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달새 언덕의 마법사
오키타 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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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이치 현에서 태어난 오키타 엔은 고등학교 재학 중에 진로의 길을 정하지 못한 채 대학에 진학 했다.

대학 재학 중에 우연히 소설 투고 사이트를 발견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창작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 틈틈이 소설을 써나갔던 오키타 엔은 2013년 <한 순간의 영원을 너와>라는 첫 작품을 출간하고 3년 후 두 번째 장편 소설 <나는 몇 번이고 너와 첫사랑을 한다>라는 책이 10대 청소년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으게 된다.

10대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시작된 열풍은 20대 여성 독자층을 사로 잡으면서 1년 만에 25만부를 돌파했고 종이 만화 단행본으로 출간하며 대중적인 소설가로 거듭나게 된다.

2018년 연작 단편집으로 제 1회 퓨어풀 소설 대상 부분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필력을 인정 받은 오키타 엔은 출판사 지쓰교노니혼샤에서 창간 한 문학 시리즈 ‘마음을 성장 시키고 희망을 전해줄 한 권의 책’이라는 ‘GROW’의 첫 번째 장편 시리즈 <종달새 언덕의 마법사>를 발표 한다.

봄부터 겨울까지, 계절에 따라 옴니버스 형식으로 에피소드가 전개되는 <종달새 언덕의 마법사>의 첫 페이지를 열면 마녀와 마법사가 등장한다.

어느 날, 한 마녀가 마을에 나타났다. 끝없이 여행을 이어오던 중에 정착할 곳을 찾다가 우연히 다다른 것이었다.

마녀는 마을이 썩 마음에 들어 자신의 정처로 삼기로 했다.

마녀는 마을에 집을 샀다. 낡아 빠진 건물을 직접 수리하고, 가구를 만들고, 황무지 같던 정원에 텃밭을 일구고, 집 앞에는 사랑스러운 꽃도 심었다.

마녀는 그 집에 마법상점을 차렸다.

-오키타 엔의 <종달새 언덕의 마법사> 중에서


‘종달새 언덕’에 자리한 마법 상점에 마법의 힘을 수련 하기 위에 찾아 온 수련생은 뜻밖에도 인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살 소년이다.

부모가 마법을 혐오해서 학대 받으며 자란 소년은 다른 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 그 소년에게 마법을 알려주는 마법사 스이는 자연을 이루는 구성원인 물, 불,바람, 하늘, 식물, 동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고 키우는 힘으로 인간의 곁에 있는 동식물들과 대화를 할 수 있고 날씨 변화를 예측하는 힘을 갖고 있다.

‘종달새 언덕’에 자리한 마법 상점에 찾아 오는 이들에게 제각기 다른 사연과 상처를 갖고 있다.

불의의 사고로 소꿉친구와 멀어진 중학생,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원로 화가,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괴로워하는 소설가, 애인을 잃고 힘들어하는 형과 그를 걱정하는 남동생은 마법의 힘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현실의 좌절감을 극복 하고 싶어 하지만 마녀 스이는 이들의 소원을 단번에 이루어주지 않는다.

마녀 스이는 마법의 힘을 빌리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세상에 존재 하는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게 만들어 줄 뿐이다.

수련 마법사 소년 역시 스승 마법사에게 배우는 마법의 기술은 그리 대단 하다거나 신묘 하지 않다.

마녀 스이에게 약초 키우는 법과 제조법을 배운 수련 마법사 소년은 마법 상점에 찾아 오는 손님들과 소통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과 동 식물의 마음과 상태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판타지 세계를 그리고 있는 <종달새 언덕의 마법사> 작품에서 태초에 신 역시 지구 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 수 없고 인간 역시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앞 날을 예측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영장류 중에 인간은 무언가를 숭배 하고 예를 표하며 불안과 근심, 걱정을 떨쳐 버리기 위해 눈 앞에 존재 하지 않는 신을 믿고 그 믿음에 부합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 한다.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는 주술을 다루는 무속인이다.

석기 시대 부터 존재 했던 무속은 질병 치료, 예언, 기우제, 풍요 기원 등 다양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 하며 영적인 세계와 인간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자 역할을 해왔다.

인간의 불확실한 미래와 고단한 현실의 문제를 분석해서 운의 향방을 알려주는 무속은 시대에 맞춰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해 나갔다.

광역 인터넷 망 시대에 무속은 더 넓고 다양한 서비스로 확장 시켜 나갔고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AI 기술이 접목 되면서 굳이 무속인과 철학관을 찾아 간다거나 온라인 상담을 통해 1대1로 연결 하지 않아도 이름과 생년월일, 생시, 성별 등을 입력하면 의뢰인의 사주 핵심 특징 분석 부터 시작해서 성격 및 성향 -직업 및 재물운 -애정운 및 결혼운 -대운(운의 흐름) -전체적인 운세 정리 -조언 순으로 사주를 봐준다.

부채를 펼치거나 종을 흔들어 의뢰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불러 낸다거나 깊은 산 속에서 돼지 머리를 올려 놓는 제를 올려 굿판을 벌이는 무속인들에게 찾아 가지 않아도 된다.

AI 챗봇인 챗GPT는 질문 창에 생년월일과 궁금한 질문을 넣으면 실제 점술가처럼 의뢰인과 질문을 주고받는 대화 형식으로 사주를 봐주거나 고민 상담까지 해준다.

단 몇 초 만에 의뢰인의 질문에 즉각적인 답을 하는 챗GPT는 가령 '내 사주로 볼 때 000을 선택 해야 할까? 라는 질문을 하면 이에 대해 이렇게 답변한다.

'그 일은 당신의 사주와 아주 잘 맞는 일은 아니지만, 완전히 불리한 일도 아닙니다. 단기적으로 해보되, 너무 무리하지 말고 더 맞는 일을 찾는 과정 중 하나로 보는 게 좋겠습니다.'

챗GPT는 즉각적으로 두리 뭉실 하게 답변하면서도 적당히 기분 좋을 정도로 예의 바르게 대답한다.

몇 십 만 원에서부터 몇 백 만원에 달하는 부적을 지니라는 말도 하지 않고 큰 돈을 들여 굿을 하라는 조언을 하지 않는 챗GPT는 부모탓, 형제탓, 조상탓을 한다거나 전적으로 의뢰인의 업보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사주 결과에 대해서도 딱히 좋다, 나쁘다 하지 않고 의뢰인의 단점이나 부족한 부분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으로 말해 준다.

단, 인간의 생년월시에 따른 운명을 통계적으로 수집 분석하는 AI는 의뢰인의 미래까지 예측해 주지 못한다.

사람들은 무언가 어려움에 봉착 하게 된다거나 불확실한 상황을 돌파 하고 싶다거나 현실의 불행을 극복하고 싶을 때면 철학관 문을 두드리게 된다.

난생 처음 만나는 무속인이나 점술가에게 어느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는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다 보면 가슴의 응얼이가 풀어지는 경우가 많다.

사주를 본다는 건 미래를 알고 싶어서 이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마음의 고민을 털어놓기 위해서 다.

바쁘다는 이유로, 힘들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줄 마음의 여유를 찾아보기 힘든 세상에서 반말을 해도 비꼬듯 질문을 해도 화가 나서 퍼부어도 챗GPT는 적당히 다정하게 예의 바르게 대답해준다.


인간의 운명은 마법의 힘이라든가 주술의 힘을 빌린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성형을 해서 인상을 바꿔서 좋은 기운이 흐르는 상으로 바꾼다 해도 개명을 하고 운을 트여 준다는 터로 이사를 간다 해도 현실의 곤궁함을 떨쳐 버리는 인생 역전을 하는 일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판타지 일 뿐이다.

모든 것이 이전 시대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하고 풍요로워 졌어도 예측 불허한 세상에서 인간의 삶은 부모 세대 보다 더 고달 퍼졌고 점점 더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인간인 창조한 기계가 더 신뢰 받는 시대에 챗GPT에게 술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세상에서 가장 믿고 의지 할 수 있는 가상의 존재, 상처와 고민까지 해결해 주는 마법사가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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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손턴 와일더 지음, 정해영 옮김, 신형철 해제 / 클레이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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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년 7월 20일 정오 무렵 리마와 쿠스코 사이를 이어주는 페루에서 가장 멋진 다리 산 루이스 레이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다리가 무너져 버릴 당시에 건너던 다섯 사람 모두 떨어져 죽게 된다.

간발의 차이로 참사를 피한 주니퍼 수사는 “왜 이런 일이 하필 저 다섯 사람에게 일어난 것일까?”라는 의문을 품고 다리 붕괴 사고로 희생된 사람들이 우연히 그 장소에 가게 되어 죽게 된 것이였는지 아니면 신이 정해 놓은 운명의 섭리에 따라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들의 죽음’의 원인을 밝혀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인생 행적을 탐사해 나간다.


주니퍼 수사가 가장 먼저 인생 행적을 탐문하는 첫 번째 희생자는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으로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딸을 키워냈지만 엄마의 과도한 집착과 사랑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딸은 스페인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결혼을 하고 엄마를 두번 다시 찾지 않는다.

두 번째 희생자는 후작 부인을 수행했던 하녀로 수도원에 버려졌던 고아 소녀 페피타이다.

그녀의 뒤를 따라 다리를 건넜던 세 번째 희생자 에스테반 청년은 자신의 쌍둥이 형제의 죽음으로 자살을 시도 했지만 실패 한 후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 하기 위해 다리를 건너갔던 청년이다.

네 번째 희생자는 '늙은 어릿 광대' 피오 아저씨로 한때는 유명했던 연극 배우였던 그는 젊은 시절 페루의 최고의 여배우가 성공 할 수 있게 모든 것을 희생했지만 연인에게 버림 받는다.

다섯 번째 희생자는 하이메라는 이름의 아이로 '늙은 어릿 광대' 피오 아저씨가 자신이 연기를 가르쳤던 여배우 카밀라 페리콜이 낳은 아이를 맡아 키우며 함께 리마로 가던 중이었다.

한 날 한 시에 같은 마차에 타고 산 루이스 레이 다리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 다섯 명의 운명은 ‘모두 죽을 만했던 사람들이였을까?" 아니면 ‘신의 섭리였을까?, 허무한 우연인 것인가?'

만일 이게 섭리라면 신은 잔혹하고, 한낱 우연이라면 인생은 무의미한 것 아닌가?

이 다섯 사람들은 그 날 왜 산 루이스 레이 다리를 건너갔던 것일까?

가톨릭 성인의 이름을 딴 산 루이스 레이 다리를 건너 산길을 오르면 클루삼부쿠아 성지에 닿는다.

이 성지는 개혁적이고도 헌신적인 마리아 수녀원장 이끄는 수녀원과 성당이 있는 곳으로 발길이 닿는 곳마다 성당과 수녀원에서 들리는 종소리가 울리는 경건함으로 가득 찬 곳이다.

포목상의 딸로 태어나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몬테 마요르 후작부인은 딸 클라라에 대한 강박과 집착이 결국은 자신을 위한 딸의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다리를 건너다 죽음을 맞이 하고 후작부인의 하녀인 페피타는 고아였던 자신을 키워준 수녀원장의 사랑을 구하려다 결국 다리 아래로 떨어진다.

쌍둥이 동생을 잃은 형 에스테반은 삶의 의지를 잃어 버렸지만 자신의 형제를 키워준 수녀원장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다리를 건너다 추락하고 연인에게 버림 받은 늙은 연극 배우와 그가 데려다 키우는 아이까지 각기 다른 사연을 품고 리마로 되돌아가던 한날 한시에 죽는다.

저마다 욕망하고 자학 하고 절망하고 원망하다 비로소 “용기”를 내어 죽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고 새 삶의 의지를 품고 다리를 건너던 그 순간에 죽음을 맞는다.

이 안타까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다섯 명의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세상은 오만함과 부유함이 저주 받은 것이라 했지만 신의 섭리를 연구하던 주니퍼 수도사는 이들의 삶이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다르다고 추론 했지만 결국 이교도로 몰려 책과 함께 화형을 당한다.

주니퍼 수사가 탐문하기 시작한 다섯 사람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완전히 우연한 사고처럼 보이는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무너지는 사고에 더 큰 운명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족 사이의 사랑, 스승과 제자 사이의 애정,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부모를 잃은 고아를 키워준 마리아 수녀원장에 대한 사랑을 품고 있었던 다섯 명의 운명은 인류 전체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연결 시켜 주는 가장 강력한 두 세계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땅’과 ‘죽은 사람들을 위한 땅’으로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신의 본성을 알지 못하는 유일한 동물이지만 자신과 다른 또 다른 인간의 속성을 찾아 서로 비교 하고 경쟁하며 동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인간이 직면하는 고통과 고난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극복하며 서로 공존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제주항공 참사와 같은 비극을 겪는 동안 "왜 하필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며 사건 수습과 대처, 사고 예방에 미흡할 뿐 그저 누구나 우연히 그런 사고를 당해 그런 죽음을 맞이할 뿐이라고 덮어 버린다.

소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에서 마리아 수녀원장은 자신의 신자들이자 다리 붕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죽음의 의미를 이런 말로 추모 한다.

'모든 사랑의 충동은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랑으로 돌아간다. 사랑을 위해서는 기억조차 필요하지 않다. 산 자들의 땅과 죽은 자들의 땅이 있고, 그 둘을 잇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 오직 사랑만이 의미를 지닌다.'

-손턴 와일더의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중에서

작가 손턴 와일더(1897~1975)의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작품의 첫 장의 시작은 '어쩌면 우연' 마지막 장은 '어쩌면 신의 의도'로 끝이 난다.

1714년에 페루 리마에서 발생한 안타까운 사고로 희생된 운명을 갖은 사람들에게 <신>은 구원적인 존재가 아니였다.

어차피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생명들은 언젠가 죽게 될 것이고 죽고 나서는 그 모든 기억들이 사라져 버린다.

어떤 시대가 도래 한다 해도 결국엔 모두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끝이 있고 그 끝에서 다시 태어나서 시작되는 사랑이 있듯이 모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우리 모두 날마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삶과 죽음의 다리를 건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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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5-16 13: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책 궁금했는데 스콧님 덕분에 바로 찜합니다. ^^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 2024 스웨덴 올해의 도서상 수상작
리사 리드센 지음, 손화수 옮김 / 북파머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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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금요일이라고 적혀 있는 책의 첫 장을 열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13시 10분

보는 점심으로 생선 그라탱과 설탕을 많이 넣은 커피를 원했음.

가래를 제거하기 위해 천식약을 흡입하고 식스텐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음.

그는 식스텐을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한다는 가족 일원의 말에 자신이 상당히 화를 냈다는 것을 꼭 일지에 적어 놓으라고 내게 부탁했음. 벽난로 상태는 양호함.

-잉리드

몇 시 몇 분이라는 정확한 시간과 '보'라는 환자의 식사 여부와 건강 상태 일지를 적은 '잉리드'는 요양 보호사다.

그녀는 6개월 전부터 89세 남자 '보'라는 환자의 집에 드나들면서 간호 하고 '보'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에게 일지를 적어 보여 주며 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알려주고 있다.

환자를 돌보는 요양 보호사와 아내의 일기 그리고 아들의 시선이 번갈아 교차 하면서 진행 되는 이야기의 중심 인물인 '보'는 자신이 눈을 감기 전 반려견 식스텐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는 아들에게 분노한다.

치매를 앓던 아내가 요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은 '보'는 살아 생전에 아내가 썼던 스카프를 병 속에 넣어두지만 병뚜껑을 열기도 힘들어서 요양보호사에게 부탁해야 할 정도로 쇠약해졌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곧 임박했음을 감지 하고 지난 시절 한 때 가족과 행복하게 보냈던 기억을 하나 하나 떠올리기 시작한다.

'나는 스카프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면서 타들어 가듯 아픈 마음을 감은 눈꺼풀 뒤에 숨겼다. 나이가 들면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정상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기억 속에는 눈물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

-리사 리드센의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아버지 보는 아들 한스의 꼬마 시절 함께 낚시를 다니며 친구 투레의 오두막에서 셋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지만 아들 한스는 어릴 때부터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로 인해 큰 상처를 받았다.

남편과 아들 사이에 냉랭한 기류가 흐를 때 마다 아내는 엄마로 아들을 따스하게 품어 주었고 단 한번도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는 남편을 이해 했다.

아들 한스가 대학에 진학하고 부터 아버지 보는 아들이 말하는 정치, 사회 문제에 관한 어려운 용어를 이해 하지 못했고 세상에 모든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아들에게 이질감을 느꼈다.

'분노의 여파였는지 최근 나를 괴롭히던 감정이 다시 밀려들었다. 가슴 속에서 고개를 든 것은 이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였다.'

보는 천식과 심장약을 복용하고 있어도 친구 투레와 달리 움직이고 외출 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자부 하며 반려견 식스텐을 매일 산책 시키고 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피곤해지고 잠이 쏟아졌고 방금 전 했던 일을 잊어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나날이 기력이 쇠약해진 '보'는 한 여름에도 스웨터를 껴 입거나 반려견 식스텐이 목줄을 채울 때 도망치는 것을 따라 잡기 힘들게 되자 정밀 진찰을 받으러 병원에 간다.

병원에서 보는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의사로 부터 심장 마비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말에 화가 치밀어서 병원을 박차고 나가고 아들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의 불안한 시선을 애써 외면 한다.

보는 수면 중에 소변을 보기에 이르지만 요양원에 가지 않기 위해 부엌 소파에서 자기 시작하고 부지런히 반려견을 산책 시키고 친구를 찾아 가며 일상적인 생활을 이어간다.

결국 '보'는 산책 중에 참지 못하고 옷에 오줌을 싸고 급기야 집으로 돌아와서는 바지 조차 벗기 힘겨운 상태에 이르자 자신에게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실감한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갑자기 오른쪽 허벅지가 묵직해졌다. 안개 낀 듯 흐릿한 시야 속에서 내 다리에 얹은 한스의 손이 보였다. 우리가 얇은 옷차림으로 낚시를 하기 위해 오랫동안 호숫가에 앉아 있을 때면 나도 그의 어깨에 그렇게 손을 올려놓곤 했다. 문득, 우리의 손이 너무나 닮아서 깜짝 놀랐다.

-리사 리드센의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은 작가 리사 리드센이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가 남긴 메모에서 시작 되었다.

손녀인 작가는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 하던 중 요양보호사가 남긴 메모에서 할아버지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의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작가는 할아버지가 남기고 간 기록과 메모를 정리 하면서 죽음에 이른 한 남자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뼈저리게 느끼며 한 생을 살다 간 남자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던 소년이 제재소에서 일하며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들을 낳고 키우며 생의 한 시절을 보내다 치매를 앓던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홀로 남겨진다.

가족처럼 반려견에게 의지하며 생의 끝을 향해 가고 있는 보는 새 가정을 꾸린 아들에게 태어날 손녀를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89세 보의 일생에서 조금씩, 부분 부분 잃어버리고 놓쳐 버리는 시간의 길이가 행복했던 시간보다 훨씬 더 길었다.

론 뮤익 <피노키오 Pinocchio>(1996), 혼합재료, 84 x 20 x 18cm, The John and Amy Phelan Collection / 사진. ©Anthony d'Offay


장난감 가게 아들로 태어난 소년은 어린 시절부터 손에 잡히는 재료로 인형을 만들었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즐겨 보는 어린이 TV프로그램의 캐릭터 인형을 만들다가 직접 방송국에 자신이 만든 인형을 가져 간다.

그의 재능을 알아 본 제작진은 청년에게 일자리를 제안하고 대학에 진학 하지 않고 일찌감치 영화와 TV 분야에서 마네킹과 소품을 제작하다 영국의 광고 재벌이자 컬렉터 찰스 사치의 눈에 띄어 그가 1997년에 기획한 ‘센세이션’전에 직접 만든 마네킹을 끌고 나와 세상을 놀라게 한다.


론 뮤익 <쇼핑하는 여인 Woman with Shopping>(2013), 혼합재료, 113 × 46 × 30 cm / 사진. © Patrick Gries, 출처.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홈페이지

양 손 가득 묵직한 비닐 봉지를 들은 여자의 커다란 외투 속에 이제 막 목을 가눌 수 있는 아기가 엄마의 얼굴을 쳐다 보고 있지만 피로에 찌든 엄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가와 눈을 마주치 않은 채 다른 곳을 응시 하고 있다.

호주 멜버른 태생의 극사실주의 조각가 론 뮤익(Ron Mueck, 1958~)의 작품은 가까이 다가가면 조작상이 말을 걸거나 불쑥 손을 내밀 것 같이 실제 사람 크기와 너무나도 흡사하게 만들었다.

론 뮤익 <죽은 아버지 Dead Dad>(1996~1997), 혼합재료, 20 x 38 x 102 cm / 사진. © Eva Herzog,

출처. 타데우스 로팍 홈페이지

호주 멜버른에서 장난감 제조업체를 경영했던 론 뮤익의 아버지는 아들의 손에 의해 1996년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 마지막 숨을 거둔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들 론 뮤익은 아버지의 얼굴에 새겨긴 주름과 검버섯을 만들고 한올 한올 흩어진 머리카락과 땀구멍까지 정밀하게 표현해서 자식에게 모든 걸 주고 떠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자신의 <죽은 아버지>를 세상에 공개 했다.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복잡 다단한 삶을 살다 숨결이 다하는 그 마지막 날은 모든 걸 소진해 버린 육신만 남겨진다.

출처: 바티칸 교황청,목관에 안치된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목관에 안치된 모습이 세상에 공개 되었다.

교황의 마지막 유언에 대로 바티칸 내 거처인 산타 마르타의 집 예배당에 있는 목관에 붉은 예복을 입고 머리에는 미트라를 썼고, 손에는 묵주가 들려 있다.

화려한 치장을 한 관이 아닌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목관에 조문객 눈높이보다 아래에 몸을 누인 교황이 선종 뒤 남긴 재산은 100달러 뿐이다.

평생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며 청빈한 삶을 살다 간 교황은 마지막 까지 그의 교황명인 13세기 성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빈자의 성인’으로 살다 갔다.

인간의 생이 다한 육신을 마주 할 때면 마지막 내 것으로 가져 갈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죽음 또한 살아보지 못한 삶의 시작이기에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죽음을 인생의 마무리로 받아들인다면 매 순간 삶을 더 소중하고 충실하게 살아 갈 수 있으리라..

희망은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을 수 있는 가장 거룩한 선물입니다.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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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5-04-25 12: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재작년에 욘 포세의 작품들을 몇 권 읽었었는데, 거기서도 삶과 죽음이 이어져있다는 메시지 같은 걸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scott 님의 글을 통해 그러한 메시지가 한 번 더 각인 된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25-04-25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4-25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다미 넉 장 반 타임머신 블루스 다다미 넉 장 반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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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대학원 재학 당시에 쓴 <태양의 탑>으로 일본 판타지 노벨대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 데뷔한 모리미 도미 히코는 3년 만에 발표한 작품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로 나오키상 후보와 서점 대상 2위에 오르며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수상하며 장르 소설계에 돌풍을 일으킨다.

독자들은 교토 태생의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의 예스러운 단어와 독특한 대화체에 열광했고 교토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현실과 환상의 세계가 오묘하게 조합된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그의 작품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며 소설을 넘어 작가 특유의 '의고체' 화법의 열풍을 몰고 왔다.

주요 문학상과 독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한 몸에 받은 작가 모리미 도미 히코가 2011년에 발표한 <다다미 넉장 반 신화 대계>는 동아리 활동도 연애도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한 채 자책만 하는 대학교 3학년생인 주인공 '나'가 다다미 넉장 반 짜리 방구석에서 . 만약…이라는 가정하에 입학 때로 돌아가 여러 가정을 하기 시작한다.

작품의 전개는 주인공이 '만약'이라는 망상의 시간을 과거와 현재. 미래 시간대를 차례대로 보여주다가 주인공의 삶에 불쑥 불쑥 끼어드는 현실 속의 주변 인물들 때문에 '만약'이였던 망상이 현실이 되어 버리면서 전개되는 모험담을 펼쳐 보인다.

'현실에 꿈만 같은 일이 벌어지는' 환상적 리얼리즘의 세계관을 보여준 <다다미 넉장 반 신화 대계>은 출간 즉시 일본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되었다.

작가는 <다다미 넉장 반 신화 대계>가 애니메이션이나 영상물로 제작되는 것을 전혀 염두해 두지 않고 썼지만 이 작품이 다양한 콘텐츠로 제작되며 흥행에 성공하자 16년 만에 성공으로 극작가 우에다 마코토의 컬래버레이션으로 속편 《다다미 넉 장 반 타임머신 블루스》를 완성했다.

출간 즉시 순식간에 10만 부가 판매되었고 속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디즈니 플러스에서 방영되었다.

외전이자 속편 격인 작품《다다미 넉 장 반 타임머신 블루스》는 전작에 등장했던 교토 대학 3학년에 재학중인 주인공이 다시 등장한다.

불지옥과 같은 교토의 여름을 겨우 견디게 해준 교토대학 기숙사의 유일한 에어컨을 켤 수 없게 되면서 부터 주인공에게 황당한 일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대학 생활을 엉망 징찬으로 만든 친구 ‘오즈’가 에어컨의 리모콘을 고장 냈다는 걸 알아차린 주인공이 리모콘을 수리 하려던 중 25년 후의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찾아왔다는 한 남자가 나타난다.

주인공은 이 타임머신을 이용해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면 고장 나기 전의 리모콘을 가져올 수 있다는 엉뚱한 계획을 세운다.

드디어 주인공은 시간여행에 나서지만 뜻밖에도 예상을 벗어나는 변수의 연속으로 그의 계획은 꼬여 버리게 되고 급기야 세상의 궤멸을 눈앞에 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전작 <다다미 넉장 반 신화 대계>에서 작가는 “만약 신입생 동아리 모집에서 주인공이 다른 동아리에 들어갔다면, 대학 생활은 어떻게 달라졌겠는가”라는 설정을 속편으로 연장 시켜서 시간의 루프(반복)와 멀티버스(평행세계)의 요소를 적용시켜 작가 특유의 독특한 판타지 세계관을 펼쳐 보였다.

교토의 허름한 하숙집의 다다미 넉 장 반크기의 방에서 시작된 망상이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간을 오고 가는 공상과학과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이 작품은 천편일률적인 이(異)세계물 스토리가 쏟아지는 웹툰과 웹소설계와의 경쟁에서도 압도적 우위를 차지 할 정도로 입체적인 스토리를 탄탄하게 갖춘 작품이다.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만의 고유 대명사 같은 스토리가 된 <다다미 넉장 반>은 한 작품 안에서 피어오르는 청춘 남녀들의 로맨스, 공상과학과 판타지적 요소 그리고 작품의 후반부에 주인공들이 던지는 철학적 메시지가 매우 자연스럽게 구현되어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제한 없는 상상력’으로 독자들의 흥미와 호기심을 채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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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미 넉 장 반 신화대계 다다미 넉 장 반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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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일반 가정 주택이나 료칸 바닥에 깔려 있는 다다미는 일본 전통 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닥재이면서 다다미 개수로 방의 크기를 재는 척도로 사용 된다.


볏짚을 압축해서 단단히 묶은 코어로 구성된 다다미는 각 지역에 자생하는 볏짚의 색과 크기도 다르고 기후에 따라 지어지는 건축 양식도 다르기 때문에 지역 별 다다미 치수도 제각각이다.

다다미 1장(조)의 크기는 약 180cm×90cm,로 대략 1.62제곱미터에 달하는데 지역에 따라 다다미의 치수가 달라서 평수를 재는 척도도 달라진다.

수도 도쿄가 있는 관동 지방의 표준 다다미 크기는 전 열도에서 가장 작은 176cm x 88cm 치수가 기준이다.

794년부터 1869년까지 일본 수도였던 관서 지방의 최대 도시 교토는 땅값이 비싸고 협소한 주택인 많은 도쿄에 비해 거주지 용 가옥 규모가 커서 다다미 한 장 크기는 191cm x 95.5cm다.

관서 지역의 가옥을 세울 때 기둥은 다다미 크기에 따라 배치 하고 관동 지방은 기둥 사이의 거리를 기준으로 다다미를 배치 한다.

일반적으로 관동지역의 일반 성인 1명 기준의 방 크기는 다다미 넉 장 반이고 번화가나 중심부로 갈수록 이 다다미 장수는 줄어 들고 방의 크기도 협소해진다.

반면에 관서 지역의 평균 방 크기는 다다미 8장이여서 관서 지역의 평균 크기인 다다미 넉 장 반은 이 지역에서 가난의 상징이다.

가난의 상징인 다다미 넉 장 반에서 온갖 기상 천외한 망상을 하는 구제 불능의 청춘이 있다.

대학 3학년 봄 까지 이 년간, 실익 있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노라고 단언해두련다. 이성과의 건전한 교제, 학업 정진, 육체 단련등 사회에 유익한 인재가 되기 위한 포석은 쏙쏙 빼버리고 이성으로부터의 고립, 학업 방기, 육체의 쇠약화 등 깔지 않아도 되는 포석만 족족 골라 깔아댄 것인 어인 까닭인가.

책임자를 추궁할 필요가 있다.

책임자는 어디 있나.

-모리미 도미히코의 '다다미 넉장 반 신화 대계 '중에서

다다미 넉 장 반 크기의 자취방에 틀어박힌 채 의미 있는 대학 생활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대학 3학년생인 '나'는 이 모든 것을 친구 오즈의 탓으로 돌려 버린다.

대학에 갓 입학 했을 때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 오즈는 야채를 먹지 않고 오로지 즉석 식품만 먹어 대는 괴짜로 주인공은 만일 1학년 때 다른 동아리를 가입해서 오즈를 만나지 않았다면 꿈 같은 장밋빛 캠퍼스 라이프를 구가할 수 있었다는 망상을 하기 시작한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것 없이 대학 내 영화 동아리 "계"에서 괴짜 친구와 그에 못지 않는 기이한 선배들과 교류 하면서 찬란할 것만 같았던 청춘의 빛은 오묘한 색을 띄게 되고 탄탄 대로 같았던 인생은 우연곡절 같은 사건을 겪게 되면서 기상천외한 경험을 두루 겪게 된다.

대학 내에서 역사가 그리 길지 않는 영화 동아리 "계'의 멤버는 30명 정도로 이 동아리에서 처음 제작한 영화는 2차 세계 대전 이전 부터 계속 되어온 유서 깊은 장난 대결을 계승한 두 남자가 지력과 체력을 다할 때까지 자존심 대결을 펼치다는 황당 무계한 스토리의 영화였다.

상영회에서 웃는 사람은 단 한 명, 그 사람은 바로 이 황당무계한 영화를 제작한 동아리 멤버였다.

두 번째로 제작한 영화는 <리어 왕>으로 남자 배역에 너무 많은 공을 들여서 여성 관객에게 야유 소리와 항의를 들었던 망작이였다.

세 번째 작품은 대학 생활 내내 무엇 하나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고 자조 하는 주인공 '나'와 그의 엉뚱한 친구 오즈와 함께 제작하는 다다미 넉장 반이라는 영화다.

다다미 넉 장 반에서 살던 남자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미로 안에 갇혀서 그곳을 탈출하는 여정을 담겠다는 시놉시스를 만들자 동기들과 선배들로 부터 황당무계하다며 무시 당한다.

대놓고 면전에서 거절과 무시를 당한 주인공은 파 소스를 얻은 소 혀를 맛있게 굽는 가게가 있다는 친구 오즈의 손에 이끌려 교토 대학가 밤 거리를 쏘다닌다.

온갖 냄새와 사람들로 들끓는 밤 거리를 쏘다니던 나는 고양이로 국물을 낸다는 고양이 라면가게에 들어가 어딘지 신비로우면서도 수상쩍은 가모타게 쓰누미노카미라는 사람을 만난다.

기이한 사람과 기이한 대화를 나누다 술에 취한 나는 온갖 망상을 풍선처럼 불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친구 오즈가 사라진다.

오즈를 찾아 거리로 나온 주인공은 술 기운이 남은 채 새벽녘에 학교에 가서 새로 가입한 동아리 신입들의 면접 보는 자리에 나간다.

4월부터 5월까지 열리는 봄 꽃 축제에 상영할 영화를 제작하느라 동아리 방과 캠퍼스 곳곳에서 노숙을 하며 지내던 주인공은 이따금씩 방으로 돌아 올 때마다 동아리 '계'를 선택 했다는 후회감에 몸부림친다.

자전거를 타고 강둑을 따라 숲 길을 달리다가 마주치는 괴짜들은 신묘한 기운이 가득한 신사에서 튀어나온 기인 같은 인물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동아리 '계'에서 오랫동안 독재자로 군림한 선배,동기들도 선배들도 두려워 하는 동아리 회원, 본인 스스로 언제 대학에 입학 했는지 정확한 년를 기억하지 못하고 학내 교수들 보다 연식이 높은 동아리계에 사부, 알콜 도수가 미약한 술과 벽돌 크기의 카스테라를 들고 다다미 넉장 반 크기의 방에 불쑥 나타나는 괴짜 이웃들이 총 충돌하는 모리미 도미히코의 <다다미 넉 장 반>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지만 현실의 고통과 빈궁함도 망상으로 연결 시키는 괴짜들이다.

주인공 '나'가 망상을 펼치는 협소한 크기의 다다미 넉 장 반에 찾아 오는 괴짜들은 마치 해가 지고 나면 활동을 시작하는 신사의 신령들과 혼령들처럼 각자만의 독특한 개성으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암담한 현실에서 고군분투하는 청춘들 앞 길을 열어 준다.

수수께끼 같은 게임에 뛰어들어 결투 끝에 후계자 자리에 올라간 주인공은 어쩌다 보니 이 세계가 아닌 저 세계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며 자칭 '자학적 대리 전쟁'에 휘말리게 되자 동아리 '계'에 가입 하게 만든 친구 오즈를 원망한다.

엉뚱하면서 천하태평한 친구 오즈는 스승이 실종 되고 얼떨결에 스승의 대리인이 된 주인공이 '자학적 대리 전쟁터'에서 친구의 헛발질을 천진난만한 얼굴로 지켜 보다 다리에서 추락해서 병원에 실려간다.

다다미 넉 장 반짜리 방안에서 피어 오른 원망과 망상은 바로 옆 방에 미녀가 새로 이사 오면서 일 순간 꺼져 버리고 착실하게 편지를 쓰며 빨래방에서 도난 당한 속옷을 찾아 주는 의인이 된다.

대학 시절의 끝자락에 선 주인공은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 놓지 못한 채 취직에 대비해서 영어 학원에 등록하고 어딘지 모르게 대단해 보이는 인물이나 화려했던 과거를 갖고 있는 이들을 스승 삼아 사회인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한다.

기이한 스승을 만나 기이한 싸움에 휘말리고 괴짜 친구들과 선배들 때문에 탄탄한 성공 대로가 아닌 신들의 무덤이 있는 신사나 축제가 열리는 강가를 배회 하며 청춘의 시간을 허비 하면서도 다다미 넉장 반짜리 방으로 돌아 오면 마음껏 책을 읽고 카스테라를 베어 물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 버린다.

늘 최선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던 주인공 '나'는 그 선택의 결과가 실패 하거나 최악으로 치닫게 되자 자신의 선택을 한탄하며 다다미 넉 장 반을 나와 교토 시내 곳곳을 돌아 다니며 '만약에..'라는 말을 시종일관 내뱉고 다닌다.

청춘의 판타지물, 망상계의 신의 손인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는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청춘들이 기기묘묘한 행동을 일삼으면서도 고상한 교토 화법을 구사하며 현실을 벗어난 망상의 세상에서 허우적 거리는 모습을 유쾌하게 그려내어 일본 독자들에게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다.

1979년 생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가 생각하는 대학 캠퍼스를 누비는 청춘의 모습은 몸 하나 누울 수 있는 다다미 넉 장 반 크기의 방에 살며 이성과의 건전한 교제, 학업 정진, 육체 단련과 같은 사회에 유익한 인재가 되기 위해 거듭 노력하며 전력 질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이런 청춘들의 모습은 망상을 너머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시대 청춘들은 대학 진학 후 학점 관리는 기본이고 학회, 대외 활동 등에 참여하며 입사 지원칸에 채워 넣을 스펙을 치열하게 준비해야 한다.

동아리도 취직에 유리한 동아리로 가입하고 인턴십도 능력을 키우고 스펙을 쌓을 수 있는 곳을 열심히 찾고 재학 중에 여러 개의 자격증을 따고 해외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1학기 또는 1년 동안 해외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에 매진한다.

이렇게 고군 분투 하며 청춘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도 입사 지원서를 내는 기업으로부터 정확한 사유도 듣지 못한 채 번번이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아빠와 엄마 찬스, 조부모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청춘들이 불안한 계약직에서 최저 임금을 받거나 졸업을 미루고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동안 정치인이나 고위층 자녀들은 1명 모집하는 꿀 보직에 지원해서 눈 깜짝 할 사이에 부모로 부터 직업 세습을 받는다.

컴퓨터나 제품 사양(specification)의 줄임말인 스펙은 취직을 해도 끝이 나지 않는다.

승진에 도움이 되는 자격증을 따기 위해 퇴근하고도, 주말에도 시험을 준비하거나 더 나은 직장으로 이직 하기 위해 대학원 시험을 준비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연애와 결혼을 위해서도 스펙이 필요할 정도로 스펙 쌓기는 죽을 때까지 끝이 나지 않는다.

기회 조차 잡지 못한 청춘들이 취업을 포기하게 만들어 버리는 이 사회는 노후 걱정 없는 급여를 제공하는 일자리 수 조차 많지 않아 중 장년들도 암담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다.

청년을 위한 나라! 노후 걱정 없는 중장년층을 위해 연금을 개혁 한다고 외치는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사는 기생충들에게 스펙 대신 짱돌을 던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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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5-03-28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다미 사이즈가 지방마다 다르군요.

scott 2025-06-07 11:44   좋아요 0 | URL
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