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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소문과 영원의 말
나인경 지음 / 허블 / 2025년 4월
평점 :

"허블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도시의 소문과 영원의 말》이라는 제목도 나인경이라는 작가의 이름도 낯선 하지만 장르는 익숙한 SF 소설을 만나보았다. 나인경 작가는 2021년 단편〈눈뜨기〉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그리고 《도시의 소문과 영원의 말》은 나인경 작가의 첫 번째 장편 소설이다. 그래서 작가의 다음이 더 기대된다. 익숙한 SF 소설과는 다른 결의 낯선 SF 소설을 만났고, 다음 작품에서는 또 어떤 변화를 보여줄지 기다리게 된다.
p.247. 그런데 얼굴도 모르는 너를 떠올릴 때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아파 오는 건지 모르겠어.
이야기는 유니언워크사社에서 행한 비도덕적 실험의 희생자인 '안'과 '정한'이 자신의 기억을 찾으려는 것에서 시작한다. 프리랜서 방송작가 안은 '기억 소거'서비스를, AI챗봇 설계자인 정한은 '기억 반환'서비스를 제공받고 있다. 둘의 공통점은 뇌에 ID 칩을 심었다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심어졌다는 것이다. 다른 점은 안의 기억은 타인의 기억과 혼합되어 중첩되어 나타나고, 정한의 기억은 중간중간 끊어진 채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는 기억을 지우려 하고 또 누구는 기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실험의 대상자였던 십 대 소녀와 소년은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서로를 찾는다. 하지만 둘은 서로의 이름도 모른다. 그래도 둘을 이어주는 '연결'이 있었다. 그 연결은 서로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이었고, 나를 찾기 위한 간절한 소망이었다. 기억을 소거하지도 다시 소환하지도 못하는 두 주인공의 엇갈린 그리움이 교차되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실험을 행하던 병원 옆 호수에서 만나 서로의 마음을 달래주던 안과 정한은 서로의 '약속'대로 다시 그 호수에서 만날 수 있을까? 안이 꿈꾸던 '산책'을 할 수 있을까?
p.127. 모든 걸 잃어도 우리는 호수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반유니언워크 커뮤니티 원장, 직장 동료 그리고 의뢰인 등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풍부하게 해준다. 특히 챗봇의 원리나 클라우드 서비스의 원리 등 과학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있어서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sf 소설의 재미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주인공들의 안타까운 사랑이 가슴을 울리는 로맨스 소설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또 다른 면으로는 첨단 과학 기술을 활용해서 사람들의 존엄성을 빼앗고 인간성을 말살시키려고 하는 세력을 등장시켜 가까운 미래가 아닌 오늘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사회소설 같기도 하다.
p.210. 사라지지 않기 위해 매 순간 흩어지는 의식의 조각을 붙잡고 있는 건 분명 내 딸이에요.
정말 다양한 모습의 엄청난 스토리를 담고 있는 소설이다. 너무나 재미있어서 순삭 했고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가슴에 남았다. 뇌의 칩을 이용해서 기억을 지웠는데도 '사랑'은 다시 살아났다. 어쩌면 사랑은 머리, 뇌의 영역이 아니라 마음, 심장의 영역일지도 모르겠다. 과학으로도 어쩔 수 없는 영혼의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안과 정한, 둘의 사랑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정한의 용기를 응원하는 묘한 분위기를 가진 SF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