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3부작 -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마추켈리 외 그림, 황보석 외 옮김, 폴 오스터 원작, 폴 카라식 각색 / 미메시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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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굉장히 독특한 그래픽노블을 만났어요.

이제껏 봤던 그래픽노블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어요. 원작이 있는 그래픽노블의 경우, 그림은 글을 대변할 때가 많아요. 마치 번역처럼, 글로 표현된 내용들이 그림으로 전환되는 분위기인데, 이 책은 손오공의 분신술마냥 본체와 여러 개의 분신들이 제각각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 같아요.

2025년 폴 오스터의 1주기를 맞아 미국과 동시에 출간된 《뉴욕 3부작 The New York Trilogy》은 그래픽노블이에요. 아직 원작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그래픽노블로 처음 만나는 《뉴욕 3부작》은, 기묘한 세계에 빠져든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어요. 왜냐하면 뉴욕이라는 공간 자체가 실재하지만 실제 경험해보지 못했으니 제게는 가상의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고, 이미 머릿속에 박혀 있는 뉴욕의 이미지들은 전부 외부에서 유입된 거라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에요. 어쩌면 이번 그래픽노블도 폴 오스터가 글로써 묘사한 뉴욕과는 별개의 뉴욕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다른, 그 자체로 모순된 세계를 보여주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뉴욕이 아니라 뉴욕에 살고 있는 소설의 주인공인 퀸, 블루, 익명의 비평가인데, 그들이 쫓고 있는 사건과 인물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남은 건 노트 한 권이라는 것이 참으로 묘했어요.

《뉴욕 3부작》은 폴 오스터가 1980년대에 개별적으로 출간한 세 편의 단편 소설, <유리의 도시>, <유령들>, <잠겨 있는 방>을 하나로 묶어낸 작품인데, 그래픽노블로 탄생하게 된 공로는 폴 오스터와 1980년대 말에 친구가 된 만화가 아트 슈피겔만에게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아트 슈피겔만이 감독하고 데이비드 마추켈리가 그린 그래픽노블 <유리의 도시>가 1994년 처음 세상에 나왔네요. 폴 오스터가 <유리의 도시>를 집필하던 1981년과 1982년에 아트 슈피겔만은 뉴욕의 시각예술학교에서 폴 카라식을 가르치고 있었고, 폴 오스터와 아트 슈피겔만이 처음으로 만났던 1987년에 폴 카라식은 미술학원에서 열한 살짜리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폴 오스터의 아들 대니얼인 것을 알고, 그의 책을 몇 권 읽다가 장난삼아 <유리의 도시> 가운데 몇 페이지를 스케치했다는 거예요. 동시간대에 뉴욕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 중 그들이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일 뿐이지만 그래픽노블 《뉴욕 3부작》을 보고 나면 다른 생각이 들 거예요. 폴 오스터의 소설은 고전 탐정소설에 포스트모더니즘과 실존주의적 요소를 가미한 작품이라는 전문가의 소견 말고, 제 개인적인 생각은 누군가를 쫓다가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정체성 혼란에 빠진 주인공이 되어보는 이야기였네요. <유리의 도시>에서 대니얼 퀸은 전화 한 통 때문에 폴 오스터가 되었다가 피터 스틸먼을 돕게 되면서 헨리 다크이자 피터의 아버지 스틸먼이 되기도 해요. 폴 오스터의 아들 이름이 실제로 대니얼이라는 것, 중년이 된 대니얼은 마약중독자이며 생후10개월된 자신의 딸 루비를 약물중독에 빠뜨려 사망에 이르렀고, 얼마 뒤 뉴욕 지하철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된 대니얼도 브루클린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을 때 폴 오스터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잠겨 있는 방>에서 주인공은 비가 내린 밤 거리에서 택시를 잡으려고 기다리지만 정차하는 차는 없고, 들고 있던 우산을 놓쳐 웅덩이에 빠뜨리지만 주울 생각이 없어요. 보스턴 남부역에 도착하자 뉴욕행 기차는 15분 전에 떠났고, 벤치에 앉은 그는 빨간 노트를 펼쳐 읽다가 갈갈이 찢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기차가 역을 빠져나가는 장면으로 끝맺고 있어요. 유리의 도시 속 유령들과 잠겨 있는 방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 모두가 똑같이 《뉴욕 3부작》을 보겠지만 각자가 보는 이야기는 다를 거예요. 마지막에 남는 감정과 생각들은, 결국 나의 이야기가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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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글쓰기의 분투 - 스콧 피츠제럴드는 ‘이렇게 글을 씁니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래리 W. 필립스 엮음, 차영지 옮김 / 스마트비즈니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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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가들의 '글쓰기'를 주제로 하여 책을 엮은 이가 있네요.

래리 W. 필립스는 전작에서 헤밍웨이의 작가적인 철학, 글쓰기에 관한 견해들이 담겨 있는 기록들을 모아 소개했는데, 이번 주인공은 스콧 피츠제럴드네요. 두 작가는 완전히 다른 철학을 지녔으나 다른 작가들의 조언을 열린 마음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어요. 실제로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는 서로에게 영향을 줬던 관계였고,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어요.

《피츠제럴드, 글쓰기의 분투》는 래리 W. 필립스가 엮은 피츠제럴드의 글쓰기에 관한 글 모음집이에요.

이 책은 스콧 피츠제럴드가 자신의 문학과 글쓰기에 대해 남긴 글들만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출처가 다양한데, 눈길을 끄는 건 다양한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 내용이네요. 다수의 독자들을 위해 쓰는 작품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편지 속에서 피츠제럴드의 진심을 엿볼 수 있네요. 미국의 전설적인 문학편집자 맥스웰 퍼킨스에게 쓴 편지를 보면, "계획대로라면 <위대한 개츠비>가 6월 중에 마무리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잘 아시지요. 시간이 열 배로 걸린다고 한들 제가 쓸 수 있는 최선이 나오지 않으면, 혹은 가끔 느끼는 것처럼 제 능력을 넘어선 무언가가 탄생하지 않으면, 이 작품은 세상에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22p)라고 창작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네요. 맥스웰 퍼킨스는 찰스 스크리브너스 선즈 출판사에서 활동하며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토머스 울프 같은 미국 문학의 거장들을 발굴한 인물이라고 하네요. 우리는 이미 완성된 작품을 만나기 때문에 작가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소설을 쓰는가를 알 수가 없는데, 여기 소개된 서신들을 통해 작가의 내밀한 생각들을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신선했네요.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문학적 멘토이자 문학평론가인 H.I. 멘켄에게 보낸 편지에서, "<밤은 부드러워라>는 서서히 몰락으로 잠식되는 방식으로 철저하게 의도했습니다. 단순히 생기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명확한 계획 아래에서 구현된 것이지요. 그 기법은 헤밍웨이와 함께 고안한 겁니다. 아마도 조셉 콘래드가 쓴 <나르시서스호의 검둥이> 서문을 읽고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제가 일을 단순히 직업으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예술로 받아들일지를 결정한 뒤로는 제 삶의 가장 중요한 신조가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자연스러운 의무가 있지만, 저는 유명해지기보다는 제 이미지를 누군가의 영혼에 각인시키고 싶습니다. 그 이미지가 설령 5센트짜리 동전만큼 형편없이 작을지라도 말입니다. 이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시인 아르튀르 랭보처럼 영원히 무명으로 남아도 괜찮을 것 같네요. 단순히 감상적으로 떠드는 게 아닙니다. 예술의 강렬함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창작의 과정만큼이나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 없다는 걸 알게 되거든요." (42-43p) 라고 밝혔듯이, 그에게 글쓰기가 삶 그 자체였다는 것이 놀라워요.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글쓰기는 스스로를 깎는 과정이라고 종종 생각한다. 깎고 나면, 더 앙상하게 벌거벗겨진 아주 작은 무언가만 남게 되는 거지." (165p)라고 이야기했는데, 이 문장이 글쓰기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냈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제대로 된 글쓰기를 하는 이가 드문 이유예요. 그래서 위대한 작가들이 칭송받는 거예요. 오직 펜으로, 지금은 펜이 아니지만 여하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전해주니까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행동하게 만드는 힘, 우리는 그것을 위대한 문학이라고 부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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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의 풀꽃 인생수업
나태주 지음 / 니들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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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주제로 한 책은 가볍게 읽기 어려워요.

내용 자체가 어려워서일 수도 있지만 왠지 진지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느껴서 그런 것 같아요.

근데 이번 책은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마냥 편안하고 다정했네요. 인생을 무겁게 만드는 고민들이 있다면 잠시 내려놓고, 산책하듯이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풀꽃 시인이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 《나태주의 풀꽃 인생수업》은 원래 EBS 강연 프로그램인 클래스e에서 <나태주의 풀꽃 인생수업>이란 제목으로 강연했던 내용으로 책으로 묶어낸 거래요. 젊은 청춘들에게 건네는 마음의 편지와 같은 글이 스웨덴 화가 칼 라르손의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수록되어 있어요. 칼 라르손은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을 그린 수채화 시리즈로 유명한데,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따뜻한 분위기에 절로 마음이 환해지고 행복해져서 풀꽃 인생수업과 정말 잘 어울려요. 제가 좋아하는 나태주 시인의 「행복」 이라는 시를 보면,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88p), 이 행복을 칼 라르손의 작품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요. 나태주 시인은 우리에게 시인의 시선으로, 달리 보면 달라 보인다고 이야기하네요. 모두 열두 가지 주제로 자기애, 자존감, 결핍, 인생, 행복, 사랑, 터닝포인트, 시, 가족, 삶의 담론, 성공, 죽음에 대해 특별한 인생수업을 들을 수 있어요. 나태주 시인의 인생 이야기와 시 그리고 칼 라르손의 그림까지, 인생수업이라고 했지만 수업이 아닌 즐거운 산책과도 같은 시간을 선물해주네요. 산책 갔다고 집으로 돌아올 때의 기분을 느꼈네요. 역시나 나태주 시인의 「산책」이라는 시, "백합꽃 향기 너무 진하여 저녁때 / 대문이 절로 열렸네." (94p) 를 공감하게 되네요. 시인은 적막했던 시절 아내분과 산책하며 느끼고 깨달은 것이 있다고 해요. 산책을 오래 하다가 지칠 때, "여보, 이제 집에 갑시다." 라며 가던 길을 돌아서 집 쪽을 향하면 마음속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는 거예요. 갑자기 걸어온 길이 짧아지고, 이상하게 집으로 돌아갈 때 발걸음도 가볍고 기분이 좋더래요. 멀게 느껴졌던 길이 처음보다 가깝게 느껴진 건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진 거라고, 우리는 실제 거리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거리로도 산다는 거예요. 그러니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가 없겠지요. 문제는 마음이라는 것,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걸. 다들 알면서도 마음대로 안 될 때는 그 마음을 다독여줄, 따뜻한 책을 만나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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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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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득 채우기에 급급했던 삶이 조금씩 느슨해지는 시점이 오겠지요.

아직은 그럴 정도로 내면이 무르익지 못했기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는 말은 못하겠어요.

하지만 《바움가트너》를 통해서 그 마음을 엿본 느낌이에요.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폴 오스터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라고 해요. 투병 중이던 폴 오스터는 이 소설의 주인공을 은퇴를 앞둔 바움가트너로 정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움가트너의 삶이 묘하게 폴 오스터와 겹쳐져 보이게 만들었네요. 소설은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가 되어 주인공과 수많은 타인들을 이어주고, 독자들에게도 옆자리를 내어주는 것 같아요. 10년 전 아내 애나를 잃은 바움가트너가 불현듯 아내에 대한 기억들을 끄집어내면서 잔잔했던 그의 일상에 물결이 일렁이게 되는 이야기예요. 애나와 바움가트너의 첫 만남, 그건 분명 우연이었을 테지만 특별한 인연은 운명이라고 부르지 않나요. 5월 말의 어느 오후 앰스터댐 애비뉴의 헝가리안 페이스트리 숍에서 '우연히' 애나의 옆 테이브에 앉았던 바움가트너는 그곳에 앉을 수밖에 없었어요. 왜냐하면 거기가 그가 앉을 수 있는 유일한 빈자리였기 때문이에요. 슬쩍 로맨스적인 요소를 얹고 싶어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꾸며댈 수도 있지만 그때 그 순간 애나는 읽고 있는 책으로 얼굴이 가려진 상태였어요. 중요한 건 바움가트너가 애나 옆자리에 앉았고 두 사람의 인연은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고전적인 의미의 연애편지는 아니지만 꽤나 많은 양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사랑을 키워나갔다는 거예요. 애나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미발표 유작들이 바움가트너가 집필하고 있는 원고들과 뒤섞여, 아주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던 무언가를 끌어내고 말았네요. 2024년 4월 30일, 일흔일곱의 생애를 살다간 폴 오스터는 우리에게 《바움가트너》를 남겼고 그의 빈자리는 수많은 작품들이 대신하겠지요. 주디스는 사람과의 연결을 강조했지만 바움가트너는 삶의 이야기를 통해 한층 친밀하게 다가왔네요. 책 덕분에 삶은 더 좋은 것이 되었네요.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삶이 없는 것과 같죠.

운이 좋아 다른 사람과 깊이 연결되면, 그 다른 사람이 자신만큼 중요해질 정도로 가까워지면,

삶은 단지 가능해질 뿐 아니라 좋은 것이 돼요." (1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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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를 향해 쏴라
최인 지음 / 글여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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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부조리한 시대의 희생자이면서 부조리한 삶을 적극 수용한 사람들이었다.

내게 그들의 이러한 모습은 또 다른 숙제였다. 그렇게 해서 그해 5월은 내 마음속에 깊은 상처와 또렷한 기억을 남기고 지나갔다. 사람을 죽이는 한 자루의 권총과 실탄 3발을 남겨 놓은 채." (197p)


5월 18일이 다가오네요.

45년 전 그 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시민들이 신군부에 맞서 싸웠고, 계엄군들은 무자비하게 광주 시민들을 진압했어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신군부는 저항하는 세력을 적색분자, 불순세력, 폭도 등으로 규정하며, 언론에서는 광주사태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가짜뉴스를 퍼뜨렸어요. 선량한 시민들을 하루 아침에 폭도로 둔갑시켜 총칼을 겨눴던 그날 비극의 현장에 있었던 태오와 유키코, 두 사람은 이방인처럼 낯선 그곳에서 처음 만났고, 그 인연으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됐으나...

《부조리를 향해 쏴라》는 최인 작가님의 장편소설이에요. 제목만 봤을 때는, 부조리를 향해 뭔가를 쏘는 주체는 주인공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아니었네요. 소설은 주인공 태오를 부조리한 역사와 시대에 던져버렸네요. 현대사의 비극적인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고, 주인공은 부조리한 세상, 바다 위를 표류하는 것 같아요. 과연 부조리는 무엇일까요. 이 세상 모든 것이 부조리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던 태오에게 수지는 이렇게 말했어요. "부조리에 대항하는 한 세상은 보이지 않을 거예요. 부조리에 역류하는 한 자신은 찾을 수 없을 거예요. 부조리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만이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378p)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태오는 그 의미를 알게 되는데, "부정과 저항과 적개심으로 가득찬 삶은 결국 추락한다는 뜻이었다. 나방처럼 불을 보고 달려드는 인간은 반드시 타버리고 만다. 부조리에 저항하는 사람은 뼈저리게 절망할 수밖에 없다. 부조리를 껴안고 입맞추는 사람만이 희망을 찾을 수 있다. 부조리는 이기고 꺾는 대상이 아니라, 존중하고 순응하는 대상이다." (378p) 라는 거예요. 80년대 청년 태오가 살아온 삶, 그 끝에서 현재 우리 사회를 만나게 되는데, 참으로 충격적인 결말이네요. 부조리 그 자체, 적나라한 민낯을 목격하게 되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시의적절한 이야기였네요. 그들이 아닌 바로 나, 부조리해진 나를 마주하는 것이 최종목적지였으니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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