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미 넉 장 반 신화대계 다다미 넉 장 반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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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일반 가정 주택이나 료칸 바닥에 깔려 있는 다다미는 일본 전통 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닥재이면서 다다미 개수로 방의 크기를 재는 척도로 사용 된다.


볏짚을 압축해서 단단히 묶은 코어로 구성된 다다미는 각 지역에 자생하는 볏짚의 색과 크기도 다르고 기후에 따라 지어지는 건축 양식도 다르기 때문에 지역 별 다다미 치수도 제각각이다.

다다미 1장(조)의 크기는 약 180cm×90cm,로 대략 1.62제곱미터에 달하는데 지역에 따라 다다미의 치수가 달라서 평수를 재는 척도도 달라진다.

수도 도쿄가 있는 관동 지방의 표준 다다미 크기는 전 열도에서 가장 작은 176cm x 88cm 치수가 기준이다.

794년부터 1869년까지 일본 수도였던 관서 지방의 최대 도시 교토는 땅값이 비싸고 협소한 주택인 많은 도쿄에 비해 거주지 용 가옥 규모가 커서 다다미 한 장 크기는 191cm x 95.5cm다.

관서 지역의 가옥을 세울 때 기둥은 다다미 크기에 따라 배치 하고 관동 지방은 기둥 사이의 거리를 기준으로 다다미를 배치 한다.

일반적으로 관동지역의 일반 성인 1명 기준의 방 크기는 다다미 넉 장 반이고 번화가나 중심부로 갈수록 이 다다미 장수는 줄어 들고 방의 크기도 협소해진다.

반면에 관서 지역의 평균 방 크기는 다다미 8장이여서 관서 지역의 평균 크기인 다다미 넉 장 반은 이 지역에서 가난의 상징이다.

가난의 상징인 다다미 넉 장 반에서 온갖 기상 천외한 망상을 하는 구제 불능의 청춘이 있다.

대학 3학년 봄 까지 이 년간, 실익 있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노라고 단언해두련다. 이성과의 건전한 교제, 학업 정진, 육체 단련등 사회에 유익한 인재가 되기 위한 포석은 쏙쏙 빼버리고 이성으로부터의 고립, 학업 방기, 육체의 쇠약화 등 깔지 않아도 되는 포석만 족족 골라 깔아댄 것인 어인 까닭인가.

책임자를 추궁할 필요가 있다.

책임자는 어디 있나.

-모리미 도미히코의 '다다미 넉장 반 신화 대계 '중에서

다다미 넉 장 반 크기의 자취방에 틀어박힌 채 의미 있는 대학 생활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대학 3학년생인 '나'는 이 모든 것을 친구 오즈의 탓으로 돌려 버린다.

대학에 갓 입학 했을 때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 오즈는 야채를 먹지 않고 오로지 즉석 식품만 먹어 대는 괴짜로 주인공은 만일 1학년 때 다른 동아리를 가입해서 오즈를 만나지 않았다면 꿈 같은 장밋빛 캠퍼스 라이프를 구가할 수 있었다는 망상을 하기 시작한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것 없이 대학 내 영화 동아리 "계"에서 괴짜 친구와 그에 못지 않는 기이한 선배들과 교류 하면서 찬란할 것만 같았던 청춘의 빛은 오묘한 색을 띄게 되고 탄탄 대로 같았던 인생은 우연곡절 같은 사건을 겪게 되면서 기상천외한 경험을 두루 겪게 된다.

대학 내에서 역사가 그리 길지 않는 영화 동아리 "계'의 멤버는 30명 정도로 이 동아리에서 처음 제작한 영화는 2차 세계 대전 이전 부터 계속 되어온 유서 깊은 장난 대결을 계승한 두 남자가 지력과 체력을 다할 때까지 자존심 대결을 펼치다는 황당 무계한 스토리의 영화였다.

상영회에서 웃는 사람은 단 한 명, 그 사람은 바로 이 황당무계한 영화를 제작한 동아리 멤버였다.

두 번째로 제작한 영화는 <리어 왕>으로 남자 배역에 너무 많은 공을 들여서 여성 관객에게 야유 소리와 항의를 들었던 망작이였다.

세 번째 작품은 대학 생활 내내 무엇 하나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고 자조 하는 주인공 '나'와 그의 엉뚱한 친구 오즈와 함께 제작하는 다다미 넉장 반이라는 영화다.

다다미 넉 장 반에서 살던 남자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미로 안에 갇혀서 그곳을 탈출하는 여정을 담겠다는 시놉시스를 만들자 동기들과 선배들로 부터 황당무계하다며 무시 당한다.

대놓고 면전에서 거절과 무시를 당한 주인공은 파 소스를 얻은 소 혀를 맛있게 굽는 가게가 있다는 친구 오즈의 손에 이끌려 교토 대학가 밤 거리를 쏘다닌다.

온갖 냄새와 사람들로 들끓는 밤 거리를 쏘다니던 나는 고양이로 국물을 낸다는 고양이 라면가게에 들어가 어딘지 신비로우면서도 수상쩍은 가모타게 쓰누미노카미라는 사람을 만난다.

기이한 사람과 기이한 대화를 나누다 술에 취한 나는 온갖 망상을 풍선처럼 불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친구 오즈가 사라진다.

오즈를 찾아 거리로 나온 주인공은 술 기운이 남은 채 새벽녘에 학교에 가서 새로 가입한 동아리 신입들의 면접 보는 자리에 나간다.

4월부터 5월까지 열리는 봄 꽃 축제에 상영할 영화를 제작하느라 동아리 방과 캠퍼스 곳곳에서 노숙을 하며 지내던 주인공은 이따금씩 방으로 돌아 올 때마다 동아리 '계'를 선택 했다는 후회감에 몸부림친다.

자전거를 타고 강둑을 따라 숲 길을 달리다가 마주치는 괴짜들은 신묘한 기운이 가득한 신사에서 튀어나온 기인 같은 인물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동아리 '계'에서 오랫동안 독재자로 군림한 선배,동기들도 선배들도 두려워 하는 동아리 회원, 본인 스스로 언제 대학에 입학 했는지 정확한 년를 기억하지 못하고 학내 교수들 보다 연식이 높은 동아리계에 사부, 알콜 도수가 미약한 술과 벽돌 크기의 카스테라를 들고 다다미 넉장 반 크기의 방에 불쑥 나타나는 괴짜 이웃들이 총 충돌하는 모리미 도미히코의 <다다미 넉 장 반>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지만 현실의 고통과 빈궁함도 망상으로 연결 시키는 괴짜들이다.

주인공 '나'가 망상을 펼치는 협소한 크기의 다다미 넉 장 반에 찾아 오는 괴짜들은 마치 해가 지고 나면 활동을 시작하는 신사의 신령들과 혼령들처럼 각자만의 독특한 개성으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암담한 현실에서 고군분투하는 청춘들 앞 길을 열어 준다.

수수께끼 같은 게임에 뛰어들어 결투 끝에 후계자 자리에 올라간 주인공은 어쩌다 보니 이 세계가 아닌 저 세계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며 자칭 '자학적 대리 전쟁'에 휘말리게 되자 동아리 '계'에 가입 하게 만든 친구 오즈를 원망한다.

엉뚱하면서 천하태평한 친구 오즈는 스승이 실종 되고 얼떨결에 스승의 대리인이 된 주인공이 '자학적 대리 전쟁터'에서 친구의 헛발질을 천진난만한 얼굴로 지켜 보다 다리에서 추락해서 병원에 실려간다.

다다미 넉 장 반짜리 방안에서 피어 오른 원망과 망상은 바로 옆 방에 미녀가 새로 이사 오면서 일 순간 꺼져 버리고 착실하게 편지를 쓰며 빨래방에서 도난 당한 속옷을 찾아 주는 의인이 된다.

대학 시절의 끝자락에 선 주인공은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 놓지 못한 채 취직에 대비해서 영어 학원에 등록하고 어딘지 모르게 대단해 보이는 인물이나 화려했던 과거를 갖고 있는 이들을 스승 삼아 사회인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한다.

기이한 스승을 만나 기이한 싸움에 휘말리고 괴짜 친구들과 선배들 때문에 탄탄한 성공 대로가 아닌 신들의 무덤이 있는 신사나 축제가 열리는 강가를 배회 하며 청춘의 시간을 허비 하면서도 다다미 넉장 반짜리 방으로 돌아 오면 마음껏 책을 읽고 카스테라를 베어 물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 버린다.

늘 최선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던 주인공 '나'는 그 선택의 결과가 실패 하거나 최악으로 치닫게 되자 자신의 선택을 한탄하며 다다미 넉 장 반을 나와 교토 시내 곳곳을 돌아 다니며 '만약에..'라는 말을 시종일관 내뱉고 다닌다.

청춘의 판타지물, 망상계의 신의 손인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는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청춘들이 기기묘묘한 행동을 일삼으면서도 고상한 교토 화법을 구사하며 현실을 벗어난 망상의 세상에서 허우적 거리는 모습을 유쾌하게 그려내어 일본 독자들에게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다.

1979년 생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가 생각하는 대학 캠퍼스를 누비는 청춘의 모습은 몸 하나 누울 수 있는 다다미 넉 장 반 크기의 방에 살며 이성과의 건전한 교제, 학업 정진, 육체 단련과 같은 사회에 유익한 인재가 되기 위해 거듭 노력하며 전력 질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이런 청춘들의 모습은 망상을 너머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시대 청춘들은 대학 진학 후 학점 관리는 기본이고 학회, 대외 활동 등에 참여하며 입사 지원칸에 채워 넣을 스펙을 치열하게 준비해야 한다.

동아리도 취직에 유리한 동아리로 가입하고 인턴십도 능력을 키우고 스펙을 쌓을 수 있는 곳을 열심히 찾고 재학 중에 여러 개의 자격증을 따고 해외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1학기 또는 1년 동안 해외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에 매진한다.

이렇게 고군 분투 하며 청춘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도 입사 지원서를 내는 기업으로부터 정확한 사유도 듣지 못한 채 번번이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아빠와 엄마 찬스, 조부모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청춘들이 불안한 계약직에서 최저 임금을 받거나 졸업을 미루고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동안 정치인이나 고위층 자녀들은 1명 모집하는 꿀 보직에 지원해서 눈 깜짝 할 사이에 부모로 부터 직업 세습을 받는다.

컴퓨터나 제품 사양(specification)의 줄임말인 스펙은 취직을 해도 끝이 나지 않는다.

승진에 도움이 되는 자격증을 따기 위해 퇴근하고도, 주말에도 시험을 준비하거나 더 나은 직장으로 이직 하기 위해 대학원 시험을 준비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연애와 결혼을 위해서도 스펙이 필요할 정도로 스펙 쌓기는 죽을 때까지 끝이 나지 않는다.

기회 조차 잡지 못한 청춘들이 취업을 포기하게 만들어 버리는 이 사회는 노후 걱정 없는 급여를 제공하는 일자리 수 조차 많지 않아 중 장년들도 암담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다.

청년을 위한 나라! 노후 걱정 없는 중장년층을 위해 연금을 개혁 한다고 외치는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사는 기생충들에게 스펙 대신 짱돌을 던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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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5-03-28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다미 사이즈가 지방마다 다르군요.
 
야수를 믿다
나스타샤 마르탱 지음, 한국화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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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다양한 생태계와 기후 상태를 연구 하고 그 지역에 생존하고 있는 생태계의 습성과 진화 상태를 관찰 하기 가장 좋은 지형은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캄차카 반도다.

일본 홋카이도 쪽으로 흐르는 쿠릴 열도의 출발지인 캄차카반도는 태평양과 오호츠크해에서 미국 알래스카까지 이어지는 알류산 열도와 인접해 있어서 북극의 툰드라 기후와 남쪽의 습한 기후로 인해 불과 얼음이 공존하는 독특한 환경으로 전 세계 과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몰려 가는 곳이다.



17세기말에 러시아인들이 도착하기 이전까지 캄챠카 반도에는 곰과 순록 그리고 연어를 사냥하며 기후 변화에 맞춰 이동하며 살았던 이텔멘족, 코랴크족 원주민들이 드문 드문 살고 있었던 곳이였지만 19세기 러시아와 일본 열강들의 침략으로 백 러시아인들과 일본인 홋카이도의 아이누족들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2차 대전 발발 당시 러시아가 캄차카 반도를 점령 하면서 핵원료 생산과 핵실험 장소가 되었다.

대 자연은 시간이 축적되듯 핵 방사능에 오염 되었고 반도 땅에서 다양한 민족들과 평화롭게 공존 하며 살았던 원주민들은 극소수만 살아 남게 되었다.

소련 체제 아래서 방출된 엄청난 방사능이 캄차카 반도의 자연과 생활 터전을 오염 시켜서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이들은 전 세계에서 백혈병과 각종 암, 기관지염 같은 질병의 발병률이 높은 곳이 되었다.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나서 서구인들은 이 지역에 탐사와 탐험, 관광과 연구 목적으로 방문 하면서 무분별하게 들어 오는 서구 문명과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생태계가 파괴 되었고 토착 원주민들과 토종 동식물들이 빠른 속도로 멸종하기 시작했다.

한반도 보다 약간 넓은 크기의 캄차카 반도는 1년 중 활동 하기 좋은 온화한 기후가 단 3개월 뿐이고 이 시기에 현지인들은 연어와 곰 사냥 그리고 외지인들을 위한 관광 안내와 숙박으로 생계를 유지 하고 있다.

수도 주변 지역은 광물 자원이나 핵실험으로 마구잡이로 개발 되어서 생태계가 파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지구 생태계의 다양한 기후와 멸종 직전의 동물들을 볼 수 있고 특이한 지형이 많아서 외지인들이 끊임없이 이 곳으로 몰려 가고 있다.

불꽃이 치솟는 활화산 부터 얼음 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니는 바이칼 호수와 바다 깊숙한 심해까지 전부 외지인들이 훑고 지나가서 생활 터전을 빼앗긴 곰과 순록들이 인간들이 거주 하는 지역까지 내려와 먹이를 찾아 다니거나 습격을 하는 일이 자주 발생 하고 있다.


파리 사회과학 고등연구원에서 인류학을 전공한 프랑스 태생의 나스타샤 마르탱은 알래스카 지역의 원주민인 그위친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이들의 습성과 문화를 탐구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알래스카 북부와 캐나다의 유콘 지역에 걸쳐 살고 있는 애서바스칸 인디언의 11개 지파 중 한 종족인 그위친(Gwich'in)족은 침략자 러시아와 미국에 대항하며 북극야생보호구역의 석유 자원 개발에 반대했던 유일한 부족이였다.

하지만 수 세기 전에 러시아 극동의 캄차카 반도로 이주한 그위친족은 러시아와 일본에게 오랜 시간에 걸쳐 잔혹하게 학살로 극소수만 살아남아서 무자비한 자원 개발이나 동식물 사냥을 막는데 대항하지 못했다.

2015년 그위친족의 이동 경로와 습성과 문화를 연구 하는 젊은 인류 학자 나스타샤 마르탱은 시베리아 북동부로 이주해서 그곳 원주민과 혼혈 된 에벤인을 대상으로 인류학 연구를 진행 하기 위해 캄차카 화산 지대 근처에 연구 기지에 터를 잡는다.

2015년 8월 인류학자 마르탱은 에벤인 족의 한 가정에 거주 하던 중 활화산 움직임이 시작되던 날 연구 진척을 확인하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숲 속으로 들어 간다.

몇 날 몇 일 동안 산을 오르며 강과 불화산을 만나는 위기가 도사리는 숲 속 한 가운데서 동료들이 잠시 다른 지역을 탐사 하러 갔던 날 곰 한 마리가 인류학자 마르탱이 거주 하고 있던 공간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 한다.

단 몇 분 만에 곰의 날카로운 이빨은 그녀의 얼굴 반의 뼈와 살을 무너뜨렸고 턱의 반쪽도 부숴버렸다.

마르탱은 치료를 받는 중에 극심한 통증으로 발 버둥치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릴 때마다 상처 부위에 파고 들어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마르탱은 무사히 러시아에서 응급 치료를 받고 프랑스로 돌아가 후속 재활 치료를 받는 동안 러시아 의료진 치료를 불신한 프랑스 의사들이 강행한 재수술에서 병원성 세균에 감염되어 혼수 상태에 빠진다.

눈 깜짝 할 사이에 곰이 이빨을 드러내며 그녀를 공격 했던 절체절명의 위기의 시간을 지나 병원에 긴급 우송 되어 곰에게 습격 당한 부위를 수술하고 회복되는 시기에 마르탱은 곰과 마주 했던 끔찍한 순간을 떠올리며 기록하기 시작한다.

그날 늦은 밤, 문장들이 종이 위를 가로지른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명백한 것들, 내 마음속 깊이 충격을 준 것들을 쓴다. 나에겐 두 권의 현장 노트가 있다. 하나는 주간용으로 세세한 묘사와 대화 혹은 말의 녹취가 어수선한 형태로 한가득 적혀 있다.

집으로 돌아가 체계를 부여 하기 전까지는 상세한 정보의 축적을 정리해서 그것을 토대로 균형적이고 알기 쉬우며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무엇인가로 만들기 전까지는 대부분 몹시 난해 하다.

다른 한 권은 야간용이다. 여기 적힌 내용은 불완전하고 파편적이고 들쭉 날쭉 하다. 나는 그것을 검은 노트라고 부른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간 노트와 야간 노트는 나를 갉아 먹는 이중성의 표현이자,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내가 가지고 있는 객관성과 주관성의 상징이다.

-나스타샤 마르탱의 <야수를 믿다.>

마르탱은 인류학자로서 관찰하고 목격하고 경험한 것까지 모두 연구 자료의 토대로 활용하려는 의지 만으로 노트에 그 날의 사건을 떠올리기 시작하지만 곰에게 무자비하게 습격 당한 육신의 통증으로 정상적인 사고조차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캄차카 반도 땅에서는 오래 전 부터 곰과 혼혈 종족들이 서로 경계 하며 공존 하는 삶을 살아갔지만 침입자인 외부인들의 약탈과 파괴로 소멸과 멸종의 시간대로 들어섰다.

죽음의 순간에서 다시 회생한 인류학자 마르탱은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곰에게 큰 습격을 받고도 이 사건을 공격이라는 단어를 사용 하지 않고 과거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의 경계가 파열 되어 균열을 일으킨 것이라 스스로 정의 한다.

나는 내가 곰과 함께 무엇을 찾는지 알고 있었나? 내가 기다리던 자가 누군지, 꿈에서 본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나?

내가 사방으로 그의 흔적을 밟은 이유와 언젠가 그와 눈을 마주치기를 은근히 바란 이유를 알고 있었나?

자연의 생태계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종족을 탐구했던 인류학자 마르탱은 회복 되는 동안 그날의 습격으로 부숴지고 함몰된 현재 자신의 몸 안에서 가족에게 받았던 정신적 상처의 트라우마와 조우하게 된다.

유년기 시절에 겪었던 아버지의 죽음, 홀로 고군분투하며 자신을 양육 했던 엄마, 가난과 차별에서 벗어나 엄마를 위해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위해 지구 반을 돌며 인류학 연구에 매진 했던 마르탱은 마음 한 구석에 도사 리고 있던 우울증을 끄집어 내어 자신의 육신이 파괴된 캄차카 반도 땅에 다시 찾아 간다.

곰에게 습격 당하기 전 마르탱은 캄차카 반도 땅의 동과 서, 겨울과 봄 그리고 새벽부터 밤까지 탐험하면서 오로지 자신의 논문에 채워야 하는 탐구 대상 목록을 찾아다니는데 급급했었다.

하지만 반쪽 얼굴이 함몰 되고 다리를 절뚝 거리는 육신으로 다시 찾은 캄차카 반도에서 마르탱은 처음으로 어느 방향에서나 빛이 나는 밤 하늘의 별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나는 태곳적 만남을 따라 끝까지 갔지만 다시 돌아왔고 여전히 살아있다.

이종교배가 일어났지만 나는 여전히 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나를 닮은 무엇인가에 애니미즘 가면의 특징을 더한 채로 나의 안과 밖은 뒤집혔다.

인간 애니미즘의 근본은 가면의 변형된 얼굴이다. 반절은 사람, 반절은 바다표범, 반절은 사람, 반절은 독수리, 반절은 사람, 반절은 늑대, 반절은 여자 반절은 곰, 얼굴의 이면, 짐승들의 인간적인 실체, 그것이 봐서는 안 됐을 자의 눈 속에서 곰이 보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눈 속에서 내 곰이 본 것이다.

-나스타샤 마르탱

인간은 캄차카 반도의 땅 속 깊이 매몰된 광물을 캐고 화산재를 퍼 날라서 핵 개발을 하고 강과 바다의 밑바닥까지 훑으며 기후의 변화를 연구 하고 자생하는 동식물을 마구 잡이로 채집하고 사냥 하는 사이 곰의 개체수는 빠른 속도로 줄어 들었고 부화 한 곳으로 되돌아와 생을 마감하는 연어들은 방사능으로 오염 되어 인간에게 먹히지 않아도 곧 죽을 운명이 되었다.

영화 보다 더 악랄한 악당 지도자들이 활개 치고 있는 현 시대에 지구 상에서 가장 부유한 자원과 드넓은 땅을 소유 하고 있는 미국의 지도자는 인접 국가인 캐나다와 멕시코를 집어 삼키고 북극과 가까운 그린란드에 미국 국기를 꼽고 더 나아가 미국 땅으로 건너온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아프리카 대륙으로 내쫓는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으로 유럽에서 가장 풍부한 자원을 보유 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땅을 집어 삼키려는 러시아의 푸틴은 캄차카 반도 땅 속에 매몰 시켜 놓은 핵무기를 만지작 거리며 인류 전체를 위협 하고 있다.

숲 속의 사냥꾼은 먹잇감의 냄새를 풍기며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 쓰고 사냥감을 유인 할 수 있어도 지구의 회전 방향을 뜻대로 바꿀 수 없지만 연어는 생을 마감하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 갈 수 있고 곰은 자신의 영역에 들어 온 침입자들을 공격 할 수 있는 본능을 갖추고 있다.

자연에서 가장 초라하고 빈약했던 인간은 동굴과 숲을 벗어나 쾌적한 삶을 살 수 있는 도시 생태계를 건설 했지만 남쪽에 살던 기러기가 먹이를 찾아 생명을 부화 시키기 위해 북극 하늘로 날아 오는 걸 막지도 못한다.

눈부신 과학 기술로 문명의 진보를 이룩해 온 인류는 여전히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 기술 발명이 인류의 모든 생명을 구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는 사이에 빙하는 녹아 내리고 있고 땅바닥은 갈라져서 불기둥이 치솟고 있다.

홍수와 쓰나미, 지진과 산불로 철새들은 떼 죽음을 당하고 있고 연어는 돌아 오지 못하고 오염된 토양에서 태어난 가축들은 인간에 의해 살처분 당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읽고 세상의 변화를 분석하고 통제 할 수 시대가 되었다 해도 현재 지구 곳곳은 붕괴되고 무너지고 있다.

세상은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데로 변화되거나 바뀌었던 적이 없었다.

지구 상의 악당들이 앞으로 몇 년을 더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최고의 의료 기술과 치료로 생존 시간을 끌어 올린다 해도 100년을 넘어 설 수 없을 것이고 인간의 삶은 자연을 거슬러서 영원 불멸한 삶을 살 수 없다.

과거를 반복에서부터 조금이라도 해방하는 것, 이것은 이상한 과업이다. 과거의 존재가 아니라 과거의 결속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하는 것, 이것은 오묘하고도 가련한 과업이다. 지나간 일, 일어난 일, 일어나고 있는 일의 연결고리를 푸는 일은 단순하지만 힘든 과업이다.

-파스칼 키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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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스토브 - 오시로 고가니 단편집
오시로 고가니 지음, 김진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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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전 세계 국가 중에 책을 가장 많이 읽는 국가로 종이로 발행 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출판 하며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출판대국이였다.

특히 종이 만화의 종주국이였던 일본의 만화 시장은 전 세계 독서 소비인구가 단연 1등이였고 발행되는 만화 잡지 종류도 다양했다.

엄청난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세상 전체가 종이 만화로 뒤덮였던 일본은 손 안에 스마트 폰 시대에 읽는 매개체가 디지털화 되면서 웹툰과 전자책 발행으로 판매 부수로는 인쇄 비용조차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2020년 이전에 일본 도쿄 지하철 안에서 종이 신문과 종이 잡지, 만화, 기타 문고본을 읽고 있는 일본 승객들을 자주 볼 수 있었지만 최근에 갔던 일본인들 대부분 대중 교통 이동 중에 스마트 폰만 응시 하고 있었다.

호기심에 일본인들이 스마트폰으로 뭘 보고 있는지 얼핏 보니 게임이나 버라이어티 쇼 같은 예능을 주로 보고 있었고 한국 드라마를 보는 이들도 꽤 보였다.

간간히 웹툰을 보는 일본인들 중 상당수는 종이로 발행 되었던 만화를 가로로 화면에 축소 시킨 흑백 만화책을 스마트 폰으로 보고 있었다.

일본은 잃어 버린 30년 경제 침체 속에서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인구 감소로 유서 깊은 서점들도 문을 닫고 있고 지역 도서관도 사라지고 대세가 된 디지털화 흐름 속에서 종이에 인쇄 된 거의 모든 것들을 스마트 폰으로 볼 수 있어서 종이 만화 발행 부수량도 대폭 줄어 들고 있다.

출처: 오시로 고가니의 단편 만화 <눈 내리는 마을> 중에서

밀려 드는 K-웹툰 공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굳건하게 종이에 펜으로 만화를 그리는 이들이 있다.

종이 만화 중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이어가고 있는 종이 만화들은 ‘원피스·나루토·블리치-귀멸의 칼날·주술회전·체인소맨 같은 소년들이 주인공인 만화가 여전히 대세지만 이 틈을 뚫고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만화가 ‘이 만화가 대단하다’ 순위에서 1위(여성편)를 차지했다.

스마트 폰 기기 하나로 집 안의 가전 제품과 연결 되어 원격 조정과 제어를 할 수 있는 시대에 아마존 쇼핑몰에서 구입한 전기 스토브가 집 안의 모든 상황을 감지 하며 말을 한다는 비 현실적인 이야기 조차 나 홀로 살아가는 외로운 이들의 일상과 절묘하게 뒤섞여서 따스한 상상을 불러 일으킨다.

주변의 공기를 따스하게 해주는 전기 스토브 한 대와 평균 체온이 삼십 칠도에서 삼십 오도 사이의 온기를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떠나 버린다면 남아 있는 온도는 자신의 체온과 전기 스토브 한 대 뿐이 된다.

종이를 넘길 수록 매회 등장하는 장면 마다 사랑은 쿵 하고 다가와서는 휙 하고 떠나가버린다.

방 안의 온기가 되어 주었던 연인이 떠나고 전기 스토브만 덜렁 남겨진다거나 한 때 따스한 우정을 함께 나눴던 친구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거나 매일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회사 생활에서 영혼까지 갈아 넣어 버리다 텅빈 영혼의 육신만 덜렁 남겨진다.

펑펑 내린 눈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사람과 함께 눈덩이를 뭉치거나 공중 목욕탕으로 가던 길에 만난 이와 함께 목욕을 하며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면서 실연당하고 이별 하고 영혼을 치유 받는다.

오시로 고가니 단편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누군가와 헤어지는 걸 항상 두려워 하며 가족과 연인을 잃는 상상을 쉼 없이 하면서도 섣불리 누군가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작가 오시로 고가니는 매 장면 마다 출렁이는 바다, 달리는 지하철, 하늘에서 펑펑 내리는 눈, 따스한 물로 가득찬 공중 목욕탕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거나 함께 걷거나 마주 보며 살을 맞대고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 하고 서로를 보듬는 모습을 보여 준다.

별 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 하지만 한 장 한 장 마다 그려진 그와 그녀의 모습을 따라 가다 보면 미숙한 청춘의 상실과 슬픔이 느껴지고 언젠가 잃어 버리게 될 곁에 머물던 존재의 죽음과 이별이 한 편의 시처럼 다가 온다.

출처: 오시로 고가니의 <당신이 투명해지기 전에>

어느 날 광학연구소로 향하던 차량이 폭발 하고 이 길을 지나가던 스기와라는 그 차량에서 흘러나온 특수 약품을 온 몸에 뒤집어쓰는 사고를 당한다.

사고 이후 스기와라는 나닐이 자신의 육신이 사라지는 기이한 일이 벌어 지고 아내는 자신의 눈 앞에서 사라지는 남편의 모습을 눈물을 흘리며 지켜 볼 뿐이다.

한 때 사랑했지만 함께 사는 동안 울고 웃다가 미워 하기도 했던 사랑이 눈 앞에서 사라지게 된다면 그 사랑이 떠나고 난 후에 남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우연히 들렸던 도쿄 서점에서 이 만화가 대단하다 여성편 1위를 차지 했다는 띠지 문구에 호기심이 일어서 구입한 오시로 고가니의 단편집 <해변의 스토브>는 휘리릭 눈으로 훑어 버리는 만화가 아니였다.

디지털 시대에 화려한 컬러 색상의 웹툰이 대세인 시대에 작가 오시로 고가니는 여전히 편을 쥐고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뚜렷한 명암 대비와 고운 선으로 그린 배경과 사물 그리고 사람들의 그림체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소소한 일상을 보여 주다가 인간의 기억에 남기 위해 본보기로 사람을 얼려 죽이는 설녀가 등장해서 인간과 한 집에 살면서 처음으로 뜨거운 음식을 먹고 빙수를 먹으며 영화를 보고 축제를 따라가는 기발한 상상이 펼쳐 진다.

현 시대에는 모든 것이 스마트 폰과 연결된 과도한 ‘소통의 시대’를 살고 있다.

화장실에 갈 때도 자기 전까지 스마트 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동안 엉뚱한 상상이나 잡념 조차도 넘쳐 나는 영상과 이미지 홍수에 푹 젖어 들어서 시간을 들여 생각을 하기 보다 자극적이고 즉각적인 것에 소중한 시간을 쏟아 붓고 있다.

모든 것이 연결 되었지만 통제 하기 힘들 정도로 과도하게 연결 되어 소통이 단절 되고 관계가 단절 되어 오로지 '나' 하나만 덜렁 남겨 버린 시대가 되었다.

가게를 들어가도 자판기로 주문을 하는 시대에 집에 돌아와 반기는 건 내가 없는 사이에 집안 구석 구석을 청소해준 청소 로봇 기기의 불빛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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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진 산정에서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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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고백>은 신인 각본상 가작 수상을 시작으로 창작라디오 드라마 대상을 수상 하고 같은 해 소설 추리 신인상을 수상하며 일본 내 존재하는 거의 모든 상을 휩쓸며 일본 문단에서 <미나토 가나에> 신드롬을 일으켰다.

작가로 데뷔하기 전 미나토 가나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의류회사에 근무 하던 중 일 년 만에 퇴사하고 남태평양에 위치한 통가 섬에서 청년 해외 협력대 대원으로 2년 동안 봉사 활동을 했다.

귀국 후 효고 현 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 하다 같은 학교 국어 교사와 결혼과 동시에 교사 일을 그만둔다.

작가 미나토 가나에는 결혼 생활 10년 동안 아내로 엄마로 살고 있는 자신의 인생이 무기력 하다 생각해서 무작정 서점에 달려가 창작법과 글쓰기에 관한 책을 사서 매일 밤 식구들이 잠든 시간에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이 바로 우리 반에 있다”는 고백과 함께 열세 살 중학생 범인들을 상대로 가혹하게 복수하는 교사 이야기 <고백>으로 추리 소설계의 돌풍을 일으킨 작가 미나토 가나에는 첫 작품 <고백> 이후 출간하는 작품 마다 미스터리 랭킹 1위를 차지 하며 400만부 가까이 팔리는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평화로운 일상에서 인간의 마음 속에 스며든 독을 소름 끼치게 해부하는 작가 미나토 가나에는 데뷔 이후 첫 작품을 출간 한지 15년 동안 세상의 악을 마주 보며 글을 썼다고 고백 할 정도로 죽기 살기로 작가로 세상에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글을 썼다.

독자들에게 읽고 나면 기분이 찝찝해진다는 소리까지 들었던 작가는 일본 내 최고 작가의 자리에 올려 주었던 살인, 복수극이 아닌 '아무도 죽지 않는 이야기'를 쓴다.

데뷔 15년 만에 발표한 8편의 연작 소설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이별의 슬픔, 사랑의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 오랜 열등감 등 제각각의 고민을 안고 산에 오르는 다양한 세대의 여성들의 모습을 담아 단숨에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 잡아서 드라마로 제작 방영되었다

대학 시절 취미가 등산이였던 작가 미나토 가나에는 자전거를 타고 일본 열도를 여행 하며 오르지 않은 산은 거의 없었을 정도로 배테랑 등산 매니아로 드라마에서 산행 하는 등산객 중 한 명으로 카메오로 출연했다.

2014년에 발표한 ‘여자들의 등산일기’에서 일본 니가타의 묘코산과 히우치산을 시작으로 홋카이도의 리시리산, 뉴질랜드 통가리로산 등을 경유하는 산과 국립공원, 산악 페스티벌까지 등정 하는 모습을 담았다.

2021년에 출간한 <노을진 산정에서> 는 앞서 발표한 등산일기의 속편 연작 소설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산은 다음과 같다.

-우시로타테야마 연봉(도야먀/나가노)

-북알프스 오모테긴자 (나가노)

-다테야마ˑ 쓰루기다케 (도야마)

-부나가타케ˑ 아다타라 산 (시가)

작품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우시로타테야마 연봉은 도야마에서 나가노까지 펼쳐진 산으로 이 산에 오르는 여성들은 평지부터 시작해서 1530미터까지 올라가서 리프트를 타고 1673미터에 위치한 지조노카라시 도미 능선을 걸어서 2490미터에 있는 고류 산장을 목표로 등정 하기 시작한다.

우시로다테야마 연봉 등산 코스는 위험한 쇠사슬 구간이나 사다리 타기도 없는 비교적 안전한 코스다.

이 등산 코스 대열에 참여한 여성들의 나이대는 60대와 40대들로 10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현재는 카페 ‘GORYU’를 경영하고 있는 65세의 다니자키 아야코는 생전에 남편이 가장 좋아했던 그 산 코스 등정에 처음 참여 했다.

훗교쿠 유업에 다니는 회사원 마미야 미코는 42세로 거래처인 카페 ‘GORYU’에 들렀다가 단골이 되어 카페 주인 다니자키 아야코와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그녀는 대학시절 산악부 출신으로 처음 산에 올라가는 아야코를 등산로 입구로 이끌어주다가 함께 산 정상에 올라간다.

은퇴 후 남편이 등산에 미쳤다 생각했던 아야코는 산 정상에 올라가서야 비로소 살아 생전에 함께 오르지 않았다는 걸 후회 한다.

“등산로 입구에 선다는 건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거야. 등산로 입구까지가 멀거든.”

'산에 오르면 그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북알프스 오모테긴자> 편에는 고등학생 노가미 유이가 등장한다.

지방 동네의 작은 노래자랑 대회에서 트로피를 휩쓸던 가수지망생 노가미 유이는 음악 교사에게 방과 후 레슨을 받아 음악 대학에 기적적으로 입학해서 성악을 전공한다.

유이는 반주자 메이트이자 피아노 전공의 이와타 유카로와 유명한 음악가 집안 출신에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마에다 미사키와 함께 산에 올라간다.

출신도 성장 배경도 다른 세 명의 음대생들은 산을 오르는 동안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한 걱정을 한다.

평범한 회사원 아버지를 둔 유이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가인 부모님을 따라서 해외 초청 연주회를 다녔던 미사키가 독일 유학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부러워 하며 질투를 한다.

산을 오르는 동안 자연의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 이와타 유카로는 유이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을 작곡 하고 싶어 한다.

출발선부터 다른 미래의 음악가들은 과연 목표 했던 산 정상에 무사히 올라 갈 수 있을까?

돌아보지 않는다. 똑바로 앞을 보며 올라간다.

커다란 바위를 돈다. 창끝이 떡 나타난다. 공이 날아갈 거리 정도가 아니다 눈 싸움도 가능한 거리다. 하지만 이걸로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가갔다고 생각하면 냉담하게 밀쳐내니까

'언젠가는 누군가 죽겠지?' 라고 기대하며 읽다가 다음 편 산에 올라가는 이들의 사연을 따라 가다 보니 서로 얽히고 설킨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면서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오해와 갈등을 풀어 나가고 화해 한다.

산을 올라가는 과정은 종종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한 고비를 넘었다 싶으면 또 다른 고비가 나타나고, 한 고비에 올라서고 나서야 산을 내려가는 동안 앞으로 내가 가야 하는 길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는 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미나토 가나에의 <등산 일지>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혼자 산에 올라가지 않는다.

손님과 가게 주인 사이로 만난 이들, 전공이 다른 대학 동기들, 갈등을 겪고 있는 엄마와 딸, 가업 승계자였던 오빠의 죽음으로 갑작스럽게 가업을 있게 되어 힘에 버거웠던 이가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동창과 함께 산에 올라간다.

서로 다른 삶을 살며 서로 다른 인생의 행로를 걸어가던 이들은 산에 오르는 동안 누군가로 부터 도움을 받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

능선을 걷다 아담한 바위 밭을 올라간 곳에 정상이 있었어.

내 머리 위에는 하늘, 파란 하늘 단지 그것 뿐이야.

어느 날 문득 산에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다양한 사이트에서 정보를 찾아 내고 가고 싶은 산에 직접 등정 한 영상을 찍은 어느 유튜버 채널 영상에 시선을 고정 시킨다.

뒤이어 알고리즘으로 올라오는 비슷한 주제의 영상을 관람하다 어느 새 도파민에 중독 되어 눈으로 감상한 그곳은 이미 가 본 것이나 다름 없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삶의 여유가 있게 되면 타인에 대해 너그러워지지만 지금의 내 삶이 힘겨워서 나 살기도 급급할 경우에는 누가 어떻게 되던지 관심을 가질 마음의 여유가 없다.

소득 양극화로 인한 빈부의 격차 ,갈수록 줄어드는 안정적인 일자리로 불안한 앞날이 나날이 짙어지고 있는 이 사회가 지옥이라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산은 천국인 것이다.

지난 괴로운 날들은 괴로웠다고 인정해도 돼.

힘들었다고 입 밖에 내어 말해도 돼.

그리고 그걸 지나온 자신을 그냥 위로해줘.

이제부터 다음 목적지를 찾으면 되는 거야.

-미나토 가나에의 <노을 진 산정에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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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121번째이자 여성으로는 18번째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이 출간한 책들은 지난해 10월 부터 최근 까지[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 순번을 서로 번갈아 가며 1위 자리를 밀어 내고 올라서기를 반복했다.











한강 작품 열기 속에서 인기 아이돌이 추천하는 책, SNS열풍을 타고 화제를 불러 일으키는 책,영향력 있는 인사가 추천하는 책들이 빠른 속도로 베스트셀러 상위권으로 진입했다.












이 와중에 세상은 12·3 불법계엄 이후 대통령 탄핵심판이 열렸고 전국 주요 도심은 탄핵 찬반 시위, 시국 선언,집회 등으로 단 하루도 시끄럽지 않은 날이 없다.

탄핵 심판 선고를 앞두고 권력의 '별의 순간'을 잡으려는 대권 잠룡들이 여론의 추이를 살피는 동안 아이돌 그룹의 신간 앨범이나 사진집 발매 오픈 런 대기줄 처럼 어느 정치인의 자서전 책을 사려는 이들이 대형 서점 개점 전부터 100m가 넘는 줄을 서는 기 현상이 벌어졌다.

광화문을 지나가는 버스 차창 너머로 눈 앞에 이런 광고 문구가 스쳐 지나간다.


긴박한 순간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역사 다큐멘터리


누구든 책을 낼 자유가 있고 누구든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구매 할 자유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 역시 내가 읽고 싶은 책,손바닥 크기의 작은 문고본을 꺼내 무심코 펼쳐지는 페이지를 읽는다.


“어제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돌아보니 울컥 목이 메었다. 모두가 착하디 착한 이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루의 고된 생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눈매에서 뭐라 말하기 어려운 인간의 우수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다."


머릿 속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펼쳐 드는 책이 있다.


영혼의 스승’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납덩이처럼 무겁고 답답하기만 한 이 가을의 공기 속에서 그토록 선량한 눈매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어디서 무얼하며 어떻게 지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이 뭘 잘못했다고 이 가을의 공기는 이렇게 숨이 막히는가. 언어가, 인간의 그 언어가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들으려야 들을 수가 없다. 요즈음 신문을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 라디오를 들어도 눈물이 난다. 인간의 말이 듣고 싶어서, 우리들 이웃의 나직한 그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내 귀는 도리어 문을 닫는다.

지형(紙型)까지 떠 놓았지만 언제 책이 되어 햇빛을 보게 될는지 알 수 없다. 영혼의 모음(母音)은 맑게 개인 하늘 아래서가 아니면 울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1972년 입동절 다래헌(茶來軒)에서 저자 합장.”

법정스님을 평가할 때 ‘무소유(無所有)’의 가르침을 실천한 수행자이자 고등교과와 대학 교과에 수필이 실리는 자연주의자 에세이스트로 인식한다.

하지만 스님이 남기신 글들을 찬찬히 읽다 보면 ‘비구 법정’은 반 세기 전 민주화에 앞장섰던 선구자자 였다.

1954년 입산 출가하여 조계산 불일암 시자인 법정(法頂)스님은 1960년부터는 통도사에서 운허스님이 주도했던 <불교사전> 편찬사업에 참여하고 1972년 12월 독재 정권 연장을 위한 유신 헌법이 발효되고 이에 항거한 학생, 시민, 민주계 인사 등의 유신 철폐 개헌 서명 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스님도 뜻을 함께 하였다.

1971년 법정 스님은 <현대문학> 3월호에 <무소유(無所有)>를 발표했다.

우리는 지금

다스림을 받고 있는

일부一部 몰지각자者

대한민국大韓民國 주민住民 3천5백만 다들 말짱한 지각知覺을 지녔는데

어찌하여 우리는 지각知覺을 잃었는가

아, 이가 아린다 어금니가 아린다.

입을 가지고도 말을 못하니

이가 아리는가

들어줄 귀가 없어 입을 다무니

이가 아리는가

들어줄 귀가 없어 입을 다무니

이가 아리는가

오늘도 부질없이

치과의원齒科病院을 찾아 나선다.

흔들리는 그 계단을 오르내린다.

「1974년 1월-어떤 몰지각자沒知覺者의 노래」(중에서)


1980년 법정스님은 해인사와 서울을 오고 갈 때 뉴스와 신문을 통해 5·16 군사쿠데타가 발발 한 것을 알게 된다.

몇 일 후 선암사의 어느 노스님이 군인이 쏜 실탄을 팔에 맞아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며 사회민주화에 대해 발원한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를 발표한다.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박해를 받으니까 증오심이 생기더군요. 내 마음에 독을 품는 게 증오심인데 그때 ‘이래선 수행에 도움이 안 되겠구나’하고 느꼈어요. 순수한 마음에서 이탈하는 게 괴롭고. 중노릇하는 내 본분이 뭐냐고 스스로 물었지요. 본래 자리로 돌아가자. 해서 산으로 들어갔어요.'

-법정(法頂)


시국을 비판하며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던 어느 날, 법정스님은 정권에 대한 증오심이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깨닫고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전남 순천 조계산 자락 불일암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버리고 한 칸 암자에서 혼자서 밭을 매고 밥 지으며 수행한다.

법정 스님이 세상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산 속으로 들어간 지 17년의 세월 동안 그의 주옥같은 산문집들을 읽는 독자들 마음마다 사색의 깊이가 새겨지고 스님이 활자로 새긴 철학적 언어들은 현실의 고통 속에서 미래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밝은 빛이 되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으나 침묵 속에 머무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발견한다. 말이 많은 사람은 누구나 막론하고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간에 그 내부는 비어 있다.

스님의 말씀을 더 듣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산 속 암자까지 찾아 가자 법정 스님은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1992년 법정스님을 찾아온 한 프랑스 철학자가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이렇게 외진 곳에서 혼자 살고 계신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스님은 다시 붓을 들고 세상 밖으로 나갔다.


‘내가 사는 방식을 남에게 강요할 게 아니라, 이렇게 자연에서 배우고 얻어 들은 것들을 사람들과 나눠야 되겠구나.’


새벽 4시에 일어나 저녁 10시에 자는 일과를 매일 지키셨던 법정 스님은 세상을 향해 말로 글로 깨우침을 전하고 나서 2010년 3월 13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입적 하셨다.

50년 동안 수행을 했던 법정스님이 다다른 곳은 과연 어디였을까...


“사람의 한 생애에서 남는 것은 재산도 명예도 아닙니다. 얼마나 주변 이웃에게 덕(德)을 베풀었는지가 중요해요. 바로 덕이야말로 사람의 근원적인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많은 사람들은 덕을 쌓을 줄을 모릅니다. 잘 살고 편리해도 덕이 없으니 외롭고 마음이 황폐해지는 것이죠. 무슨 일을 하든 이웃에 덕이 되는 따뜻한 가슴과 포용력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연을 통해서만 회복할 수 있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을 뽑기 위해 친인척을 채용하는 전통을 내세우는 매관매직을 하고 있는 무소불위 공무원들은 국민의 혈세 법카를 긁으며 잘 먹고 잘 사는 풀 소유의 삶을 누리고 있다.

국민의 삶을 좌지우지 하는 권력자들은 저마다 국민의 세금으로 현금 살포를 하겠다고 하고 미래 먹거리를 위해 인공 지능이라는 단어를 내뱉으면서도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킬 수 있는 법안만 통과 시키며 정치 개혁, 정권 교체를 외치고 있다.

정치가 국민의 삶을 외면하는 동안 사회 곳곳에 시퍼런 칼날들이 무고한 시민들의 생명을 찌르고 있고 부실한 사회 안전망은 언제 어디서 어떤식으로든 무너져 버릴지 모를 정도로 위태롭다.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우리 모두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의 역사다.

소유 하려는 열망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남들 보다 더 많이 내 몫을 챙기기 위해 끊임없이 싸울 뿐이다.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시며 청빈을 실천하셨던 법정스님은 빈 손으로 떠나셨다.

“그저 ‘현재의 나’일 뿐입니다. 과거를 회상하거나 불확실한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최대한의 삶을 살아갈 뿐이지요. 연륜 값을 하고 있는 건지, 수행자 답게 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고, 함부로 말과 행동을 하지 않을 뿐이지요.”

-법정(法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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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5-03-11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생각하니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세상이 혼탁하고 어지러울 수록 어서 빨리 맑고 향기로운 세상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scott님의 늘 좋은 글 감사 합니다.

2025-03-12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