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달새 언덕의 마법사
오키타 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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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쿠로의 온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든든한지, 얼마나 평온하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지.

쿠로는 미노루와의 나날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어째서 옆에 있어주는 것일까.

"언어는 확실히 중요하지. 하지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인 건 아니야."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이 스이가 말했다.

미노루는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 '여름 바람의 행복' 중에서, p.121


저명한 화가인 미노루는 종달새 마을에서 삼십 년 가까이 살아왔다. 아내와 단 둘이 살다가 8년 전에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지금은 고양이 쿠로가 유일한 가족이었다. 자녀가 없고 양친도 오래전에 돌아가셨기에 쿠로는 아내 외에 처음으로 생긴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였다. 칠십대인 미노루는 반년 전에 육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되지 않았기에 미노루는 가정부 하나에에게 종달새 언덕의 마녀에게 데려가달라고 부탁한다. 삽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곳에 살면서 한 번도 마법상점에 가본 적이 없었지만, 처음으로 가야할 일이 생긴 것이다. 마녀는 동물과 대화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고양이 쿠로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미노루는 갑작스럽게 아내를 잃고 아내에게 제대로 묻지 못했던 말을 쿠로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와 함께한 시간, 넌 행복했냐고 말이다. 과연 마녀는 미노루의 소원을 들어줄까.


소설가인 하루코는 지금까지 단행본 일곱 권과 문고본 열다섯 권을 출판했다. 화제가 된 작품이 없어 결코 잘나간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계속해올 수 있던 것만으로도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근근이 이어온 작가 생활도 이제는 정말 끝나버릴지 모른다. 소설을 출판한 지 거의 일 년이 다 되어가지만, 좀처럼 쓰고 싶은 이야기가 없어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한 슬럼프가 아니라 제로 상태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 이야기가, 부스러기조차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초조하기만 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우연히 종달새 언덕의 마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하루코는 그곳에 찾아 보기로 한다. 재미있는 소설 아이디어가 샘솟는 마법을 부탁하기 위해서. 마법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한 번 더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찾아간 마법상점에서 마녀는 하루코의 이야기를 듣더니 말한다. 마법으로 소원을 들어줄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해서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게 된다면, 행복하겠느냐고. 과연 마녀는 하루코의 소원을 들어줄까. 하루코는 마법을 통해 다시 소설을 쓸 수 있게 될까. 




"마음은 무엇보다도 강해. 하지만 말로 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것도 있지. 말은 때때로 마법보다 더 큰 기적을 일으켜."

빛이 강해진다. 스이의 빨간 눈동자가 형형히 빛나고, 머리카락은 중력을 거스르며 붕 떠오른다.

도키오는 숨을 멈춘 채 기적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스이는 도키오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무어라 속삭였다.

그리고.

"다시 일어설지 멈춰 설지는 본인이 정해야겠지."

오르골을 휘덮은 빛이 사라졌다.                - '겨울이  끝나면' 중에서, p.254


종달새 마을의 종달새 언덕에는 마녀의 상점이 있다. 벽에 담쟁이덩굴이 덮여 있고, 키가 큰 빨간 꽃이 문으로 이어지는 계단 틈새에 피어 있는 작은 목조 주택이다. '종달새 언덕 마법상점'에는 한 걸음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바깥과 다른 공기가 몸을 감싼다. 마치 마치 이곳만 계절 바깥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곳에는 인형으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운 소녀가 있다. 진녹색 로브를 입고, 붉고 긴 머리카락에 불에 타는 듯한 빨간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녀는 그대로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이다. 열다섯 남짓의 소녀 모습을 한 그녀가 바로 마녀 '스이'다. 


사람들은 마법의 힘을 얻기 위해 오는 그곳에 간다. 하지만 그중 정말 마법으로 소원을 이루고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돈을 아무리 많이 가져가도, 당장 죽을 것 같은 사람이 눈앞에서 생명 연장을 애원해도 마녀의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절대로 마법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마녀의 마법상점을 찾아가는 이들이 있다. 사고로 얻게 된 화상 흉터를 지우고 싶은 중학생, 홀로 남겨질 고양이가 걱정인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원로 화가, 글이 써지지 않아 괴로운 팔년차 소설가, 애인을 잃고 힘들어하는 형을 걱정하는 남동생 등 각기 다른 사연을 들고 마녀를 찾아간 그들은 소원을 이룰 수 있을까.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오키타 엔은 마음을 간질이는 섬세한 이야기를 주로 써왔다. 이 작품은 독특하게도 마법을 써서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소원을 거절하는 마녀를 등장시켜 색다른 재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네 가지 이야기는 사계절의 풍경과 함께 보여지는데, 담백하면서도 사려 깊게 사람들의 상처와 고민을 풀어내며 잔잔한 감동을 안겨준다. 힐링이 필요한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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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은 방 둘이서 2
서윤후.최다정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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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요새도 마음이 힘들어 몸에게 이상한 것을 먹이는 날이 있지만, 이젠 그런 마음에 놓여도 안 좋은 상태 속에 오래도록 나를 내버려두진 않는다. 밥을 잘 차려서 먹는 행위에 기꺼이 쏟을 여력이 마땅치 않았던, 밥보다 중요한 것이 너무 많았던 시절을 건너서, 밥도 중요하다는 걸 절실히 알게 된 지금에 도착했다. 지금 살고 있는 시간, 지금 하고 있는 경험이 꼭 나에게 생산적인 의미로 각인되지 않아도 괜찮았으면 좋겠다. 뮌헨의 내 방에서처럼 매일 밥을 잘 챙겨 먹는 생활만으로 충분한 삶이라 만족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 다정, p.96


두 사람이 함께 쓰는 열린책들의 에세이 시리즈 '둘이서'의 두 번째 책이다. 싱어송라이터 김사월과 시인 이훤의 <고상하고 천박하게>에 이어 두 번째 책 <우리 같은 방>은 시인 서윤후와 한문학자 최다정이 함께 글을 썼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 친구로서, 글을 쓰는 동료 작가로서, 그리고 자신만의 방을 가진 이웃으로서 <방>에 관한 이야기를 사계절이 넘는 시간 동안 공들여 써냈다. 두 사람의 결이 매우 비슷해 구분하지 않고 읽다 보면 마치 한 사람이 쓴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데, 다행히도 페이지 하단에 다정, 윤후라고 각각 표기가 되어 있다. 두 사람이 쓴 글을 교차하여 읽어도 좋고, 한문학자의 운치 있는 수필로, 시인의 담백한 에세이로 따로 읽어도 좋다. 


누구에게나 집은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공간이다. 있어야 할 것들이 제자리에 있고, 나의 취향과 필요에 의해 꾸려진 나만의 방은 그 속에서도 가장 익숙하고 공간이다. 책상과 의자, 화분, 책과 각종 잡동사니들로 가득해 낯익은 공간인 방에서 우리는 울고, 웃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감정을 쌓고, 생각을 한다. 최다정 작가는 이사를 자주 하며 거쳐온 보금자리들을 돌아보며 자신이 지금까지 머물렀던 각양각색의 방들이 모두 나름의 문장으로 각인되어 삶의 서사에 일부분 기여했다고 말한다. 서윤후 시인은 좋은 집이나 좋은 음식이 아니라 먹고 사는 일 사이사이로 아무렇게나 붙여 높은 스티커, 존재만으로 충분한 인형 등 의 잡동사니들이 삶을 결정해왔다고 말한다. 각자의 방에서 쓰인 방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듯 닮았고, 솔직하고 꾸밈없는 공감과 다정한 온기로 소박한 기쁨과 이상한 위안을 안겨준다. 




어떤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 좋아하는 마음을 구체적으로 세공하여 더 많은 풍경을 간직하는 일이다. 반대로 어떤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부연한 마음 자체를 안개처럼 느끼며 사는 일일지도. 여름을 무척 좋아하는 나는 여름을 기다려 온 마음을 여러 풍경에서 화답받을 때가 좋다. 바닷가의 출렁임 속에서 의연한 튜브, 시원한 라무네 병에 맺힌 물방울... 늦게 찾아오는 저녁의 어둠과 공원의 풀 냄새, 가로등을 곁에 두고 치는 심야의 배드민턴, 곱게 간 얼음 위로 팥을 얹은 빙수, 매미 울음소리에 찢어지는 지평선과 녹음으로 무성해진 수풀...... 주문처럼 외우고 있는 이 여름의 기억은, 내가 여름을 변호하기 위해서 자주 하게 되는 이야기 중 하나다.                 - 윤후, p.190~191


각자의 방문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와 서로의 방문 앞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컨셉부터 아주 마음에 들었던 책이다. 동갑내기 친구이자 서로의 독자인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에서 각자의 언어로 삶을 정리하고, 가끔은 거실에서 마주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눈다. '혼자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며 쌓은 감정, 읽고 쓴 책, 지어 먹은 밥 들이 모여 지금과 같은 모양의 나에게로 도착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살았던 방과 통과했던 시간들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원룸이고, 누군가에게는 전세집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가로 그 형태는 다르겠지만, 한동안 '내 집'이라고 불렀던 장소의 의미는 같지 않을까. 그래서 오래 전에 살던 동네를 가기라도 하면, 자연스럽게 그 시절로 입장하게 되는 듯한 기분이 드니 말이다. 


책상의 자리로는 창문 곁이 제격이고, 반가운 손님을 기다리는 의자는 방 한편에 두길 추천한다는 최다정 작가는 만약 자신이 다른 주소의 방에 살았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표정과 말투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됐을 거라고 말한다. 방문을 굳게 닫으면서 시작된 것들이 자신을 길러 왔었는데, 고양이를 키우고 난 이후로 방문을 한 번도 닫아 본 적이 없다는 서윤후 시인은 방에서 고요를 수비하며 붙잡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잡동사니 속에 한 번도 호명되지 못하고 잊힌 물건들을 가끔 꺼내어 내가 너를 잊지 않았다고 인기척하는 것이 예의라는 시인과 과거 어느 한 시기의 나를 돌이켜 보면 어김없이 제일 먼저 그때 살던 방의 창문 장면부터 떠오른다는 한문학자의 글은 각기 다른 부분에서 공감할 대목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읽는 내내 밑줄 치고 플래그를 붙이느라 더 천천히 읽었던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 <둘이서> 함께 쓰는 에세이 시리즈 '둘이서'는 라인업이 이미 10권까지 나와 있다. 첫번째, 두번째 책이 좋았으니 그 나머지는 또 얼마나 좋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올해는 매달 이 시리즈를 챙겨보는 재미를 놓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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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 격차 - 읽지 않는 아이는 어떻게 읽지 못하는 어른이 되는가
김지원.민정홍 지음 / 어크로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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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은 좀 억울할 것 같다. 여전히 재미있는 책들이 많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나 게임기가 없던 시절, 수업 시간에 숨죽여 무협지나 로맨스 소설을 읽던 기억을 떠올려보자. 그때의 책들은 정말 재미있었다. 선생님들께는 죄송하지만 교과서보다 압도적으로 재미있지 않았나? 달라진 건 '우리'다. 책보다 더 재미있는 것들이 나타났다. 그것들은 무척 재밌지만 안타깝게도 그 재미는 인간의 집중력을 노린다. 어느새 짧아진 우리의 집중력이 책의 재미를 미처 느끼기 전에 흩어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사라지는 집중력의 문제는 단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문제에 가깝다.             p.119~120


읽긴 읽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거나, 예전보다 책도 잘 읽히지 않고 이해력이나 집중력 같은 것들이 현저히 떨어진 것 같아 고민이라는 사람들이 많다. 켜켜이 쌓인 보고서 뭉치와 씨름하고 꼬리에 꼬리를 문 이메일을 훑어 내려가도 읽고 있는 글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머릿속에 잡히지 않는다면, 열심히 밑줄을 긋고 책장 모서리를 접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우리는 왜 읽고도 이해하지 못하고, 같은 글을 다르게 이해하는 걸까. 문해력은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다반사인 요즘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책맹이 증가하고 문해력 저하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인류의 읽기 능력 자체가 위협 받는 시대인 것이다. 스마트폰, TV, SNS 등으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완전히 바뀌었고, 다양한 매채렐 통해 생산되고 소비되는 데이터의 양은 점점 더 늘어만 간다. 디티럴로 읽기가 일상화되면서 우리는 점점 더 긴 글을 읽을 때 산만해지고, 집중력은 줄어들고, 읽기 능력은 떨어져가고 있다. 이 책은 대한민국에 문해력 열풍을 불러온 EBS ‘문해력 시리즈’ 〈당신의 문해력〉 〈책맹인류〉 등 을 연출해온 두 PD가 7년여 간의 취재,와 실험, 국내외 주요 연구와 교육 정책 등을 토대로 쓴 것이다. 왜 문해력 격차가 만들어지고 심화되는지, 왜 누구는 잘 읽고 누구는 읽지 못하는지, 우리가 놓치고 있던 문해력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신의 문해력>이란 프로그램이 방송된 이후 ‘문해력’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졌고, 덕분에 문해력 학원과 교재가 넘쳐나지만, 여전히 읽고 쓰기 어려워하는 아이들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어른들이 늘어 나고 있는 요즘 꼭 필요한 책이 아닌가 싶다. 




읽지 않는 아이는 읽지 못하는 성인이 된다. 문제는 읽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여전히 문자로 되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때문에 읽지 못하는 아이를 최대한 빨리 돕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며, 이는 우리 사회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왜 우리는 읽지 않을까?', '왜 문해력이 떨어졌을까?'에 대한 분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든 즐겁게 읽고 이해하고 원하는 바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야 분석이나 비판, 토론과 소통이 가능하다. 분명한 것은 격차는 반드시 줄여나가야 하는 시대적 과제라는 점이고, 문해력은 격차 그 자체이자 우리 사회의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p.285~286


아무도 제대로 읽고 쓰지 않는 시대, 그러다 보면 사람들은 차라리 안 읽고 안 쓰는 무리수를 둔다. 문해력은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길러지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이는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국가 중 하나라고 한다. 한글이 워낙 배우기 쉽기 때문에 한국에서 문맹은 거의 사라졌다고 여겨졌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글자를 읽는 행위를 '당연히' 할 수 있는 거라고 믿어 왔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읽기 능력을 타고나지 않았다. 세계적인 인지신경학자이자 아동발달학자인 매리언 울프도 자신의 책에서 독서가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십만 년에 이르는 현생인류의 기나긴 역사에서 독서가 시작된 시기는 불과 몇천 년 전에 불과하고, 읽기란 인간이 후천적으로 익힐 수 있는 기술에 가깝다는 거다. 그러니 읽기란 원래 힘든 것이고, 생존과 직결된 읽기 능력을 배우고 발전시켜서 완성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크로스의 300P CLUB을 통해 2주간 읽기와 문해력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문해력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 그리고 문해력 격차를 이기는 구체적 대안까지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책을 읽는 행위 자체를 재미없어 하고, 어른들도 두꺼운 책을 쉽게 설명해주는 요약 영상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읽는 것은 귀로 듣거나 영상으로 보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과정을 거친다. 뇌의 활동이 다르고, 기억력뿐만 아니라 상상력과 창의력에도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아무리 영상이 범람하는 시대가 되더라도 '읽기'라는 행위가 인간에게 주는 장점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는 이유이다. 한번 떨어진 문해력은 쉽게 회복되지 않고 격차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빨리, 많이 읽기를 재촉하는 문화와 질문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 등이 문해력 격차를 강화하는 요인이다. 이 책은 이러한 문해력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6가지 키워드를 제시하고 있다. 문해력에 고민이 많았다면 동기, 보상, 레벨, 상호작용, 디지털 문해력, 사회적 독서 등의 키워드를 직접 실천해보며 한걸음씩 문해력에 대한 불안을 해소해 보면 어떨까. 우리는 지금 읽기와 문해력이 위기에 빠진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책이 누구나 읽고 이해하고 소통하는 사회로 향하는 발걸음이 되어 준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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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자비의 시간 1~2 세트 - 전2권
존 그리샴 지음, 남명성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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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중요한 건, 착하고 준법정신 투철한 이곳 사람들 가운데 모든 피고인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리고 '공정'이라는 단어에는 좋은 변호사의 조력을 받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가장 뻔한 의문은 이것이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어떻게 변호할 수 있는가? 그의 일반적인 대답은 이렇다. 만일 당신의 아버지나 아들이 끔찍한 범죄로 기소되었다면, 당신은 적극적인 변호사와 만만해 보이는 사람 가운데 누굴 선택하겠습니까?                   -1권, p.76~77


열여섯 드루는 여동생 키이라와 함께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아래 층에서 엄마가 구타 당하는 소리를 공포에 질린 채 듣고 있었다. 갈 곳이 없었던 그들은 코퍼라는 남자의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는 술에 취하면 폭력을 휘둘렀고, 학대도 빈번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집이 조용해진 뒤 드루는 아래 층으로 내려갔고, 엄마는 벌겋게 부어오른 얼굴로 꼼짝도 앉고 누워 있었다. 엄마를 죽인 남자는 자신의 방에서 자는 중이었다. 그가 깨어나면 아마도 자신과 여동생 조차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드루는 그의 권총을 움켜쥐고 방아쇠를 당긴다. 하지만 엄마는 죽지 않았고, 그는 고의적인 의도로 경찰관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1급 살인죄로 사형을 구형받는다. 


사실 너무도 결과가 뻔한 사건이었다. 드루의 의붓 아버지 스튜어트 코퍼는 지역 보안관으로 성실히 일하며 동료나 지역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인물이다. 최근에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불법 약물의 위험성에 대해 강의도 했었고, 그의 상사인 오지는 그를 가장 유능하고 의심할 것 없이 가장 용감했던 부하로 기억했다. 게다가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침대에서 자는 남자를 총으로 쏜 열여섯 살짜리 아이는 반드시 성인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까지 포함해 가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였다. 코퍼의 어두운 부분은 아무도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한편 사건을 맡은 제이크 브리건스는 이 사건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이에 비해 너무 체구가 작은 소년이 자신의 범죄 의도를 이해할 능력을 갖췄는지부터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살인 용의자를 변호하는 사람은 누구든 지역사회의 반발에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좁은 동네였고, 경찰들 모두를 적으로 돌리게 생긴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살인범에게 증오의 표정을 보여주고 동정심으로 그를 대하는 불의에 조용히 분노하기 위해 모였고, 제이크는 곧 동네에서 가장 인기 없는 변호사가 될 예정이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다른 변호사들은 아무도 이런 위협에 노출되지 않는다. 왜 그들만 그래야 할까? 왜 그녀 남편은 돈도 되지 않는 위험한 사건들에 엮여야 하는 걸까? 12년 동안 그들은 열심히 일했고 저축하려 애썼고 미래를 위해 뭔가를 세워보려고 꿈꿨다. 제이크는 변호사로서 능력이 엄청나게 좋았고 어떻게든 유명한 재판 변호사로 성공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을 보라. 남편은 얻어맞아 휴짓조각처럼 구겨졌다. 변호사 일은 말라붙었고, 빚은 주마다 쌓이고 있었다.              -2권, p.62


이 작품은 ‘법정 소설의 대가’ 존 그리샴의 신작이다. <타임 투 킬>과 <속죄 나무>에서 활약했던 변호사 제이크 브리건스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타임 투 킬>이 1989년, <속죄 나무>가 2013년에 출간되었으니, 굉장히 긴 시간 동안 드문드문 출간된 시리즈인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 작품을 많이 쓰는 작가라 시리즈도 많고, 스탠드 얼론 작품도 많으며, 발표하는 작품마다 모두 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타임 투 킬>은 인종문제가 얽힌 살인사건을 다루었고, <속죄 나무>에서는 거액의 유산을 둘러싼 소송을 중심으로 차별로 얼룩진 미국 역사의 단면을 보여줬다. 이번 작품 <자비의 시간>에서는 가정 폭력을 둘러싼 사회의 어두운 민낯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존 그리샴은 약자의 편에 서서 불의한 세상에 맞서는 정의로운 변호사 제이크 브리건스를 통해서 작가는 부조리한 현실을 입체적으로 보여 준다. 


굳게 닫힌 대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대부분의 가정 폭력은 집 안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가까운 이웃이나 친구나 동료들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존 그리샴은 제이크와 드루의 법정 투쟁을 통해 감시의 사각지대에서 벌어지는 가정 폭력의 폐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사실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이미 여러번 코퍼의 폭력으로 인해 경찰이 출동했었다. 하지만 별다른 조치 없이 끝났고, 일부 동료들도 그의 도박 전력과 잦은 폭력 행사를 알고 있었지만 묵인해왔다. 그가 마을에서 가장 뛰어난 보안관보 가운데 한 명이라는 이유로, 하루도 결근하지 않았고, 성실하게 일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여러 대에 걸쳐 이곳에 살았던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무엇도 소년이 방아쇠를 당겼다는 사실을 정당화해줄 수는 없다. 비록 어린 소년이 기댈 곳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하더라도, 엄마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했더라도, 그래서 곧 자신들의 차례라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법의 이름으로 열여섯 살 소년에게 무조건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사회정의를 지키는 것일까? 소년은 의붓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인가, 아니면 끔찍한 폭력의 피해자일까? 책을 읽는 우리 모두 고민해봐야 할 부분이다. 이 작품은 매슈 매코너헤이 주연의 HBO 시리즈로 제작될 예정이다. 영상화 될 버전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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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지음, 야나 렌조바 그림,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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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의 주된 논지는 모든 동물이 조상 세계의 기술 문서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자연선택이 가장 세세한 부분들까지 깊이 유전자 풀을 조각하는 엄청나게 강력한 힘이라는 숨겨진 가정에 토대를 둔다.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자연선택의 힘을 말해 주는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는 위장의 완벽함이다. 동물이 자신의 (조상의) 환경이나 그 환경에 있는 어떤 대상을 세세한 수준까지 완벽하게 닮은 모습을 띠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인상적인 점은 한 동물이 유연관계가 없는 다른 동물을 세세한 부분까지 닮는다는 것이다. 양쪽이 같은 생활 방식으로 수렴되었기 때문이다.             p.125


이 책은 <이기적 유전자>와 <확장된 표현형>에 이은 리처드 도킨스의 최신작이다. 그는 ‘사자의 유전서(genetic book of the dead)’라는 흥미로운 개념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당신은 하나의 책, 미완성 문학 작품, 기술적 역사의 보관소다'라는 첫 문장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데, 사자의 유전서는 유전자 풀 전체를 조각한 환경을 기술한 문서이자, 다른 여느 개체보다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어느 조상 개체의 세계를 기술한 문서이다. 이것은 우리의 몸과 유전체가 오래 전에 살았던 조상들을 에워싸고 있던 세계들에 관한 종합 기록물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사자의 유전서는 동시에 미래 예측서이기도 하다. 동물의 유전체는 조상들의 자연선택을 거쳐 유전자를 통해 물려 받은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동물을 읽을 때 사실상 과거 환경을 읽고 있는 것이다. 


도킨스는 이 책에서 각종 동물과 식물, 균류, 세균, 그리고 고세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유전자 중심의 시각에서 좀 더 나아가 과거의 연대기이자 자연선택에 의해 쓰이고 편집되는 한 권의 책으로서 진화를 바라본다. 모든 동물이 조상 세계의 기술 문서라는 것을 이야기하며 다양한 도판들을 풀컬러로 수록해 시각적인 이해를 도와주고 있어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야나 렌조바의 화려한 일러스트들도 보는 즐거움을 선사하는데, 확실히 전작들에 비해 읽기 수월한 책이었다. 사실 <이기적 유전자>도, <확장된 표현형>도 전문적인 개념들이 많아서 읽는 게 쉽지는 않았었으니 말이다. 자연선택과 진화론, 진화생물학이라는 장르에 관심이 있었지만 선뜻 시작하기가 어려웠다면,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그만큼 대중적으로 잘 풀어쓴 책인데다, 담고 있는 내용 자체도 풍부해서 아마 홀린듯 페이지가 술술 넘어갈테니 말이다. 




그럴 것이다. 자연선택이 종들을 놓고 고르는 것이라면. 그러나 널리 퍼진 오해와 정반대로, 자연선택은 그렇지 않다. 자연선택이 고르는 것은 유전자다. 유전자가 개체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고른다. 그리고 거기에서 모든 차이가 빚어진다. 사려 깊은 계획 경제가 다윈주의적 수단을 통해서 출현하려면, 성비를 제어하는 유전자들의 자연선택을 거쳐야 할 것이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어떤 유전자가 수컷이 생산하는 X 정자 대 Y 정자의 수를 편향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어떤 수컷 태아를 선택적으로 유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갓 태어난 수컷 새끼들을 굶겨 죽이고 선호하는 소수만을 키우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p.332


뻐꾸기는 알에서 나오자마자 잔인한 행동을 한다. 새끼 뻐꾸기는 양부모의 주의를 독차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소중한 먹이를 놓고 경쟁할 상대들을 지체없이 제거해야 한다. 갓 부화한 새끼는 등에 작은 홈이 나 있는데, 둥지에 자신 외의 알이나 새끼를 그 홈에 끼운 뒤 꿈틀거리면서 위로 밀어 올려서 둥지 밖으로 내버린다. 물론 새끼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안다는 징후가 없으며, 죄책감이나 후회를 느끼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시계태엽 장치처럼 작동하는 행동이다. 조상 세대에서 이루어진 자연선택이 이러한 유전자를 만들어 냈고, 본능적으로 행동하도록 한 것이다. 새가 지적 인지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깃털 달린 작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은 대단히 흥미롭다. 또한 뻐꾸기는 다른 종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아서 자기 새끼를 키우게 하는 탁란 기생생물이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진화의 유전자 관점에서 보자면, 뻐꾸기는 정말 괘씸하지만 영리한 새임에는 분명하다. 


유전자의 불멸성에 대해 다루는 장도 재미있었는데, <이기적 유전자>를 대신할 수 있었던 제목들 중에 '불멸의 유전자'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인과적 유전자', '협력하는 유전자', 그리고 '약간 이기적인 염색체의 큰 조각과 더욱더 이기적인 염색체의 작은 조각'까지 모두 내용에 들어맞는 제목 후보들이었다. 이 책은 전작들에서 설명했던 진화의 유전자 관점과 확장된 표현형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어 도킨스의 책들을 아직 만나보지 못한 독자라면 이 책으로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시선을 사로잡는 첫 문장에 이어 마지막 문장도 인상적이다. '당신은 득실거리고 뒤섞이면서 시간 여행을 하는 바이러스들이 빚어낸 위대한 협력의 화신이다.' 무슨 뜻인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이 책을 직접 읽어 보시라. 자,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진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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