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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詩 한 편 새겨야 할 때 - 하루 한 줄, 마음을 달래는 필사책
김정한 지음 / 빅마우스 / 2025년 11월
평점 :

이 포스팅은 빅마우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작성했다.
우리는 누구나 완벽하게 코딩된 프로그램처럼 삶이 오류 없이 매끄럽게 돌아가기를 바란다. 하지만 20년 넘게 IT 현장에서 수많은 변수를 다뤄온 경험에 비추어 보면, 삶이란 녀석은 결코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훨씬 많았다.
항상 평온하고 행복한 일들만 있으면 좋으련만,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한 버그처럼 튀어나오는 사건들로 인해 맘 상할 일이 생기고, 해결되지 않는 걱정거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도 한다. 생성형 AI처럼 최첨단 기술이 세상을 바꾼다고 떠들썩한 이 시대에도, 정작 내 마음 하나 마음대로 바꾸지 못해 힘든 밤을 지새울 때도 많다.
바로 이럴 때, 지친 마음의 운영체제를 잠시 멈추고 마치 노트북을 재부팅하듯, 디지털 피로를 씻어내고 아날로그적 '멈춤'의 미학을 건네는 책 《마음에 시 한 편 새겨야 할 때》를 추천한다.
IT 분야는 속도와의 전쟁이라 할 만큼 변화가 빠르다. 치열한 프로세서 경쟁, 24시간 꺼지지 않는 스마트폰 알림 속에서 쳇바퀴 돌듯 쉼 없이 새로운 기삿거리가 쏟아진다. 이럴 땐 종종 세상으로부터 '로그아웃'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SNS에는 수많은 정보가 넘쳐나지만, 정작 마음에 남는 문장은 희미해져 간다. 우리가 너무 많이 읽고, 너무 빨리 반응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우리에게 잠시나마 '일시 정지' 버튼이 되어 준다. 저자는 빠르게 흐르는 시대 속에서 쉼을 잃어버린 독자들에게 시 한 편이 주는 회복의 감각을 선물한다. 단순히 눈으로 훑고 지나가는 텍스트가 아니라, 마음의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씹어 삼켜야 할 문장들을 직접 써볼 수 있도록 필사 공간도 제공한다.

이 책이 여타의 시 해설서와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은 바로 필사라는 '행위'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구성은 직관적이면서도 배려가 깊다. 왼쪽 페이지에는 김정한 작가가 엄선한 시와 해설이, 오른쪽 페이지에는 독자가 직접 펜을 들고 시를 따라 써볼 수 있는 여백이 마련되어 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행위가 정보를 입력하는 과정이라면, 펜을 꾹꾹 눌러 시를 옮겨 적는 필사(筆寫)의 과정은 내면을 정돈하고 치유하는 의식과도 같다.
"깊이 사귀지 마세 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
가벼운 정도로 사귀세
악수가 서로 짐이 되면 작별을 하세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세
(중략)"
이 시는 책에 소개된 조병화 시인의 <공존의 이유 12>다. 인간관계에 지치고, 너무 많은 '연결'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모니터 위에서 깜빡이는 커서가 아닌 손끝에서 느껴지는 필기의 감촉을 통해 이 문장들을 새롭게 만나는 시간이었다. 눈으로만 읽을 때는 스쳐 지나갔던 단어 하나, 조사 하나가 손끝에서 되살아나 마음 깊숙이 박히는 경험이었다. 저자의 말처럼, 필사는 시와 독자의 관계를 더욱 깊고 내밀하게 만들어 준다.
저자 김정한은 시인이자 수필가로서의 안목을 발휘해, 한국 시와 세계 시를 아우르는 탁월한 큐레이션을 보여준다. 한국 시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김소월, 윤동주, 박목월, 정지용, 조병화의 작품들은 우리네 정서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며 고전적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동시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 조지 허버트, 알렉산드로 푸시킨 등 국경과 언어를 초월해 사랑받아 온 세계 시들을 한국 독자의 시각에 맞춰 재해석해 낸다.
《마음에 시 한 편 새겨야 할 때》는 스마트폰을 옆구리에 끼고 살지 않던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책에 밑줄을 긋고, 공책에 시 한 편을 빼곡히 적어 내려가며 감상문을 썼던 그 시절의 숙제는 오래된 기억처럼 멀어져 있지만, 필사하는 동안만큼은 그 시절의 감성이 새록새록 피어오른다.
아름다운, 혹은 감정에 울림을 주는 시 한 편을 천천히 따라 쓰는 동안 마음에 난 생채기에 새살이 돋아나는 경험을 함께 해보시기 바란다. 외우지 않아도 되고 의미를 깊게 분석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읽고, 쓰고, 마음에 새겨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 출처 : 박기자의 끌리는 이야기, 책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