르노의 비교적 짧은 글들로 이루어진 <미니마 모랄리아>의 경우, 우리말 번역본은 최문규(2000)와 김유동(2005)의 2종이 있지만, 둘 중 어느 것도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어서, 종종 문맥을 따라가는 것조차도 벅찬 흔적을 보여준다. 예전에 바깥양반 어깨 너머로 훔쳐보다 발견한 사례를 소개하자면, 테오도르 슈토름의 소설을 인용한 다음 구절이 있다.



미니마 모랄리아(224쪽): 


"'같이 걸을래, 리자이?' 그녀는 검은 눈으로 나를 못 믿겠다는 듯 쳐다보았다. '걷자고?' 그녀는 느리게 대꾸했다. '그래.' '왜 그래, 어디 가려고?' '천 가게에! 너 새 옷 사고 싶지 않니?' 나는 어색하게 말했다. 그녀는 깔깔 웃으면서, '가, 그냥 내버려 둬!' '아니, 단지 천 조각, 천 조각만 리자이!' '물론, 인형을 입힐 천 조각만, 그건 비싸지 않을 거야!'"



한줌의 도덕(238쪽):


"'리자이, 산책할까?' 그녀는 까만 눈으로 나를 못 믿겠다는 듯 쳐다보았다. '산책하자고?' 그녀는 느린 말투로 반복했다. '정신차려! 도대체 어디로 갈려구?' '엘렌크람머로! 너 새 옷 사고 싶지 않니?' 나는 바보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소리내어 웃었다. '나를 그냥 내버려 둬! - 아니야, 그냥 헝겊 조각만 사지!' '헝겊 조각을, 리자이?'" - '물론이지! 인형을 입히기 위해서는 헝겊 조각만으로 족하지. 그것은 비싸지 않을 거야!'"



아무리 읽어봐도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서 해당 구절의 출처라는 슈토름의 소설 <폴란드인 포펜스펠러(Pole Poppenspäler)>의 독일어 원문을 찾아서 내용을 확인해 보니, 양쪽 모두 화자와 대사를 잘못 연결해 놓은 경우에 해당했다. 알기 쉽게 두 사람의 대사를 희곡처럼 배열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은 꽁냥꽁냥 대화였다.



소년: 같이 좀 걸을래, 리자이?

소녀: 걷자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소년: 너 어디 가는 건데?

소녀: 천 가게에!

소년: 너 새 옷 사려고?

소녀: 가, 귀찮게 하지 말고! 하여튼 그건 아니야, 단지 천 조각만 사려는 거지.

소년: 천 조각만, 리자이?

소년: 물론, 인형 옷 만들 천 조각만, 그건 비싸지 않을 거니까!



결국 김유동 번역은 문맥을 완전히 놓쳤고, 최문규 번역도 일부 문맥을 놓쳤기 때문에 오역이 나오고 말았다. 물론 리자이가 인형 옷을 사건 강아지 옷을 사건 아도르노의 전체 주장, 또는 사상을 허물어트릴 만큼 중대한 실수라고는 볼 수 없겠지만, 문제는 아도르노의 문장에서 이런 인용이나 언급이 빈번하다 보니, 번역자의 헛다리도 빈번하게 나온다는 거다.


그러니 기껏 번역서를 한 권 읽고 나서도 과연 제대로 이해하기는 한 건지 의문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톨스토이의 유명한 단편 제목을 김유동과 최문규 모두 "순교자의 소나타"라고 오역했는데, 그 제목의 유래인 베토벤의 2중주는 원래 프랑스의 바이올린 연주자 '로돌프 크로이처'에게 헌정한 작품이기 때문에, 흔히 말하듯 "크로이처 소나타"라고 해야 맞다.


음악에 문외한인 독자가 읽었다면, 혹시 어느 순교자에 대한 종교 음악인가 하고 오해하지는 않을까. 결국 번역자의 한계로 인해 독자의 한계가 자연스레 생겨난 셈이니 아쉬울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일단 아도르노를 제대로 이해하는 번역자/연구자가 나온 다음에나 독자도 그 혜택을 입을 법하니, 당분간은 두 권 모두 절판 상태로 남겨두는 것이 상책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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