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들 - 마음의 고통과 읽기의 날들
수잰 스캔런 지음, 정지인 옮김 / 엘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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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십 대는 고통이었고 나의 이십 대는 고독이었다. 나의 삼십 대가 그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 회복하는 시간이 된 것은, 팔 할이 독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이십 대 중반부터 오락이나 취미 수준이 아니라 중독된 사람처럼 '읽어치운' 책들은, 오랫동안 나를 잠식했던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고립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주변의 기대에 맞추어 살기보다 나답게 사는 법에 대해 고민하도록 이끌어주었다. 미국의 여성 작가 수잰 스캔런의 책 <의미들>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저자는 이십 대 초반에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후 3년 간 정신병동에 입원한 이력이 있다. 당시 저자는 가족들이 사는 시카고를 떠나 뉴욕에 있는 대학에 다니며 외롭게 생활했다. 자기 몸을 엄격하게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나쳐 거식증도 앓았다. 유일한 대화 상대였던 남자친구는 자살 충동을 가진 사람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의사를 만나본 적도 있는데, 그들은 하나 같이 '히스테리'라고(여성혐오적 표현이지만 1980년까지 미국정신의학협회의 <정신 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에 남아 있었다), 야외에서 햇볕을 받으며 운동하고 세 끼를 잘 챙겨 먹으면 호전될 거라고 말했다.


그 때로부터 삼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그 시절 저자가 사로잡혀 있던 감정이나 생각, 고수했던 생활 방식이나 습관이 잘못이었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걸 알려준 건 정신의학이 아니라 저자가 읽은 책들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을 만든 여성 작가들의 책을 소개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 나왈 엘 사다위의 <우먼, 포인트 제로> 등이다. 이 책들의 공통점은 모두 여성 작가가 쓴 소설이고, (당연하게도) 여성과 여성의 삶을 다룬다는 것이다. 이 책들은 먹지 못하는 저자를 먹였고, 어둠 속을 걸어가는 저자에게 빛으로 출구를 제시했다.


책 읽기는 삶의 한 방식이, 혹은 사는 법을 찾으려는 탐색이 되었다. 젊은 여자가 책들의 영향, 독서의 영향을 받아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 형태를 만들어가는 일은 쉽게 경시되지만, 그럼에도. 책 읽기는 내가 가진 것이었고 내겐 그것뿐이었다. 나는 잘난 체한다는 소리, 별종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은 이렇게 예술가가 된다. 당신은 오직 당신에게만 진실해진다. 당신이 알고 있던 것들, 남들에게 들은 의견들과 어린 시절부터 거쳐온 여러 정체성으로부터 떠나간다. (55쪽)


저자에게 독서는 단순한 치료, 치유 이상의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저자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할 정도로 글쓰기에 관심이 많고 책을 즐겨 읽었지만, 막상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의사가 '히스테리'라고 표현한 증상을 스스로 표현할 수 있었다면, 그것을 외로움과 슬픔으로 인지하고 자신의 언어로 묘사할 수 있었다면, 젊은 시절의 소중한 3년을 병원에서 보내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독서는 그랬던 저자에게 자기만의 언어를 선사했다. 그리고 그 언어로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기록했다. 이제는 그 자리에 없는 병원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들과 지냈던 기억을.


당신은 자기 고통과 상심이 세계사에서 전례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다가 책을 읽는다. 나는 이 말을 이해했지만, 당시 그 말은 나를 치유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내 고통이 너무나 이상하고 새롭고 고유하고 절절해서 이전에 다른 누군가도 이렇게 느꼈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그랬다면 그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 나 또한 살아남지 못할 테고. (103쪽)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경험에 대한 책이라고 해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같은 내용을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정신병원에 입원한 경험 자체보다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수용하는 방법을 독서를 통해, 그중에서도 어떤 책들을 통해 배웠는지를 설명해 주는 책이라고 느꼈다. 그런 점에서 저자와 비슷한 경험이나 문제가 있는 사람뿐 아니라 독서와 책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고 삶을 더욱 제대로 보고 싶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오래오래 곁에 두고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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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CL midnight children 5
사카모토 신이치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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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를 타고 루마니아를 여행 중인 미나의 고아원 친구 조나단은 성에서 자신을 이곳으로 초대한 드라큘라 백작의 영혼과 만난다. 반가운 마음에 조나단은 백작을 자신의 고향인 영국으로 초대하고, 초대를 받은 백작은 조나단의 목덜미에 자신의 송곳니를 찌른다. 그 광경은 어쩐 일인지 그림의 형태가 되어 영국에 있는 미나의 눈에 들어가고, 조나단의 정신세계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미나는 위기에 빠진 조나단을 구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트랜스'를 시도한 미나는 루크(남)이자 루시(여)인 웨스턴라에게로 연결되는데...


한편 런던에서는 매춘부로 일하는 여성들이 '잭 더 리퍼'로 불리는 연쇄 살인범에게 연달아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휘트비 학교의 유일한 아시아계 학생이자 최고의 수재인 조 스와(스와 죠)는 직접 개발한 기계장치를 가지고 잭 더 리퍼를 잡으러 런던으로 떠난다. 단서를 찾아 밤거리를 배회하던 조는 미술 학교에서 그림 강사로 일하는 금발의 남자의 방으로 가게 되는데, 이 남자가 그리는 그림들이 왠지 모르게 수상하다. 드라큘라 이야기에서 (마이클 잭슨을 거쳐) 잭 더 리퍼로 연결되다니. 작가의 상상력이 대단하다. 작화는 더욱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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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비오톱
나기라 유 지음, 부윤아 옮김 / 문예춘추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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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형태는 한 가지가 아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막상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형태와 다른 형태의 사랑을 하는 사람을 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같은 말이 생긴 것은 사랑의 정의 혹은 범주가 그만큼 다양하고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일본 작가 나기라 유가 2017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신의 비오톱>은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보여준다. 


우루하는 결혼한 지 2년 밖에 안 된 남편 '가노군'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엄마 대신 우루하를 키워준 이모는 더 늦기 전에 새출발하라며 맞선을 종용하는데, 가노군을 그리워 하는 우루하에게 이모의 '배려'는 폭력으로 느껴진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쉬고 있던 우루하는 툇마루에 앉아 담배를 피고 있는 가노군을 발견한다. 우루하는 가노군은 죽었고, 눈 앞에 보이는 가노군은 유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가노군이 '없는' 것보다 가노군의 유령이라도 '있는' 편이 자신에게 더 낫다고 생각한 우루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노군의 유령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남편의 유령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한 이후로 우루하에게는 신기한 일이 연달아 일어난다. 우루하는 남편의 유령과 사는 것보다 더 이상한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들여다 보니 세상에는 우루하처럼 남들에게 쉽게 이해 받지 못하는 사랑, 그래서 비밀로 감출 수밖에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예쁜 사랑을 하고 있는 줄 알았던 커플이 알고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거나, 가노군과 저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노부부에게 엄청난 비밀이 있었다거나.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우루하는 남편의 유령과 함께 하는 생활을 좋아하면서도 '이대로 괜찮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의 답을 천천히 찾아간다. 


나는 행복하지만, 이 행복은 이해하기 힘든 형태를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행복조차도 정해진 틀에 집어넣고 싶어 한다. (중략) 자신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사람에게 걱정이라는 대의명분으로 가볍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다. 말한 사람은 딱히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니 더욱 고약하다. (176쪽)


"설령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저는 다른 아이와 하루를 똑같이 사.랑.할.순.없.어요." 아직 어린 아키지만 확신에 찬 그 말에는 나도 마음 깊이 동의했다. 아키의 말 그대로였다. 나도 주위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과 가노군을 똑같이는 사랑할 수 없다. 모두가 그럴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것만으로 불평등을 낳는다. (144쪽)


사실 나는 내가 다양한 사랑의 형태에 열려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몇몇 사랑은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피부색이나 국적이 다른 사람과의 교제나 혼인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고, 같은 나라 사람이라도 어느 지역 사람과는 결혼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이십 대일 때는 서른 살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노처녀'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노처녀라는 단어 자체가 사어(死語)가 되었다. 그러니까 과거의 상식이 지금은 틀릴 수 있고, 지금은 틀린 것이 나중에는 상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의 형태나 범주가 가변적이라면 중요한 건 시대나 사회가 변해도 바뀌지 않는 사랑의 본질일 텐데, 사랑의 본질은 불평등 내지는 차별임을 지적하는 것도 이 소설의 멋진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궁극의 행위라거나 인류를 구원할 명약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사랑은 누군가(또는 무언가)를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하는(버리는)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도 사랑을 위해 안정적인 미래나 사회적 명예, 때로는 법까지 포기한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선택이 어리석거나 안타깝게 보이지만은 않고 어떤 선택은 위대하고 찬란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건, 포기하는 것의 가치(기회비용)가 클수록 사랑도 크다는 믿음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일까. 그런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는 걸까. 그래서 내가 사랑을 못하나. 그런 사랑을 내가 하고 싶나...? 이런 등등의 생각을 하게 하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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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블루 8
후지마키 타다토시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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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킬러 오오가미 쥬조는 임무 수행 도중 수수께끼의 약물을 투입 당해 중학생의 모습이 된다. 이참에 조직의 보스의 딸이 다닐 중학교에 들어가 내부 조사를 하게 되는데, 뜻밖에도 그는 이 생활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느낀다. 늦게 시작한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서 등교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다 ㅎㅎ (그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여전히) 여름 방학인 쥬조는 "마지막 날에 몰아서 벼락치기로 하는 게 국룰"인 방학 숙제도 진작에 다 끝내고 할 일이 없다. 게임이라도 하라는 말에 (어릴 때 할 만큼 해서) "이만큼 즐겼으면 됐어"라고 말하는 쥬조. 아직 중년은 아니지만(정말?) 너무 공감 된다. 뭘 해도 예전만큼 재미있지가 않아 ㅠㅠ


2학기가 시작되면서 학교에 새로운 교장, 교감 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 몇 분이 오는데, 가정실습부 전원을 납치했던 암살조직 'JARDIN'의 2대 보스 오카 요이치로와 그의 부하들이다. 미츠오카 제약이 개발 중인 신약으로 엄청난 부를 얻는 것이 목표인 이들은 미츠오카 제약 사장의 딸인 노렌을 노린다. 이를 위해 전세계에서 모은 용병 집단을 관리하는 '유니콘 레어 클래스(환수조 희소종)'라는 특별 학급을 만들어 쥬조와 대결하게 한다(이 정도면 미츠오카 제약 사장을 납치해 협박하는 편이 빠르지 않을까 ㅎㅎ). 아무튼 (좋은 의미에서) 전개를 종잡을 수 없는 만화이고, 그래서 계속 보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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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반대인 우리들 3
나츠나 호노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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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주인을 닮는다'는 말이 있다. 찾아보니 개와 주인은 외모뿐 아니라 성격도 비슷하고, 이는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사실이라고 한다. 이 만화의 경우는 다르다. 나츠나 호노의 만화 <정반대의 우리들>은 몸집은 작지만 대형견을 키우는 카구라 치하루와 몸집이 크지만 소형견을 키우는 츠지이 키요타카가 같은 동네에 살면서 반려견을 산책시키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3권에서 두 사람은 반려견과 동반 숙박이 가능한 전통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커플 같아 보이지만 (아직) 커플은 아닌 두 사람은 이 여행을 통해 전보다 더욱 서로를 의식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3권에서는 메인 커플보다도 전통 여관 주인인 아사오카 챠코의 이야기가 훨씬 더 재미있었다. 조부모가 운영하는 전통 여관에서 일하고 있는 챠코는 츠즈이 키요타카의 남동생 타카야와 같은 대학에 다니는 현역 대학생이기도 하다. 챠코는 같은 수업을 듣는 타카야를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그의 형이 자신이 일하는 여관에 묵게 된 것이 꿈만 같다. 이 일을 계기로 차코는 그동안 속으로만 좋아했던 타카야와 처음으로 대화도 나누고 같이 반려견 산책을 하자고 제안도 한다. 반려견을 매개로 가까워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재미도 있고 감동적이다. 어서 다음 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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