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초반부의 ‘놀면서 지내는 삶은 이미 전생에 정해져 있다’는 의문에 해답을 제시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둔 데서 연작의 가능성을 포착한다. 연작으로 이어진「춘분 무렵까지」에서는 신분이 다른 다양한 유민이 등장한다. 이는 전작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푸는 의미로 본다. 


고등유민의 주제로 보면 「그 후」는 텍스트의 경계를 너머 「춘분 무렵까지」로의 연작으로도 읽기 가능하며, 작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 인간성이 상실된 인물을 등장시켜 사회 비판을 한다고 해석한다.] 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be54d9b8bc7cdb09&control_no=ebe923190df5dff1ffe0bdc3ef48d419&outLink=N (이혜경)

2009년 춘분 요코하마 차이나타운 By Ootahara






"여유라니, 자네. 난 어제 비가 오니까 날이 좋을 때 다시 와달라고 자네를 거절하지 않았나? 그 이유를 지금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멋대로 거절하는 법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하나? 다구치라면 절대 그런 식으로 거절하지 못할 걸세. 다구치가 기꺼이 사람을 만나는 게 왜라고 생각하나? 다구치는 세상에 추구하는 바가 많은 사람이라 그런 거네. 다시 말해 나 같은 고등유민*이 아니기 때문이지. 아무리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해도 난처하지 않다는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네."

*소세키가 만든 말로 ‘그 후’에도 나온다. 대학을 나와서도 직장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직업 때문에 마음을 더럽히거나 안달하지 않는, 여유로운 시간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그 후’의 다이스케처럼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 무리를 해서 먹고살기 위한 직업을 가질 필요가 없는 지식인을 말한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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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분 지나고까지'에 러시아 작가 안드레예프의 소설 'Gedanke(독역)'의 줄거리가 꽤 길게 소개되는데, 일본에서는 이 작품의 제목을 '마음'으로 번역했다고 한다. 소세키가 쓴 '마음(こころ)'에 안드레예프가 쓴 저 소설이 혹시 영향을 준 건 아닌가 - 최소한 제목이라도 - 추측해본다. 안드레예프의 '마음'은 1909년에 일역되었고, 소세키의 '춘분 지나고까지'는 1912년,  '마음'은 1914년 작이다. 안드레예프는 같은 내용으로 희곡도 썼으며 이 희곡은 '생각'이란 제목으로 우리 나라에 번역출간되어 있다.





제목에는 게당케(Gedanke)*라는 독일어가 쓰여 있었다. 그는 러시아 책을 번역한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다.

*레오니트 니콜라예비치 안드레예프(1871~1919)의 소설 ‘생각’ 독일어번역본으로 소세키의 장서에 있다. (중략) ‘게당케(Gedanke)’의 영역은 ‘Thought.’ 우에다 빈이 번역하여 1909년 6월 ‘마음(心)’이라는 제목으로 간행했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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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사판 '춘분 지나고까지'의 작품해설(정혜윤)로부터 옮겨둔다. 이 글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시작해 볼까요?'에도 실려 있다.

Girl Reading, 1904 - Helene Schjerfbeck - WikiArt.org


Before Confirmation, 1891 - Helene Schjerfbeck - WikiArt.org






사랑한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 이것은 어떤 순간에는 반드시 나의 자아를 뛰어넘게 내부로부터 요구당하고 나의 자유를 타인의 발 아래 던져놓을 수밖에 없게 한다. 있는 힘껏 ‘밖으로’ 나갔다가 나 자신을 타인의 호의적인,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신비롭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처분 아래 맡겨놓게 된다. - 정혜윤(해설)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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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 소설집 '여름의 빌라'에 실린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 발표)가 2020 현대문학상 수상작이다. 하성란 작가의 본심 심사평으로부터 일부 옮긴다.

Mistress of the House, 1896 - Konstantin Korovin - WikiArt.org






수상작으로 결정된 백수린의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를 읽으면서 놀랐다는 것부터 고백해야겠다. ‘고요한 사건’에서부터 이 작가의 소설을 따라 읽어왔기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고요한 사건’ 속 "문고리만을 붙잡은 채 창밖"으로 떨어져 내리는 "새하얀 눈송이"를 황홀하게 지켜보고 있는 ‘나’의 모습 위로, 어느새 문밖으로 뛰어나가 건물 잔해 위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자신의 욕망과 대면하고 있는 희주의 모습이 겹쳐졌다. 작품의 완성과 함께 작가의 일부도 완성된다는 동료 작가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 P402

심사과정 중 이 소설의 소재가 주는 기시감에 대해 말하면서 여러 소설이 언급되기도 했다. 한때 감탄하며 읽은 소설들이었으나 곰곰 생각해보니 여러 가지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위악적이거나 자학적일 수밖에 없었다. 학습되고 체득된 모성애와 그에 따른 죄의식을 피해 갈 수 없었다.
- P403

작가는 죄의식의 그림자가 아니라 고통스럽지만 낯선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를 읽으면서야 나는 여성으로서 불온하다는 손가락질에 눌러왔고 숨겨왔던 내 욕망에 대해 비로소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작가의 완성’에 깊은 축하의 말을 보낸다. (하성란) - P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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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인물 묘사가 입체적이고 생생한 편이다. 성격이 대범하고, 거침 없이 할 말 다 하되 생각이 깊고 정도 많은 여성이 나온다.


지요코가 갖고 있는 선악과 시비의 분별은 학문이나 경험으로부터 거의 독립해 있다. 그저 상대를 향해 직감적으로 타오를 뿐이다. 그러므로 상대는 경우에 따라 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지요코의 반응이 강하고 격렬한 것은 가슴속에서 순수한 덩어리가 한꺼번에 다량으로 튀어나온다는 의미지, 가시나 독이나 부식제 같은 것을 내뿜거나 끼얹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설사 아무리 격하게 화를 낼 때도 나는 지요코가 내 마음을 깨끗이 씻어준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경우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있었다는 것이 그 증거다. 드물게는 고상한 사람을 만났다는 느낌마저 들었을 정도다. 나는 세상 앞에 홀로 서서 지요코야말로 모든 여자 중에서 가장 여성스러운 여자라고 변호해주고 싶을 정도다.
- P243

내가 만약 지요코를 아내로 맞이한다면 아내의 눈에서 나오는 강렬한 빛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 빛이 꼭 분노를 드러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인정의 빛도, 사랑의 빛도, 혹은 깊은 사모의 빛도 마찬가지다. 나는 분명 그 빛 때문에 꼼짝하지 못할 게 뻔하다.
- P244

만약 순수한 지요코의 영향이 나의 어딘가에 나타난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설명해도 그녀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데서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발현될 뿐일 것이다. 만일 지요코의 눈에 들어와도 그녀는 그것을 포마드를 발라 굳힌 내 머리나 순백색 비단 버선으로 감싼 내 발보다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 P245

나는 또 감정이라는 자신의 무게로 인해 넘어질 것 같은 지요코를, 운명의 아이러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인이라며 깊이 동정한다. 아니, 때에 따라서는 지요코 때문에 전율한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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