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우어
천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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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소설. 읽기가 쉽지 않은데 계속 읽게 된다. 예전에는 진정한 독서가(?)라면 취향이 아닌 책도 읽어야 한다는 (알량한) 의무감 때문에 읽었다면, 요즘은 개중에 마음에 드는 작품을 발견하는 재미로도 읽는다. 천선란 작가의 신작 소설집 <모우어>에서도 마음에 드는 단편을 여럿 찾았다. 


첫 번째는 <뼈의 기록>이다. 로비스는 장의사로 일하는 안드로이드 로봇이다. 하루에 몇 구의 시신을 처리하는 로비스이지만, 안드로이드 로봇인 만큼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알지 못한다. 로비스는 같은 장례식장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노인 모미와 매일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 앉아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일과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안드로이드 로봇이라고는 하지만, 로비스가 모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유난히 즐겁고 편안하게 '느끼는' 것 같은 건 인간인 나의 착각일까. 인간보다 더 인간을 위하는 안드로이드 로봇을 과연 인간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을까.


두 번째는 <서프비트>이다. 엄마가 일하는 가게에서 매일 지루한 나날을 보내던 주영은 어느 날 우연히 자신에게 초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얼마 후 초능력이 있는 아이들을 따로 모아 놓고 훈련하는 기관에 들어가게 된 주영은 그곳에서 자신과 비슷한 초능력자 남자아이 도영을 만나게 된다. 나이도 같고 이름도 비슷한 주영과 도영은 한 집에 살고 같은 학교에 다니며 쌍둥이 남매처럼 지낸다. 언제부터인가 주영은 도영을 남매나 친구와 다른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하고, 그 감정이 채 여물기도 전에 도영에게 어떤 일이 생긴다. 본격 SF 소설이라기보다는 판타지가 가미된 청소년 로맨스 소설로 분류될 만한 내용이라서, 천선란 작가의 소설을 아직 읽어본 적 없는 독자라면 입문작으로 이 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표제작 <모우어>는 언어가 사라지고 언어 대신 '의음(意音, 정신이나 마음의 작용에서 나오는 소리)'로 소통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이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초우는 어느 날 우연히 인간 아기를 발견하고 '모우'라는 이름(부름어)을 붙여준다. 초우는 모우가 이 사회에 적응해 살아갈 수 있도록 의음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치지만, 인간 아기인 모우는 초우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자꾸만 인간의 언어를 사용한다. 언어가 인간의 본능임을 이야기하는 소설 같기도 하고, 사랑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고 생존 의지를 능가하는 힘이라는 걸 보여주는 소설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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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생 3 - 언제나 그 자리에 오늘의 인생 3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새의노래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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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팬데믹 시기가 배경인 소설이나 에세이를 여러 권 읽었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팬데믹이 언제 끝날까, 평생 마스크를 착용하고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한국 정부가 엔데믹을 선언한 지 벌써 2년이나 지났다니 놀랍다. 팬데믹 시기에는 매일매일이 비슷비슷하게 느껴졌다. 대면 접촉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외출을 삼가고 모임을 포기하며 날마다 집에서 비슷한 일상을 보냈으니 당연하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버린 그 시기를 섬세하고 촘촘하게 기억하고 싶어서 읽은 책이 마스다 미리의 <오늘의 인생> 3권이다.


<오늘의 인생>은 일본의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마스다 미리가 2017년부터 연재 중인 만화다. 제목 그대로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오늘, 평범한 인생을 보여주는 만화인데, 2020년 팬데믹이 창궐하면서 본의 아니게 팬데믹 시기의 일상을 기록한 만화가 되었다. 2024년에 출간된 <오늘의 인생> 3권은 엔데믹 전후의 일상이 그려져 있다. 한여름에 마스크를 쓰고 다닐 때 느낀 괴로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웃는 얼굴을 전하기 어려울 때 느낀 곤란함, 타 지역에 사는 가족이나 친구와 영상 통화할 때 느낀 반가움과 안타까움 등등 모두 불과 몇 년 전까지 '일상'이었는데 벌써 아스라하게 느껴지다니. 시간이란. 인간이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대목은 이거다. 강한 바람에 코트 자락이 펄럭인 순간, 어린 시절 연을 날렸던 기억을 떠올린 저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 즐거웠던 시간을 사람은 어른이 되어도 잊지 않아요. 어린 내가 최선을 다해 놀아줬으니까 지금의 내가 문득 행복을 느꼈어. 그 아이는 그 아이는 분명 지금의 나를 위해서도 놀아주었던 거예요." (114-5쪽) 좋았던 기억, 행복했던 기억은 시간이 흘렀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 안의 어딘가에 쌓여서 미래의 나를 즐겁게 한다는 걸 일깨워 주는 대목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책에 실린 짧은 소설에, 작년에 가본 시즈오카 아이노역의 풍경이 묘사되어 있어서 너무나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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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
백은선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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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볼 정도의 글을 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공개된 장소에 글을 쓰는 이상 나름대로 자기 검열이라는 걸 한다. 나에 대한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사서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남기는 것뿐이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누가 내 글을 읽고 불쾌감을 느낄지도 모른다고, 나중에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길게 쓴 글을 지우게 되고 쓰려던 글도 안 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자기 검열 같은 건 하지 않은 듯 보이는 과감하고 솔직한 글에 대한 동경이 있다. 이런 것까지 쓴다고? 이런 것까지 털어놓는다고? 싶은 글을 읽으면 묘한 희열마저 느낀다. 백은선 시인의 산문집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를 읽으면서 느낀 감정이 딱 그랬다. 


책에 따르면, 저자는 결코 순탄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가정 폭력에 시달렸고, 학창 시절 내내 왕따를 당했다.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할 뻔했으며, 여자라는 이유로 크고 작은 성희롱과 폭력을 당했고 이는 문단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비로소 안정된 삶을 사는 듯했으나 몇 년 전 이혼하고 혼자서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일도 하고 살림도 하고 육아도 하는 삼중고를 겪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남자가 좋고, 돈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시를 쓰고, 아이 키우기가 힘들다고 토로하면서 둘째를 가졌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는 나. 이런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한 마음. 모른다고만은 할 수 없다.


이 책은 내용만 솔직한 게 아니라 문장도 저자의 일기를 그대로 옮긴 듯 거칠고 자유롭다. 이 점을 당혹스러워하는 독자들도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이런 문장들이야말로 21세기를 사는(인터넷 많이 하는) 사람이 쓴 문장 같고,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기록하고 보전할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저자도 책에 한강 작가를 좋아하지만 그렇게 될 수는 없다고 썼는데, 내 생각에도 많은 사람들이 한강 작가를 흠모하지만 모두가 한강 작가처럼 쓸 필요는 없고 그럴 수도 없고, 그러니 백은선 시인은 백은선 시인답게 쓰고 나는 나답게 쓰는 게 좋은 것 아닌지. 그게 비록 싫고 이상하더라도 좋은 면도 아주 없지는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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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읽기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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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독서가 여행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다"라고 한 누군가의 말처럼, 독서는 나를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이동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여행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요즘은 독서가 운동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일상 생활만으로는 체력이 키워지지 않기 때문에 운동으로 근육을 만들고 체력을 키우는 것처럼, 평상시에 말하고 듣고 쓰고 읽는 것만으로는 언어 능력이나 사고력이 충분히 길러지지 않기 때문에 독서로 보강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소설가 이승우의 산문집 <고요한 읽기>에 따르면 독서에는 또 다른 효용이 있다. 독서는 지금과 다른 나, 더 나은 나가 되는 활동임을 넘어 진정한 나, 나도 몰랐던 나가 되는 활동이다. 젊은 시절 대부분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저자는 두 가지에 몰두했다. 하나는 문학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다. 오랜 세월 문학과 종교에 대해 사유하고 창작을 하면서 저자는 문학과 종교가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꼈다. "문학에 유사종교적 기능이 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해 고민한다는 점에서 문학은 종교의 거울이다." (38쪽)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책이라는 물리적 대상을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읽는다. "책을 읽을 때 독자가 실제로 읽는 것은 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책(속 문장)은 '나'를 잘 읽도록 돕는 광학기구일 뿐이고, 그 광학기구가 있어서 나는 '나'를 읽을 수 있게 됩니다." (6-7쪽) 이 책에서 저자는 젊은 시절부터 현재까지 자기 자신을 읽어 오면서 이정표가 되어준 작가와 책들을 소개한다. 그중에는 헤르만 헤세, 밀란 쿤데라, 프란츠 카프카, 이스마일 카다레, 디노 부차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미셸 투르니에 등이 있고 성경도 빠지지 않는다.


이 책의 제목은 <고요한 '읽기'>이지만 이 책에 '쓰기'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사람이 사람을 낳는 것처럼 책이 책을 낳는다. 그러므로 책을 낳고(쓰고) 싶은 사람은 먼저 책을 낳을 책을 만나야(읽어야) 한다. "위대한 다른 작가의 작품 속에서 작가가 태어난다. 작가가 작가를 태어나게 한다. 책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책들의 자궁이다. 책은 책에서 나온다." (51쪽) 쓰기가 되는 읽기를 하려면 그저 인쇄된 글자를 읽고 줄거리를 이해하는 수준에서 그치면 안 된다. (저자처럼) 한 단어, 한 문장에 천착하며 사유를 종으로 횡으로 확장시켜야 한다.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저자처럼 읽고 쓸 수 있을까. 부디 그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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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 식당
하라다 히카 지음, 김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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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넘게 감기로 고생하는 중이다. 전에는 일주일 정도 앓으면 감기가 나았는데 요새는 일주일을 앓아도 감기가 안 낫는다. 나이 때문인가 싶고, 앞으로는 어쩌나 싶고, 앞으로고 뭐고 일단 지금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몸도 마음도 별로인 상태라서 좀처럼 독서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런 때에는 가벼운 일본 소설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읽기 시작한 게 이 책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너무 재밌게 읽었고, 하라다 히카 역시 좋다. 적당히 감상적이고 적당히 현실적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도쿄 진보초의 헌책방 거리. 이곳에서 수십 년간 혼자서 헌책방을 운영한 다카시마 지로가 사망하면서 홋카이도에 사는 여동생 산고가 헌책방을 대신 운영하러 온다. 호기롭게 오기는 했지만 도쿄에서 사는 것도 장사를 하는 것도 책을 파는 것도 처음이라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산고. 다행히 근처에 있는 대학에서 국문학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큰오빠 아들의 딸 미키키가 헌책방 일을 도와주기로 한다. 사실 미키키는 지로 할아버지의 유산 분배에 관심이 많은 엄마의 명에 따라 산고 할머니를 돕기로 한 건데, 헌책방 일을 거들면서 점점 헌책의 매력에 빠져들고 자신의 진로를 재고하게 된다.


책 제목이 <헌책 식당>인 만큼 에피소드마다 책 한 권과 음식 하나가 등장한다. 매 에피소드가 책을 좋아하지만 헌책방 운영은 처음인 산고 할머니와 미키키가 헌책방을 찾아온 손님과 음식을 나눠 먹고 손님에게 필요한 책을 찾아 주는 식으로 전개된다. 손님들의 사연도 그렇지만 산고 할머니와 미키키 각자의 이야기도 재미있고, 무엇보다 이들이 묘사하는 진보초의 풍경과 음식, 책 이야기가 흥미롭다. 오래전 도쿄 여행 때 진보초에 가본 적이 있는데, 언젠가 다시 가볼 기회가 있다면 오래 머무르면서 이 책에 나온 음식도 먹어보고, 산고 할머니와 미키키가 있을 법한 헌책방에도 들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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