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마음 속에 깊은 감명을 준 책이 <수레바퀴 아래서>이다. 주인공인 한스의 죽음은 그가 남긴 파란 작업복과 함께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는 자신의 힘겨운 삶을 함께 고민하고 조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에게는 분명히 청춘의 꿈이 있고, 목표가 있었겠지만 그것을 이룰 수가 없었다. 혼자 힘겨워하면서 삶을 마감했던 것이다.
출판사 '코너스톤'에서는 하루 필사 책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헤르만 헤세>가 출간됐다. 헤르만 헤세의 주옥같은 소설 중에서 <수레바퀴 아래서>를 가장 먼저 필사하게 됐다.
" 생각이 깊어지고, 마음을 단단하게 하는" 고전 문학의 문장을 따라 써 본다는 것은 작품을 다시 한 번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 것이며 이를 통해서 생각도 깊어지게 된다.
요즘 필사가 대세인데 그건 필사를 함으로써 어휘력도 풍부해지고 문해력도 향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의 구성을 보면, 하루에 한 페이지씩 40일간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자신만의 정성이 담긴 예쁜 글씨로 한 문장, 한 문장 따라 쓰다보면 <수레바퀴 아래서>에 담겨져 있는 청소년의 방황과 좌절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전 문학을 읽기를 기피하는 중고등학생들도 이 책의 내용을 필사하면서 문장, 문장에 담긴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 우정이라는 이름의 짐 ***
두 사람의 우정 관계는 독특했다. 하일너에게는 즐거움이자 사치였으며, 편안하거나 때로는 변덕스럽게 느껴지는 관계였다. 한스에게는 자부심으로 포장한 보물이었다가도 무겁게 짊어져야할 커다란 짐이기도 했다.
*** 알지 못하는 사이 사라지는 것들 ***
이제 그 모든 것은 사라져 버렸다.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 끝나 버렸다. 처음에는 리제 곁에서 보내던 저녁 시간이, 다음에는 일요일 오전의 금붕어 잡이 놀이가 사라졌고, 그리고 동화책 읽는 시간이, 홉 수확과 정원의 물레방아가 차례로 사라졌다. 아, 전부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수레바퀴 아래서>의 내용 중에서도 독자들이 꼭 읽어 보고 따라 썼으면 하는 문장들이다. 필사를 하는 동안에 이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내 경우에는 마음에 남는 5작품 안에 드는 소설이다.
<2013년 쓴 '수레바퀴 아래서'의 리뷰를 함께 적어본다.>
우리들에게 친근하게 느껴지는 성장소설로는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제롬 다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회색노트>등이 있다.
이 소설들은 중고등학생들의 필독 도서 목록에 담겨져 있는 책이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면 독후감 숙제를 하기 위해서라도 한 권쯤은 읽어 본 책일 것이다.
이 소설들이 발표된지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사춘기 소년들의 방황과 갈등, 또는 모험이 담겨 있기에 자신의 사춘기를 들여다 보는 듯 동일시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이 책들을 한 번 이상을 읽었는데, 그중에서도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는 이번에 세 번째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고등학교 다닐 때에 읽었고, 두 번째는 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에 함께 읽었고, 그리고 이번에 또 다시 읽었는데, 그때마다의 마음에 다가오는 느낌들은 같으면서도 그 깊이는 갈수록 더 짙게 새겨지는것이다. 고등학생 시절에 읽을 때 보다 더 강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어느덧 세월의 흐름 속에서 겹겹이 삶의 흔적들이 쌓였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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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세 번째 읽은 <수레바퀴 아래서>는 이전에 읽었던 때와는 또다른 생각들을 가지게 해준다.
헤르만 헤세가 1903년에 그의 나이 25살에 쓴 이 소설은 100 년이란 세월이 훌쩍 흘러 갔지만, 아직도 청소년들은 물론이고, 성인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가져다 주는 작품이다.
작가의 소년기의 경험들이 삶의 조각들이 되어서 한 권의 소설로 쓰여졌기에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을에서는 가장 똑똑한 아이, 재능이 뛰어난 아이, 지성으로 충만된 아이인 한스가 조금씩 삶의 무게가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은 슈바벤 신학교 시험을 보러 가면서 부터이다.
항상 머릿속에는 공부로 가득찬 아이이지만 각지에서 모인 아이들과 함께 보는 시험은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한스는 시험을 보면서 자신감이 없어지고 무력해짐을 느끼게 된다. 불합격할 것이라는 걱정을 하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신학교에 2등으로 합격하게 된다. 그래서 소년은 다시 공부에 대한 열정과 뜨거운 욕구가 솟아나기도 했지만, 새로운 학교 생활에는 적응을 하지 못하게 된다.
천재성을 지닌 한스에 대해서 교장 선생님를 비롯한 선생님들의 기대는 크지만, 소년은 차츰 나락의 늪으로 빠져 들어간다.
한스 기벤라트와 친구가 된 헤르만 하일너는 학교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짝이라는 인상을 준다.
성실한 아이와 경박한 아이, 천재적인 사고능력을 가진 아이와 시적 능력을 가진 아이.
한스 기벤라트와 헤르만 하일너의 만남은 소년을 반항심이 들끊는 소년기에 들어서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4년간의 수도원 학교 생활에서 궤도를 벗어나거나 끝없이 추락하는 소년들이 몇 명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한스 기벤라트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한스를 그렇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기만당하고 억압당했던 어린시절의 기억들이 봇물터지듯이 한꺼번에 용솟음쳤기 때문일까?
그렇게 고생하며 열심히 공부하던 한스. 작은 즐거움까지도 포기하고 공부에 몰두했던 한스.
" 환희는 젊은 사람의 힘이 거둔 승리와 강렬한 삶에 대한 최초의 예감을 의미했다. 고통은 아침의 평화가 깨지고 그의 영혼이 유년기의 땅을 떠났으며 이제 다시 찾을 수 없음을 의미했다. 그의 가벼운 조각배는 첫 난파의 위험은 가까스로 피했지만 새로운 폭풍우와 곳곳에 도사린 심연과 위험한 절벽 근처로 휩쓸려 들어갔다. 지금껏 아무리 좋은 안내를 받으며 살아온 젊은이라 해도 이제부터는 어떤 안내자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길과 구원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 (p. p. 172~173)

그의 마음에 꽉 차 있던 자부심, 명예욕, 희망에 부푼 꿈은 대관절 어디로 다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아버지와 선생님은 그를 끝까지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없었을까?
그 모든 것이 마음에 유리조각이 꽂히듯이 알알이 박힌다.
지독한 사춘기를 겪은 한스의 불운은 그 누구의 삶보다도 극명하게 극과 극을 치달린다.
" 소년은 한창 꽃필 시기에 갑자기 뚝 꺾여 즐거운 인생길을 벗어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 (p. 214)
이 책을 두 번째 읽은 지도 꽤 오래 되었기에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살아난다. 그러나, 결말 부분에 가서는 갑자기 가슴에 멍울이 새겨진다.
'맞아, <수레바퀴 아래서>의 그 무거웠던 그 결말이 바로 이랬었지!'
너무도 가슴이 아픈 한스의 파란 작업복과 그의 죽음은 아들 둔 엄마라면 모두가 가지게 되는 무거운 마음일 것이다.
이렇게 무참하게 허물어지는 천재의 최후는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학교가, 부모가 아이들의 꿈을 지켜 주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을 향한 지나친 기대와 관심도 문제가 되지만, 활짝 피어날 수 있는 아름다운 꽃을 피지도 못하고 벌레가 파 먹거나, 꺾어 버리는 것도 우리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한스에게 자신의 생각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자상한 엄마가 있었다면, 올바른 길로 함께 갈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면, 소년은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스의 짧았던 삶이 그리도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다. 소년에게는, 청춘에게는 꿈이 있고, 목표가 있고, 그것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은 혼자의 힘만으로는 힘겨울 때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청소년들을 다시 한 번 눈여겨 보면 어떨까, 힘이 되어 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