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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 ㅣ 박완서 산문집 10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월
평점 :
먼 여행을 떠난 박완서 작가님, 편히 쉬고 계신가요.
"나의 최후의 집은 내 인생의 마지막 여행 가방이 아닐까.
... 내가 일생을 끌고 온 이 남루한 여행 가방을 열 분이 주님이기 때문
... 나를 숨겨준 여행 가방을 미련 없이 버리고 나의 전체를 온전히 드러낼 때,
그분은 혹시 이렇게 나를 위로해주시지 않을까.
오냐, 그래도 잘 살아냈다. 이제 편히 쉬거라." (50-51p)
미출간 원고 다섯 편이 수록된 여행 산문집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이 출간되었어요.
이 책에 새롭게 들어간 글 다섯 편은 박완서 작가님의 딸인 호원숙 작가님이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마치 어머니가 내게 건네주는 것 같았다' (5p)라고 표현했듯이 내밀한 기록으로 느껴졌어요. 독자들을 위해 쓴 글이 아니라 오롯이 자신을 위한 기록이라서 더 특별했던 것 같아요.
"내가 문단에 나온 지 얼마 안 돼서였으니까 아마 1970년대 초였다고 생각된다. 21세기에 우리 생활이 어떻게 달라질지 상상해서 쓰는 글을 청탁받은 적이 있다. ... 내 생전에, 나는 설마 하고 가상한 세계를 직접 보고 있다. ... 꿈을 꿀 수 있는 한 세상은 아직도 살 만하다." (27-30p)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시작해 중국 만주, 백두산, 상해, 몽골, 바티칸, 에티오피아, 인도네시아, 티베트, 카트만두 기행으로 끝맺고 있는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생의 삶 자체가 여행이구나 싶었어요.
"우리가 초모랑마(에베레스트)에 대해 외경심을 갖는 것은 세계의 최고봉이기 때문이지만 인도나 티베트, 네팔 등 힌두교와 불교 문화권에서는 카일라스산을 창조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고 일생에 한 번이라도 순례하기를 열렬하게 소망한다. 순례의 길이 고통스러울수록 죄가 정화된다고 믿어 고통보다는 법열을 느낀다고 한다. 그들처럼 최소한의 소유로 단순 소박하게 사는 민족도 없다 싶은데 이런 엄청난 죄의 대가를 지불하려 들다니, 그들이 느끼고 있는 죄의식이 어떤 것인지 우리 같은 죄 많고 욕심 많은 인간에게 상상이 미치지 않는 영역일 듯싶다." (201-202p)
여행의 목적은 무엇인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똑같이 여행하고 똑같이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저마다의 마음이 천국과 지옥을 만드네요. 가난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일상에서도 불행한 이들이 있으니 말이에요. 나는 어떤 여행자인가...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즐길 수 있는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